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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대군악대의 역사
아래의 "해병대군악대 60년사" 책자는 해병대군악대가 창설된 1951년으로 부터 환갑(60주년)이 되는 2011년을 기념하기 위해
군악대 출신 예비역의 모임인 "해병대군악동우회"에서 해병대군악대 창설 60주년기념 행사를 준비하게 되면서 해병대사령부 정훈공보실의 도움으로 발간하게 되었습니다.
병118기(군악5기-1961년6월 입대)인 본 카페지기 서봉석이 평소 이 카페에 정리해 놓았던 것을 중심으로 각 기수의 선후배 회원들에게 직접 대면 또는 전화 등으로 각자 근무당시의 상황을 청취해 가면서 정리한 것입니다. 군악대 선후배 여러분들께서 기꺼이 응답해 주셨고 특히 옛날의 앨범에서 찾아내어 필자에게 사진을 보내주시고 또 이미 작고하신 분들의 자제분들께서도 사진을 앨범채로 보내주시기도 하는 등 진심으로 도와주셔서 비교적 실감나게 역사책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이 모든 내용을 팩트에 의해서 구성하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1973년에 해병대사령부가 해체되어 군 자료가 해군으로 이관된
관계로 군악대 관련 기록을 전혀 찾을 수가 없었고 해병대자료는 모두 해군 자료실에 보관되어 있는 실정이어서 모든 것을 개인의 기억에 의존하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해병대 부대 관련 역사적인 자료는 해병대사령부 홈페이지에서 인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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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대군악대 60년사
인 쇄 : 2011.09.26.
발 행: 2011.09.30.
저 자: 서봉석 (해병대군악대 병118기-1961년입대)
발행자: 해병대사령부 정훈공보실
인쇄처: 국군인쇄창 (11087644)
※ 본 책에 정리된 역사 내용은 예비역의 증언을 기초로 작성하였습니다. 해병대사령부 정훈공보실 감수를 거쳤으나 저자 또는
증언자의 개인적인 의견이 반영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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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대군악대 60년사
(1951~2011)
해병대사령관 발간사
군악대 예비역 축사
저자의 글
1부 해병대군악대 창설과 발전기 (1951~1973)
1. 해병대군악대 창설
2. 해병대군악대 고급 부사관 전환 입대
3. 초창기 군악대와 의장대 활동
4. 군악대원 모집과 군악교육
5. 부대별 군악대와 한국 최초의 고적대 창설
6. 군악대 초기 주요 인물
7. 해병대사령부 해체와 군악대
2부 해병대군악대 시련과 도약 (1973~1987)
1. 사령부 해체와 제1사단 군악대
2. 제1사단 군악대 모병 및 군악교육
3. 제2사단 군악대 창설과 고적대 해체
3부 해병대군악대 재창설과 부흥 (1987~ 2011 현재)
1. 사령부군악대 재창설과 재창설 기념일
2. 군악대 기반 구축을 위한 노력
3. 군악대 연주 수준 향상을 위한 노력
4. 2011년 해병대군악대 주요 활동
5. 재창설과 부흥기 주요 인물
4부 해병대군악동우회 - 메뉴의 해병대군악동우회 로 옮김
1. 군악동우회 결성 (1968년)
2. 군악동우회 재결성 (1988년)
3. 군악동우회 첫번째 큰 만남, 우이동잔치
4. 1995년 이후 동우회를 이끌어 온 회장단과 사무실 이전
5. 부활총회와 군악동우회 활성화 운동
6. 사령부군악대 재창설과 군악동우회
7. 해병대 최초 군가 "나가자 해병대" 악보
8. 군악동우회의 대부 배봉환
9. 군악대 창설 60주년 기념사업
5부 60년, 해병대군악대 새로운 도약을 기대하며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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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해병대군악대 창설과 발전기
1. 해병대군악대 창설 (창설기 복기호의 기술에 기초하여 재정리)
1949년 4월15일 380명의 적은 병력으로 진해 덕산비행장에서 창설된 대한민국 해병대는 최초 해군의 단위부대로 시작하였지만
6.25전쟁을 거치면서 국민적 지지와 신뢰를 얻어 보다 독립된, 강력한 군대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이즈음 해병대에서는 해군과 별도의 군악대가 해병대에도 편성되어야 한다는 군악대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후 1951년4월1
일 해병대사령부참모장 김대식대령(후에 제3대 사령관)이 과거 만군(滿軍)시절 군악대 근무경력이 있는 이관승병조장(상사-해군
군악대)에게 군악대 창설 준비를 지시하였다. 이관승은 마침 당시 해체된 국민방위군13단(경남부산지구)군악대원 16명을 선발하
고 동년 5월8일 해병대하사관교육대(진해도천초등학교 사용)에 가입대 시켰다.
※ 국민방위군이란 6.25남침 직후인 1951년12월말 국민방위군설치법에 따라 제2국민병역 해당자인 만 17세 이상 40세 미만의
장정으로 조직된 군대로 6.25전쟁때 정부는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가 불리해지자 이를 타개하기 위해 약68만명의 장정을
51개 교육연대로 편성하여 분산수용하였다. 갑작스런 북한의 6.25남침으로 인하여 남한의 젊은이들을 많이 희생시켰고 군
징집도 어려움을 당하자 1951년 1.4후퇴 직후 정부에서 현역군에 입대하지 않은 장정들을 남으로 안전하게 후송시키기 위해
국민방위군제도를 만들어 1951년1월 30일 국회에서 209억원 예산을 통과시켜 운영을 했었다.그러나 이 예산이 몇몇 정치인들
에 의해 잘못 쓰여진 관계로 국회가 시끄러웠고 결국 부대를 해체하고 말았다.
※ 군악대 창설의 모체가 된 국민방위군 출신자 16명은
Clar.-복기호,이성근.
Sax.- 김성태,이홍석,강철모.
Horn-이준호,양희문.
Trbn.-한정진.
Trpt.-조동순,이광수,유영인, 김재만.
Bar.-함성국.
Drum-송상헌,김중국,신성모
당시에는 해군의 장교와 하사관등을 해병대로 전환입대 조치, 해병대 창설의 주역이 되었기때문에 이관승도 마찬가지로 해군
군악대에서 1951년5월10일 전환입대케 되었다.
그러나 군악대를 편성하고 연주를 수행하기에 16명이라는 병력은 너무 적은 숫자였다. 이에 이관승은 병력 충원 방안을 고민하
던 끝에 16명의 가입대원을 피난민이 많이 모인 부산,대구를 중심으로 연고 지역에 보내는 등 모병 홍보활동을 벌인 결과, 총 52
명의 군악대원을 모집할 수 있었다. 이들은 1951년6월18일에 해병대제1기특과하사관후보생 의 이름으로 해병학교 (당시 진해
여고에 있던 해병대사관후보생교육대-1951년4월1일 창설)에 입교해 정식 해병대 부사관 교육을 받게 되었다. 해병대군악대의
역사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1951년 6월18일은 군악대원들의 해병학교 입교하는 역사적인 첫날이었다. 하지만 군악대원들은 이날부터 위문공연등 대내외
행사에 참여하여 군악대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1951년 9월29일 52명의 대원들은 특과하사관교육을 수료하였고 다음 날인
1951년9월30일 "해병대군악대"라는 부대명칭이 정식으로 부여되었다.
