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국의성조 혁거세왕
- 기원전 69년~서기4년, 신라의 건국시조이며 박씨의 시조로, 우리나라 박씨의 유일 시조이다. 재위는 기원전 57년~서기4년이다.
- <삼국사기>에 의하면, 혁거세는 경주 나정의 큰 알에서 태어나 이미 나이 10여세 때 매우 출중함을 보였고, 그 탄생 또한 신비하여 존경을 받다가 나이 13세 때인 기원전 57년에 당시 고조선의 유민들이 세운 진한 6촌의 촌장들로부터 왕으로 추대되어 신라의 시조왕이 되었다. 당시의 왕호는 거서간(居西干), 국호는 서라벌(徐那伐)이라고 하였다. 기원전 41년 왕은 비 알영과 함께 육부를 순행하며 농사를 장려하였다. 기원전 37년 서울에 성을 쌓아 금성이라 하였고, 기원전 32년 금성에 궁성을 지었다. 기원전 28년 낙랑이 침범해 왔으나 국경의 백성들이 밤에도 문을 잠그지 않고, 들에는 곡식더미가 즐비한 것을 보고 '도덕의 나라'라 부르며 스스로 물러갔다. 기원전 20년 마한의 왕이 공물을 보내지 않는다하여 노했는데, 이듬해 마한의 왕이 죽자 신하가 이를 큼타 마한을 치자고 하였으나 혁거세는 남의 불행을 이용하는 것은 어질지 못하다 하며 오히려 사신을 보내어 조문하였다. 기원전 5년 동옥저(東沃沮)에서 사신이 와서 말 20필을 바쳤다. 서기 4년 3월에 승하하여 담암사(曇巖寺) 북쪽에 장사 지냈다.<이상은 삼국사기의 내용>
- 신라의 시조왕릉<始祖王陵>으로 전하는 오릉<五陵>은 경주시 탑동에 있는 신라의 능묘로 사적 제172호(봉분 높이 10m, 지름 20m 내외)로 지정되었으며, 모두 5기의 능이 있는데, 박혁거세왕과 왕후인 알영왕비, 제2대 남해왕, 제3대 유리왕, 제5대 파사왕의 5위(位)의 능묘로 담암사 북쪽에 있다고 옛 문헌에 전하고 있으며, 내부 구조는 알 수 없으나 외형은 경주 시내 평지 서남쪽에 자리잡고 있는 다른 많은 삼국 시대 신라 고분과 같이 표면에 아무런 장식이 없는 원형 봉토분<封土墳>으로 4기<基>는 원형분<圓形墳>이나 1기는 표형쌍분<瓢形雙墳>으로 되어 있다. 제1릉<第1陵>은 가장 남쪽에 있으며 높이 약 10m로 5기<基> 가운데 가장 높고 크다. 제2릉<第2陵>은 제1릉의 동북쪽에 있으며 높이는 약 9m이다. 제3릉<第3陵>은 제2릉의 동쪽에 있으며, 높이는 약 7.2m로 표형쌍분<瓢形雙墳>의 형태를 가지고 있다. 이는 원형분<圓形墳> 2기<二基>가 합쳐진 것이다. 제4릉<第4陵>은 제2릉의 서쪽에 있으며 높이는 약 3.6m이다. 제5릉<第5陵>은 제4릉의 동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높이는 약 1.8m이다. 이와 같이 5기<基> 중 1기<基>는 표형쌍분<瓢形雙墳>으로 2인용 무덤이기 때문에 오릉<五陵>의 실제 피장자는 6인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또 이와 같은 대형<大形>의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은 신라에서는 4세기 이후에 출현하는 것으로 후세<後世> 수축<修築>이었으면 몰라도 혁거세왕<赫居世王> 당시의 고분 형식은 아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오릉<五陵>을 사릉<蛇陵>이라 했는데, 1대 혁거세왕<赫居世王>·남해왕<南解王>· 유리왕<儒理王>·파사왕<破娑王> 등 박씨 사왕<朴氏 四王>을 사릉원내<蛇陵園內>에 장사지냈다고 되어 있고,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에서는 혁거세왕<赫居世王>과 알영부인<閼英夫人>을 합장<合葬>하려 하자 뱀의 이변<異變>이 있어 각각 장사지냈다고 하였다. 