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의 역사 왜곡 > 수원 광교박물관 DOCENT 김 종 국 - 조선 제3대 통감이었다가 1910년 한일 합방으로 初代 總督이 된 규수지방 사쓰마番의 大將 출신 급진주의자인 데라우치 마사다케 (1852 - 1919)는 朝鮮人들에게 日本魂을 심어주어야 한다고 강조함. 그렇지 못해 조선인들의 민족적 반항심이 타오르면 큰 일 이므로 근본적인 사업이 필요하다며 朝鮮史 편찬의 필요성을 강조함 병탄전인 1906년부터 시작된 “朝鮮 舊慣 制度 조사 사업”할 때부터 역사 왜곡을 기획함 1910년 11월부터 14개월 동안 全國의 서점, 향교, 서원, 양반가의 書庫를 뒤져 단군조선 과 관련된 古文書 51種 20여萬 卷의 私書를 압수하여 불태웠다고 총독부 발행 官報에 기록되어 있고. 중요한 고문서 18,000점은 총독 데라우치의 개인 文庫에 보존하였다가 그의 사후 야마구찌 대학에 기증했음 그 후에도 문화, 예술, 인물에 관한 서적을 일본, 대마도, 중국, 만주에서 철저히 색출하여 일본에게 불리하게 기록한 책들은 모조리 없앰 - 1919년에 벌어진 三一 운동때 헌병을 내세워 철저하게 무력으로 진압 했던 武斷 통치 에서 방향을 회유책으로 文化 政治로 전환하고 이의 일환으로 조선의 역사 편찬 업무를 1922년 朝鮮史 편찬 위원회로 업무를 이관시킴. 이 때 관계된 “ 조선사 왜곡 3인방 ”은 東京 帝國大 교수 : 구로이타 가쓰미 滿洲史觀 대표자 : 이나마 이와키치 후일 京城帝大 조선사 강의 : 이마니시 류 (今西 龍) 인데 이 중 이마니시 류가 주동이고, 이 때 일본의 포섭으로 구색 맞추기로 참가한 朝鮮人 史學者 들은 이병도, 신석호, 최남선, 이능화 이었음 - 조선사 편수회는 16년 동안 무려 100萬 원(당시 쌀 1가마 10원)이라는 거액의 사업비를 투 자하여 1922년-1938년 까지 총 37卷 (24,000 쪽)의 朝鮮史를 편찬함. 그 내용은 85%가 李氏 朝鮮의 부끄러운 역사이고, 上古史는 오직 8% 뿐이나 이마저도 왜곡이 심함 - 이마나시 류는 “昔有桓國”을 “昔有桓因”으로 뜯어 고쳐 조선 상고사의 첫 나라인 환국을 한낱 환인이라는 전설의 사람으로 바꿔 환국의 존재를 부정함(수정한 글자 형태 명확함) 승려 一 然 이 삼국유사에서 “昔有桓國”을 “謂帝釋也”라고 주석을 달아 놓았는데 위제석야는 帝釋天桓因의 줄임 말로 Indra라는 印度 神雲을 일컫는 것인데 이 것을 승려 일연이 환국의 桓仁 天帝를, 佛敎의 神인 桓因과 동일시하는 착각에서 비롯됨 - 三國史記에 의하면 新羅의 건국 년도는 BC 57, 고구려 BC 37, 백제 BC 18년 인데 이를 인정하지 않고 고구려는 6대왕 태조(AD 165), 백제 8대 고이왕(AD 286), 신라 18대 내물 왕(AD 402) 때라고 주장함. 이는 삼국사기에 4-6세기 동안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던 “임나 일본부”의 기록이 없다는 이유로 삼국사기를 不信함 편수회의 쓰다 소기치는 중국 ”三國志 東夷傳“을 인용 ”韓半島 南部에 馬韓, 辰韓, 弁韓 에 78個 小國들이 있어 이들 힘없는 소국을 “任那 日本府”가 지배했다고 주장하기 위해 고구려, 백제, 신라의 건국 년도를 부정했는데 東夷傳은 陳壽가 2세기 때의 역사를 부정확한 사료를 바탕으로 기록한 것을 간과한 것 - 李丙燾 (노론의 대표적 가문의 하나인 牛峰 이씨의 후예로 이완용과는 23寸) 관련 인물 * 요시다 도고(吉田東五) : 일본이 조선을 강탈하기 전부터 植民史學을 준비한 대표적 인물 * 쓰다 소키치(律田左右吉) : 요시다의 후임. 