당시 군악대는 총원 부사관 교육을 받았으나 교육성적, 연주능력, 나이등을 고려해 상하조직을 갖추고 위계질서와 군기확립을 위
해 일등수병(일병)에서 삼등병조(병장)까지 병계급이 부여되었고 이들 중 이등병조(하사) 김형섭(클라리넷, 대구주둔 방위군군악
대 출신)과 삼등병조(병장) 복기호(앨토색소폰, 부산주둔 방위군군악대 출신)는 교육 이수 후 동기들의 선임 역할을 맡았다.
당시 해병대사령부는 부산에 있었으나 해병대교육단이 진해에 위치하고 있어 진해에서 많은 행사를 담당하였다. 또한 해병대군
악대는 단 1개부대가 존재했기때문에 별도의 부대명칭 없이 해병대군악대로 불렀다.
※ 초창기 해병대는 해군총참모장 휘하의 단위부대로 활동하다가 4개 대대로 병력이 증강하면서 진해여고에 사령부를 설치 운영
하였다. 1948년 4월3일의 제주 4.3사건의 후유증때문에 1949년12월에는 당시 그 곳에 있던 육군병력 및 경찰등과 교체하여
제주 한라산 공비 200여명의 토벌을 목적으로 제주도로 부대 이동하면서 사령부와 훈련소도 이전하게 된다.
당시 해병대는 해군 소속으로 해군 3,600명 병력중 1,200명이 해병대였었다.
그 다음해인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해병대는 제주도에서 신병3기(8/15) 신병4기(8/30) 3,000여명을 모병하여 제주도 내
에서 신병교육을 단기간에 마치고 동년 9월에는 맥아더장군의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되면서 제주도를 떠나게 된다. 이때의 제주
출신 해병은 학생과 스승이 대부분이어서 당시로서는 학력이 높은 편이었고 6.25전쟁을 통해서 해병대가 우수하다는 평을 받
게 되는데 큰 자산이 되었다고 한다. 해병대사령부는 1951년5월 부산의 용두산 막사로 이전하였다. 이때에는 피난지 부산을 임
시수도로 하여 정부 부처가 모두 부산에 있었다.
### 초창기 군악대 막사 (막사에 관한 증언:신병12기 故김용기님)
1.하사관교육대(진해도천국민학교) -가입대 기간중
2.해병학교 (진해여고 옥상)-하사관후보생교육기간중
3.舊일본군사병구락부 강당(진해운동장근처)-이때 신병12기가 군악대로 편입됨
4.하사관교육대로 다시 옮김
5.1953년 9월28일 진해 원일봉에 막사(콘세트=Quonset Hut 1개동과 천막 3동)를 새로 짓고 정착함.
(위와 같이 자주 옮기게 된 이유는 악기소리 때문에 타부서의 근무에 지장이 있으므로)
###초대 군악대장 한상기(韓相基)중위 임명
1951년10월, 해병군악대 창설자인 이관승병조장(상사)은 해병대 군악장교가 되기위해 사관후보생학교로 입교했고 당시 해군군
악학교 고등과 교관으로 근무하던 한상기중위를 해병대로 전환입대케 하여 1951.10.01.자로 해병대군악대장으로 임명함으로서
해병대군악대 초대 군악대장이 된다. 군악대장으로 임명된 그는 타군 군악대와의 음악적 수준차이를 절감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
해 노력하였다. 다양한 교육프로그램을 적용시켰고 타군에 비해 몇배 더 많은 연습시간을 편성해 군악대원들을 단련시켰다. 입술
이 부르트고 온몸이 기진맥진하여 쓰러질듯한 고된 생활이 연일 계속 이어졌지만 군악대원들은 해병대군악대라는 자부심으로 힘
든 시간을 이겨나갔다. 이러한 노력으로 군악대의 수준은 조금씩 향상되었고 추가로 창설되는 여단군악대의 대원도 모집할 수 있
었다.
또한 새로 구성된 여단군악대를 기존 대원들과 같은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한 교육과 훈련은 계속되었다. 그 결과 잘 훈련된 군
악대원 80여명을 확보하여 1954년 파주 금촌 제1임시여단 군악대 창설에 필요한 군악대원으로 충당할 수 있었다.
이후 지속적인 대원모집과 교육으로 1956년 사령부군악대로의 개편 및 진해교육단 군악대, 김포의 제1여단 군악대 창설등에 필
요한 군악대원을 충당하였다. 하지만 군악대 악기 소리가 타 부서 업무에 지장을 준다는 이유로 부대 이전이 자주 있었다.
1951년 5월8일 군악대원 가입대 기간중 하사관교육대(진해 도천국민학교)에 주둔하던 군악대는
1951년6월18일 하사관후보생 교육중 해병학교(진해여고)로 이전하였고
1951년10월1일 옛 일본군 사병클럽 강당(진해공설운동장 인근)으로,
1953년9월28일 기지를 벗어나 진해 원일봉 중턱에 막사를 신축하고 (콘세트=Quonset hut 1개동, 천막 3개동)
1956년3월26일 해병대사령부가 서울로 이전하기 전까지 원일봉 막사에 정착하여 군악대를 운영하였다.
2. 해병대군악대 고급 부사관 전환입대 (창설기 복기호의 기술에 기초하여 재정리)
당시 해병대군악대는 경험이 풍부한 지도자급 인력이 없었기때문에 군악대의 틀을 잡아가는 창설 초기가 그 어떤 시기보다 힘들
었다. 이후 여단과 사단 군악대장 임무를 수행하게 될 4명의 고급 부사관들이 해군에서 전환입대하여 해병대군악대의 창설시기
를 이끌었다. 그들이 바로 병조장(상사)의 정삼윤, 인석환, 문병일과 일등병조(중사)의 김명조이다.
이들 중 정삼윤과 인석환병조장(상사)은 초대 군악대장 한상기 중위가 해병대로 전환입대할 때 함께 전환했고 문병일병조장(상
사)과 김명조일등병조(중사)는 그 이후 전환입대하여 해병대군악대의 교관으로 복무하다가 준위로 진급하였고 해병대 각 부대에
군악대가 새로 창설되면서 각 부대별 군악대장으로 임명받고 임무를 수행하였다.
정삼윤(바리톤)병조장(상사)은 후에 해병대사관후보생 교육을 거쳐 대위까지 진급했으며 진해교육단 군악대와 제1사단(포항)
군악대장 역임.
인석환(트롬본)병조장(상사)은 해군의 전신인 해안경비대군악대를 거쳐 해군통제부 군악대에서 복무중 해병대를 지원 전환입대
하여 후에 준위로 진급하여 진해교육단 군악대와 제1여단(김포)의 군악대장 역임.
문병일(트럼펫)병조장(상사)은 한상기대장 부임후 해군군악대에서 해병대로 전환입대. 후에 준위로 진급하여 제1여단(김포) 군악
대장 역임.
