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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고의 요리상 "만한전석(滿漢全席)"
중국의 임금 천자(天子)의 음식문화
천자에게 식사 즉, 수랏상을 올리는 것을 진선(進膳) 이라고 한다.
중국 마지막 황제의 주인공이었던 부의(溥儀)를 통해 진선(進膳)에 대해 알아보자
“식사시간은 따로 없었다. 먹고 싶은 생각이 나서 분부하면 내시들이 줄을 지어 상을 받쳐들고 오는데 크고 작은 상이 일곱 개였다. 그 중에 고기요리만 두 상이지만 겨울에는 신선로(火鍋)를 위한 상이 추가되며 그밖에도 띠엔신(點心. 만두 따위의 간단한 요리)과 밥, 죽 따위가 세 상, 그리고 절인 야채가 한 상이었다.”
“모든 요리는 황금빛 용이 그려진 붉은색 칠기 그릇이나 용과 만수무강(萬壽無疆)이라는 글자가 그려진 그릇에 담아내는데 겨울에는 은그릇을 사용하였다.”
“모든 그릇에는 독이 들었는지 알아내기 위하여 은으로 만든 작은 막대가 들어 있었으며 황제가 먹기 전에 반드시 내시 한사람이 모든 음식을 맛보아 독이 들어 있는지 없는지 미리 살펴보도록 하였다.”
인간 리트머스 시험지까지 동원한 요란한 상차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임금인 천자의 구미를 썩 만족시키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부의(溥儀)의 다음 말이 이를 증명해 주고 있다.
“먹는 것은 하나인데 상에 차린 것은 둘이고 마음속의 욕심은 셋이다.(吃一 看二 眼觀三)”
즉, 다 먹지도 못할 음식을 잔뜩 차렸으나 마음음 다른걸 찾는다는 뜻이다.
<사진; 황제와 황후를 표현하는 용과 봉황으로 장식된 요리>
청나라 때의 임금들은 아침에 자리에서 일어나면 제비집 스프와 간단한 띠엔신(點心)을 주로 먹었으며 정식으로는 하루 두 번을 먹었는데, 정오쯤에 먹는 조선(早膳)과 해지기 전에 먹는 만선(晩膳)이 있었고, 그밖에도 배가 출출하면 수랏상을 대령시켰다 한다.
( 세계 공통적으로 보면 어디고 간에 아침은 간단히 먹는게 '대세'였던 모양이다.)
그러면 그들이 먹었던 음식을 담는 그릇들은 또 어떠했을까?.
서태후 개인용 주방에는 금 은 옥그릇 1500여종이 있었는데 그 중 금그릇만도 무게가 5816냥(약 215kg)이었고 은그릇은 1만590냥이었다고 전한다.
천자의 일상적인 식사는 상선(常膳)이라 하였으며 공 식연회는 연연(筵宴)이라고 하였다..
잔칫상이라 할 수 있는 '연연'은 국가의 큰 행사가 있거나 주요 명절 때 베풀었는데, 예를 들자면 설날에 여는 원단국경지연(元旦國慶之宴)이라던가 임금의 생일날 여는 만수정경지연(萬壽正慶之宴) 따위가 그것이다.
<사진: 청나라 황실 연회장면>
이러한 큰 연회는 임금이 직접 주재하여 북경 자금성안의 태화전(太和殿)에서 주로 열었는데, 청나라 강희(康熙) 이후는 이를 만한전석(滿漢全席)이라고도 하였다.
만한전석(滿漢全席, 만한취앤시)
거대한 중국대륙의 곳곳에서 개발된 수만가지 요리 중에서 나름의 평가를 통해 인정을 받은 요리들은 그 소문들을 통해 황제의 궁궐안으로 전해지면서 그 요리들은 지방의 향토음식에서 궁중요리로 신분을 달리하게 되었다. 오천 년의 역사가 흐르면서 왕조는 수없이 바뀌었어도 궁중요리의 전통은 꾸준히 전해지다가 마침내 하나의 체계로 종합화되고 집대성된 것이 바로 중국요리의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는 만한전석(滿漢全席) 이다.