쓰다의 강의듣고 지도받고, 역사 연구 훈련받음 * 이케우치 히로시(池內廣) : 쓰다의 소개로 만난 東京帝大 교수로 實證史學 지도 받음 * 1925년부터 조선 편수회에서 修史官補로 이마니시 류와 함께 高麗 이전 시기 담당. 우리나라는 漢四郡 이전은 미개 사회이었고 漢四郡이 우리나라에 철기문화를 전래하고 최초로 국가가 성립되었다고 주장 * 해방 후 이병도는 서울大에서 韓國史 가르치면서 이기백, 김철준, 변태섭등 2세대 양성. 2세대는 노태돈, 이기동같은 3세대를 3세대는 손호정(한국 교원대교수) 배출하며 식민사학을 이끌어 오고 있음
< 식민 사관을 가진 대표적 인물 > * 하야시 다이스께(林泰輔) : 東京帝大 사학과 출신. 1892년 임나일본부를 주장하면서 처음으로 식민사관 세움 * 이나바 이와가치(稻葉岩吉) : 1876 - 1940 , 조선사 편수회 간사, 만주 건국대학 교수로 漢四郡이 韓半島에 있었다는 說을 주장. 해방 후 이병도가 이를 계승. 식민사학의 주류 * 쓰다 소기치(律田左右吉) : 三國史記 初期 기록을 강하게 不信. 原三國을 강하게 주장함 해방 후 이병도, 김원룡등이 그의 원3국론을 “한일역사공동연구회”에서 계승함 조선은 漢江 이북은 漢나라 지배를 받았고, 이남은 임나일본부가 지배했다고 주장하고 (마한 54개, 진한 12개, 변한 12개의 小國을 원삼국으로 표기) * 아베 노부유키( 阿部信行) : 현 일본 수상인 “아베“ 의 할아버지로서 조선이 해방될 때 조선총독부의 총독이었음. 일본의 항복으로 조선을 떠나면서 “일본은 졌다. 그러나 조선이 승리한 것이 아니다. 朝鮮은 일본이 조선인에게 심은 식민사관의 노예가 되었 으므로 이를 치유하는데 100년 이상 걸릴 것이다. 그러므로 아베 노부유키는 다시 돌아 올 것이다“ 라는 끔직한 말을 했음 * 메이지 유신(1867년) 이후 서양 문물을 빨리 흡수하여 군사력을 강화한 일본이 일본을 중심으로 하는 대동아공영을 형성하여 서양의 제국주의 국가와 맞서겠다는 망상을 합리화 하기 위해 1882년에 일본 육군 참모 본부내에 조선 국사 편찬부를 만들어 조선 국사를 가르치고 征韓 목적에 편리하도록 자료 수집함 자료 수집 목적으로 만주에 파견된 육군 대위 사코 가게노부가 만주 집안에서 우연히 광개토대왕비를 발견하고 탁본을 떠 일본으로 가져가서 서기 4세기부터 6세기까지 일본이 가야에 임나일본부를 두어 지배했다는 전래의 주장을 합리화시키는 자료로 이용 함(그러나 이 것은 탁본할 때 글자 몇 개를 변조한 것으로 전체의 비문 내용과 상이한 것 으로 믿을 수없음) * 이토 히로부미가 1883년 총리가 된 후 일본 5개의 帝國 大學을 설립하고 1887년 사학과 를 설치하여 육군이 주도했던 사학 업무를 대학으로 이관시킴 당시 서양은 실증주의에 의한 역사를 추종하고 있었음. 당시 대표적인 실증주의 철학자인 “루드비흐”의 弟子 “리스”를 일본으로 초청. 2년간 대학에서 근무했던 “리스”교수는 일본 이 정치적 목적으로 역사를 날조하는 것을 보고 반대하며 國史學科를 다시 만듬
