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구 청 장 예 비 후 보
신 현 구 (미래, 현재, 과거)...살아온 길
저는 1960년 1월 13일 전라남도 해남군에서 태어났습니다.
광주에서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학창 시절을 보냈고 특히 고교평준화 1기로서 광주 서석고 3학년 시절 학도호국단 연대장(당시 학생회장)을 역임하면서도 서울대 사회계열에 합격함으로써, 서석고 출신 서울대 1호, 학생연대장 출신 서울대생이 되었습니다. 대통령의 꿈을 갖고 있던 저는,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하신 아버지의 완강한 반대로 정치학과 대신 상대를 선택해야 했습니다. 1980년 12월, 광주민주화운동의 아픔을 안고 군에 입대를 하게 되었고, 논산훈련소에서 복무 하였습니다.
만기 제대 이후 복학과 더불어 4학년 재학시절인 1984년 마침내 컴퓨터 소프트웨어 개발회사를 설립하여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1989년 말 둘째 아이의 건강 상태가 매우 좋지 않은 관계로 서울을 떠나 본가와 처가 있는 광주 서구로 돌아오게 되었고 8년 동안의 사업 참여는 저를 더욱 풍부하고 단단한 사람으로 만들어준 소중한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운명이란 어쩔 수 없는 가 봅니다. 정치에 대한 열정을 접고 경제계로 방향을 바꿨던 저는 사업을 정리하고 쉬고 있는 동안 후배의 권유로 정치권과 인연을 맺게 된 것입니다. 1993년 1월 국회의원 한화갑 보좌관을 시작으로 정치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는데 당시 국회 경험이 없었던 만큼 남들보다 더욱 노력하는 자세로 임했습니다.
밤∙낮 구분 없이 의원회관에서 씨름한 탓에 가족에겐 늘 미안한 남편과 아빠였지만, 저의 작은 노력들이 빛을 발하기 시작하면서 남다른 성취감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1993년부터 1996년까지 4년간 국정감사에서 한화갑 의원을 건설교통위원회 최우수의원으로 만드는 역할을, 1997년 50년만의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루어내는 작은 역할(경남지역 정책위원 총괄)을 담당했으며 원내총무실과 사무총장실에서 국회와 정당의 실무경험을 쌓으면서 우수당직자 표창을 수차례 받기도 했습니다. 98년 8월부터 3년간 국회 재경분야 정책연구위원을 역임하였고 2003년 한화갑 대표최고위원이 대표직을 사임할 때까지 대표특보를 역임하였습니다. 2002년 민주당 대통령경선에서 한화갑 후보의 선거실무를 총괄하다가 광주 경선에서 실패하면서 한동안 정치적 갈등과 방황을 하기도 했습니다.
2003년 17대 총선 출마를 결심하고 광주 서구로 내려와 6개월여 동안 경선을 준비한 결과, 2차까지 가는 접전 끝에 김영진 후보에게 석패하고 깨끗하게 결과에 승복하여 명예선대위원장을 맡았습니다. 선거 직후에는 지역에서 터를 잡기 위해 지역구인 풍암동에 독서⋅논술학원을 개원하여 아내와 함께 운영하다가 1년 만에 아내에게 맡기고 다시 정당에 복귀하여 광주 서구을 지역위원장 자리를 놓고 김영진 前장관과 치열하게 경쟁한 결과 위원장으로 지명 받았습니다. 김영진 前장관과는 1승1패가 된 것입니다.
2005년 말 5⋅31 지방선거를 앞두고 서울대 출신의 현직 열린우리당 서구청장을 상대할만한 인물이 없고 같은 서울대 출신인 제가 상대하면 되겠다는 중앙당의 언질이 있어 12월말 일자로 지역위원장을 사퇴하고 구청장 준비에 들어갔습니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저의 우세가 이어졌고 모일간지에서는 “지역최초로 현직 단체장 제압” 이라는 기사까지 나왔습니다.
그런데 아침 면담에서까지도 걱정하지 말라던 한화갑 대표가 말 한마디 없이 그날 오후에 서구청장 후보를 광주시 고위 공직자 출신을 전략공천 한다고 발표하였습니다. 경선에서 졌다면 깨끗하게 승복하지만 여론에서 타당 후보를 앞서가고 있는 후보자를 제치고 전략공천을 하는 것에 대해 재심을 요구하며 단식에 들어갔고, 7일간의 단식투쟁에도 불구하고 문제해결의 기미가 안보여 결국 무소속 출마를 강행하게 되었습니다.
열린우리당과 민주당의 양당 구도하에서의 대접전, 그리고 민노당의 고정표로 인해 제 자신의 목표치인 10%(선거비의 1/2을 보전 받을 수 있는 득표율)를 얻는데 실패하였습니다. 그로 인해 정신적 경제적 상처가 무척 컸지만 1년 반 동안 아내와 함께 열심히 일하고 청빈생활을 한 결과 이제 안정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혹자는 ‘신현구는 인물이지만 돈이 없어 문제’ 라고 말할 것입니다. 낭비할 돈은 없지만, 저의 가족들이 중산층 생활을 할 정도는 되고 지금도 아내가 학원을 안정적으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또한 돈은 부족하지만 그런 것에 개의치 않고 신념과 정으로 뭉친 많은 순수한 동지들이 있습니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광주 시민 그리고 서구민 여러분!
이제 안철수와 함께 새로운 정치를 해보려고 합니다.
이곳 서구가 변화와 혁신의 진원지가 되도록 하겠습니다. 과거 민주당의 구태정치의 피해자이기도 한 저는 지난 대선과정에서 안철수의 진심캠프 대외협력위원으로 활동하였던 검증된 안철수 맨입니다.
대선 이후로도 광주 시민포럼 상임위원, 정책네트워크 내일 실행위원으로 최일선에서 안철수의 새정치를 전파하기 위해 준비하고 실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변화와 혁신, 그리고 역동성을 부여할 수 있는 준비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10년 이상을 서구에서 정치적 시련과 고통을 받으며 연단의 과정을 겪어 왔습니다.
그리고 서울대 상대 출신으로 중앙 재·계에 많은 인맥을 형성하고 있고, 10여 년간 중앙정치무대 중심에서 정치력과 국정과제를 다루면서 정책능력과 장관⦁차관들과 함께 머리를 맞대고 국가예산의 큰 줄기를 다루기도 하였습니다.
서구를 잘 알고 50대 중반의 패기와 경륜이 조화롭게 잘 어우러진 제가 서구에 역동성을 부여하고 호남의 중심구로서의 위상을 제고시킬 최적의 적임자라고 생각합니다.
누구에게도 자신 있는 높은 도덕성과 청렴성이야 말로 새정치가 요구하고 수준 높은 광주 서구민이 요구하는 참 일꾼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위 글은 신현구님을 며칠 전 직접 뵙고 추선회관에 있는 캠프에서 받은 내용입니다. 정말 정말 소탈하고 인자한 분이신데 우리가 만들어 봤으면 좋겠습니다. 다들 힘내시고 행복하시고 화이팅~~~하세요.
카페지키 다스파이샤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