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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부흥운동의 주류성은 존재하였을까?
서천,부안,홍성,연기, 심지어 대륙에 까지....
주류성이라 주장하는 어느곳도 확실한 유물이 나오지 않아 애만태우고, 삼년동안 싸우다 죽어간 백제부흥군의 원혼이 잠든 주류성을 찾아나서지만,,,,,,
백제는 동,서,남,북,중방성의 5방성을 중심으로 통치하였고, 부흥운동은 서방성의 임존성에서 시작되어 마지막 항전도 임존성에서 끝을 맺는다. 고문서에도 부흥운동은 강 서쪽에서 시작되었다 기록하였고, 당나라군도 지척의 부흥군이 두려워 주둔지를 방어에 유리한 웅진성으로 옮긴것으로도 부흥운동은 사비성과 가까운 거리에 있었씀을 알 수 있다.
백제부흥군을 진압하던 신라군의 진격로와 격전지를 보면, 처음 신라군은 고립된 당군과의 연결을 위하여 웅진성 동쪽에서 격렬한 전투를 벌이게 되고, 신라군이 승리하여 웅진의 당군에 군수물자를 공급하면서 부흥군이 밀리게 된다.
신라군이 웅진성 동쪽 전투에서 승리하고 부흥군의 본거지 주류성으로 진격하면서, 두릉윤성과 주류성을 함락시킨 후에 임존성을 공격하는 진압하는 과정을 기록하였다. 신라군은 웅진에 도착 당군과 수륙으로 나누어 출병하면서 가림성 공격을 주장하지만 유인궤는 병법을 논하며 허약한 주류성 공격을 결정한다. 웅진에서 백강으로 나아가 수륙군이 합세하여 주류성으로 진격한 기록을 보면 주류성은 금강 서북방향에 있어야 한다.
고문서의 기록을 보면, 부흥군의 전투는 동방성, 서방성의 전투가 대부분 이고, 주류성 또한 서방성의 홍주목 산악지역 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주류성이라는 특정 산성을 찾다보니 미궁으로 빠지게 된다.........
차령산맥 끝자락, 칠갑산 만수산 성주산 등이 있는 험준한 산악지역에 부흥군은 새로운 왕도를 만들어 유민을 보호하고 지원군을 훈련시켜 외곽 백제성에 보내어 항전 한 것이 백제부흥운동이다.
부흥군의 내분으로 인한 복신의 죽음, 부흥군(흑치상지)이 투항하면서 주류성의 실체(위치)가 드러나게 되고, 나 당군은 산악지역 주류성으로 진격한다. 산악지역 외곽의 백제성이 무너지면서 주류성은 와해 된 것이고, 나 당군은 부흥군의 본거지에 무혈입성하여 단지 몰려든 백제유민을 해산시키면서 주류성은 역사에서 소멸된다.
周留城은 새로운 왕성으로 부흥군과 유민들이 산악지역의 넓은 공간/둘레(周)에 머무른(留) 지역(城)을 표현한 것이지 어떤 실체가 있는 석성산성이 아니다.
백제부흥운동 관련 고문서에 기록된 내용들을 보면 아래와 같다.
백제부흥군이 주둔지를 주류성으로 이동하는 과정을 기록한 것이다.
〈仍圖反逆 卽有僞僧道琛 僞杆率 鬼室福信 出自閭巷 僞其魁首 招集狂狡 保據任存 峰屯謂起 彌山滿谷 假名盜位 單軍 &579;城坡邑 漸入中部 >- 당유인원기공비
<거듭 반역을 도모하였으니, 즉 가짜 승려 도침과 가짜 간솔 귀실복신이 있어 스스로 민중에서 나와 거짓으로 그 괴수가 되어서는 미친듯이 날뛰는 자들을 불러 모아 임존에 보를 쌓고 웅거하니 벌떼처럼 진을 치고 고슴도치처럼 일어나서 마침내 산곡에 가득하였다. 이름을 빌리고 품위를 훔쳐 단마로 군사를 지휘하여 성을 깨뜨리고 고을을 공파하여 점차 중부로 들어갔다.>
부흥군이 세력을 확장하여 임존성에서 중부(주류성)로 들어갔다는 기록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우금산성을 주류성으로 보는 사람들은 이 부분을 지적하며 임존성에서 백제 중부(중방) 지역 인 부안으로 부흥군이 이동한 것으로 해석하지만 틀린 해석이다. 부흥군의 지지기반은 백제 서북부 백성들이고 풍달군에서 세력을 규합하자 몰려든 수만명의 지원군 유민들 때문에 풍달군 임존산성에서 더이상 머무르기 힘들게 되자 가까운 산악지역의 넓은 공간을 찾아들어간 것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신라군은 부흥군을 진압하기 위해 출병하지만 부흥군에게 패하여 더는 출병하지 못하였다는 부분이다.
