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덕겸(1849~1916)’에게 ‘이기릉(1901~1996)’도 때론 사사받았던 명창이라고 알려진 근대 문헌은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예문 9>
1990년 李基綾이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으나 그가 작고함으로써 朴善愛가 승계하여 전승에 노력하고 있다. 이기릉은 조선조 고종 때에 영제시조의 3대 명창으로 알려진 손덕겸의 수제자 김영도에게서 시조를 배웠는데 때로는 손덕겸으로부터 직접 사사받기도 한 명창이다.
<반론>
영제시조 三大名唱으로 알려진 손덕겸(1849~ 1916)은 경남 의령출신이다. 손덕겸은 조선말기 인물로서, 손덕겸의 수제자라고 알려진 김영도(金榮燾)박사는 <예문 3> 에 기술한 내용을 빌리자면 병원을 경영하면서 영제시조창을 배운 시기가 해방 후라고 기술되어 있다. 해방후라면 적어도 1945년 후라는 얘기가 된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1916년에 돌아가신 손덕겸에게 김영도박사가 수제자가 되어 배울 수 있었는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 더구나 김영도도 이러한데 김영도의 제자인 이기릉은 더더욱 손덕겸에게 배울 수도, 만날 수도 없었던 분이시다.....
‘이기릉’이 동아일보, “향토의 맥박” <1991.2.19. 15면> 에 직접 인터뷰한 기사 내용이다.
그가 嶺制時調를 배우게 된 것은 해방직후 당시 嶺制의 맥을 잇고 있던 金榮燾씨(작고)와 교분을 맺으면서부터다.
李옹은 대구고보(경북고전신) 3회 출신으로 경주, 대구, 서울 등지에서 20여년간 교사와 慶北道 장학사등을 지내다 사직하고, 滿洲로 건너가 사업을 했으며 日本의 패색이 짙자 고향인 大邱로 돌아와 해방을 맞았는데, 우연히 金씨와 만나 사귀게 됐던 것.
金씨로부터 嶺制를 배우면서 李씨는 우람한 창법에 매료돼 독특한 장단을 익히기 위해 심산유곡을 찾아 다니며 발성연습을 하는 등 점차 심취하기 시작했다.
앞서 언급했지만, ‘김영도’ 박사와 그의 제자 ‘이기릉’은 해방 후인 적어도 1945년 이후부터 영제시조를 배웠던 분들이다. 1916년에 돌아가신 ‘손덕겸’에게 어떻게 해서 영제시조를 배울수 있으며, 수제자가 될 수 있었겠는가?
고종 때 영제시조 3대 명창 중 한 분으로 알려진 ‘손덕겸’에 관하여 알려진 기사 내용이다.
경남일보,“영제시조의 맥을 찾아서(중) - 거짓말처럼 사라진 흔적들 ”2007. 08. 07일자에 ‘손덕겸’에 관하여 기록되어 있으며, 인터넷 사이트에도 쉽게 볼 수 있다.
http://www.idomin.com/news/articleView.html?idxno=226855이다. 내용은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손덕겸 선생의 출생지로 알려진 의령군 신반 하막곡 마을에는 그의 묘소가 남아 있었다. 하지만 묘비명도 없다. 일가인 손정표(71·의령군 신반면) 씨가 그의 묘소임을 입증해 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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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령문화원장 등을 지내며 의령의 잊혀진 인물을 발굴하는 작업을 해오고 있는 허백영 의령향토사연구회 회장도 손덕겸 선생의 흔적이 거의 남아있지 않은 점을 안타까워했다.
"명창이 나기 어렵기로 유명한 시조 분야에서 전국적인 명성을 떨쳤던 손덕겸 선생의 고장에서 제자라고 자처하는 사람조차 만날 수 없었다"며 아쉬움을 전했다.
의령의 260개 마을을 3∼4번씩 돌아도 '손덕겸'의 이름과 명성을 아는 이가 없었을 정도로 실체가 희미하다.
고향을 지키며 선조의 묘를 지키고 있는 손정표 씨로부터 손덕겸 선생의 행적과 명성을 어느 정도 들을 수 있었다.
손덕겸 선생이 돌아가셨던 1916년에도 굉장했다고 전해진다. 진주권번에서 기생들이 흰 소복을 입고 의령까지 찾아와 상여를 메고 울었다.
이러한 신화 같은 일화가 전해져옴에도 불구하고 손덕겸 선생에 관한 어떠한 기록도 찾을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손덕겸의 '의령조' 행적은 그의 고향에서는 더욱 찾아보기 힘들었다.
위의 기록된 내용과 같이 ‘손덕겸’에 관하여 알려진 것은 일가인 손정표에 의하여 겨우 알아낸 묘비명도 없는 묘소와 그의 생몰연대 뿐 이다........
『영제시조의 맥과 계보를 찾아서』내용中..... 〈구입처 : 교보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