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도]
기도란 하나님의 소원을 소유한 자가 그 소원을 아뢰는 것이다
그래서 요한복음 15장 7절의
“너희가 내 안에서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는 말씀을 이렇게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너희가 말씀대로 살며, 내 소원이 너희들의 소원이 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요한 1 서 14절 :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기도]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일이므로
사람으로서는 그 어떤 방법이나 노력으로 하나님의 일에 참여할 수 없다.
과연 그러하다. 어떻게 사람의 힘으로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기도"라고 하는 매개체를 주신 것은 하나님의 일을 하라고 주신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일에 기도로서 동참할 수 있음에 감격해 보자.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하나님의 일)도 할 수 없음이라” (요한복음 15:5)
따라서 사람은 기도를 하고 하나님은 시행 하신다.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요14:14)
기도 : 하나님은 일을 하시되 기도로서 시동 걸게 하신다.
.
.
기도 : 마음에 쌓인 하나님의 뜻을 간구 하는 것이다.
.
.
기도 : 소원을 이룰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
.
.
기도 : 하나님과 하나가 된 사람은 기도를 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과 하나 되려고 또 기도를 하는 것은 신비주의자다.
기도 : 물리적 행사보다도 강한 것이다. 그래서 물리적 행사를 시도 하는 것은 옳바른 방법이 아니다.
.
기도 : 기도를 많이 한 사람은 자본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업가와 같다.
따라서 기도는 만능이다.
.
.
기도 : 신앙생활의 최후 승리자는 기도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기도생활을 제대로 하는 사람은 신앙생활의 프로급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기도 : 기도는 곧 해답이다.
기도 : 하나님의 일에는 사람이 시행할 수도 없다. 물론 흉내는 낼 수 있을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의 일에 시동을 거는 일이된다.
(기도)
기도를 통하여 그냥 얻을 수 있는 이유는
이미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어 놓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그냥 주시기 위하여 기도 하라고 하셨다.
그냥 주실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사람으로서는 이룰 수도 없거니와)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이다.
(기도)
필요한 것을 위하여 기도할 때는 주위의 환경을 생각하고 계산해서는 안된다.
주님께서 해결해 달라고 기도를 하면서도 환경을 바라 보는 것은
주님과 환경을 동시에 바라 보는 불신일 뿐이다.
(기도)
자신의 염려를 주님께 다 맡기는 것도 기도이다.
그러므로 현재의 염려가 주님께 다 맡겨질 때까지 기도를 해야 한다.
그래서 그 날의 괴로움도 끝내고 평안해야 한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염려가 또 몰려올 때는
염려가 맡겨지고 평안을 얻어질 때까지 또 기도해야 한다.
내일의 염려까지 맡길 것 없다.
내일의 염려까지 합하면 더 큰 괴로움이 되기 때문이다.
당장의 염려만 맡기고 평안하라.
내일 또 염려가 엄습해 오면 내일 또 맡기면 된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 (마 6: 31- 34 )
그러니까 믿음이 없거나(마 6:32)적은 자 (마 6:30)들은 오늘의 염려 뿐만이 아니라 먼 장래의 것 까지 스스로 염려 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천부를 안다면 그 날의 괴로움(마6:34)으로만 하루를 마감해야 한다.
기도: 그리스도로 입문을 하면 반드시 기도를 첨가 시켜야 한다.
입대한 군인은 옷을 다 벗고 빤스로부터 시작하여 군복까지 새로 갈아 입는다. 그리고는 무기도 지급 받고 훈련을 받는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모든 일에 첨가 되는 노동 한 가지는 기도 하는 일이다.
(기도 )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들 자신이지 그 무엇도 아니다.
우리의 열심이나 노력이 아닌 우리 자신만을 원하신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을 해야만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 하기 쉽지만 오해일 뿐이다.
헌금을 해야 한다거나 무슨 선한 행위의 표가 있어야만 가능하다고 생각하면 그 자체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어색하게 만들 뿐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말로만 우리의 고통을 아는 것이 아니라 철저한 사람으로서 친히 육체적인 고난을 받으신 분이시다.
그분이 책찍에 맞음으로 아픔이 무엇인지 친히 경험 하셨다.
그러므로 아픔의 고통이 우리에게 임하기를 원치 않으신다(사 53:1-6)
그분은 징계를 받으니까 싫었다.
그러니까 우리가 징계를 받지 않고 평화 누리기를 원하신다.
그분은 가난이 싫었다.
그래서 우리가 가난하지 않고 부유하기를 원하신다.
예수님이 친히 고난(경험)을 받음으로서 해결하신 일이지 결코 우리의 행위가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하나님은 우리 자신 만을 원하시기에 그냥 만나기만 하면 된다.
자신의 착한 행실을 더할 필요도 없고, 자신의 죄를 해결하고 만나려고 하는 愚를 범해서는 안된다. 이러한 사람의 열심은 오히려 은혜를 받지 못하게 방해물일 뿐이다.