김명조(클라리넷)일등병조(중사)는 해군에서 예편한후 해병대로 재입대하여 후에 준위로 진급하여 진해교육단의 군악대장 역임.
3.초창기 군악대와 의장대(Ceremonical Guard) 활동 (창설기 복기호, 심한구 기술에 기초하여 재정리)
### 창설 후 첫 군악연주회 (해병대창설 제3주년기념)
해병대군악대의 첫 공식행사는 1951년6월 김일성고지전투 전사자 영결식이었다. 지휘는 이관승 병조장(상사).
군악대원들은 부사관교육을 받던 중이었고 첫 행사를 마친 후 해병학교로 귀교하여 교육과정 중 마지막 교육훈련인 각개
약진 전투훈련을 진해 시가지 일원에서 실시하였다. 이때 해병학교장 김대식대령이 참관했으며 우중에 실시하게 되어서
너무나 힘들었던 잊지 못할 하루였다.
1951년10월 한상기대장 부임후 전대원들의 피나는 노력으로 해병대군악대는 조금씩 그 실력을 향상시켰고 드디어
1952년4월10일 진해 해양극장에서 첫 군악연주회를 갖게 되었다. 이 연주회는 해병대 창설 3주년을 기념하고 또 전쟁의 상처로
피폐해진 국민들을 위로가기 위한 시민위안연주회로 진행되었다.
### 창설 후 첫 순회연주 (백령도와 석도)
그 이후로 1952년 10월에는 서해의 백령도와 지금은 북한땅인 석도등을 방문하여 절해의 고도를 지키는 해병대 장병들의 사기를
북돋웠다. 1953년 가을에는 서울,대전,대구,부산,진해 등지에서 서울수복 3주년을 기념하는 순회연주를 개최하여 해병대군악대
를 대외적으로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생각하면 영광스러운 시간들이었지만 그 영광을 이루기 위한 군악대원들의 노력과 희
생이 생각나 무척 안타깝고 가슴시린 기억이다. 연일 계속되는 행사와 연습으로 대원들은 많이 지쳐 있었으나 체력을 보충할 영
양가 높은 식사는 제공되기 어려웠고 충분한 휴식도 보상받을 수 없었다. 군악대원들중 과로와 영양실조로 쓰러지는 대원도 있었
고 폐병에 걸려 병원에 입원한 대원도 있었던 일들이다. 그 시절의 땀과 눈물이 있었기에 해병대군악대의 영광스러운 오늘이 있
음을 기억해야 한다.
1951년 해병대군악대 창설시기에도 행사용 정복이 있었지만 1950년대 중반까지의 행사시에는 작업복에 위장복철모를 쓰는 행
사, 겨울에는 해병대만의 그린사지복, 그리고 여름에는 카키색 외출복에 흰색페인팅 화이버를 쓰는 행사가 대부분이었다. 이러한
복장들은 문자 그대로 해병대라는 막강한 특수부대 모습이 그대로 느껴져서 국민들에게 대단히 강한 인상을 주곤 했다.
### 군악대 초창기 행사복
### 해병대군악대의 첫 서울시가행진
1954년 6.25 전쟁 4주년 기념행사는 정전회담(1953.07.27.) 이후 첫 6.25 전쟁 기념행사였으며 이 행사는 진해에서 차출된 군악
대원 30여명과 창설된지 4개월 된 금촌의 제1임시여단군악대가 합동으로 행사를 치루었다.
이날의 행사에서 타군은 단정한 복장으로 시가행진을 했으나 해병대는 전투부대 행진에서 훈련중 묻은 흙이 그대로 있는 전투복
을 입고 행진을 했고 군악대 역시 얼룩무늬 철모와 전투복, 탄띠에 수통을 차고 왼쪽에는 빨간 악보가방을 둘러메고 행진을 했었
다. 행사를 참관했던 이승만대통령이 해병대의 시가행진모습을 보고 안타까운 표정으로 눈물을 보였다는 내용이 다음날 일간신
문에 게재되었다 한다.
해병대사령부가 부산 용두산 막사에서 서울 용산구후암동 신청사로 옮기기 전까지는 파주의 금촌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제1사단
군악대(직전의 제1임시여단)가 서울과 경기지역의 행사에 참가했었으며 1954년부터 시작된 서울시가 주관하는 "9.28서울수복
중앙청태극기게양기념 행사"와 인천시가 주관하는 "9.15 인천상륙작전기념행사"는 그 당시부터 현재까지 해병대군악대가 빠짐
없이 참가하며 그 고귀한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또한 그외의 국가행사나 비중있는 사회단체 행사들도 계속 참여함으로서 해병대
군악대의 위상을 드높였다.
[아래 내용은 창설기 복기호님의 기술(記述)에 기초하여 재정리]
***군악대와 함께 한 의장대시범
1953년12월10일에는 해병대의장대가 정식으로 창설되었다. 의장대는 의식행사 위주로 활동하였으며 1955년1월15일 파주 금촌
에 있던 제1임시여단이 제1상륙사단으로 승격되면서 사단의장대도 창설되었다.
의장대시범 초기에는 군악대연주와 함께 시범을 하는것이 아니고 의장대 자체에서 구령을 붙여가며 동작을 했었는데 당시 제1사
단군악대 선임하사관인 복기호일등병조(중사)가 의장대장에게 주악에 맞춰 의장대시범을 할것을 제안하였고 의장대원들의 동작
하나하나를 체크해서 의장대시범의 반주음악을 편곡하여 의장대시범을 한 결과, 대원들의 동작과 음악이 딱딱 맞아 떨어져 더욱
절도있게 보였고, M-1소총에 대검을 꽂고 한손으로 총을 돌리며 공중으로 던졌다가 부동자세에서 총검을 받는등 곡예같은 아슬
아슬한 묘기가 연출되니 대단히 호응이 좋아 인근 미군부대에도 소문이 나면서 의정부에 있던 미육군 제1군단(I Corp)의 1956년
9월 부대창설기념일에 초청을 받아 가게 된다.
여기에 참석했던 이승만대통령 앞에서 의장대시범을 했는데 그날의 감동이 해병대군악대와 의장대의 명성을 널리 알리는데 큰
역할을 했다고 하겠다. 특히 해병대의장대가 국내에서 처음으로 의식행사에서 탈피하여 고난도 테크닉이 요구되는 의장대쇼를
실시하였다. 1958년에는 이승만대통령 특별지시로 해병대군악대와 의장대가 공보처(현 문화관광부)가 주관하는 동남아순회
문화예술사절단에단에 참가하여 KBS교향악단등과 함께 해군함정으로 동남아 각국을 돌며 순회공연을 하였다. 특히 해병대의장
대와 군악대가 의장대시범을 보임으로서 가는 곳마다 한국 해병대의장대는 “동남아 최고“라는 찬사를 받으며 지금도 전통적으로
그 명예를 유지하고 있다. 이때에 순회공연에 참가했던 부대는 1사단 소속이 아니라 사령부군악대와 의장대였다.