< 明治 維新에 크게 기여한 요시다 쇼인의 제자들 > * 1867년 本州의 조슈蕃, 九州의 사쓰마藩, 四國의 토사蕃 출신의 젊은 소장 무사들 이 중심이 되어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막부에 반대하는 쿠테타를 일으켜 막부를 뒤엎고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개혁 정치(명치유신)를 하기 시작한 것이 일본의 근대화를 앞 당긴 계기가 되었음. 이 개혁을 정신적으로 뒷받침 한 인물이 27세의 요시다 쇼인 임 * 요시다 쇼인 : 신주꾸 학교에 17-24歲의 청년 13명(이들 중 이등박문이 맨 막내)을 뽑아 2년 6개월 동안 주로 영어 교육이 아니라 日本魂을 가르치는 정신 교육을 시킴 이들 졸업생중 3명이 국무 총리, 6명이 장관 (4명은 메이지 혁명 때 죽음)으로 메이 지 유신 확립에 크게 기여함 교육의 목표는 조선을 정복해 식민지화해서 일본이 서양과의 무역으로 생기는 적자를 해결하고, 만주를 정복해서 이익을 취하고, 대만, 필립핀을 정복하여 大東亞 공영권 을 만들어 미국, 영국등의 서양의 제국주의 국가들과 어깨를 같이 하자는 것이었음 * 이토 히로부미 : 조슈번 출신의 쇼인의 대표적인 제자로서 영국에서 유학 후 일본의 헌법 과 국회의 양원제도 확립에 기여 한 정치가. 일본의 초대 총리를 지내고 조선 통감을 역임 한 후 일본이 조선을 병탐하는데 지대한 역할을 함. 1909년 11월 하얼빈에서 안중근 의사에게 저격 당해 사망함 * 이노우에 가오루 : 외무대신 * 이마가타 아리토모 대장 : 사쓰마 출신의 무장으로 일본군대 근대화에 공이 큼 이를 따르는 軍部의 계보는 * 가쓰라 다로 총리 大臣 (가쓰라, 테프트 밀약 당사자) * 데라우치 마사다케 大將(初代 조선 총독) * 하세가와 요시미치 大將(2대 조선 종독) < 중국과 일본의 합작품 漢四郡 위치 왜곡> - 고조선의 辰朝鮮이 大扶餘로 국호를 바꾼 후 BC 239년 스스로 문닫고, 番朝鮮은 중국에 서 망명 온 위만에게 BC 194년 탈취 되었지만, 고조선의 중심국가인 대부여의 국통은 중 국 燕나라의 침략을 물리치고 BC 239년 웅심산에서 건국한 해모수가 BC 232년 대부여 5가 귀족들의 추대로 북부여 1세 王으로 즉위하여 고조선의 대통을 이어 받았으므로 고조선의 역사는 계속되었음. - BC 108년 漢武帝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킨 후, 북부여마저 정복하려고 쳐들어 왔을 때 “고두막한“이 義兵를 일으켜 한나라 군대와 격돌해 이를 물리침 - 漢武帝가 내부 분열로 멸망한 위만조선의 右渠(우거)王을 폐하고 위만조선의 통치지역인 북경과 기까운 중국과의 경계였던 요동 지방과 요서 지방에 漢나라의 四郡을 설치함 - 그러나 일본의 대표적인 식민사학자인 쓰다 소기치는 임나 일본부를 계속 존속시키기 위해 (3세기) 지도에 낙랑은 평양, 대방은 황해도에 표시하고 馬韓은 54개의 小國, 辰韓은 12 개, 弁韓도 12개의 소국만 존재했기 때문에 任那日本府가 있을 수 있었다고 주장함 (이 것은 아마도 이마니시 류가 BC 195년 번조선의 제후국의 하나인 樂浪國의 최숭이 중국의 잦은 침략을 피해 막조선의 왕검성(현 평양)으로 옮겨 세운 樂浪國을 BC 108년 漢武帝가 요동에 세운 樂浪郡과 의도적으로 혼돈한 것이 아닌지 의심이 가는 대목 임) * 조선은 오래 전부터 한반도 북부는 중국의 지배를 받았고, 남부는 일본의 임나일본 부에 의해 지배를 받아 온 열등 국가라는 인식을 심어주어 일본에 의한 조선 병탐은 역사적으로 보아도 정당하다는 인식을 조선인들에게 심어주려고 역사 왜곡 했음 - 그러나 당사국인 중국의 역사적 사료에 의한 한사군의 위치는 아래와 같음 < 일본 과 중국이 말하는 漢四郡 위치 >