<羅>王<春秋>奉詔, 遣其將<金欽>, 將兵救<仁軌>等 至<古泗>, <福信>邀擊, 敗之. <欽>自<葛嶺道>遁還, <新羅>不敢復出. 尋而<福信>殺<道琛>
<김흠이 갈령의 길에서 숨어 돌아가니, 신라는 감히 다시 출병하지 못했다.>
처음 직역 "갈령의 길에서 숨어 돌아갔다"는 해석은 갈령도를 통하여 도망한 것으로 사학계는 갈령도에서 나와 신라 진영으로 되돌아온 것으로 해석한다.
고문서의 갈령도를 노령산맥(내장산 갈재)으로 보고 가까운 부안 우금산성을 주류성으로 주장한다. 그런데 노령산맥 넘어도 순창 장수 남원 거창 까지도 당시 백제 진영 인데, 갈령도를 빠져나와도 안전한 신라 땅까지는 너무 먼 거리여서 갈령도가 다른 곳이 아닐까 의구심도 든다.
일본서기 백제본기 부흥운동 관련 내용이다.
부흥군은 산악지역 주류성에서 피성으로 이전하였는데 일본서기에 아래와 같이 기록하였다.
<<겨울 12월 丙戌 초하루 百濟王 豊璋, 그 신하 佐平 福信 등은 狹井連(이름은 빠져 있다), 朴市田來津과 의논하기를 이 州柔는 농토와 멀리 떨어져 있고 토지가 척박하여 농업과 양잠에 적합하지 않은 땅이고, 이곳은 방어하기 좋아 싸울 만한 곳이다. 여기에서 오래 머문다면 백성들이 굶주릴 것이니 이제 避城으로 옮기는 것이 좋겠다. 避城은 서북쪽으로는 띠를 두르듯 古連旦涇 이 흐르고 동남쪽으로는 깊은 수렁과 커다란 둑으로 된 제방이 자리하고 있으며, 땅으로 둘러싸여 있고 도랑을 터트리면 물이 쏟아진다. 꽃과 열매가 있는 나무에서 얻는 토산물은 三韓에서 가장 기름질 것이며, 옷과 음식의 근원은 천지 사이에 숨어 있는 곳일 것이다. 비록 낮은 땅 이라고 하지만 어찌 옮기지 않겠는가? 라고 하였다. 이에 朴市田來津이 혼자 나아가 避城과 적이 있는 곳과의 거리는 하룻밤이면 갈 수 있습니다. 서로 이렇게 매우 가까우니 만약 예기하지 못한 일이 있게 되면 후회해도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굶는 것은 나중의 일이고 망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지금 적이 함부로 오지 않는 것은 州柔가 산이 험한 곳에 있어 모두 방어물이 되며, 산이 높고 계곡이 좁아 지키기 쉽고 공격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만약 낮은 땅에 머물면 어찌 굳건히 살겠으며 흔들리지 않음이 오늘날에 미치겠습니까? 라고 간하였다. 끝내 간하는 말을 따르지 않고 避城에 도읍하였다.>>
몰려든 유민 지원군으로 험준한 산악지역의 부흥군은 식량난에 부디치게 되고, 피성으로 이전하는 논쟁에서 주류성과 피성의 지리적 군사적 특별함을 기록하였다. 백성들의 굶주림을 걱정하는 기록은 부흥군 무리중에 백성들이 함께 머물렀씀을 알 수있다. 즉, 주류성은 몇만명이 머무른 상상하기 힘든 넓은 공간이다.