*** 한미해병대 제1사단군악대 합동연주
1955년 2월5일에는 서울특별시 후원으로 명동의 시공관에서 미 해병대 제1사단의 환송연주회가 한미 양국의 해병대 제1사단
군악대가 합동으로 개최되었다.
또 1955년 봄에도 창경궁에서 봄맞이합동연주를 개최하므로서 양국간의 혈맹의 의를 더욱 깊게 하였다.
4.군악대원 모집과 군악교육(1951~1973)
(창설기 복기호, 김성태 , 군악1기 배봉환, 군악3기 이재창의 구술에 기초하여 정리)
### 창설 초기의 군악대원 모집
군악대 창설시기 선발해 군악대로 운용하던 특과하사관1기(병8기에 해당) 이후에는 병12기(1951.12.) 때에 훈련병 중에서 연주
경력자를 선발해서 군악병을 충원하였다. 이후에도 병18기(1952.06.) 병22기(1952.10.-제주도에서의 교직자들이 대부분) 병27기
등이 군악대 초기의 군악대원이다.
특히 병27기는 군악대에서 연주경력자를 미리 선발하여 훈련소에 입소시킨 첫번째 군악대원이며 진해에 해병대군악대가 하나만
있을 때 모집한 마지막 깃수가 병39기였다. 이때에는 장차 군악대의 추가 창설에 대비하여 군악대원을 80~90명 정도 유지하다가
훗날 제1임시여단(금촌-포항-후에 제1사단)군악대, 사령부(서울)군악대, 교육단(진해)군악대, 제1여단(김포-후에 제2여단,제2사
단)군악대로 배치되었다.
당시 육군과 해군에는 군악학교가 있어 모든 군악대원들을 소정의 군악교육을 이수케 함으로서 연주와 음악이론의 기초를 확실
히 하여 대원들을 질적으로 향상시키려고 애쓴 반면 해병대에서는 자체 군악학교와 교육은 커녕 타군 군악학교에 위탁교육을 의
뢰하려는 시도조차도 하지 못했다. 그나마 일시적으로 한상기대장이 부사관을 대상으로 화성학이론을 가르친것이 유일한 군악교
육이라 할 수 있겠다.
### 사령부군악대에서 군악대원 선발, 사령부 예하 4개 부대 군악대에 배치
1954년2월1일 제1임시여단군악대(파주 금촌) 창설때 진해에서 30 여명을 차출, 조직하였다.
1956년6월30일 해병대사령부가 서울로 이전하면서 사령부군악대가 정식으로 개편될 때에도 그때까지 진해에 있던 군악대 주멤
버 40여명을 중심으로 편성케 되었다. 진해에는 교육단군악대로 30여명이 남았고 군악대원모집은 종전처럼 신병훈련소에서 연
주경험자를 수시로 선발해서 구성하였다. 이렇게 주먹구구식으로 군악대원을 선발하다보니 연주능력 면에서 질적인 향상을 도모
하기 힘들었다. 1957년 사령부 군악대장으로 새로 부임한 안진영대위는 상부에 이런 애로사항을 보고하고 군악대원 선발방법 개
선안을 건의하여 전국적으로 군악대원 모집 범위를 넓히고 오디션을 통해 군악1기(1957.10.) 28명과 군악2기(1958.06.) 72명을
서울에서 현지 입대케 했다. 이렇게 입대한 군악대원은 사령부군악대 자체에서 기초군사훈련과 군악교육 수료후 전원 부사관으
로 임명되어 4개 군악대로 배치하여 각 군악대의 발전을 꾀하였다. 이때부터 깃수별 군악대원 모집이 정례화 되었고 이러한 모병
방법은 사령부군악대를 비롯 3개의 군악대가 해체되던 1973년까지 계속되었다.
사령부군악대의 안진영 대장은 대원들의 연주력 향상을 위해 노력했지만 군악대에 외부강사 초청 또는 교육프로그램 개발이나
참가와 관련된 예산이 없는지라 우선 연주실력 배양에는 연주회를 여는것이 가장 빠른 방법이라고 판단했다.
대규모의 군악연주회 계획을 세우고 비교적 어려운 대곡들을 선곡하여 강도높은 연습프로그램을 짜서, 안진영대장이 과거 함께
활동하던 교향악단의 관악 파트 수석주자들을 설득, 당시 정상급 연주자인 정윤민(트럼펫)임춘원(클라리넷)등 여러 지인의 무료
봉사로 군악대원들의 기량을 끌어 올리는데 주력하여 성공리에 연주회를 마쳤으며 그시절 해병대군악대의 대외적인 인지도를
높이는데 성공했다고 하겠다.
1959년4월에는 군악3기생을 선발하였고 전과 마찬가지로 사령부에서 현지입대하여 같은 방법으로 교육을 이수하고 이번에는
전원 兵으로 임명되었다. 1961년에는 군악1기(부사관), 2기(부사관), 3기생(병)들과 그 이전 부사관들의 예편, 그리고 고적대 창단
관계로 많은 대원이 필요했다. 따라서 4월(군악4기) 6월(군악5기) 8월(군악6기)까지 2개월 간격으로 3개 깃수에 걸쳐 100 여 명을
모집하게 되는데 이들은 모두 진해신병훈련소와 상남전투훈련장에서 16주교육을 수료 후 전원 兵으로 임명받고 각 군악대로 배
치되었다.
이 이후에는 군악7기생만이 서울 현지입대하여 사령부군악대 자체에서 3개월간 신병기초훈련과 군악교육을 마친후 각 군악대로
배치되었고 그 이후부터 군악26기까지는 신병훈련소에서 8주간 기초훈련 수료 후 상남의 전투훈련장을 가는 대신 사령부군악대
에서 4주간 군악교육을 받고 각 군악대로 배치되었다. 군악대원 모집은 매년 일정 기간에 행해지는것이 아니라 군악대원 전역 관
계로 결원이 생겨서 어느 정도 모집할 인원이 될 때에 맞춰 모집하게 되므로 깃수간의 간격은 일정하지가 않았다.
### 진해교육단군악대의 군악대원 모집 (군악2기 유영대의 구술에 기초하여 정리}
1957년 진해 교육단군악대는 병력 충원이 원만치 않게 되자 전국으로 범위를 확대시켜 군악대원 모집 홍보를 벌였고 오디션을
통해 군악대원 25명을 선발하였다. 이들은 진해 현지입대 형식으로 교육단군악대 자체에서 3개월간 기초군사훈련과 군악제식교
육을 실시했으며 1주에 1일은 교육단에서 신병교육을 보충하였다. 소정의 교육 훈련을 이수한 군악대원들은 포항의 제1사단에
약간 명을 배치하고 20여명은 진해에서 복무케 하였다. 이 깃수가 병76기(1957.12.)이며 1년 후 약간 명을 제외한 신병76기 전원
이 부사관학교에 입교하게 되었다.
*** 군악대원을 모집하는 방법으로는
1.전국적으로 군악병 모집 공고를 내고 연주경력자를 선발하는 방법 (군악 깃수에 해당)
2.신병교육 도중 군악병 지원에 의해 연주능력 또는 가능성을 인정 받아 선발되는 경우
3.신병교육 후 자대배치 받고 부대 복무중 같은 사단 내 군악대에서 연주능력이 인정되어 군악대로 부서 이동하는 경우
등이 있었다.
