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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항면(月恒面)의 환경과 유래◈
통일신라시대 유동.당소.비호석의 3방으로 구분되어 있었는데, ‘유동방’은 유월.대산.안포.용각리 일대였고, ‘당소방’은 보암, 수죽, 지방리 일대였으며, 1914년 성주읍에서 편제된 학산리가 포함되어 있었다. ‘비호석방’은 장산.어산. 인촌.용봉리 일대였는데, 1895년 이들 각 방은 각 면이 되었다. 1914년 4월 행정구역 개편 시 면 폐합으로 유동, 당소, 망성의 3면을 합면되어 월항면이 되었다. 이때 용봉동이 초전면에 편입되었고, 1989년 1월 행정구역 개편으로 어산리가 초전면에 이관되었으며 현재 대산, 유월, 용각, 보암, 장산, 수죽, 지방, 인촌의 법정 9개리 ,행정 22개리로 구성되어 있으며, 1500여 세대에 인구는 4,500여명이다. 월항면의 ‘월항’이라는 명칭은 지금의 유월리의 명칭인 월암에서 연유하였으며 오늘에 이르고 있음.
1.안포리(安捕里)의 환경과 유래
고려 때 광평이씨 이능이 성주이씨 이억년의 사위로 대원 외교의 공으로 인하여 왕으로부터 능이라 사명 받고 삼중대광 광평군에 봉해져 덤개마을에 터를 잡았다. 백인당, 상포, 새터는 경산이씨 집성마을이고, 중포는 한 개에서 온 성산이씨 집성마을이며, 안무실 마을에는 고려 말 김승득이 경산이씨 이감의 사위가 되어 입향함.
*덤개, 백인당이란?
약 1300년 경 마을을 형성하였으며 덤개라 칭하였다. 그 명칭은 넉넉하게 형성된 길지의 마을로 명산대천의 명을 인용하여 덤개라 칭한 것이며, 백인, 백인당은 1600년 경 임란을 피하기 위해 성주에서 이 마을로 피신하여 100일간 어려움을 참고 견디었다 하여 ‘백인’ 또는 ‘백인당’이라고 칭하고 있음.
*신기(新基, 새터, 새뜸)이란?
효종 10년 기해(1659)년에 경산이씨 처사 이위가 검암산 일맥이 백천 포변에 멈춘 지세가 좋다하여 현 백인에서 이주하여 이 마을을 개척하였다고 한다. 새로 터를 열었다고 하여 ‘새터’라고 칭하였다고 함.
*상포(上捕), 밤나무정이란 ?
1300년 경 조성 당시 덤개라 하였는데 그후 덤개마을의 5개 자연촌(백인당, 신기, 상포, 중포, 동정리) 중 제일 윗마을이라 하여 ‘상암’이라고 칭하였다가 뒤에 상포라 칭하였다. 죽령으로 넘어가는 작은 재 주변에 밤나무가 많아 ‘밤나무 정’ 또는 ‘밤나무 고개’이라 부르기도 한다.
*중포(中浦)란?
성산이씨 이달심, 이달지, 이달영 3형제가 한 개에서 1625년도 경 이곳으로 이주하여 마을을을 형성하였다고 하고 위 이달지는 경산이씨 이륜의 사위로 그의 후손이 집성을 이루고 있으며 마을 형성 당시 대포의 포자와 마을 앞에 명수(물)인 중정이 있다고 하여 ‘중포’라고 칭했다고 하며 일제시대에는 암포1동으로 부르다가 해방 후 안포4동으로 개칭하였으며 그리고 대포와 덤개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다고 하여‘ 중포’라고도 호칭하기도 함.
*동정리(東亭里)란?
월항면 소재지 마을 서편에 이천의 지류인 백천 냇가가 있으며 조선조 초에 개국 공신 배극렴의 농지였다고 하며 배내라 한 것이 ‘백천’이 되었다고 하며, 그곳으로 흐르는 물 개울가에 수양버들이 우거져 좋은 그늘이 마치 정자와 같고 덤개 동쪽에 있다하여 동정리라고 칭하였다고 한다. 또한 마을 동쪽에 정자가 있어 그 이름을 동정이라고 하여 그 정자 이름을 따서 ‘동정리’로 마을이름을 부르게 되었다는 설도 있음.
*안무실(安茂室), 응무실(應舞室)이란 ?