주류성은 특정 산성이 아닌 산악지역의 넓은 공간 이고, 험한 지형을 이용한 방어 구조로 예상된다.
주류성은 토질이 척박하여 농잠하기 어렵다는 기록은 피난해 온 백제유민들이 생계를 위한 농사할 땅이 있다는 이야기다. 부흥군 지도층은 피난 백성을 보호하고 지원군을 훈련시켜 부흥군을 보충하기 위한 안전하고 넓은 공간이 필요하여 난공불락인 임존성을 떠나 새로운 수도를 급조하여 만든 것이 주류성이다. 고산자 김정호는 주류성의 이러한 특징 때문에 그의 대동지지에 "홍주목본주류성"이라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주류성이 산이 험한곳에 있어 모두 방어물이 되며, 산이 높고 계곡이 좁아 지키기 쉽고 공격하기 어렵다"는 내용으로도 주류성이 산악지역의 산세를 이용한 좁은 계곡에 목책으로 만들어진 산성임을 추측할 수 있다. 부안 우금산성은 서쪽방면 만이 산악지형 일뿐, 나 당군이 공격해 오는 동쪽은 야산 평지에 불과하고 몇만명이 머물며 농사할 넓은 공간이 없다.
<<2년 봄 2월 乙酉 초하루 丙戌 百濟가 達率 金受 등을 보내 調를 바쳤다. 新羅인이 백제의 남쪽 경계에 있는 4州를 불태우고, 아울러 安德 등의 중요 지역을 빼앗았다. 이에 避城이 적과 거리가 가까웠으므로 형세가 머물 수 없어어 州柔에 돌아와 살았으니, 田來津이 헤아린 바와 같았다.>>
일본서기 부흥군이 피성에서 다시 주류성으로 되돌아온 기록이다. 신라군이 득안성(논산) 등백제남방 4주를 평정하고 주요지역을 점령하자 부흥군은 주류성으로 되돌아왔다. 득안성 함락으로 피성(김제성산)이 적군과 가까워져서 주류성으로 되돌아왔다'는 것은 틀린 해석이다. 득안성이 함락되기 이전의 적군은 사비성 뿐으로 하룻밤의 지척지간 기록을 설명할 수 없다.
피성은 처음부터 적군과 하룻밤 사이의 지척지간 이고, 백제남방이 평정되는 등, 나 당군의 공세가 강화되었씀을 감지하고 방어에 유리한 산악지역으로 되돌아갔다는 기록이다.
박성흥은 신라군이 점령한 사평성을 당진 신평(백제시대 사평현)으로 비정하고 피성(당진 면천)과 너무 가까워 주류성으로 돌아갔다고 주장하였지만, 사평성은 고문서 기록대로 백제의 남쪽지역으로 보인다. 신평과 면천은 너무 가까워 사평성 함락후 수 많은 백성을 데리고 주류성으로 돌아가기에는 늦고, 신라군의 추격을 뿌리칠 수 없다.
부흥군은 식량문제로 주류성에서 피성으로 이전하였는데, 우금산성에서 가까운 고부지역이 백제 중방성 이었다면, 굳이 더 훌륭한 백제 지방수도를 버리고 아무런 방어대책이 없는 김제 성산을 택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행위이다. 농지 때문이었다 해도 두 지역 사이 고부, 태인, 김제의 옥토 또한 이전해도 그 땅이 그 땅, 방어에 유리한 요새지역을 버리고 평지로 이전할 이유도 없다.
김제는 고문서에 기록된 피성의 어떠한 내용도 설명하지 못하고 단지 삼국사기 지리지에 의하면, ‘古四州는 본래 古沙夫里로 5현이 있는데,…辟城縣(벽성현)은 본래 辟骨(벽골)이다.(삼국사기 권37 잡지 6 지리4 백제)’라고 하여, 일본서기에 수록된 避城(피성)은 ‘辟城’의 오기 라는 추측으로 설명하고 있다. 더구나 토질이 척박하다는 주류성의 여러 기록들 또한 우금산성이 설명하지 못한다면, 피성의 김제성산 설 또한 재고 되어야 한다.