5. 해병대 부대별 4개 군악대와 한국 최초의 고적대 창설
(창설기 김성태, 군악1기 배봉환의 구술을 기초하여 정리)
A-1. 사령부 군악대(서울) [증언: 김성태(창설기) 배봉환(군악1기)]
1951년 진해에서 창설된 군악대는 사실상 사령부군악대나 다름없었지만 당시에는 군악대가 하나 뿐이었기에 군악대 명칭도 부
대명 없이 단순히 해병대군악대로 불렀다. 진해에 주둔하던 해병대사령부는 1949년12월 제주공비토벌 및 제주지역 치안을 책임지고 사령부와 신병교육대까지 제주로 이동했다가 1951년5월10일 사령부가 부산으로 이전했다. 군악대는 창설멤버들이 1951년
6월8일 입대하여 교육을 마친 후에 부산으로 이전하지 않고 진해교육단에 남아 많은 연주행사를 담당했다.
(사령부는 정부가 피난지 부산에 임시로 있었기에 그곳으로 소수 행정요원과 경호병력만 이전을 했지만 당시 규모가 큰 부대가
진해교육기지와 창설초기 활동하던 덕산비행장이 있어서 군악대는 진해에 남아서 활동하게 되었다.)
1956년6월30일 사령부는 서울 용산구후암동 신청사로 이전하였다.이때 진해에서 차출된 군악대 주병력 40여명을 주축으로 사령
부군악대를 편성하여 본진보다 앞서 3월26일 서울 용산구 한남동 막사로 이전했다. 사령부군악대장에 한상기중령,선임하사관
에 김형섭일등병조(중사)가 임명되어 명실상부한 사령부군악대로 개편 출발하게 되었다.
1957년10월 한상기중령이 예편하게 되자 육군군악대에서 안진영중위를 대위로 진급, 전환입대시켜 사령부군악대장으로 임명하
였다. 이 시기 군악대 병력 충원이 원활하지 못했고 군악대 대원이 10여명 밖에 남지 않았었다. 따라서 이시기에는 군악1기 입대
지망생들이 행사에 참여하는 웃지못할 일도 있었다.
안진영대장은 당시 사령부군악대의 연주능력 향상 방안으로 전국에 걸쳐 군악대원을 모집 홍보를 하였고 오디션을 통해 군악대
원을 선발하는 등 군악병 단체모병제도를 확립하였다. 군악1기.군악2기를 8개월 차이로 모집하여 전원 부사관으로 복무토록 하
였고 연주력 향상 작전에 돌입, 2~3년 후에는 타군 군악대보다 우수하다는 평을 듣기도 했다.
안진영대장은 건강관계상 1963년8월에 예편하고 후임으로 당시 보좌관으로 있던 윤동균중위가 사령부군악대장을 맡았다. 이후
1965년 진해군악대장으로 있던 김영방대위가 뒤를 이어 사령부군악대장으로 임명되어 군악대의 발전을 위해 노력했으며 1973
년10월10일 사령부 해체와 더불어 사령부군악대도 해체되며 소령으로 예편하게 되었다.
사령부군악대는 사령부 자체 행사외에 군악대 정기연주회, 60년대와 70년대 초에는 매년 미스코리아 경연대회 본선의 연주 및
당선축하 시가행진을 하는등의 인기행사를 비롯 전국 여러 도시의 시민위안 공연등으로 해병대의 위상과 홍보에 크나큰 역할을
담당했었다.
그시절 군악대원들의 기억 속에 모든 공연이 의미있게 기억되겠지만 특히 기억에 남는 연주회는
1960년 (대장: 안진영대위) 원각사 공연과
1961년5월16일 (대장:안진영대위) 시민회관(후에 세종문화회관의 전신)에서 열린 안익태 지휘의 제1회 5.16국제음악제
의 “코리아 판타지” 대공연(교향악단,3군 및 해병대군악대와 대합창단) 그리고
1969년4월15일 (대장:김영방)의 "해병대창설 제10주년기념 군악연주회"의 시민회관 공연이었다.
사령부 역대 군악대장과 선임하사관 명단
군악대장 = 한상기중령 →안진영대위 →윤동균대위(해간29기) →김영방소령(해간29기)
선임하사관 = 김형섭일등병조(중사) → 양희문일등병조(중사) → 복기호일등병조(중사) → 한정진일등병조(중사) →
김성태일등병조(중사) → 배봉환 상사 → 김삼복 상사
A-2. 사령부 고적대(서울): (前사령부군악대장 김영방의 구술에 기초하여 정리)
1960년에는 美해병대 고적대가 해병대사령부연병장에서 시범공연을 한적이 있었는데 군악대에서는 이것을 관람한 후, 당시 사
령부의 이봉출대령의 지시에 의해 고적대 창설 준비를 하게되었다. 군악대에서는 서둘러 미해병대를 통해 고적대 악기를 구입하
였다.(당시 국내에는 고적대용 악기들이 없었음)
당시 한국에 온 미해병대고적대의 편성인 4x4=16인조의 고적대의 마칭쇼를 모델로 삼아 군악4기를 중심병력으로 고적대를 창설
하였다. 필름 화면을 보고 군악대 자체에서 동작안무(김경태하사)와 편곡(안진영대장)을 하고 강도 높은 훈련을 통해 1961년7월4
일에 국내에서 처음 보게 되는 해병대고적대가 탄생되었다
.
지금은 여러 여자고등학교에 고적대가 있고 롯데월드나 에버랜드등 대형놀이공원시설에서 고적대를 흔히 볼 수 있지만 그 당시
에는 국내에 하나뿐인 해병대 고적대의 마칭쇼가 장안의 화제거리였었다. 군대 행사 외에도 사회 각 기관장들이 서로 자기네 지
역 행사에 출연섭외를 하려고 정성을 쏟는등 그 인기가 정말로 대단했다.
사령부군악대 내에 연주대와 고적대가 구성되었고 고적대지휘자(Drummajor)에는 김경태하사가 임명되었고 1년후 고적대장
에 김성태상사가 임명되어 고적대의 훈련 및 공연행사를 담당하게 되었다.
하지만 해병대고적대는 1973년10월10일 사령부가 해체되면서 동시에 시련을 겪게 되었다.
고적대장(군악15기 임용술하사)포함 17명이 김포의 제2여단 33대대로 전출되어 평소에는 보병업무를 수행하고 행사가 있을 때
에만 행사에 참여하는 형식으로 운영되다가 제2여단이 제2사단으로 승격될 때 군악대가 창설되면서 해체되었다.
