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2세--------3세-----------4세--------5세-----------6세-----------7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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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순작(崔舜爵)-최숭(崔崇)--최남부(崔南敷)--최전(崔佺)--최정신(崔正臣)--최득평(崔得枰)--최재(崔宰)
-------------------------------------------------------------최직평(崔直坪)
------------최공(崔 )--최남돈
7세----------------------8세-------------------------9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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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공 최재(文貞公 崔宰)---판서공 최사미(判書公 崔思美)-----------------------------판서공파
------------------------최덕성(崔德成)
------------------------평도공 최유경(平度公 崔有慶)---판윤공 최사위(判尹公 崔士威)--판윤공파
---------------------------------------------------양도공 최사의(襄度公 崔士儀)--양도공파
---------------------------------------------------지평공 최사규(持平公 崔士規)--지평공파
---------------------------------------------------경절공 최사강(敬節公 崔士康)--경절공파
---------------------------------------------------첨추공 최사용(僉樞公 崔士庸)--첨추공파
---------------------------------------------------감무공 최사흥(監務公 崔士興)--감무공파
문열공 최순작(文烈公 崔純爵)
고려 정종 때 벼슬에 나가 고려 문종 때 과거에 급제하여 중서시랑 평장사가 되었다. 병부상서 겸 신호위 상장군이 되었고 완주개국백(完州開國伯)이라는 작위를 받았다. 1108년 9월에 돌아가셨다고 되어 있으나 고증 해 보면 잘못된 연대인 것으로 보인다. 시호는 문열공이다.
상서공 최숭(尙書公 崔崇)
문열공 최순작의 큰아들. 고려 숙종때(1095 - 1105년) 문과에 급제하여 예종때(1105년 - 1122년) 이부시랑을 역임한 후 판예부상서 겸 예문제학을 지내고 1151년에 돌아가셨다.
개성소윤공 최공(開城小尹公 崔 )
문열공의 둘째아들로 휘는 공이며 개성소윤을 지냈다.
문강공 최남부(文康公. 崔南敷)
상서공 최숭의 장남이다. 고려 의종때(1146년-1170년) 문과에 급제하여 공부상서를 지내고 대장군으로 수문전 태학사를 겸했다. 1200년에 돌아가셨고 시호는 문강공이며 전주백(全州伯)에 봉해졌다.
최남돈.
문열공 최순작의 손자로 복야공 최균의 아버지라는 설이 있으나 믿기 어렵다. 문열공의 아들은 상서공 최숭과 개성소윤공 최공 두 분인데 작은아들 개성소윤공의 아들이 최남돈이라는 설이다.
소윤공 최전(小尹公 崔佺)
고려 희종때(1205년 - 1211년) 비서소윤을 지냈다.
시랑공 최정신(侍郞公 崔正臣)
소윤공 최전의 아들이다. 1226년(고려 고종 13년) 문과에 급제하여 좌우위 정언, 전중어사, 중정시랑을 거쳐 김해부사를 지냈다. 원종때(1259-1274) 임연의 독재를 타도하려 하다가 실패하여 10여년간 귀양살이를 하고 더 이상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전서공 최득평(典書公 崔得枰)
문열공 최순작의 5세손. 전주최씨 문정공계 중시조 문정공 최재의 아버지이다. 선부전서를 지냈으며 성품이 청렴하고 강직하여 여러 사람의 공경을 받았으나 강직한 성품으로 여러 차례 사람들의 미움을 사서 조정에 참소 되기도 했다.
시랑공 최직평(侍郞公 崔直坪)
문열공 최순작의 5세손으로 전해온다. 예부시랑을 지냈다고 하나 후손은 전해오지 않는다.
문정공 최재(文貞公 崔宰)
자는 재지(宰之) 호는 문정이다. 1303년에 태어나 1330년 문과에 급제 지평이 되었고 1352년 집의가 되었다. 성산군(星山君)의 존호를 받았으며 중광대문하시중을 지냈고 1378년 10월에 돌아가셨다.
판서공 최사미(判書公 崔思美)
전주최씨 문정공계 판서공파의 파조로 고려 공양왕 때 예의판서를 역임했다.
평도공 최유경(平度公 崔有慶)
1343-1413. 조선 초기의 문신 휘는 유경(有慶) 자는 경지(慶之) 호는 죽정(竹亭)이다. 고려 우왕이 요동을 정벌 할 때 서북면 전운사로 찰방을 겸하였다. 이성계의 위화도회군 뒤 밀직부사가 되고 조선을 개국하자 원종공신이 되었으며 1397년 지중추원사를 거쳐서 유후사로 승진했다. 조선 태종이 즉위하자 대사헌을 거쳐 참찬 의정부사가 되어 정조사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판한성부사에 보직되었다. 시호는 평도공(平度公)이다.