김제 성산의 피성 발굴조사를 시작하면서 지금까지 어떠한 조사도 이루어지지 않았고 추정할뿐 이라는 글도 있었다.
부흥군의 주류성을 진압하기 위한 출병부터 백강해전에서 왜수군을 섬멸하는 부흥운동의 종말을 기록한 삼국사기 백제본기 내용이다.
<<或曰: "<加林城>水陸之衝, 合先擊之." <仁軌>曰: "兵法 '避實擊虛.'<加林> 而固, 攻則傷士, 守則曠日. <周留城>, <百濟>巢穴, 群聚焉, 若克之, 諸城自下." 於是, <仁師>·<仁願>及<羅>王<金法敏>, 帥陸軍進, <劉仁軌>及別帥<杜爽>·<扶餘隆>, 帥水軍及粮船, 自<熊津江>往<白江>, 以會陸軍, 同 <周留城>. 遇<倭>人<白江>口, 四戰皆克, 焚其舟四百, 煙炎灼天, 海水爲丹. 王<扶餘 >脫身而走, 不知所在, 或云奔<高句麗>,
<<어떤 자가 "가림성이 수륙의 요충이므로 먼저 쳐버려야 한다"고 말하니, 인궤가 대답하길, "병법에는 강한 곳을 피하고 약한 곳을 공격해야 한다"하였다. 가림성은 험하고 튼튼하므로 공격하면 군사들이 상할 것이요, 밖에서 지키자면 날짜가 오래 걸릴 것이다. 주류성은 백제의 소굴로서 무리들이 모여있으니, 만일 이곳을 쳐서 이기게 되면 여러 성은 저절로 항복할 것이다. 이에 인사, 인원과 신라왕 김법민은 육군을 거느리고 나아가고, 유인궤와 별수 두상과 부여융은 수군과 군량 실은 배를 거느리고 웅진강으로부터 백강으로 가서 육군과 합세하여 주류성으로 갔다. 백강어귀에서 왜국 군사를 만나 네 번 싸워서 모두 이기고, 그들의 배 4백척을 불사르니 연기와 불꽃이 하늘로 오르고 바닷물도 붉은 빛을 띄웠다. 이 때 왕 부여풍은 탈출하여 도주하였으므로 거처를 알지못하게 되었는데 어떤 사람은 고구려로 달아났다고 말하기도 한다. 당나라 군사들이 그의 보검을 노획하였다.>> (구당서 유인궤열전)
나 당군이 백강에서 합세하여 주류성으로 갔다 하고, 백강어귀에서 왜군을 만나 네 번 싸워 모두 이기고 4백척을 불사르었다고 기록을 보면 백강 과 백강어귀는 서로 다른 장소 여야 한다.
백강은 사비성 부근의 금강 이고, 백촌강, 백강구는 강과 바다가 접하는 강의 하구를 가리키는 것으로 금강하구, 동진강하구, 아산만 중에 어느 한 곳이다. 그런데 금강하구 주변에는 주류성 피성으로 주장할 장소가 존재하지 않아 백강해전의 장소로 볼수없다.
웅진에서 수륙으로 출발한 진압군대가 백강에서 합세하여 주류성으로 진군한 것으로 기록하였고, 동시에 백강어귀에서 왜병과 만나 싸워이기고 왜수군을 모두 불태우고 섬멸한 것으로 기록하였다. 육지와 바다에서 동시에 전투가 벌어진 듯하다.
웅진에서 출발한 나당군은 백강에서 합류하여 가림성을 우회하여 주류성으로 진군하였는데, 백촌강에서 싸운 당수군은 어떤 병력 인지 의문이다. 이러한 의문 때문에 백강을 동진강으로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지만 부안 우금산성을 주류성으로 주장하기 위한 억측이다.
백강해전이 안전한 장소에 정박하던 당수군 이라면 가능성이 높은 곳이 아산만이다.
백강 과 백촌강이 다른 장소 라면 가능성은 더욱 높아진다. 웅진강 어디에도 그 많은 배를 정박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주류성은 험준한 산악지형에 있었고, 금강과 가까우며, 하룻밤에도 사비성 공격이 가능한 곳에 있었을 것이다" 라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무량사 입구 오른쪽 야산자락, 검은돌들로 가득한 모습이다.