B. 해병교육단군악대(진해): 진해기지사령부(1959~)교육기지사령부(1967~)
(군악2기 유영대의 구술에 기초하여 정리)
1951년 진해에서 창설된 군악대는 진해해병교육단을 중심으로 진해를 비롯한 전국 주요도시 대민 위문공연과 각급 부대 위문등
을 실시하며 해병대의 유일한 군악대로서 해병대의 위상을 높이며 연주활동을 했다. 부산에 주둔했던 사령부가 서울로 이전하면
서 진해의 군악대 주병력 40여명이 서울 사령부로 전출됨에 따라 군악대 구성과 운영에도 작은 변화가 생기게 되었다. 진해에 남
게 된 30여명 대원을 중심으로 군악대가 재편되었고 진해교육단군악대로 거듭나게 된다.
1956년3월26일 정삼윤중위를 군악대장으로, 조동순 이등병조(하사)를 선임하사관으로 임명하였다.
1957년12월에는 사령부에서 모집 선발된 군악1기의 배정이 부족하여 진해군악대에서 전국적으로 군악병 모집공고를 내고 25명
을 선발하였다. 선발된 인원들은 진해군악대로 현지입대토록 했으며, 군악대 자체에서 12주간의 기초훈련과 군악교육을 이수케
하여 20여명이 진해에 남아 복무케 함으로서 군악대원 40 여명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 깃수가 병76기인데 이중에는 후에 국내 최
고의 재즈 트럼펫 주자인 강대관이 속해 있어 시민위안공연때 스윙밴드음악을 연주하면 그의 뛰어난 즉흥연주로 인해 타 군악대
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1959년2월5일에는 진해해병교육단에서 진해기지사령부로 부대명이 변경되었으며 1967년5월16일에는 해병교육기지사령부로
변경되었다.
# 진해의 해병교육기지사령부 군악대 해체
1973년10월10일 해병대사령부의 해체로 진해의 교육기지사령부도 포항으로 이전하였다. 따라서 군악대도 해체하게 되었고 그
이후에 해병대교육기지는 해군이 인수하여 해군교육기지로 사용하게 된다. 이것으로서 해병대군악대가 처음 창설되었고 사령부
군악대와 제1사단군악대(포항)와 제2사단군악대(김포)등 해병대 4개 군악대 창설의 모태가 되었던 진해군악대는 역사속으로 사
라지고 말았다.
진해교육단군악대 역대 군악대장과 선임하사관 명단
군악대장= 정삼윤중위 →김명조준위 →인석환준위 →김영방중위 →윤동균중위 →박종원중위 →조영윤중위
선임하사관= 조동순이등병조(하사) →김성태이등병조(하사) →고중갑상사→정병한상사
C. 제1사단군악대(금촌 1954~ / 포항 1959~) (창설기 복기호 기술에 기초하여 재정리)
진해에 1개 군악대만 있다가 휴전(1953.07.27.) 직후인 1954년2월1일 금촌에 있던 해병제1전투단이 해병제1임시여단으로 승격
되면서 제1임시여단군악대가 창설되게 되는데 당시 진해에서 30여명을 차출하여 해병대에서 두번째로 군악대를 창설하게 된다.
군악대장에는 군악대 창설자인 이관승대위가 선임하사관에는 복기호이등병조(하사)가 임명되었다.
1955년1월15일에는 제1여단이 제1상륙사단으로 승격함에 따라 제1상륙사단군악대로 개편되었다.
사령부가 부산에서 서울로 이전하게되는 1956년6월 이전까지는 파주 금촌이 서울과 가까운 관계로 서울과 인근지역의 행사는
제1사단군악대에서 대부분 참가함으로서 사실상 해병대를 대표하는 군악대의 역할을 담당했었다.
1959년3월12일 금촌에 있던 상륙사단이 포항으로 이동하고 본격적인 제1상륙사단군악대로 재개편되면서 대장에 정삼윤대위,
선임하사관에 한정진일등병조(중사)가 임명되어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되었다.
1965년10월부터 7년 동안은 한국군의 월남 참전으로 인해 무적해병 “청룡부대”의 출국 환송과 귀국 환영행사를 치루느라 장기간
수고를 하기도 했다.
1970년1월에는 김포의 제5여단군악대(과거 제1여단지역)가 해체되어 이동석중사 외 6명이 제1사단군악대로 전입되는 안타까운
일도 있었고 1973년10월10일에는 해병대사령부 해체와 더불어 사령부군악대와 진해교육기지군악대도 해체되면서 해체된 부대
에서 일부 병력이 제1사단군악대로 전입되었다. 해병대군악대 동료 전우들의 가슴 아픈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부대가 제1사단군
악대이기도 하다.
제1사단군악대 역대 군악대장과 선임하사관 명단
군악대장= 이관승대위 →인석환준위 →정삼윤대위 →곽진용대위(해간32기) →조인원대위(해간38기) →김헌경중위(해간
48기) →조영윤중위(해간50기)
선임하사관= 복기호이등병조(하사) →한정진일등병조(중사) →유치준이등병조(하사) →박노천상사
D. 제1여단군악대(1959~1966) 제5여단군악대(1966~1970) (김포)
(병27기 김삼복과 해체당시 군악15기 심상갑의 구술을 기초하여 정리)
1959년3월12일 파주 금촌에 있던 해병제1상륙사단이 포항으로 이동함에 따라 김포에 제1임시여단이 창설되면서 제1임시여단군
악대가 창설되었다. 군악대장에는 제1상륙사단군악대장 인석환준위가, 선임하사관에는 김삼복(병27기)일등병조(중사)가 임명되
었다.
1966년11월23일에 포항에서 창설된 제5여단은 1967년1월23일에 김포의 제1임시여단과 부대교대를 하여 군악대는 소속이 제5
여단군악대로 바뀌었다. 하지만 1970년1월6일에는 군악대의 활용가치가 없다는 이유로 해체되어(꼭 필요할 경우는 서울의 사령
부군악대가 행사지원) 당시 군악대원 35명중 군악대장 백대웅중위는 사령부보좌관으로, 선임하사관 이동석중사와 대원 6명은 포
항의 제1사단군악대로, 나머지 대원은 포항 제1사단수색대로 전출되었고 악기는 모두 사령부군악대로 이관되는등 참으로 비통
한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1972년에는 제5여단이 제2여단과 통합하여 제2여단(청룡부대)으로 명칭이 바뀌고 1973년에 해병대사령부가 해체되자 사령부
소속이던 16인조 고적대가 제2여단으로 전출되었으나 행사를 위한 독립부대가 아니고 보병부대인 33대대에 편입되어 보병업무
와 행사시에 고적대 활동을 병행하다가 1975년에 여단본부 소속으로 변경되었다.
제1여단군악대 역대 군악대장과 선임하사관 명단
군악대장= 인석환준위 →문병일준위 →김영방소위(해간29기) →윤동균중위(해간29기) →인석환준위 →김성태준위→
백대웅중위(해간35기)
선임하사관= 김삼복일등병조(중사) →서종석중사 →이동석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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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포지역의 해병대 부대 명칭이 자주 바뀐 이유
금촌지역
1954.02.01. 금촌에 있던 해병제1전투단(연대병력)을 해병 제1임시여단으로 승격.
1955.01.15. 금촌의 제1임시여단이 제1상륙사단으로 승격하면서 제1임시여단은 사단병력에 흡수.