그러나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는 이와 다른 기록을 하고 있는데, 혁거세왕<赫居世王>이 재위 62년만에 승천하였다가 그후 7일만에 유체<遺體>가 흩어져 땅에 떨어졌고 왕후<王后>도 따라 승하하니 사람들이 합장<合葬>하고자 하였으나 큰 뱀이 방해하여 오체<五體>를 각각 장사지냈으므로 오릉<五陵> 또는 사릉<蛇陵>이라 하며 담암사<曇巖寺> 북릉<北陵>이 그것이라고 하였다. 지금 담암사<曇巖寺> 위치를 확실히 알 수는 없으나 오릉<五陵>의 제실<齊室>인 숭덕전<崇德殿=혁거세왕의 제향을 받드는 제전으로 본래 조선 세조 11년(1429)에 지음> 앞의 홍전문<紅箭門>이 사찰의 당간지주<幢竿支柱>를 이용하여 서 있는데, 오릉<五陵> 옆에 사찰<寺刹>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며, 이 당간지주<幢竿支柱>를 담암사<曇巖寺>의 유물로 믿고 있다. 숭덕전<崇德殿>은 조선 세조<朝鮮 世祖> 11년(1429)에 창건되었으나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불타 선조<宣祖> 33년(1600)에 재건하였고, 숙종<肅宗> 20년(1694)에 수리하였으며 경종 3년(1723)에 사액<賜額>되었다. 또한 경내에는 영조<英祖> 35년(1759)에 세워진 혁거세왕<赫居世王>과 숭덕전<崇德殿>의 내력을 새긴 신도비<新道碑>가 있다. 숭덕전 위편에는 알영왕비의 탄생지라 하는 알영정<閼英井> 터가 있다.
- 가는 길: 자가운전시 톨게이트에서 5분정도 소요.
시내방향으로 좌회전하면 오른쪽에 돌담이 보이는 곳으로 우회전하면 바로 오릉 주차장이다.
고속버스터미널 정문 맞은편 도로에서 500~507번 내남, 봉계 방면 버스를 타면 15분정도 소요.
버스비: 1,050원 30분간격
오릉의 전경
오릉의 전경
- 신라 시조왕<始祖王> 박혁거세의 묘(廟)로 경북 경주시 탑동에 있다. 1429년(세종11) 왕명에 의해 창건되어, 봄과 가을에 증사(中祀)의 예로 치제(致祭)할 것을 정식으로 정하였다. 1723년(경종3) 숭덕전의 현판을 하사하고 참봉 2인을 두어 관리하게하였다. 1752년(영조28) 묘정에 비석을 세워 신라 시조가 백성에게 끼친 유덕을 기록하였다.
- 제관으로는 헌관(獻官), 축(祝), 장찬(掌饌), 집준(執尊), 집사(執事), 찬자(贊者), 알자(謁者) 등이다. 헌관은 관찰사가 왕을 대행하여 치제하였다.
숭덕전
숙경문(肅敬門=숭덕전으로 들어가는 내신문(內神門))
숭성각(崇聖閣=신라 시조왕 박혁거세의 신도비각으로 1759년(영조35년) 어명으로 건립
소재;경북 경주시 탑동
- 박혁거세의 탄강전설이 깃들어 있는 우물로 사적 제 245호이다. 경주시 탑동 오릉에서 남동쪽으로 약 1km 떨어진 소나무 숲속에 위치하고, 옆에는 조그만 시조유허비가 있다.
- 옛날 진한 땅에 고조선의 유민이 세운 여섯 마을이 있었는데, 6촌 촌장들이 어느날 양산(지금의 경주 남산) 숲속에 있는 우물인 나정 곁을 바라보는데 이상한 빛이 드리워졌고 백마 한 마리가 무릎을 꿇고 울고 있어 다가가보니, 우물가에 큰 알이 하나 놓여 있고 그 안에서 아름다운 사내 아이가 태어나와 마침내 자라 신라의 시조가 되었다 한다. 서기 6년(남해왕 3년)에 이곳에 묘전을 세우고 왕이 즉위하면 반드시 제를 올렸다.
나정(蘿井)
- 박혁거세의 왕비인 알영이 태어난 우물로, 오릉원 내에 있으며, 우물터에 비각이 서있다.