월항면 소재지에서 선남면으로 가는 길 동쪽에 표고 112m의 낮은 산봉을 가리고 남향한 마을이다. 고려말 좌부대언 보문각 직제학 김승득이 경산이씨 이감의 사위가 되어 이 마을에 들어와 세거하여 그 후손이 살고 있으며, 세조 때 서산류씨 류한경이 이 마을에 이주하여 연못에 배를 띄워 응화무희를 즐기며 보냈다고 ‘응무실’이라고 부르기도 했다함.
2.용각리(龍角里)의 환경과 유래
동북의 친곡 군계에 있는 각산(468m)에서 서남으로 뻗은 산맥이 꿈틀거리는 용의 형상과 같다하여 용각리라 칭하고 있다고 하며 선비가 많아 먹(묵산), 붓(필산), 종이(저암), 벼루(당쇠, 당소)로 자연부락의 명이 특색이며 밀양박씨 박치엽이 이주하여 후손이 살며 원씨, 허씨가 주 집성촌이고 댓갱이(죽관)에서 입향해서 후손이 살며 먹뫼 마을에는 성주도씨 도형이 수원에서 이주하여 후손이 살고 경산이씨 이광서의 후손이 살며 마을을 형성하고 있음.
*묵산(墨山), 먹뫼란?
조선 성종 때 도응천이 마을에 입주하여 저암, 필산, 당새 용문 문방사우를 이루려면 먹에 해당된다하여 묵산이라고 호칭하고 있으며 또한 마을이 다른 마을보다 크다하여 큰마라고도 부르기도 함, 성주도씨 도형의 후손 집성촌과 경산이씨 이덕유의 아들 이광서의 후손이 살고 있으며 김녕김씨 김연의 후손이 살고 있음.
*죽관(竹官, 댓갱이, 대갱)이란?
1400년도 경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이 말을에는 옛날 대나무 밭이 많았다 하여 대 ‘죽’자를 앞세우고 선비들이 과거를 보러갈 때 이곳 대나무 지팡이를 만들어 짚고 가면 반드시 벼슬을 한다하여 벼슬‘ 관’자를 써서 ‘죽관’이라고 함.
*필산(筆山)이란?
조선시대에 문방사우인 붓에 해당하는 곳으로 ‘필산’이라고 하고 영조 때에 반남박씨 박지원이 영주에서 입향하였으며 효자 박재현의 출생마을이고 성주도씨와 반남박씨가 거주하고 있음.
*당새, 용문(龍文)이란?
약 600년 전에 마을 조성 당시 선비들이 모여서 용각동을 문방사우의 뜻 중에서 글우러 ‘문’자에 속하는 곳이고 뒷산 산봉의 흐름이 풍수지리설에 용의 혀로 전해 ‘용문’이라고도 하고 또한 마을 앞에 큰 연못이 있었고 그 연못에 큰 물이 들게되면 잉어가 뒷산에 올라가 용이 되어 승천했다하여 ‘용문’이라고도 하였으며 조선 중종 때 밀양박씨 박치엽이 입향하여 살고 있으며 원씨, 허씨도 현주하고 있음.
3. 보암리(甫岩里)의 환경과 유래
보동에는 성산배씨 배숙의 후손과 반남박씨 박반원의 후손이 살고 있으며 순조 때 박홍원의 세거지이며 영조 때 남원양씨 양시만이 입향하여 그 후손이 살고 고려 공민왕 때(1374년) 이 마을에 해서도부사를 지낸 청주한씨 한방도가 입향하여 살았던 곳임.
*저암(楮岩), 새뜸. 샛덤이란?
본래 마을은 서쪽에 있었는데 약 600년 전 김녕김씨 김세훈이 먹뫼(묵산)에서 이곳으로 이주하면서 동쪽으로 넓혀 샛듬(새뜸)이라 했고 조성 당시 마을 주위에 닥나무(저)와 바위(암)이 많이 마을이름을 ‘저암’이라고 했다 한다. 영조 때 남원양씨 양시만이 이 마을에 들어와 그 후손이 살고 있음.
*보동(甫洞)이란?
조선 세조 때 성산배씨가 전라도 순천에서 이 마을로 들어와서 조성하였다. 큰선비가 많이 나오라는 뜻으로 클 ‘보’자를 사용하여 ‘보동’이라고 하고 성산배씨 배숙의 7세손 배근상의 후손으로 집성촌과 반남박씨 박반원의 후손과 순조 때 박홍원이 영주에서 세거한 곳이고 중종 때 밀양박씨 박치엽이 입향해 그 후손이 살고 있음.