* 일본측 주장 - 낙랑 (Lelang) : 평양 * 이마니시 류는 낙랑군 수성현은 황해도 수안이다. 秦나라 때 萬里長城의 끝은 지금의 황해도 遂安의 경계에서 시작하는 것은.....이라는 것이 漢書地理誌에 의하여 의심할 것이 없다 라고 주장 - 임둔 (Lintun) : 강원도 - 현도 (Xantu) : 함경남도 - 진번 (Zhenfan): 쓰다 소키치는 평안북도, 이마니시 류는 황해도 라고 함 * 이마니시 류는 중국 갈석산에 있던 점제현 비를 끌로 쪼아 황해도로 가져와 땅에 묻었다가 우연히 발견된 것처럼 조작까지 했음
* 중국측 사서 - 漢書 列傳 師古曰 “樂浪屬 幽州” : 낙랑군은 유주(현재 북경)에 속해 있다. - 後漢書 光武帝紀 樂浪郡 古朝鮮國也 在遼東 : 낙랑군은 옛조선국 요동에 있다. - 후한서 : 낙랑군은 요동에 있다. - 史記 “夏本記 太康地理誌”에 樂浪遂城縣有碣石山-萬里長城起 라고 기록: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는데 여기가 만리장성의 기점이다. 중국의 모든 사료에서 漢四郡이 중국의 요동에 있다고 서술하고 있는데 반해 일본의 植民史學者들은 漢四郡이 한반도에 있었다는 증거로 아래 사항을 제시함 1. 평양에서 발굴된 고구려 때 것으로 추적돠는 유물들 중에 漢나라 때의 기와가 발견되었고 2. 평안남도 온천郡에서 점제현 碑(점제현은 漢武帝가 古朝鮮을 점령하고 그 영역 안에 설 치한 樂浪郡에 속한 25縣중의 하나인데 이 縣의 주민들이 풍년들기를 기원하여 호랑이 山 神에게 제사 지냈던 山神堂에 세운 비라는 기록이 있음)가 발견되었으므로 이 지역에 漢四郡이 존재했다고 주장함. 그러나 이는 후일 손보기 교수(옛날 평남 온천 군은 바다였다고 주장)와 북한의 김일성大 사회과학원의 돌 성분 조사에 의해 이 碑의 石 材가 이 지역에는 없는 돌로 판명되었음 이 것은 조선 편수회의 일본인 괴수 이마니시 류 가 중국 낙랑군 갈석산에 있던 비석을 정으로 쪼아 몰래 황해도 온천군으로 옮겨 묻어 놓았다가 우연히 발견된 것으로 조작했기 때문임 일본이 이렇게 역사를 왜곡하는 이유는 조선의 역사는 유구한 단군 조선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고 오래 전부터 한반도 북부는 중국의 한사군이 지배했었고 그 때부터 조선의 역사가 시작되었고, 남부는 일본의 임나부가 지배했었다고 역사를 왜곡하고 이를 조선인들에게 교육시킨 것 임 이는 조선인들의 민족적 자존심을 추락시키고 식민지배에 순응케하여 日帝의 식민지 경영을 정당화 하려고 했던 것이 목적이었다는 것을 역대 조선 총독들이 시달한 교육시책을 보면 알 수 있음 < 1925년 사이토 總督이 전국에 시달한 교육시책 > 손준희 교수 - 먼저 조선 사람들이 자신의 일, 역사, 전통을 알지 못하게 만들므로서 民族魂, 民族文化를 상실케 하고 - 그들 祖上의 무위, 무능과 惡行을 들추어 내 그 것을 과장해 후손들에게 가르치므로서 그 父祖를 무시하고 경시하는 감정을 일으키게 하고 - 그 결과로 조선의 청소년들이 自國의 人物과 史蹟에 대해 부정적인 지식을 얻게 함. - 그 때 日本文化, 人物을 소개하면 그 同化가 지대하므로 半 日本人으로 만들라. 