사비성 금강 서쪽 부여군 은산면 지역을 조사하여 보면 부흥군이 마지막 한 사람 까지 장렬하게 싸우다 전사한 기록들이 많으며, 이 지역은 바로 홍주목에 해당하고 부흥군의 최전방 이자 최후의 지역으로, 이 지역이 무너지면 바로 부흥군의 중심지인 산악지역으로 더이상 물러날 곳이 없어 부흥군이 전멸당하며 항전한 것으로 보인다.
지금도 이 지역에 남아있는 "은산별신굿제"는 싸우다 죽어간 부흥군의 원혼을 위로하던 풍습이 전해 내려온 것이라 한다.
주류성이 남쪽 부안에 있었다면 왜 이렇게 후퇴하지 않고 싸웠을까?
임존성에서 가까운 부여군 외산면의 험준한 산악지역, 이곳은 홍주목 이고 박성흥선생이 주류성 이라 주장하는 장곡산성도 홍주목주류성의 관점으로 보면 산악지역 외곽의 백제산성 이다.
장곡~학산산성을 당시 풍달군의 치소로 비정 하기도 한다. 풍달군장 흑지상지로 기록되어 부흥운동의 시작이 된 "풍달군"은 역사서 어디에도 흔적없이 사라지고 "임존성" 만이 등장한다. 풍달군은 부흥군의 주요 항쟁 지역으로 임존산 대책 소책 공격시 초토화 되었고, 마지막 임존산성의 부흥군을 섬멸한 후에 "풍달군"을 "성"으로 격하시켜 "임존성"으로 변경 통치하여 풍달군이 역사에서 사라진 것으로 주장한다.(성부제 설)
부흥운동은 위 산악지역에서 시작하여 외곽의 백제산성으로 세력을 확장하여 사비성의 당나라 군대와 대치하였고, 부흥운동이 백제유민으로 부터 호응을 얻으면서 불어나는 유민 지원군으로 산악지역에서의 항쟁은 식량난에 부디치고 피성으로 이전한다. 피성을 지금의 가야산(박성흥=면천) 내포지역으로 보면, 당시 평택 아산만은 신라 지역이고, 적군과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다는 피성의 설명과 일치한다.
당수군도 안전한 상륙을 위하여 아산만 지역으로 상륙 정박하였을 가능성 또한 커서 백촌강이 아산만 일 가능성이 높다.
부흥군이 왕성하여 사비 웅진성에 고립될 당시 당나라군이 타고 돌아갈 수백척의 배를 안전하게 정박할 곳이 어디일까....?
당군의 백제상륙을 1차 소정방, 2차 손인사 상륙으로 구분하면, 1차 상륙과 2차 상륙지점은 서로 다를수도 있다.
1차 소정방의 상륙은 기습공격으로 빠르게 사비성으로 진격하는 것이 주목적 이었고, 2차 손인사의 상륙은 부흥군에 패하여 사비 웅진성에 고립된 당군을 구원하기 위한 상륙으로 안전한 신라지역으로 상륙하여 신라군과 함께 부흥군을 공격하며 웅진 사비성에 이르렀을 가능성이 크다.
웅진성에 머무르던 유인궤가 사비성에 고립된 유인원을 구원하는 과정에서 신라군과 함께 웅진강어귀의 부흥군을 격파하고 사비성에 입성한다. 그 웅진강어귀는 어디일까?
소정방의 군사가 사비성으로 진격해 오자 의자왕은 웅진강어귀에서 소정방의 군사를 방어하지만 패한다. 두 사건의 기록은 똑같이 사비성으로 향하는 사건에서 웅진강어귀로 기록하였다. 웅진성에서 사비성으로 향하는 어느지점에 웅진강어귀가 있었다면 소정방의 상륙지점 또한 금강하구가 아닌 아산만으로 추측할 수도 있다.
2차 손인사의 구원 파병은 나 당군의 고구려 정복 실패 이후 부흥군의 공세에 당군이 고립되자, 당고종은 유인궤에게 백제에 머물지 말고 신라로 피하던지 본국으로 철군하라 할 만큼 부흥군이 위협하던 상황이다. 유인궤가 백제에 남아 있겠다고 하자 손인사를 보내어 당군을 구원토록 한 것인데 부흥군의 품안으로 상륙 정박하였을까...?