< 사진: 시연중인 '황제의 밥상'>
'만한전석'을 그 내력부터 천천히 알아보자.
고구려와 발해의 백성이던 여진족(女眞族)의 누르하치(努爾哈赤)가 세운 대금(大金)은 그의 아들 홍타이지(皇太極)가 1636년에 대청(大淸) 으로 바꾸었고, 땅 이름도 건주에서 만주(滿州)로 바꾸었다. 이때부터 여진족은 '만주족'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 만주족이 대륙을 차지하고서 시행한 것이 탕평정책으로서 중요 부서의 관리는 만족과 한족을 함께 쓰되 그 우두머리에는 반드시 만족 출신을 임명하였다. 예를 들면, 대외 교섭을 맡는 오늘날의 외무장관격인 이번원(理藩院)의 우두머리에는 물론 만주족을 앉히고, 그 밑의 차관에는 만주족 1명에 몽골족이나 한족을 임명하곤 했다.
마찬가지로 국가의 연회를 담당하는 광록사(光祿寺)의 최고 책임자인 사경(寺卿)에는 만족을 임명하였고 ,부책임자인 소경(少卿)에는 만주족과 한족을 각각 1명씩 두었다. 그러나 직책만 구분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주요 관심사항의 하나였던 연회문화에서도 이 같은 질서는 엄격히 지켜졌으며 궁중요리도 만주식 연회를 뜻하는 만석(滿席)과 한족식 연회를 뜻하는 한석(漢席)으로 구분되었던 것이다.
이 만석(滿席)은 다시 여섯 개의 등급으로, 그리고 한석(漢席)은 세 개의 등급에 상석(上席)과 중석(中席)의 다섯 가지가 있었으며, 여기에 쓰이는 음식재료와 연회예산에 대해서도 각각 규정이 정해져 있어 이 규정을 어길 경우에는 책임자가 처벌을 받기도 하였다. 예를 들자면 한 상에 여덟 냥을 한도로 하되 만석 6등급이면 2냥(兩) 2전(錢) 6푼(分)이 그 한도였다.
이렇게 '만석'과 '한석'으로 구분되던 궁중음식이 '만한전석(滿漢全席)'으로 합쳐져 중국을 대표하는 연회요리가 된것은 것은 18세기 초 청나라 2대 황제인 강희제(康熙帝) 말기에 이루어졌다.
< 사진 : 강희제(康熙帝) >
강희제는 자신의 회갑을 맞자 천자로서 보기 드문 장수를 누린 기쁨으로 이틀 간에 걸쳐 65세 이상의 노인들을 2800명이나 초청하여 대연회 이른바 천수연(千壽宴)를 베풀었다. 이 자리에서 강희제는 만석과 한석을 두루 갖춘 잔칫상을 가리켜 친히 만한전석(滿漢全席)이라 하였다.
정치가 안정되면서 수많은 노인들을 모아놓고 잔치를 차린 기쁨에 그는 만족과 한족의 산해진미를 두루 갖춘 연회에 보다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을 것이다. 이것이 기록에 보이는 최초의 만한전석이다.
'만한전석'의 구성
만한전석은 6연(宴) 으로 나뉘며 모두 청나라 궁중에서 유명한 요리 이름으로 명명되었다. 만한전석은 산해진미를 모아 만들어진 요리라고 할수 있다. 다양한 종류도 대단하지만 그 다채로운 재료도 흥미로운데 온갖 진귀하고 좋다는 건 다 모여있다.
붉은제비, 제비집, 상어지느러미, 물고기부레, 전복에다 곰발바닥, 원숭이골까지 사용되었다고 하니 그 맛이 정말 궁금하다.만한전석은 다음과 같이 진행된다.
'만한전석'에서의 모든 요리는 한 셋트씩 정해진 순서에 따라 나온다.