공짜는 공짜로 받아야만 , 은혜는 변질 되지 않고 은혜다워지는 것이다.
(기도)
따라서 물리적인 방법은 절대로 안됩니다. 물리적인 방법은 믿음이 없고 지혜도 없는 사람이 행하는 일이라고 생각 합니다. 혈과 육으로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지만(이루는 것 같은 것도 잠시 뿐) 믿음의 기도는 산도 옮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물리적인 방법이 아니라 기도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기도는 우리에게 주신 유일한 수단입니다.
하나님은 물리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일을 하시겠어요? 그것은 마귀에게 속한 일이며 우리에게는 그러한 방법을 주신 적이 없습니다.
(기도)
시련이 꺽인 나머지 자신의 의지도 완전히 사라지고 그래서 세상에서 버림 받을 지경에 이르렀을 때에 더욱 더 애타게 기다리시는 분은 상담자이시다.
왜냐하면 그 고통을 함께 겪고 있기 때문에 잘 아시기 때문이다.
고통의 짐이 아직도 자신의 것이라고 있기 때문에, 그 고통은 없어지지 아니하고 같이 고통 받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그리스께 넘겨주면 해결 되는 것이다.
운반비도 필요 없이 기도라고 하는 운반용으로 싣어 보내면 되는 것이다.
(기도) 여호수아의 기도에 대한 과학적 모순을 제기한 안티에게 보낸 글
기도란 기도를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기도를 하면 되는 겁니다. 기도를 하는 사람의 지식수준이나 상식선에서 기도를 해도 하나님은 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기도가 소용이 없는 기도라면, 기도를 하는 사람의 지식이 하나님의 수준까지 통달해야만 기도를 할 수 있다는 결론이 님의 주장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당시 여호수아는 자신이 원하는 기도를 아는 상식선에서 기도를 한 것입니다 여호수아의 상식으로는 해가 돌아가는 것이지 지구가 돌아가는 것이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아는 대로 “태양아,멈춰라”하고 말한 겁니다.
만약 그 기도의 내용이 과학적으로 틀리다 하여 기도 자체가 모순이라면 여호수아는 갈릴레오가 태어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겁니까?
병나음을 위한 기도의 경우를 봅시다. 그 병에 대한 과학적으로 합당한 이론이 완벽해야 응답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문자를 잘 나열하든지 아니면 비문법적이고 비과학적인 기도를 하든 하나님은 그러한 것에는 귀를 귀울이지 않습니다.
사람이 지혜롭다고 여긴 나머지 과학에 입각한 기도를 한다고 한들, 그 과학적인 기도의 수준이 하나님 앞에서는 얼마나 위대하고 완벽한 기도가 되겠습니까? 과학적으로 입각한 그러한 기도가 하나님으로서는 기막힌 비웃음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귀는 우리의 마음에 있다 이겁니다.
저도 맹목적인 신앙을 아마 님보다 더 싫어하고 경계를 합니다만 확실히 기도는 그렇다 하는 겁니다.
그래서 여호수아의 기도에 응답이 가능했던 것은 태양에 대한 설명을 잘하고 못하고가 아니라. 태양에 대한 그러한 소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기도라는 것은 우리의 소원에 과학적인 설명을 올리는 것이 아니라, 그냥 소원만 아뢴다 이겁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자신의 소원을 아뢰었다는 말씀과 같이 소원을 올리는 것이 기도입니다. 하나님은 그 소원의 내용을 들으시는 것이지 태산처럼 똑똑하고 지혜롭게 꾸미는 미사여구에는 외면하신다 이겁니다 .
그러므로 여호수아의 기도에는 비록 그의 천동설이나 지동설에 대한 구차한 과학 설명이 없어도 소원에 대한 기도로 받아 주셨다 이겁니다.
사람이 아무리 철저한 논리로 기도를 한들 그 과학적 논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하게 해 줄 수 있겠습니까?
또 그 논리가 아무리 정교스러워도 그 지식에 하나님의 마음이 감동 되겠습니까? 지식은 하나님께 도착 되지 않습니다.
(기도)
그리스도인에게 기다리고 있는 일은
그리스도의 일이기에
그리스도가 주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방법으로 행해야 한다.
.
그래서 기도란 전화기를 개통 시켜준 것과 같다.
전화는 지배인이 하는 것이고 일은 주인이 하는 것이다.
지배인은 보고를 하는 것이고 주인은 일을 처리 하는 것이다.
(기도)
기도의 내용은 주님의 뜻이어야만 한다.
주님의 요구를 이루기 위하여 (필요한 것을) 청구 하는 것이 기도이다.
혈과 육으로는 이룰 수 없는 주님의 일에 기도라고 하는 수단을 주신 것이다.
기도 하는 것이 사람의 눈으로 볼 때는 공짜이지만
영적으로는 영원한 대가가 지불 되었음을 알자.
아무 것도 없는 인생이라도 손쉽게 확보할 수 있도록 마련해 주신 것이 기도이다.
첫댓글 좋은말씀 잘읽고 담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