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河東 都先山 -
▣ 시조(始祖)
● 하동정씨(河東鄭氏)의 시조(始祖) 휘 도정(諱 道正)은 현리(縣吏)였으며 삼한 말기(三韓末期)의 인물(人物)이다. 호걸(豪傑)스럽고 무용(武勇)이 뛰어나서 하동 전역(河東全域)과 고을 백성(百姓)을 통합(統合)하고 공부(貢賦)를 나라에 이바지하니 그 공으로 인(因)하여 고을 호장(戶長)이 되었고 자손(子孫)이 번성(繁盛)하니 본관(本貫)으로 삼은 것이다.
● 고려(高麗)가 통합(統合)할 때 그 고을을 지키고 있었으니 그 현(縣)에 어른을 호장(戶長)이라 했고 병마(兵馬)를 통솔(統率)하는 자(者)를 장교(將校)라고 불렀으니 능(能)히 병마(兵馬)를 통솔(統率)할 수 있으므로 고려(高麗)가 통일(統一)하려 할 때 솔선(率先)해서 협력(協力)하였다. 대개 향리지족(鄕吏之族)은 공거(貢擧:추천함)나 역시(歷試:과거에 급제함)를 거쳐 사족(士族)이 되는 것이다.
● 신라 51대 진성여왕 때 하동지방의 호족출신으로 신라 55대 경애왕 7년(927년) 후백제군이 신라를 침범할 때 하동 호장(戶長)으로 향병(鄕兵)을 단련하여 하동 성을 지켰으며 그 뒤 고려와 신라가 통합할 때 향병(鄕兵)을 이끌고 신라 56대 경순왕을 개성까지 호위하여 호종과 지방의 호족으로 예우를 받아 내 의성의 상시(常侍)에 제수되었고 이의 고려와 통합하여 뒷날 벼슬이 평장사(平章事)에 이르렀다. 평장사(平章事): 고려 정2품 벼슬로 문하시랑 평장사라 불렸다.
● 시조(始祖) 휘 도정(諱 道正)은 고려조정(高麗朝廷)에 출임(出仕)하였으므로 수도(首都)인 개성(開城)에서 서거 후 고향(故鄕) 도선산(都先山)에 반장(返葬)치 못하고 그곳에 묻힌 것으로 추측(推測)만 될 뿐이다. 고려건국(高麗建國) 초기(初期)에는 고관직(高官職)에 출임(出仕)한 분들은 죄를 짓지 않는 한 생전(生前)이나 사후(死後)에도 반드시 개성(開城)에 남아야 한다는 제도(制度) 때문에 고향(故鄕) 도선산(都先山)에 묻히지 못한 것이다.
始祖:高麗平章事河東鄭公道正之壇碑(시조:고려평장사하동정공도정지단비)
▣ 시조(始祖)의 대한 사학자(史學者)기록
하동정씨(河東鄭氏)의 득관 시조(得貫始祖)인 정도정(鄭道正)을 득관 시조라 하고 또 그의 아버지인 정문 공을 비조(鼻祖)라 한다. 그렇다면 득관조(得貫祖)인 정도정은 어떤 인물이었으며 어떻게 득관했을까?
문 공의 아버지인 정년 공(鄭年 公)은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던 청해진(淸海鎭)의 진장(鎭將)이었고, 정년공의 아내인 김씨(金氏)할머니는 신라 왕족(王族)의 딸이었으며, 아버지인 정문 공(鄭文 公)은 하동지방의 현리(縣吏)의 자리를 지킨 신분이었으니, 이와같은 혈통으로 이어지는 엄격하고 품격(品格)높은 가통(家統)과 가정에서 자란 정도정은 삼한(三韓)시대 말기(末期)쯤의 시대에 하동(河東)을 관향(貫鄕)하고, 하동지방의 호족(豪族)으로서 호장의 역할을 하리만큼 성장한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 지방에서 단련시킨 향병(鄕兵)을 거느리고 점차 호족(豪族)의 세를 넓혀 기반을 닦아 무장(武將)인 대당(大幢)이 되어 하동성(河東城)을 수호하다가 920년 이후 한반도가 후삼국(後三國)으로 판도가 바뀌었을 때 하동이 속해 있던 강주(康州-지금의 진주,남해,하동,고성,함안,거제,단성,함양,거창,고령,합천,성주지방)에는 통치권(統治權)이 미치지 못하는 등 혼란기에 처해 있었던 때라 이때 정도정(鄭道正)공은 그 광할 한 지역의 주군(州郡)들을 전부 제패하여 명실상부한 막강한 하동성주(河東城主)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고려와 신라가 통합할 때에 도정공은 자기 휘하의 군사를 이끌고 고려(高麗) 건국초기에 고려에 솔선귀부(率先歸附)하여 하동(河東)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이 지역을 다스렸다는 삼국사기와 하동군지에서의 상세한 내용을 찾아볼 때 정도정(鄭道正) 공은 참으로 대단한 인물로 기록, 평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그뿐만 아니라 고려사(高麗史)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및 하동정씨(河東鄭氏) 대동보(大同譜)에서도 정도정(鄭道正-고려태조: 918년)은 실제인물임을 입증하고 있고 득관조임을 알 수 있다.