김포지역
1959.03.12. 금촌의 제1상륙사단이 포항으로 이전하면서 김포반도와 서울 방어임무를 맡게될 부대로 해병제1임시여단이
독립부대로서 김포에 주둔.(제1상륙사단에 포함되어 있다가 다시 여단 단독임무 부여)
1967.01.23. 해병제5여단 창설(1966.11.23.포항에서 창설하여 1967.01.23.김포로 이동. 김포의 제1임시여단은 제1사단
으로 복귀)
제1사단 제2연대를 기간으로 제2여단(청룡부대)이 월남전에 투입된 후 해병대 임무 수행 능력 보강을 위하여
5‚470명의 병력이 보충되어 건군사상 최초로 해병대가 30‚430명으로 증강된 병력을 보유하게 되었고 이 병력으로
1966.11.14. 제5연대를 신편하여 이 부대를 기간으로
1966.11.23. 새로운 전투여단인 제 5여단을 창설하고 8년 동안 김포반도에서 휴전선을 지킨 제1임시여단과
1967.01.23. 부대 교대함으로서‚ 서부전선 수도권방어력을 보강하였다.
제1임시여단은 수도권방어 임무를 마치고 제1사단으로 복귀하여 제1사단은 전투력 정비가 강화되어 전략기동 예비대로 임무수행 능력을 완전히 회복하게 되었다.
1972.03.10. 해병제2여단(청룡부대-기존의 제5여단과 통합하여 서부전선 방위 임무 부여)
1965.06.28. 월남파병을 목적으로 포항 제1상륙사단의 제2연대병력을 기간으로 제2여단 (여단장:이봉출준장)을 창설하여 월남
전 참전 후 1972.03. 완전 철수
1977.01.01. 해병제6여단 창설(서해 3도-백령도,대청도,소청도의 방어 임무)
1981.04.16. 해병제2사단 창설(제2여단을 기간으로 사단 창설)
[아래 사진: 1959.10. 김포 1여단군악대 귀빈 영접식 행사 -대장:인석환준위]
[자료제공: 故이동석상사(제1사단군악대장)앨범에서]
6. 군악대 초기 주요 인물
A. 해병대군악대 창설자 이관승 (병조장(상사)~대위)
이관승(클라리넷)은 8.15 해방전 일본 만주군 군악대원으로 있다가 해방후 해군의 전신인 해안경비대군악대를 거쳐 해군군악학교 교관으로 복무 후 전역, 고향인 충북제천에서 중학교 음악교사 생활을 하던중 6.25동란으로 해병대에 재입대하여 해병학교장 김대식대령의 지시로 군악대를 창설하고 1951년10월 군악장교가 되기 위해 해병학교 제8기 간부후보생 교육후 중위로 임관, 후에 대위로 진급. 1954년12월 금촌의 해병전투연대가 해병제1임시여단으로 승격되면서 또 하나의 해병대군악대가 창설되고 군악대장으로 임명되었다.
B. 해병대군악대 초대 군악대장 한상기 소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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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안경쓴이 군악대장 한상기 소령 1955.)
[ 한상기(1923년 서울출생-피아노-작곡가)는 일본 동경 고등음악학교 사범과를 졸업하고 해방 직후, 국내에서 Pianist로 연주활동을 하다가 당시 해군군악학교 교장이던 남궁요열씨의 권유로 해군사관학교 제4차 특교대를 거쳐 곧 중위로 임관되어 해군통제부군악대 대장으로 임명 되고 당시 서울에 있던 해군군악학교 교관으로 출강하였으며 해병대로 전환입대,
1951년 10월 해병대군악대장으로 임명되어 7년 복무후 1957년 중령으로 예편하였다.]
경 력
1942년 콜롬비아 레코드 전속작곡가
대표곡: 산중일기,안남아가씨, 통군정의 노래, 청춘항로, 청노새극장, 꽃파는 꾸냥.등
군시절 작품
군가작곡: 도솔산의 노래
취주악곡: 휘날리는 태극기, 해병대 행진곡, 유엔기 아래에, 민요접속곡,
전원시곡: 시골풍경
예편후, 영화음악계에서 활동 300여편의 영화음악을 작곡, 3차례 대종상 음악부문 수상. 예총 음악분과 위원장 역임.
C. 해병대사령부군악대 제2대 군악대장 안진영 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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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각사에서 정기연주회 지휘 군악대장 안진영 대위
해병대는 군악장교를 별도로 육성하지 않았기때문에 1957년10월 사령부군악대장 한상기 중령 예편 후, 해병대 내에서는 마땅한 후임이 없었다. 황기오 육군대령(육군본부군악대 창설의 주역)의 주선으로 당시 육군군악대의 트럼펫 주자였고 육군상사에서 장교로 진급한 음악능력이 탁월한 안진영 육군중위를 해병대로 전환입대 후 대위로 진급시켜 사령부군악대장에 임명했다. 그의 뛰어난 음악성으로 인해 해병대군악대가 연주면에서 이 시절이 가장 발전적이었고 군악대원 개개인의 능력도 대단히 향상 되었다고 하겠다.
특히 해병대에서도 안진영대장의 건의를 받아들여 군악병을 군악대 자체에서 모집하고 사령부군악대 내에서 기초훈련과 군악교육을 자체 교육하도록 배려했다. 군악1기(1957년10월 입대) 군악2기(1958년6월 입대)는 교육 후 하사관으로 임명되었고 군악3기(1959년4월 입대-병92기)부터는 계속 교육 후 병으로 복무하게 되었다. 그는 건강관계로 1963년8월
예편, 3개월 후인1963년11월27일에 별세하였으며 그의 장례식에는 3군군악대가 참석한 가운데 그의 마지막 가는 길을 애도했다.
[아래 사진: 1960년 원각사에서 사령부군악대 공연 - 지휘: 군악대장 안진영 대위]
[자료제공: 군악3기 이재창]
D. 해병대사령부군악대 제4대 군악대장 김영방 소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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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10월1일 국군의 날 행사직후 여학생으로부터 꽃다발 받는 김영방 대장
해병대군악대는 장교 대부분이 장기근무를 하지 못했다. 계급 정년과 군악대 내의 장교 정원 관계일 것이다.
1961년부터 김포여단과 진해기지 군악대장을 역임하고 1967년부터 1973년까지 사령부군악대장을 역임한 김영방소령이 가장 오래 복무한 군악장교이다.
그는 연세대학교음대 졸업 후 1959년 병(군악3기)으로 입대하여 트럼펫주자로 사령부에서 복무 중 안진영대장의 권유로 장교가 되기 위해 1960년 해간29기 교육을 받았다.
1962 제1여단 →1962 진해기지 →1967~1973 사령부의 군악대장으로 복무했다. 예편 후에는 연세대학교 음악대학 강사로 활동하다 1976년 미국으로 이민. 그 후 귀국하여 백제예술대학 교수(1993~2002)한국 마칭밴드협회 회장,세계마칭밴드 경연대회 한국 유치(제주도) 아시아태평양(APBA)밴드협회 창설(부회장) 백제예술대학 명예교수(현재) 한국관악총연합회 이사장(현재)등의 직함으로 한국관악계의 지도자로 활동중이다.