연회는 하루 두 차례씩 사흘에 걸쳐 진행되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한 차례는 네 개의 셋트로 구성되어 있으며 매 셋트마다 주요리 하나에 네 개의 보조요리가 따랐다고 한다. 그러므로 한 차례에 20가지의 주요리와 보조요리가 나오게 되며 여기에 찬 음식(일종의 appetizer), 건과류, 꿀전병(蜜餞), 띠엔신(點心), 과일 등을 합치면 모두 30~40가지가 되므로, 사흘에 걸친 연회에는 모두 180가지 이상의 요리가 나오게 되는 것이다.
후대에서는 이 만한전석의 요리 가짓수를 '108 가지'로 전하고 있는데, 이는 부수적으로 따라나오는 찬 음식(일종의 appetizer), 건과류, 꿀전병(蜜餞), 띠엔신(點心), 과일 등에 대해 요리로 보는가 아닌가에 따른 관점의 차이 및 중복적으로 제공되는 부수요리로 분류 여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한 개의 주 요리에 네 개의 보조 요리로 이루어지는 것 또한 모든 별이 하나의 달을 에워싼다(衆星捧月)는 뜻에서 하나의 천자를 여러 신하가 모시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라 하니 요리 가짓수에까지 세심하게 배려되어 있는 왕권의 절대성에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다.
만한전석이 거행되어 초대받은 신하들로서는 여간한 기쁨이 아니었을 것이다. 자주 있는 일도 아니고 아무 때나 맛볼 수 있는 음식도 아닐 뿐더러 중국에서는 아무리 황제 앞이라 하여도 음식상을 두고 점잔을 빼거나 내숭을 떨지않고 즐겁게 먹었기 때문이다.
연회장에 들어서면 겉옷을 벗고 얼굴을 씻은 다음 차를 마시며 간단한 띠엔신(點心) 을 먹는데 이것을 도봉(到奉)이라고 한다. 도봉이 끝나면 다시 차를 마시고 호도 따위를 먹으면서 대화를 즐기는데 이때는 시를 읊조리기도 하고 주위에 걸린 그림을 감상하기도 한다. 이때 곳곳에는 온갖 과일과 볶은 은행알, 말린 여지(리즈), 연꽃씨 따위가 놓여 있다. 이때를 대상(對相)이라고 한다.
손님들이 자리에 앉으면 먼저 과일을 썰어 올리고 찬 고기안주와 함께 술을 올리는데 술은 여러 종류가 준비되어 있어 각자 취향대로 마실 수 있지만 대개는 알콜 도수가 약하고 부드러운 소흥주(紹興酒), 그 중에서도 화조(花雕, 후아탸오)를 마셨다고 한다. 이 때는 손가락을 내밀며 숫자맞추기 내기(酒令)를 하여 틀린 사람이 벌주를 마시는 방법으로 즐겼다.
이렇게 요리를 위주로 하는 첫 네가지 코스가 끝나면 다섯 번째 상이 나오는데 다섯번째 상부터는 요리가 아니라 밥, 죽, 국이 위주로 나온다. 다섯번째 코스까지 끝나면 조그마한 은접시에 이쑤시개, 빈랑나무 열매 따위 등이 나온다.
이마저 끝나면 조그만 은접시에 이쑤시개, 빈랑나무 열매 따위가 나온다. 다시 한번 얼굴과 손을 씻고 나면 연회가 끝나는데 이때를 빈수(檳水) 라고 한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점심과 저녁 그리고 밤에 걸쳐 하루 코스로 끝내기도 하였고 하루 두 번씩 사흘에 걸쳐 진행하기도 하였다.
이 중화 음식문화 최고의 경지를 농축한 이 음식상은 그 수량과 기술적인 어려움으로 강희제 이후 한번도 제대로 재현된 적이 없다고 한다. 현대 중국인들도 그저 전해오는 이야기나 책에서 '만한전석'의 전설을 기억할 뿐, 누구도 직접 체험해보지는 못한 연고로 이 음식상에 대한 신비감이 더욱 깊어진다.