필연적으로 손인사의 당수군은 안전한 신라지역 아산만에 상륙 정박하였고, 부흥군을 지원하러 온 왜수군은 당수군을 궤멸시켜 당나라 와의 연락을 차단하고, 나 당군과 장기전으로 백제부흥군을 지원하려는 계획으로 백강해전이 발생되었다면 백강해전은 아산만으로 보인다. 그런데 왜수군은 부흥군을 지원하려는 병사와 군수품을 가득 싣고 왔을텐데 상륙시키지 않고 전투가 가능할지 의문이다.
백강, 백촌강(백강구)을 서로 다른 지명으로 보면 가능성이 높다. 당서, 구당서, 일본서기 기록들은 후대에 백제 지리에 어두운 사가들에 의해 전해들은 3년간의 전투내용을 함축 기록한 것이기에 많은부분 오기하였을 가능성 또한 충분하다.
전 문화재청장 유홍준교수의 주말쉼터가 있는 부여 외산면 반교리 마을 돌담은 주변 텃밭에서 나온 돌들로 만들어진 것이고, 반교리는 흙반 돌반 일정도로 돌이 많은 곳이다. 반교리는 부여군 외산면으로 무량사와 아주 가까운 곳이고, 무량사 주변의 산자락은 온통 돌들로 가득하다..
산자락에 돌들로 가득하다면 평지에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결론적으로,
주류성이 험준한 산악지형에 있었고, 금강과 가까우며, 하룻밤에도 사비성 공격이 가능한 임존성과도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면, 김정호가 "주류성은 홍주목이다" 기록한 내용이 사실임을 증명하고, 그곳은 특정 산성이 아니라 홍주목 산악지역과 외곽의 백제산성을 포함하는 부흥군의 주요 활동지역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된다.
주류성 찾아서~~
첫댓글 부흥운동을 공부하면서 임존성 연구에 심혈을 기울이신 성부제 선생님의 글이 가장 사실에 가까운 연구로 관심을 끌었다.
흑지상지는 풍달군장이다. 그런데 역사기록 어디에도 풍달군은 사라지고 임존성만 존재한다.
백제는 "5방 37군 200성(현)" 행정조직으로 통치되었다. 성부제 선생은 부흥운동 초기 등장하다 사라진 풍달군을 임존성으로 주장한다.
행정조직 "임존성" 과 성곽 "임존성"을 동일시 하여 혼란을 불러왔다는 것이다.
누구도 발견하지 못한 중요한 내용이다.
부흥운동 초기 나당군은 임존산 대책 소책 공격시 소책만을 함락하고, 대책 진압에 실패하고 철수하게 된다.
임존산의 부흥군은 성벽을 강화하고 옛 풍달군의 백성들을 중심으로 백제 서북부를 부흥군의 세력으로 확장시켜 나당군과 대치한다.
부흥운동이 확대되고 부흥군에 참여하는 지원군과 유민들이 모여들면서 임존산의 부흥군은 보다 넓고 안전한 공간으로 이동하게 된다.
부흥군이 지원군 유민을 이끌고 들어간 홍주목 공주목의 산악지역 넓은 공간이 주류성이다.
나당군은 부흥군을 평정하고 옛 풍달군 지역을 임존성(영현)으로 통치 기록하여 임존성(영현)과 임존성(산성)의 분별이 혼재하였다는 주장이다.
"州柔는 농토와 멀리 떨어져 있고 토지가 척박하여 농업과 양잠에 적합하지 않은 땅이고, 이곳은 방어하기 좋아 싸울 만한 곳이다."
일본서기에 주류성을 州柔로 기록하였을까?
아마도 주류성이 형태화 된 산성의 모습이 아닌 산악지역의 넓은 지형으로 된 특징 때문에 <고을 州>로 기록한것으로 보인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내포지방은 땅이 기름지고 평평하며 생선과 소금이 매우 흔하므로 부자가 많고 여러 대를 이어 사는 사대부 집이 많다.
피성을 설명한 것과 비슷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