920년 이후 한반도가 후삼국으로 세력 판도가 변하고 있을 때 하동이 속해있는 즉 진주를 비롯하여 남해일대의 군소 고을과 함양,거창까지 미치는 강주지역(康州地域) 일대에는 나라의 통치권(統治權)이 제대로 미치지 못하는 혼란기에 처해 있었다.이즈음 도정공(道正公)은 하동을 비롯하여 인근 지방을 먼저 무력으로 장악하고 세력을 넓히고 있었으며,점 점 넓게 각 지역의 주군(州郡)을 차례로 무력으로 제패 점거함으로써 하동성주(河東城主)가 되어 하동호장으로서의 권력과 힘으로 지방을 장악하고 있다가 고려(高麗)초에 호장(戶長)으로서 향병(鄕兵)을 이끌고 고려와 지역및 정치 통합시 스스로 고려조에 귀부(歸附)하여 그 지위를 튼튼히 했으며,심지어 향리의 모든 선비들에게 시험을 보여 관리(官吏)로 뽑아 쓰던 제도인 시험관이던 공거(貢擧)를 역임하기도 했다.
하동에서 호장으로 있던 중 정도정이 향병을 이끌고 고려(高麗)의 군대를 도와 모든 반세력을 제압하고 외침으로부터의 방어 등 많은 공을 세워 그의 훌륭한 업적을 인정받아 뒤에 군대의 단련사(團練使)가 되기도 했다. 그 뒤 고려와 신라가 통합될 때에는 향병을 이끌고 경순왕(敬順王)을 개성(開城)까지 호위하여 가기도 했다. 그와 같은 공로와 절대 호족으로서의 지위는 물론 인물됨을 평가하고 인정하여 내의성 상시(內議省 常侍)에 제수되었고, 이어 곧 정이품(正二品)벼슬에 해당하는 광평성(廣評省)의 평장사(平章事)에 올랐다.
한편으로는 하동을 본관으로 삼고 여기에 정착하게 되었다. 하동군지에 의하면 휘 정도정 공이 하동정씨로 사성(賜姓)되었다 하지 않고 하동으로 사적하였다 기록됨은 하동정씨 발원 전에 이미 성을 사용하고 있던 사람이 드디어 어느 곳을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는 즉 수위본관(遂爲本貫)하였다는 말과 같은 뜻으로 고려 이전에 이미 성(姓)을 사용하고 있었다는 증거이며, 하동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가 하동정씨 밖에 없는 것을 보면 고려 태조가 사성 득관(得貫)할 때 하동 성주(城主)나 호장(戶長)이 하동정씨였음을 미루어 알 수 있다. 또한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여러 기록들은 정문(鄭文) 공이 고려 건국 이전에 정씨성(鄭氏姓)을 가지고 하동에 정착하였음을 말해준다.
여기서 지적 해 두고자 함은 하동 정씨 중 정도정(鄭道正)공 이후 인물, 즉 1100년대 인물인 손위(遜位) 공이나,1200년대 인물인 응 공(膺 公)이 득관을 하였다면 대부분의 성씨(姓氏)가 사성(賜姓) 득관(得貫)하던 고려 태조(太祖) 때 하동 성주나 호장을 다른 사람이 하였을 것이란 추론으로 볼 때 하동을 본관(本貫)으로 한 다른 성씨가 있을 것인데, 하동으로 시관(始貫)한 성씨는 오직 하동정씨 밖에 없는 점으로 봐서 삼국지계인(三國之季人)으로 하동 호장을 지낸 휘(諱) 도정공(道正公) 이 하동정씨의 득관조인 동시에 시조임이 명백하고 여러 역사적 사실로서 증거되고 있다. 편집/松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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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자료를 찾아보니 지금껏 후손이 추론 했던 것보다 훨씬 위대한 업적을 남기신 우리 조상님들이 자랑스럽습니다.
기록한 자료가 사실과 차이가 있을경우 바로잡을 수 있도록 조언 부탁합니다.
나도 비조의 대해 많이생각하고있는 후손입니다. 마음속에 담고갑니다.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