'홍콩'이 영국으로부터 중국에 반환되었을 때 중국은 이를 기념하고자 이 '만한전석'을 재현하여 큰 잔치임을 나타내고자 이 행사를 기획하였으나, 도저히 그 요리들을 재현할 동원인력과 식재료 및 예산을 감당할 수가 없어서 포기하였다고 한다.
만한전석의 진행
'만한전석'에 등장하는 요리는 워낙 방대한 음식체계이므로 그 하나하나를 여기에 일일이 소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우선 여기서는 한끼에 나올 수 있는 예를 서브하는 순서에 따라 몇가지 진열함으로써 이 글을 읽는 분들의 이해를 돕고자 한다.
1. 전채(前菜, 到捧點心) : 간단한 해물 스프와 음료
2. 과자 네 가지(四乾果) : 살구씨과자(怪味杏仁), 호두과자(核桃粘) 등
3. 꿀전병 네 가지(四蜜果) : 사과 꿀전병(蜜餞?果), 라이찌 꿀전병(蜜餞桂圓) 등
4. 간단한 찬 음식 네 가지(四冷点) : 아가위 연양갱, 완두로 만든 부채모양의 과자
(御扇豆黃) 등
5. 찬 음식(冷菜) :
북경식 오리구이와 달걀, 앵두를 이용하여 봉황새모양을 낸 요리(鳳凰展翅), 박달
나무부채 모양의 삶은 오리발(檀扇鴨掌) 등
6. 더운 음식(熱菜) :
닭고기 가루를 넣은 죽순탕(龍井竹蓀), 말린 패주, 버섯, 햄, 오이 볶음(紅燒乾貝),
산 새우와 돼지 고기, 발채(髮菜)를 얹은 빵(金錢吐絲), 메추리알을 얹은 상어지느
러미, 물고기부레, 버섯, 메추리 알을 이용한 닭찜, 오리발, 물고기부레, 가늘게 썬
오리 가슴살과 숙주나물의 볶음 등
7. 간단한 더운 음식 두 가지(熱点兩道) :
만두피 속에 연양갱 따위를 넣고 구워 낸 것 등
8. 더운 음식(熱菜) :
잘게 토막낸 쏘가리와 오이를 넣고 낙화생기름으로 볶은 것(魚藏劍), 물고기부레,
전복, 닭고기 가슴 살, 용수채(龍鬚菜)를 삶은 것, 토끼고기를 달걀피로 싸서 튀긴
것(虎皮兎肉), 등
9. 간단한 더운 음식 두 가지(熱点兩道) :
밀가루반죽을 발효시켜 고기와 참깨를 얹어 둥글 납작하게 구운 것(肉末燒餠) 등
10. 죽 한가지(膳粥一道) : 찹쌀과 연밥(蓮子)으로 쑨 죽(蓮子膳粥)
11. 된장에 절여 만든 네 가지 디저트(四醬菜) :
감을 맵게 절인 것, 여덟 가지 과일이나 야채를 절인 것(八寶醬菜) 등
이상의 정도로 대강의 윤곽을 살펴보았으나 만한전석은 항상 똑같은 고정메뉴가 정해진 것은 아니고, 연회를 차릴 때마다 그때 그때 철에 맞는 것 중에서 그리고 상차림의 기준에 따라 메뉴가 정하여 졌음은 물론이다.
'만한전석' 요리의 식재료
만한전석에 쓰이는 식재료 종류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므로 일반적인 것을 말하자면 구태어 나열할 필요도 없을 것이므로 여기서는 가급적 진귀한 것만을 들어보자.