4. 대산리(大山里)의 환경과 유래
한 개 마을은 성산이씨의 집성마을이고 고려 말 정언을 지낸 이여양의 후손이 대대로 현존하고 울뫼 마을은 김해김씨, 해주오씨, 성산이씨가 분포되어 현존하고 있으며 너은골(언골)은 김녕김씨 경주최씨 등이 현존하고 있음.
*대포(大浦), 한 개란?
1450년에 성산이씨로 진주목사인 이우가 이 마을에 입향하였으며 마을 앞에 큰 백천과 이천이 합류하고 있다고하여 ‘대포’ 또는 ‘한개’라고하고 영취산이라는 큰산을 배경으로 하였다 하여 대산리라고 칭하고 있음.
*울뫼, 화산(華山)이란?
1500년경 마을이 형성당시 솔개가 소리를 내며 영취산을 돌다가 산밑에 앉아 울고 갔다하여 ‘울뫼’라고 하였다고 하고 또한 풍수지라학자의 말에 의하면 이후 근심이 끊일 날이 없다 하여 한때 화산으로 개칭한 적이 있다고 함.
*관동(寬洞), 너은골이란?
조선 선조 25년 임진왜란 이전에는 현재 동네에서 동북쪽으로 500미터 떨어진 북측골에 서산류씨가 살았는데 그때 ‘유동방’ 또는 ‘신기(셋터)’라 칭하였다. 또한 임진왜란 때 성주 관부가 일시적으로 마을 동북편까지 후퇴하자 관부 따라 몰려온 피란민 속에 폭행,절도, 살인 등 불상사가 일어나 동네의 터가 나쁘다는 소문이 퍼졌다. 이에 한강 정구가 퇴계의 동문생 최천강에게 “자네같이 덕이 있고 너그러운 사람이 살면 동네의 불상사가 없어지고 조용할 것”이며 또한 우리 서로 가까운 곳에서 살면서 학문을 토론하자며 경주에서 이주할 것을 권하고 현재의 동네 위치를 잡아주었고 너그러운 사람이 많이 나기를 바라는 뜻에서 동명을 너그러울 ‘관’자를 따서 ‘관동’이라 칭하였으며 그 후 140년이 지난 후 경주최씨 최태현이 거주하면서 ‘말골’이라 개명하여 보았으나 새로이 궂은 일이 일어나 편안하지 못하여 다시 관동으로 칭하고 원래의 동명은 ‘너그러운 고을’이였으나 너무 길고 부르기만 번거롭다하여 ‘너은골’로 속칭되고 있음.
*감응사(感 應 寺)란?
지금부터 약 1200년 전 서기 802년 신라 애장왕 3년 채징이 창건하였다. 애장왕이 늦게 아들을 얻었으나 왕자가 날 때부터 심한 눈병으로 앞을 볼 수가 없었는데 왕비가 왕자의 눈병을 고치기 위하여 온갖 약을 다 써 보았으나 효과가 없어 명산을 찾아 기도를 올렸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꿈에 도인이 나타나 “내일 아침 문 앞에 독수리가 나타날 테니 그 독수리를 따라가면 약수가 있을 것이니 그 약수로 왕자의 눈을 씻고 마시게 되면 눈병이 나을 것이다 ” 하고는 사라졌다. 그 이튿날 아침 문 앞 나무에 독수리가 나타나서 날랜 군사(군인)을 시켜 그 독수리를 따라가게 하였더니 독수리가 이곳까지 와서는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독수리를 놓쳐버린 군사는 독수리를 찾아 헤매다가 이곳 약수를 발견하고 이 약수를 떠다가 왕자의 눈을 씻고 마시게 했더니 눈병이 감쪽같이 완쾌하여 왕은 부처님의 가호와 은덕이라 생각하고 약수 앞에 절을 창건하고 절 이름을 ‘감은사(후에 감응사라고 칭함)’라 하고, 산 이름을 신령스러운 독수리란 뜻에서 영취산이라 명했다.