이를 칙령으로 시행하게 함 - 50여종 20여 만 권을 압수하거나 불태우고 중요한 사료는 일본 황실 도서관 및 동경대 비밀문고로 이동시킴 - 그들은 단군은 신화라는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단군 조선에 관해서는 기록하지 않은 삼 국사기, 삼국유사(신화로 처리)는 남겨놓고 그 이전에 관한 책들은 모두 없앰 - 조선사 편수회를 통해 1925-1937년 12년간 100억원을 투입 (조선인: 이병도, 신석호) 함 이를 토대로 이병도가 “한국사 대관“을 지움---> 이것이 해방후 초,중,고 교과서로 사용됨 에 따라 식민사관의 역사 교육이 이루어 지게 됨 < 단군조선에 대한 한,중,일 3國의 역사인식 > - 한국학계 : 이병도, 이기백, 송호정은 단군은 신화이지 국가가 아니라고 부정 - 북한학계 : 단군조선 인정, 평양박물관에 단군 47대 이름 조각하고 교과서에 反映 - 중국학계 : 기자, 위만, 한4군은 중국의 속국(기자가 조선에 왔다는 기록은 없고 殷나라를 멸망시킨 周나라 文王이 기자를 조선의 왕으로 봉했다는 기록만 있음. 기자의 무덤이 중국 산동성에 있어 기자조선은 믿기 어려움) - 일본학계 : 단군은 신화이고 3세기 이후부터 國家 시작 * 1986년 식민사학자의 대표인 이병도박사 자택으로 당시 국사 찾기 협의회 회원으로 경주에 서 韓醫院을 경영하시던 분( ? )이 밤에 칼을 갖고 찾아 가 그동안 이병도가 주장한 우리나라 역사가 잘못된 것이므로 이를 시정하는 “우리민족의 참된 역사”를 밝히기를 요구 함. 이에 잘못을 인정하고 시정할 것을 약속하는 각서를 쓰고 1986년 10월 9일 조선일보 에 “단군은 신화가 아닌 우리의 國祖”라는 고백을 발표했음. 그 후 식민사학 후배들의 강력한 항의를 받으며 후속 조처를 취하는 중 1989년 9월 사망
< 韓國, 中國, 日本의 건국 년도 >
* 한국 : BC 7197 桓因이 桓國의 天帝로 추대 됨(환인 신화) BC 3898 桓雄이 配達國을 겅국(환웅 신화) BC 2333 檀君 王儉이 조선 건국 * 중국 : BC 3900 班固가 창세(신화) BC 2679 黃帝가 건국(신화) BC 2205 夏 나라 건국 (최초) * 일본 : BC 660 (1대 天皇) 神武가 건국(신화) 3세기 중엽 (伽倻係) 스진 왕조의 야마토 왕(?) (小지방국가) AD 673 백제 멸망후 天武(백제계)가 국호를 倭에서 日本으로 바꾸고 최초로 天皇제 도입하고 40대 천황으로 즉위 함
동 아시아 국가 중에서 일본의 건국 년도가 제일 늦으므로 이 콤플렉스를 없애기 위해 일본은 단군 조선의 역사는 부정하고 우리나라 건국이 3세기 이후부터 이고, 일본의 건국은 BC 660년 신무 천황부터라고 없었던 천황을 조작해 만들어 사실인양 역사를 왜곡함 또 서기 369년에는 日本이 가야에 任那 日本府를 두어 韓半島 남부를 200여 년 지배했었 다고 주장하나 이것은 크게 왜곡한 것 임 ((왜냐하면 日本이라는 國號를 쓰기 시작한 것은 백제, 고구려가 멸망한 후인 서기 673년 부터이므로 사실이 아님. 