고급의 궁중음식에 쓰였던 먹거리로는 3천년전인 주(周)나라 시대의 기록에 여덟가지 진귀한 것(八珍)이 소개되어 있다. 순오(淳熬, 볶음의 한가지), 포돈(暑豚, 통돼지구이), 지(漬, 절임), --- 따위가 그것인데 조리법이 발달하지 않은 당시로서는 굽고 절였다는 사실만으로도 별미였을 것으로 짐작이 간다.
이것이 문화가 발달하면서 먹거리의 폭도 넓어지고 조리방법도 발달하면서 여러 가지 구분이 생겼다. 이중에서 대체로 인정되는 진귀한 것을 들자면 날짐승, 해산물, 들짐승, 야채류에 따라 각각 여덟가지로 나눌 수가 있는데.
날짐승으로서 진귀한 여덟가지(禽八珍)는
붉은 제비(紅燕), 백조(天鵝), 비룡(飛龍, 들꿩의 하나), 메추라기 따위이고,
해산물로서 진귀한 여덟가지(海八珍)는
제비집(燕窩), 상어지느라미(魚翅), 검은해삼(烏蔘), 물고기 부레(魚 ), 전복(鮑魚) 따위이며,
들짐승으로서 진귀한 여덟가지(山八珍)는
낙타 혹(駝峰), 곰발바닥(熊掌), 원숭이골( 腦), 성성이 입술(猩脣), 표범의 태반(豹胎), 코뿔소 꼬리(犀尾), 사슴 힘줄(鹿筋) 따위이고.
야채류로서 진귀한 여덟가지(草八珍)는
원숭이머리버섯( 頭菌), 흰참나무버섯(銀耳), 죽순(竹筍), 그물주름버섯(羊?菌), 표고버섯(花 ) 따위가 있었다.
건륭제(建隆帝)가 1784년 섣달 그믐날 신하들을 위하여 베푼 만찬에서 상 하나하나를 준비하는데 들어간 재료가 기록에 남아있는데, 돼지고기 65근, 오리 네마리, 닭 열마리, 돼지 허벅다리 3개, 멧돼지 25근, 거위 다섯 마리, 양고기 20근, 사슴고기 15근, 야생닭 여섯 마리, 물고기 20근, 사슴꼬리 네개 등등으로 고기만해도 3, 4백근에 달하였다고 전하며,
진귀한 식재료로는 제비집 정도는 기본에 속하고 사슴 애기집, 사슴고기 포, 산닭(山鷄), 곰발바닥, 백조, 너새, 두꺼비 따위의 들짐승과 날짐승만해도 수십가지이고, 흥안령(興安嶺) 산맥에서 나는 숫호랑이의 고환으로 만든 청탕호단(淸湯虎丹), 사불상(四不像)의 머리로 만든 일품기린면(一品麒麟面), 사슴눈알로 만든 명월조금봉(明月照金鳳) 등등이 있다. 재료도 특이하지만 이름도 묘한 것들이 많아 도대체 어떤 맛을 가졌을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 그러나 위의 재료는 오히려 평범하다.
뱀의 간은 용의 간(龍肝)이라 하며, 닭의 골은 봉황의 골수(鳳髓) 이밖에도 잉어의 꼬리는 이미(鯉尾), 독수리 구이는 (炙), 그리고 우유로만든 제호(醍), 사슴입술인 녹순(鹿脣)도 제각각 별미로서의 위치를 자랑하며 별미로 조리 되었다.
과연 이름 그대로 모든 식재료의 진수만을 동원하였으니 그 호화로움이 얼마나 대단했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으며, 중국이 홍콩반환을 기념하려 이 '만한전석'을 재현하려다 포기한 까닭 또한 이해가 되는 항목이다. 강희제처럼 3,000 여명분의 이러한 연회를 마련하려 한다면 그 식재료의 준비에서부터 조리 인원, 음식그릇, 연회장 및 서빙인원 확보등에 도대체 얼마나 많은 금액이 들어갈까? 현대 중국이라는 큰나라 조차 포기한 걸보면 가히 어림잡아 보기도 힘들다. 그 만큼 당시 중국 황제의 권력은 대단하였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