븍부정류장에서 만나자!
의성사는 친구랑 서울사는 친구를 만나기로했다 . 셋이같이 만나는건 십몇년만인가보다.
예전엔 네명이서 모임을 하며 일년에 한두번씩 대구에서 또는 의성에서 만나곤 했었다.
한친구가 해외로 파견근무를 나가는 남편을 따라몇년동안 가있었고 또 한친구는 집안의 부도로 인하여 모임을 회피 하는바람에 모임이 흐지부지 된채 십여년이훌쩍지나버렸다 .이제 다들 손주를보아 할매가 되어 여유를 갖게되니 옛친구들을그리워하게 됐다.
의성친구가 버스를 타고온다하니 그친구의 동선에 맞추기로하고 두달전 부터 설레며 만날날만을 고대했다.
서울친구는 우리집에 와서 하룻밤을 보내기로 했는데 그친구남편이 대구일정들을 잔뜩잡아 대구오는길에 태워준다며 따라나서는바람에 긴밤새우며 얘기꽃피울 생각에 설레던 꿈은 날아가버렸다.
새댁시절 모임을 할때마다 태워다 주고 태우러 오고하여 항상 아쉬움을 남기게해 미워 했었는데 또그런다고 한소리했더니 착한 친구는 ' 우짜겠노 ,한다.
북부징류장 에서 셋이만나 팔짝팔짝 뛰며 우리는 금새 꿈많던 십대시절로 되돌아갔다.
그시절엔 네명이 뭉쳐다녔는데 지금은 어떤 오해로 한명이 빠지게되어 아쉬웠지만 세명이라도 다시만나니 설레고 벅찬기분을 어떻게 표현할수있을까.
카페서 옛날 얘기꽃 피우다가 점심때가되어 자리옮겨 식당에서 식사를하며 얘기꽃을피우고.
또다시 카페로 옮겨 아까하던 얘기꽃은 다시 이어지고.
다들 아들딸 잘키워 시집장가보내고 여유로와졌다고 . 그둉안 많이 그리웠다고 .
남편들 퇴직하고 연금빵빵하게나오건만 다시제2의직업 을 찾아 가계는 풍성하다고.
서울친구는 아들하는사업이너무잘돼서 그비싼 강남에빌딩도 샀다고.
두친구 모두 박사 사위맞아 모대학교 교수라고.
사위얘기를 할때 우리딸은 아직미혼이라 사위자랑에는 낄수가없었노라고 나중에 딸애에게 하소연 했더니 키득거리기만 한다.
비슷한시기에 결혼을했고 걔네들은 모두첫째를 딸을낳았고 나만아들이었는데 그시절은 아직 아들선호사상이 남아있던때라 둘째때는 검사를거쳐 다들 둘째는아들을 낳았다.
지금은 딸을선호하는세상이 되었고 며느리 눈치보는세상이 되어있으니 가치관이 바뀌어도 너무나 많이 바뀌고 빨리 바뀐다.
하긴 지금도 중동에는 여자가부르카를써야하는곳도존재하고 일부다처제가 허용되는곳도있으니 빨리 바뀐 우리나라가 살기좋은 나라다.
둘만 낳아잘키우자 하다가 둘도많다 하나만낳아라 하던때가엊그제인데 제발 애 좀낳아라 낳기만하면 지원듬뿍 해주께 하는세상이되어있다.
젊은시절 동네 할머니하시는 말씀이 '내 살아생전에 세상이 이렇게 많이바뀔줄 몰랐다,고 하시던 생각이난다.
그때 할머니말씀이 지금은 내가 실감한다. 나의 세상에서도 세상이 엄청나게 급변 했다.
소가 수레끌던 시대에서 자동차 시대로 바뀐것도내게는 먼 옛날얘기가 아니다.
어릴적 우리동네엔 조랑말도없던 산골동네라 소가끄는달구지가유일한 탈것이었다.
곡식 가마니를 실어나르던 맘씨좋은 방앗간 머슴이 빈수레일때는 우리들을 태워주기도 했는데 그때 얻어탔던 달그랑 달그랑 소구루마는 추억거리 별로없던 어린시절의 내게 아름다운 한폭의 수채화로 남아있다.
우리 손자가 자라 이다음에 내나이가되면 손자의 수채화에는 어떤 그림이 그려질까?
네명이 뭉쳐다니던 까마득한 옛시절얘기들을 꽃피우노라니
첫째는걸리고 둘째는 들쳐업고 북적이는 버스타고 그렇게라도 친구들이좋아 모임하러가던 시절에서 부터 더거슬러가니
서울친구랑 수학수업시간에 오목에빠져 선생님이 옆에와서 지켜보는것도 모르고 오목만 노려보다가 복도로 쫓겨났던 대목 에서 그때우리가 두손을 들고있었나 내리고 있었나 하며 깔깔거렸다.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돌아오는길에 집이 영천이라 학교근처서자취하던 지금의 의성친구집에서 떡볶이를 만들어 먹던 얘기로 거슬러갔다가 20대처녀시절로 다시올라왔다가 서울친구 연애사에서 정점을 찍고있는데 그장본인한테서 전화가와 '언제 끝나노?, 보채는통에 헤어질 때가됐나보다.
아쉬움을안고 돌아오는길은 흥분이 도저히 가시지를 않아 운전중에 또 번갈아가며 집에올때까지 통화를한거같다.
아마도 한동안은 흥분의긴여운속에서 살아갈거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