한국사회에서 오랫동안 ‘낙태’는 인구조절과 가족계획의 문제와 연관되어 있었다. 국가가 인구를 줄여야 한다고 판단했을 때에는 월경조절술, 영구피임술 등을 통해 산아제한을 했고 현재는 저출산이 문제라고 하면서 ‘불법’ 낙태를 근절하겠다고 나서고 있다. 이 와중에 프로라이프 의사회가 낙태시술을 하는 산부인과 병원을 고발하면서 낙태 이슈는 충격적인 방법으로 수면위로 떠올랐다.
그런데 지금 낙태 논쟁은 왜 10대, 미혼모의 문제인 것처럼 보이는 걸까? 왜 태아의 생명을 무시하는 이기적인 여성들의 문제로 비춰지는 걸까? 그건 기혼여성의 낙태율이 더 많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알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이다. 낙태 문제를 떳떳하지 못한 성관계, 여성의 성적 타락의 문제로 보고 싶은 것이다. 이러한 시각은 여성의 혼외 성관계를 나쁜 것으로 치부하는 성차별적 문화에서 기인한다.
혼인 상황이 어떠하든 여성들은 원치 않는 임신을 했거나 출산할 상황이 되지 못하는 경우 비공식적으로 낙태시술을 받아왔다. 그렇다고 여성이 임신과 출산에 대한 결정권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할 수 없다. 진정한 결정권은 성관계, 피임에서부터 출발해 육아까지 연결되는 임신과 출산을 결정한 권리가 확보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원치 않는 임신을 하지 않으려면 원치 않는 성관계를 하지 않을 권리가 있어야 하고, 제대로 된 피임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아이를 낳았을 때 자신의 경제적 지위를 떠나서 안전하고 평등하게 키울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현재의 논란은 낙태에 대한 법적 허용의 문제와 생명권에 대한 옹호로 초점이 맞추어지면서 낙태를 직접 경험하는 여성들의 경험은 제대로 발언되고 않는다. 더구나 낙태시술을 거부하는 병원들이 늘고 있다. 성폭력 피해를 당한 여성조차 경찰수사가 진행되지 않고 있다는 이유로 시술을 거부당하는 사례가 보고되었으며, 비용 또한 다섯 배 이상 증가하였다.
종교계와 일부 낙태 근절을 말하는 진영에서는 태아의 생명권과 여성의 선택권이 대립하는 문제로 보고 있지만 임신과 출산을 경험하는 당사자인 여성보다 언제나 법과 도덕의 원칙이 우선한다고 누구도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다. 당사자인 여성의 의사에 반대되는 임신과 출산에 대한 결정을 어떤 누가 대신해 줄 수 있다는 말인가? 임신과 출산은 여성의 몸에서 시작된 변화를 통해 하나의 생명이 태어나는 순간까지 연속적인 과정인데, 언제부터 태아가 독립적인 존재인지를 판단하는 것은 쉬운 문제가 아니다.
가족정책포럼에서 ‘낙태와 출산장려정책을 둘러싼 쟁점’을 토론하고 있다.
태어나는 모든 아이가 충분한 지원 속에서 잘 양육할 수 있도록 지원책을 만들고 임신에 대한 여성의 결정권을 보장하도록 하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여성의 결정권이 배제된 상황에서 출산과 보육 지원책만을 강조하는 것은 출산강요정책과 다르지 않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또한 지원책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는 여성의 결정권도 제대로 의미를 발휘할 수 없다. 임신과 출산, 나아가 섹스와 양육에 이르기까지 여성의 결정권을 보장하고, 그 결정권이 발휘될 수 있도록 사회적인 환경을 만드는 것은 동시에, 충분히, 시급히 이루어져야 한다.
출산장려정책도 처음부터, 다 틀렸다
최근 정부도 저출산 대책을 발표하면서 낙태단속을 언급하였고, 불법인공임신중절 예방 종합계획에서도 낙태시술에 대한 신고센터를 운영한다고 하는 등 낙태단속으로 모아지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한 단속과 출산강요를 연결하는 것은 절대로 효과를 발휘할 수 없다. 더욱 여성을 곤궁하게 만들 뿐이다.
2000년대 이후 계속해서 인구의 위기로 회자되고 있는 ‘저출산·고령화 현상’은 이미 한국의 국가적 위기로 기정사실화 되었다. 하지만 출산율이 떨어지고 있는 근본적인 원인인 양극화, 고용불안, 일과 보육에 대한 여성의 이중부담, 가족의 변화에 대해 제대로 바라보고 성평등과 아동의 복지를 개선하고자 하는 정책은 건드리지 않고 있다. 문제들은 내버려둔 채 이명박 정권 들어 노골적으로 다자녀 가구에게 현물지원, 주택지원, 조세지원을 하는 것에 집중하는 것은 절대로 출산율을 높일 수 없다. 양극화와 계급불평등이 조금이라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일회성 출산 축하금 몇 십만 원으로 출산을 유인하겠다고 하는 것에 할 말을 잃는다.
한편 작년 말 미래기획위원회에서 저출산 대책을 발표하면서 ‘다양한 가족형태 지원’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그 안에 들어가는 가족형태는 미혼모, 다문화가족이다. 가족의 ‘다양성’ 자체를 저출산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고 왜곡하는 시대에, 오히려 걸림돌로 인식되는 우리의 권리와 다양성을 어떻게 제기할 수 있을지 참 막막한 상황이다.
가족구성권과 만나기
모두가 저출산 위기를 해결해야 한다고 뛰어드는 상황에서 임신과 출산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이 나아지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여전히 불평등과 위계가 존재하고 있다. ‘미혼모’에 관한 관심이 늘어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저출산 위기를 해결하는데 미혼모가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범위 내에서만 인정될 가능성이 많다. 특히 이명박 정부 들어서 전반적인 차별시정에 대한 의지가 실종되고 있는 상황을 예의주시해야 한다. 또한 결혼과 관련이 없는 출산, 레즈비언의 출산, 동성애자의 입양은 여전히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임신과 출산에 관한 결정권은 모두에게 열려있지 않다. 또한 장애나 질병을 가졌다는 이유로 낙태하지 않으려면 장애아에 대한 책임이 어머니에게만 전가되지 않도록 하고 장애인이 평등하게 살아갈 수 있는 특단의 조치를 마련해야 한다.
더 나아가 저출산과 고령화의 문제를 제대로 바라보고 대처해가야 한다. 인구구성의 비율이 변화되고 있는 것을 여성에게 출산을 강요함으로써 막을 것이 아니라 그러한 변화에 맞추어 고용, 복지, 교육, 조세 제도를 변화시켜야 한다. “인구가 국력”, “출산이 애국”이라는 낡은 전략에 속을 사람은 더 이상 없다. 오히려 소위 국가의 힘으로 인식되지 않는 인구집단(빈곤층, 장애인, 동성애자, 이주노동자 등)이 임신과 출산을 충분히 결정하고 지원 받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은, 다양한 가족형태에 따른 차별을 해소하고자 하는 노력과 함께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