그 전까지는 倭(왜)라고 만 썻음)) - 이등박문(1841-1909)은 일본의 250여 藩(번)중 가장 강력하게 정한론을 주장하던 조슈번 출신 정치가로 1906년 初代 조선 총감으로 있을 때 조선 역사의 뿌리를 제거하라고 강력히 지시함 - 1919년 이후 사이토 총독은 조선인이 조상을 멸시하도록 역사를 만들라고 지시함 - 1916년 “조선 반도사 편찬위원회”가 1925년 “조선사 편수회”로 개칭되었지만 강제 수색과 압수를 통해 자료수집 - 1932 - 38 植民史觀에 바탕한 “조선사” 37冊 간행함 집필진은 일본인으로 구로이다 가쓰미, 이나마 이와가치, 이마나시 류(실무 총 책임자)이고 한국인은 이병도(촉탁), 김유정, 신석호등이었음 특히 이마니시 류는 실무 총 책임자로서 삼국유사에 기록된 桓國을 桓因으로 변조하여 환 인, 환웅, 단군을 묶어 1세대로 하여 조선의 7,000년 역사를 없앰. 이 것은 글자를 변조한 것이 증명됨. 또 馬韓은 54개 城邑, 弁韓은 12개 城邑, 辰韓은 12개의 城邑이 소규모로 존재했을 뿐이므로 조선국가 체계는 4세기부터 이후라고 역사 왜곡함. - 일본의 사학자 쓰다 소기치(1863 - 1961)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조선인 학자는 이병도(1896 - 1989)인데 해방 후 서울대 교수, 국사편찬위원회위원, 문교부 장관, 학술 원장을 역임함. 해방 후 우리나라 고대사학계를 이끌면서 우리나라 역사를 왜곡시킴 - 쓰다 소키치의 영향을 받은 또다른 조선인 신석호 또한 초대 국사 편찬위원장을 맡아 우리나라 역사를 왜곡시킴 < 한일 합방시 조선의 협력자 당파 분류> 총 76명 인데 이 중 작위를 받은 협력자는 64명임. 이들의 당파는 노론 56명, 소론 6명, 북인 2명, 남인 (0) 으로 黨首 이완용을 중심으로 하는 노론이 주도적 역할을 함 < 한일 양국의 문제점 > 유흥준 전 문화재청장 - 철기 문화로 무장한 중국 燕나라가 고조선을 공격하여 고조선이 서서히 멸망하기 시작할 무렵인 기원전 3세기 부터 많은 古朝鮮人이 일본으로 이주하기 시작함. - 그 후 기원 후 3세기까지 신라, 고구려, 백제인 들이 일본의 여러 지역으로 이주하여 지역별로 세력을 확보함 (백제계는 규수,나라 지방, 가야계 는 조슈번 지방등) - 특히 660년 백제가 나당 연합군에 멸망하고, 3년 후인 663년 8월 25일 백제에서 나당군 에 대항하여 부흥 운동을 전개하고 있던 부여“豊”을 왕으로 추대하고 치른 대규모 백강 전투(왜에 있던 백제의 分朝에서 배 80척에 27,000명을 지원했음)에서도 패전하자 많은 백제의 귀족들이 일본으로 도망가 그 지역 곳곳에 백제 산성을 쌓고 거주함 - 힘의 열세로 백제를 회생시킬 가능성이 없어지자 전쟁에서 패배하여 생긴 자존심 비하를 없애고, 本朝이었던 백제와의 관계를 절단하려고, 이주한 백제 귀족들이 중심이 되어 서기 670년 국호를 倭에서 日本(해가 뜨는 本朝라는 뜻, 本朝였던 백제가 없어졌으니까 자기들이 本朝가 됨을 의미)으로 바꾸고 그동안 종속관계에 있던 본국 백제와의 역사도 단절하기 위해 정권을 잡았던 백제계 (武內 가문)이 중심이 되어 712년 古史記, 720년에 日本書記를 집필함. - 日本은 고대에는 백제의 분조 국가였고 조선으로부터 문화, 문자, 제도 등 각종 선진 문물 을 전래받았기 때문에 韓國에 대한 古代 Complex가 있고 朝鮮은 근대 서양의 문물을 일본보다 늦게 받아들여 개화가 늦어 36년 간 일제의 지배를 받은 아픈 역사가 있어 日本에 대한 近代 Complex가 있는 것이 사실이므로 韓日 양국은 조속히 서로를 인정하고 이런 분위기에서 벗어나 양국의 善隣 관계를 유지 하게 할 수 있는 凡國民적인 措處를 취해 동아시아의 평화 유지에 기여해야 할 것임 - 일본의 간단한 고대 역사 - 1. 