5.유월리(柳月里)의 환경과 유래
유월리라는 명칭은 유촌의 ‘유’자와 월암 마을의 ‘월’ 을 따서 칭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당시 두 마을을 합하여 유월동이 되었으며 자연 부락은 달암, 월곡, 버들이, 숲마을, 새마, 연봉 6개 마을로 구성되어 있음.
*월암(月岩), 달암이란?
성주군과 칠곡군의 경계이며 고갯마루를 ‘달암티’라고 하고, 남쪽의 산봉을 달암산이라 하여 이 산에 달바위가 있었으며 경주최씨 최천강의 후손이 살고 있으며 해주오씨와 성주이씨도 있으며 동네 개척 당시 마을 뒷산에 달 모양의 바위가 많다하여 월암이라 하였다고 하며 또한 이 바위위로 달이 떠오른다 하여 달이 뜨는 바위라는 뜻으로 달암이라 했다고 함.
*월곡(月谷), 달곡이란?
이 마을은 광산노씨 노득일의 아들 노계종이 인조 때 상주에서 이곳으로 입향하여 학문과 덕망을 베풀며 살았고, 달이 뜨면 이 마을을 바로 비추게 되어 그 경관이 일품이어서 달곡(월곡)이라 부르게 되었음.
*유촌(柳村), 버들이란 ?
1550년 경 순흥안씨가 마을을 형성하였고 1700년 경까지는 ‘유등방’이라 하였으며 마을 주변의 산세가 한 그루의 버드나무같이 교교하게 뻗어있고 물가에 버드나무가 많다하여 버들이라고 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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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마을(숲골)이란?
유촌 남쪽에 있는 마을 앞에 소나무 숲이 울창하다하여 ‘숲마을’이라고 하였음.
*새마을(새마실)이란?
유촌과 숲마을 남쪽에 위치하며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하여 ‘새마을’이라 부르고 있음.
*연봉(連峰)이란?
새마을 서쪽에 있는 마을로 왜관, 성주를 잇는 국도 옆에 위치하고 있으며, 바위가 이어져 묘한 봉우리를 이루고 있다하여 ‘연봉’이라 하였음.
6. 장산리(長山里)의 환경과 유래
초전면의 동편 백천 건너 지점에 자리하여 평야와 도로의 면모를 갖추고 취락조건이 알맞게 짜여져 있는 동네로 조선 성종 때 입향한(들어온 사람을 칭함) 고령인(고령 박씨를 칭함) 박효통 등 10여 성씨가 집성촌으로 분포되어 우리 성주군 내에서 아주 큰 마을로 현재까지 유지하고 있음.
*철산(哲山)이란?
지금부터 약 1250년도 경(약 700여 년) 철산(284고지)의 마을이 형성되었고 당시 마을 앞 개천을 건너기 위하여 철 다리를 놓았다고 ‘철산’으로 부르다가 그 후 밝을 ‘철‘자를 사용하여 ’철산‘이라 부르고 있으며 마을에 옛날 옹기를 굽던 곳이 있었는데, 그 부근을 옹구동막, 그리고 마을 중앙에서 동쪽을 ’앞뜸‘, 서쪽을 ’뒤뜸‘, 새로 집을 지어 마을을 이루고 있는 곳을 ’새뜸‘등으로 부르고 있다.
*장갓(長山), 장지(長枝)란?
마을 북쪽 현령산에서 멈칫멈칫 뻗은 줄기가 장산을 이루었고 옛날에는 위의 산 주변의 단풍이 너무 아름다워 싯뫼(시의 단풍)이라 했다고 하며 그 마을이 중복모음으로 되어 ‘풍 또는 싯뵈’로 흔히 부른다고 하며 그 북동 편에 있는 선석산(선석사 뒤편 산을 칭함)의 산줄기가 이 마을 뒷산까지 길게 뻗어 있어 긴 산가지 마을이라는 뜻으로 ‘장지’라고 부르며 또 긴 산이란 뜻으로 전체동 행정동명을 ‘장산’이라고 칭하고 있음.
*‘멍징이‘란?
고려장터라고 불리는 마을 뒷산에서 발견되는 토기 파편들이 가야시대 것으로 추정됨에 따라 아주 일찍부터 마을이 형성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옛날에는 이 마을에 복숭아 나무가 많아 복사꽃이 피는 봄날에는 환상적인 전경이 나오듯 하여 비원이라 칭하였고 또한 도원동이라고도 지금 칭하고 있으며 또한 옛날에는 울창한 숲이 많이 잇어 그 숲으로 마을이 가리어 마을은 보이지 않고 정자만이 구름 속에 솟는 듯이 보여 ‘망정’이라 했는데 ‘정’을 경상도에스는 ‘징’이라 발음하였고 ‘망’은 모음 조화에 의해 ‘멍’으로 되어 지금은 ‘멍징이’라고 불리고 있음.