알영정(閼英井) 비각
알영지(閼英池)
- 박혁거세의 탄생설화는 나정의 알에서 태어났다는 것 외에 성령의 힘에 의해 잉태되어 성모(聖母)에게서 났다는 또 한가지 설이 있다. 성모는 본래 중국 황실의 딸로 선술(仙術)을 얻어 신선이 되어, 동해 바다 위에 나와 놀다가 지아비 없이 잉태하여 경주 서악(西岳) 선도산(仙桃山)에 머물다가 시조왕을 낳았다고 한다.
- 성모사는 성모를 기리기 위해 경주 사악 선도산 주봉의 높은 바위 밑에 지은 것이다. <삼국유사>에 26대 진흥왕 때 안흥사(安興寺)의 지혜(智惠)라는 비구니가 사당의 왼쪽 아래 땅 속에서 황금 160냥을 얻었다는 기록과, 경명왕 때는 왕이 이곳에 올라와서 매 사냥을 하다가 매를 잃고 신모에게 기도하여 되찾았다는 기록이 있다. 또 <숭덕전 고왕록(攷往錄)>에는 임진왜란 때 후손 언수(彦秀)가 숨어서 피란했다는 기록이 있으니, 오래된 역사와 전설을 가진 사당임을 알 수 있다. 지금의 것은 구한말 전 참봉(前 參奉) 기문(基汶)이 비각을 중건하고, 다시 1963년에 사우(祠宇)를 중건한 것이다.
성모사(聖母祠)
옆에서 본 성모사(聖母祠)와 그 뒤쪽에 있는 석불(石佛)
- 기원전 69년 여섯 촌장들이 아들을 데리고 알천의 언덕 위에 모여서 백성을 다스릴 임금을 뽑기 위한 논의를 하던중 남쪽 방향의 양산 아래 있는 나정이라는 우물가에서 오색영롱한 빛이 비치고 백마 한마리가 무릎을 꿇고 절을 하는 모습이 보였다한다. 이들이 그곳에 가보니 박같은 알이 있어 이를 깨어 보니, 잘생긴 사내아기가 나왔다 한다. 사람들은 이러한 연유로 그아이를 혁거세라 이름 지었고, 박에서 태어났다 하여 성을 박씨라 하였다. 그가 곧 박씨의 시조인 박혁거세이다.
- 같은 날 사량리에 있는 알영정이라는 우물에서는 용이 나타났는데, 왼쪽 갈비에서 어린 여자 아이가 나왔다 한다. 이 아이는 얼굴과 입술은 고왔으나 입술이 닭의 부리를 닮아 보기가 흉해서, 월성 북쪽에 있는 냇물에 목욕을 시켰더니 부리가 떨어졌다. 사람들은 이 아이가 나온 우물의 이름을 따서 알영(閼英)이라 이름지었다.
- 기원전 57년 이 두 아이가 13세가 되자 박혁거세는 왕이 되었고, 알영을 왕비로 맞아들였으며, 나라의 이름을 서라벌이라고 했다. 이때부터 신라 왕실의 56대 왕은 박, 석(昔), 김의 3성이 돌아가며 하였는데, 그중 박씨 성을 가진 왕은 시조인 박혁거세를 포함하여 모두 10명이다.
- 박씨는 녀러 본관 중 단 1본도 외래 귀화족이 없으며, 모든 박씨는 박혁거세를 유일한 시조로 받들고 있다. 박씨끼리의 혼인을 피하는 이유도 이러한 까닭이다.
- 박씨는 박혁거세의 증손인 파사왕(신라 5대왕)과 일성왕(신라 7대왕)에서 갈라 졌으며, 일성왕계는 그의 26세손인 경명왕(신라 54대왕)과 경애왕(신라 55대왕)대에서 다시 갈라졌다.
- 특히 경명왕계는 아들 9형제에서...
- 첫째 아들 박언침의 밀성대군파 - 밀양박씨, 반남박씨, 진원박씨의 시조가 되었으며,
- 둘째 박언성의 고양대군파 - 고령박씨
- 셋째 박언신의 속함대군파 - 함양, 삼척
- 넷째 박언립의 죽성대군파 - 죽산, 음성, 고성,
- 다섯째 박언창의 사벌대군파 - 상주, 충주
- 여섯째 박언화의 완산대군파 - 전주, 무안
- 일곱째 박언지의 강남대군파 - 순천, 춘천
- 여덟째 박언의의 월성대군파 - 경주박씨의 8대군파
- 아홉째 박교순의 국상공파 - 울산박씨로 분파되었다.
- 한편 경애왕계는 계림대군파로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