고분(古墳)시대 : AD 300 - 600 철기시대로 前方後圓墳 (인덕왕릉 400*500m)시대 2. 아스카(飛鳥)시대 : 550 -710 불교가 들어오고 律令이 제정된 국가로 발전 3. 나라 (奈良)시대 : 710 -794 고대국가의 완성, 天皇중신의 中央集權制 (일본국력이 한국보다 앞섰다고 믿음) 4. 헤이안(平安)시대 : 794 - 1185 武人 세력 < 일본은 왜 역사를 왜곡하나 > YTN TV - 일본은 오래 전부터 韓半島 北部는 漢四郡이, 그리고 南部는 倭의 야마다 정권이 AD 369부터 562년 약 200년 동안 백제, 신라, 가야를 직접 지배했다고 주장함 이는 百濟는 자체 역사서가 없고, 三國史記는 신라위주로 쓰인 흔적이 너무 뚜렷하고 日本書記는 천황 정권 위주로 왜곡되어 있어 이 3자를 잘 조합하면 그 당시 일본의 야마 토 정권이 우위에 있는 것처럼 조작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아래 이유로 주장함 첫째 일본서기에 의하면 신공왕후가 보낸 왜군이 369년 한반도에 건너와 7國 과 4邑(상 다리, 사타, 모두, 하다리)을 200년 간 점령했다고 함( 확인 안 된 기록) 둘째 고구려 광개토 대왕 비에서 辛卯년(광개토 대왕 1년)에 倭 가 바다를 건너와 백제, OO, 신라를 臣民으로 삼았다고 해석하는 것을 들 수 있다. (이는 단순히 백제가 왜 를 끌어들여 고구려와 싸웠다는 碑 전체의 내용을 왜곡한 것임) 셋째 영산강 나주 지역의 반남 고분에서 일본 야마토 시대에 있었던 대형 옹기가 발견 되었고(부장 유물들이 왜의 것들이 많아야 정상인데 유물들이 모두 백제 것들이었음) 넷째 영산강 지역의 5세기경 무덤이 일본 양식의 前方 後圓을 닮았다( 그러나 무덤에서 유물들은 모두 百濟係의 것 들이었음)
오히려 백제 25대 무령왕( 501 - 523 재위 )이 일본 오호도 王子(507 - 531)에게 보내준 “人物畵像鏡”이 일본의 국보가 되고, 백제와 일본의 환곡제도가 비슷하다는 木簡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오히려 일본이 백제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음 오랫동안의 연구를 통해 임나 일본부를 주장할만한 증거를 찾아내지 못해 2010년 韓日歷史學者들은 “ 임나 일본부는 없었다” 라고 合意했음. 그러나 국내 일부 식민 사관을 갖은 사학자들은 이 합의가 “임나 일본부의 폐기”가 아니라 일본부라는 용어의 폐기일 뿐이라고 인식하고 있음. 일본에서 임나일본부의 성격에 대해서는 임나 지배설이 퇴조하고 백제나 가야와의 外交나 交易을 중시하는 설로 바뀌었으며 그 용어도 사실에 가까운 倭使臣館으로 대체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것이 결론이라고 변명하고 있음. 펌 : http://cafe.daum.net/54choongang/aCVT/58?q=%EC%9D%BC%EB%B3%B8%EC%9D%98%20%EC%A1%B0%EC%84%A0%20%EC%97%AD%EC%82%AC%20%EC%99%9C%EA%B3%A1%20%EA%B5%90%EC%88%9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