7.수죽리(水竹里)의 환경과 유래
약 1600년도 경 동네가 형성되었고 1914년도 행정구역 때 수죽동으로 칭하게 되었으며 마을 명칭은 수죽은 ‘수’자와 죽방의 ‘죽’자를 따라 칭하여진 것이다.
*수남(水南), 나부랑, 나부람, 하남(霞南)이란?
마을 중간에 개울이 흐른다하여 ‘수남’이라고도 하였으며, 이 개울이 ‘나오리(노을)’가 비친다 하여 하 자와 남 자를 합하여 ‘하남’이라 하였는데, 나오리, 나부리남이라 부르다가 ‘나부람’이 되었다고 한다. 또 나부람 마을 뒤의 동서 1.5Km, 높이 169m의 삼각형의 형태인 모산이 있으므로 산 서편 마을을 모산이라하고 나부람은 모산의 너울 같아 나부람으로 된 듯하다는 설도 있다.
*풀모산, 불모산이란?
옛날 마을 앞에 풀이 많은 초지가 많이 풀모산, 마을 앞산이 어머니의 유방과 같다하여 ‘쌍유혈’이라 하였다가, 어머니를 부르는 산이라 하여 부를모산, 불모산이라 하다가 다시 불모산이 변해서 풀모산이 되었다고 하기도 한다. 또한 조선시대 상주목사 이권의 집이 있었는데 이괄의 난 때 이권이 반란군과 합세하여 길을 안내해 준 것을 안 마을주민이 이권의 집을 헐고 그 터에 못을 팠으며 이 못에 풀이 많이 났다하여 풀모산이라 부르게 되었다고도 한다.
*죽방(竹坊), 대뱅이란?
약 1700년 경 유응빈이라는 선비가 입향하였다고 하며 마을 주변에 대나무가 많이 자생하고 있어 죽방, 대뱅이라고 칭하였다 한다.
*구암리(龜岩里)란?
거북 형상의 바위가 입구에 있다하여 ‘구암리’라 하였다는데 죽방의 서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산간마을이다. 이 마을에는 구당 이희성을 추모하는 ‘구암정’이 있다.
8.지방리(池方里)의 환경과 유래
약 1600년도 경 동네가 형성되었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 지방동으로 칭하였고 지산 마을의 ‘지’와 모방의 ‘방’자를 따서 ‘지방리’라고 칭하고 있음.
*지산(池山), 모산(牟山), 못안이란?
옛날 극지라는 천연적인 유지가 있었는데 이 유지의 이무기가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며 꼬리로 못 둑을 무너뜨려 못의 물이 빠져나가고 이 못 터 안에 마을이 들어 섰다하여 못안이라 이름하였다. 그러나 마을 동남에 나부람 마을과의 사이에 모산이 있어 지명의 유래가 여기에 있는 지도 모른다. 아래, 윗마을을 각각 아랫모산, 윗모산이라 부르고 있다.
*띠뱅이,때방이란?
서진산에서 내린 능선이 각산으로 뻗은 중간에 성주와 칠곡의 군계 가까이 표고 150m에 터잡은 10여호의 산촌이다. 옛날 이곳에 띠풀(도룡이를 만드는 풀)이 밭을 이루고 많이 자생하고 있었는데 사람이 이주하면서 띠풀을 베어내고 마을을 만들었다하여 ‘띠뱅이’라고 칭하게 되었다고 한다. 마을 앞에는 철산에서 돌아오른 도로가 칠곡 각산리로 향해서 잘 정비되어 있다. 비교적 완만한 비탈의 이 길은 고래로 동북방의 성주고을 관문이기도 하였다.
9.인촌(仁村), 작촌(鵲村)의 환경과 유래
고려 말 나웅대사가 도망가는 충신 노씨를 데리고 선석사로 가던 중 까치가 많이 울고 있는 곳이 있어 까치가 우는 곳은 손님을 부르는 곳이라 하여 그 노씨에게 그곳에 살도록 하여 마을을 이루게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까치마 또는 작곡촌으로 부르다가 마을이 서편으로 점점 옮겨지면서 작촌으로 부르게 되었다. 그리고 인촌리라는 마을 이름은 부인마을의 ‘인’자와 작촌 마을의 ‘촌’자를 따서 ‘인촌’이라 칭하게 된 것이다.