조선 초기 축성도감의 도제조로 서울의 성곽(城郭)과 남대문(南大門)을 세웠으며 남대문의 상량문(上樑文)은 공의 친필(親筆)로서 1962년 지하철(地下鐵) 1호선 건설을 위해 남대문을 해체(解體) 작업 중 발견되어 중요한 문화재가 되었다.
판윤공 최사위(判尹公 崔士威)
전주최씨 문정공계 판윤공파의 파조로 조선 태종 때 황해도 관찰사, 세종 때 한성판윤을 지냈다.
양도공 최사의(襄度公 崔士儀)
전주최씨 문정공계 양도공파의 파조로 조선 세종 때 문신으로 자는 범숙(凡叔) 시호는 양도(襄度)이다. 이조참의, 예조참판 등을 지냈다.
지평공 최사규(持平公 崔士規)
전주최씨 문정공계 지평공파의 파조로 조선 태종 때 사헌부 지평을 지냈다.
경절공 최사강(敬節公 崔士康)
전주최씨 문정공계 경절공파의 파조로 자는 안국(安國) 시호는 경절(敬節)이다. 조선 세종 때 병조참판, 호조참판, 이조참판을 지냈다.
첨추공 최사용(僉樞公 崔士庸)
전주최씨 문정공계 첨추공파 파조로 자는 관중(貫中)이다. 조선 세종 때 첨지중추부사를 지냈다.
감무공 최사흥(監務公 崔士興)
전주최씨 문정공계 감무공파 파조로 어머님이 병들어 백약이 무효하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먹였으나 효과가 없자 허벅지 살을 베어내어 어머니께 드려 병이 낳았다. 이에 나라에서 대흥감무 벼슬을 주었다. 감무는 지금의 군수이다.
문성공 최아(文成公 崔阿)
전주최씨 문성공계의 시조(始祖) 문성공(文成公)은 휘(諱)가 아(阿)이며 자(字)는 형지(衡之)이고 시호(諡號)는 문성공(文成公)이며 완산군(完山君)이라는 존호(尊號)를 받았다. 고려 충숙왕 때 문하시중을 지냈다고 전해오고 있으나 태어나고 돌아가신 해 그리고 할머니에 대한 기록은 전해오지 않는다.
복야공 최균(僕射公 崔均)
전주최씨 복야공계의 시조로 자가 간유(幹儒)로 복야공 또는 사도공(司徒公)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1127년 완산 군수 박춘령이 연구(聯句)로 시(詩)를 짖는 시험을 열어 최척경, 최균, 최송년 3명의 어린이를 뽑아 완산의 3최라고 불럿고 이 3최 모두가 완산백 문영공 최언위의 후손이라고 했다.
1174년 서경 유수 조위총이 정중부의 토벌을 내세우고 반란을 일으키자 동북로 도지휘사가 되어 토벌군을 지휘하였다. 화주에서 조위총의 부장인 깁박승(金朴升)의 공격으로 성이 함락되고 병마사 이의(李儀)와 함께 붙잡혀 살해되었다.
<참고>--관청 및 관직
* 판돈녕부사-- 조선때 돈령부에 속한 정2품의 벼슬
* 한성판윤-- 조선때 한성부의 으뜸벼슬로 정2품의 관리, 지금의 서울특별시장
* 한성부윤-- 조선때 정2품의 지방관직으로 부의 우두머리
* 형조 좌참판-- 조선때 6조의 하나로 법률과 소송,노비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였으며 지금의 법무부 와 같은 관청의 종2품의 벼슬
* 동지돈녕부사--조선때 돈녕부에 속한 종2품의 벼슬
* 부윤-- 조선때 정2품의 지방관직으로 부의 우두머리
* 호조참판-- 조선때 호구와 납세,식량과 화폐에 관한 일을 관장하던 기관이며,지금의 재정경제부와 같은 관청의 종2품의 벼슬
* 이조참의-- 조선때 6조에 하나로 모든 문관의 인사를 담당하고,훈봉에 관한 사무를 집행하돈 관청으로, 지금의 내무부와 총부와 같은 관청의 정3품의 벼슬
* 상호군-- 조선때 5위에 속한 정3품의 무관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