*부인(扶仁),불이티란?
지금부터 약 1500년 전에 조성(486m고지)된 마을로 당초에는 불인동이라 했다가 그 후 전재근 선비가 부인동으로 개칭하였다고 하며 마을 명칭에 대하여 좀더 자세하게 살펴보면 옛날 합천 해인사의 법당에 불이 났을 때 이 곳까지 불티가 날아왔다하여 불티, 부리티라고 하였다고 전해지며 또한 산 너머 절(선석사라 칭함)이 있다하여 불인동이라고도 하였다고 전해지며 또 선석사의 스님이 환속하였다 하여 불이퇴로 불려오다가 불이티로 되었다는 설도 있으나 지금은 불이티 또는 부인 두 가지로 부르고 있으며, 부인은 선비 전재근이 인재가 많이 배출되라는 뜻으로 불인동을 부인으로 개칭하였다고 함.
<위 전재근 선비는 유래에 대한 자료제공자 전하수의 조부임>
*선석사(禪石寺)사찰
본 사찰은 대한 불교 조계종 제 8교구 본사인 동화사의 말사이다. 692년 의상대사가 화엄 10찰 중 하나로 창건하여 신광사로 하였으나 현재보다 서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1316년(공민왕 10년)에는 나웅대사가 위 신광사 주지로 부임한 뒤 절을 현재의 위치로 이건 하였는데 당시 새 절터를 닦다가 큰 바위가 나왔다하여 터 닦을 ‘선’자를 넣어 절 이름을 ‘선석사’라고 하였다고 하며 지금도 바위는 대웅전 앞뜰에 뭍인 채 머리 부분만 땅 위로 나와 있다.
임진왜란 때 전소된 뒤 1684년 (숙종10년)에 중창하였다가 1725년(영조 1년)때 서쪽의 옛터로 이건하였다가 1804년 (순조 4년)에 신도들의 도움으로 지금의 자리로 이전하고 대웅전, 명부전, 칠성각, 신왕각, 정법료 등이 현존하고 있으며 이 절의 뒤쪽에 바람이 불면 이상한 소리를 내는 쌍곡죽이라는 대나무 숲이 있었다고 한다. 이 대나무를 잘라 만든 피리는 그 소리가 맑고 깨끗하기가 다른 피리와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고 하고 본 사찰은 성주에서 가장 큰 절이고 고찰(오래된 것을 칭함)임.
*선석사(禪石寺)와 서진산(捿山)의 이해
신라시대 명찰 선석사는 1677년 발행 성주 경산지에 뒷산이 선석산으로 명기되어 있고 불자에도 선석산으로 되어 있으며 ,현재 서진산이라고 부르고 있으나 실제의 산명은 선석산(742m)으로 인면 지명은 고유명사로 바꿀 수 없는 사안으로 앞으로 선석산으로 부르는 것이 타당할 것으로 사료됨.
*태봉(胎峰),세종대왕왕자태실(世宗大王王子胎室)
이 태봉은 원래 농서군공 이장경의 묘지였는데 묘터를 골라준 소승이 지운을 미리 알고 후일에 부근 묘제 등을 세우면 터 임자가 바뀔 것이니 명심하라 했는데 그 뒤 이장경의 자손이 큰 인물이 많이 나서 소승의 예언을 무시하고 묘제를 세웠던 바 세종20년(1438년) 왕자태실 터를 찾아 이곳으로 나온 지관이 장마를 만나서 돌아가다가 교제에서 밤을 세우고 아침 구름이 걷힌 산을 보니 농서군공의 묘자리가 탄복할 만큼 명당이라 곧 왕가에 알려 묘는 대가면으로 이설하고 태실을 봉안했다. 위 태봉에는 수양대군을 비롯하여 18대군 1세손의 모두 19태실이 봉안되어 있음.
첫댓글 구하기 어려운 귀중한 자료 감사 합니다-.,
우리들의 뿌리를 알수 있는 좋은 자료인것 같습니다
고향의 유래를 알게돼었고 뜻깊은글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