E. 최장기 복무자 김성태 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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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11. 포항 - 제5회 동해문화제 - 지휘 김성태 준위)
당시 해병대에서 특히 군악대에서 준위 진급은 참으로 힘들었다. 군악대 창설때 해군에서 해병대로 전환입대한 4명의
군악지도교관 이후 순수 해병대 자체의 군악대원으로서는 처음이었다. 군악대 창설기 특과하사관으로 시작하여 해병대군악대에서 처음으로 준위에 진급했고 해병대군악대의 "살아있는 전설" 이라고 할수 있는 김성태준위가 당시 군악대의 최장기 복무자이다.(1951~1973)
그는 사령부와 진해군악대의 선임하사관을 거쳐 준위 진급후 사령부군악대보좌관을 비롯 제5여단 군악대장을 역임했고 해병대사령부 해체로 예편(1973)하게 되었다.
예편 후에는 "김성태와 그 악단"을 창설하여 대중음악계에서 활동했고 군악대 예비역의 친목모임인 해병대군악동우회 회장(2006~2009)을 두 차례 역임하였다.
7.통한의 해병대사령부 해체와 군악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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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10월10일은 국방부 훈령 제157조에 의거 해병대사령부가 해체되는 통한의 날이었다. 창설된지 24년6개월만의 일이었다. 해병대 현역은 물론 예비역들 모두가 흥분하고 슬픔에 잠겼던 날이기도 하다.
아래의 명령서가 박정희대통령의 명에 의하여 유재흥국방부장관 명의로 해병대장 이병문사령관에게 전달된 것이다.
사령부군악대의 해체와 더불어 진해교육기지군악대도 해체되었으며, 사령부군악대 소속 고적대는 제2여단(김포)33대대로 배속되었다.
또한 군악대원들의 일부는 제1사단군악대(포항)와 해군본부군악대로, 일부는 일반병과로 전출되고 장교와 부사관은 대부분 예편하게 됨으로서 해병대 전체에 단위 군악부대로는 포항의 제1사단군악대 하나만 남게 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발생하여 해병대를 사랑하는 많은 국민들을 실망케 하였고 또 언제 사령부가 재탄생될지도 모르는 시련의 구렁텅이로
빠져들게 되었다.
해병대사령부 해체 명령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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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해병대군악대 시련과 도약
(1973~1987)
1. 사령부 해체와 제1사단 군악대
2. 제1사단군악대 모병 및 군악교육
3. 제2사단군악대 창설과 고적대 해체
1. 사령부 해체와 제1사단 군악대
[정대규 중위(해간 58기) 정덕환 준위(현 제2사단군악대장) 김인성(병340기) 박동환(병354기) 전명수(해군 병167기)
의 구술에 기초하여 정리]
1973년10월에 해병대사령부가 해체되면서 사령부군악대와 진해교육기지사령부군악대 등 2개 군악대가 해체되었으며
(김포의 제5여단군악대는 1970년 해체되었음) 부사관 이상은 대부분 예편되고 사병들은 일반병과 또는 제1사단군악대와
해군본부군악대로 편입되어 남은 복무기간을 마치고 전역하였다.
군악대장에는 당시의 대장 김헌경중위(해간48기)가 3개월 후 예편 예정이어서 그 후임으로 해체된 진해군악대장 조영윤
중위(해간 50기)가 포항제1사단으로 전입하게 되었다. 이 시절의 군악대 명칭은 해군해병제1사단군악대였으며 대원은
40여명뿐이었다.
사령부군악대가 없다보니 실질적으로 해병대를 대표하는 군악대였지만 인원이 부족하여 제대로 군악연주회도 할 수 없
었고, 예전의 해병대의 각 군악대 연합으로 대형군악대를 편성하여 멋지게 행사를 치루던 아름다운 전통도 더 이상 이어
나갈수 없게 되었다. 특히 이 시기에 치루어진 국군의 날 행사에서는 해병대군악대만의 위풍당당한 모습을 볼 수 없었기
에 더욱 안타까웠다. 당시 국군의 날 행사는 서울 도심에서 진행되는 행사였지만 해병대 단독으로 참가할 수 없었고 해군
군악대와 합동으로 행사를 치루어야 했다. 따라서 전체 행사병력의 3~4분의1 정도를 해병대에서 담당하는 것에 만족해야
만 했었다.
이후 군악26기(병260기)가 군악대 단체모병의 마지막 군악병 깃수인데 이들이 예편하게 되니까 해병대의 자력으로는 군
악병 모집이 힘들게 되었고 필요한 군악요원이 턱없이 부족하게 되자, 해군에서는1975년11월 해군군악병(해군 병167기=
해병대 병293기에 해당)으로 모집한 신병 17명 전원을 교육 수료 후 포항의 제1사단군악대로 파견근무 발령을 내게 된
다. 이들은 해군군악대에서는 근무경력이 전혀 없이 해병대군악대에서 해군규정 복무기간에 맞춰 복무한 후 예편하게
다.
이들 17명 이외에도 해군에서 해병대로 파견근무케 된 군악요원이 간헐적으로 있었지만 1979년초 예편한 해군의 파견 근
무자를 끝으로 해군군악요원의 해병대군악대 파견은 더 이상 없었다.
제1사단군악대는 제대로 갖춰진 합주실도 없이 군악대 병사 안에서 적당히 연습을 하기도 하고 병사 밖에 나가서 연습을
하기도 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1993년에는(대장: 정덕환중사) 제1사단군악대 역사상 처음으로 군악대 옆에 20평정도
의 합주실을 마련하게 되었고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합주 연습을 시작하였다. 또한 제1사단군악대 연주회를 시작하게 됨
으로서 매년 정기연주회를 여는 계기가 되었다.
1997년에는 180평 규모의 군악대 전용건물이 완성되어 합주실,파트연습실,개인연습실,악기실,악보실,군장실,대장실,부
사관실,내무실 등을 갖추게 되고 그 편리한 환경 속에서 군악대원들의 사기와 긍지, 음악에 대한 열성등이 대단히 높아졌
다고 하겠다. 그간의 제1사단군악대의 업무 내용을 보면 사단 자체 행사와 신병교육대 입,퇴소식.동원예비군훈련 입,퇴소
식,포항시 인근도시와 인접부대의 행사 지원, 해병대전우회 전국 각 지역의 행사, 정기연주회, 모병 홍보순회연주 등 많은
연주와 행사를 실시했고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제1사단 역대 군악대장
군악대장: 김헌경중위(해간48기-"68~) →조영윤중위(해간50기-'73~) →김광은중위(해간55기-'75~) →
정대규중위(해간58기- '77~) →이상은중위(해간62기-'81~) →이동석상사('83~) →김춘배상사('89~) →
정덕환상사('92~) →백승만중사('04~) →허태진중위(해간95기'09~) →김대성중위 (해간95기-"11~) →
2. 제1사단군악대 모병 및 군악교육
제1사단군악대에서는 자체적으로 군악병 모병이 제한되어 병력 충원이 어려웠다. 따라서 신병훈련소를 통해 악기연주
경험자를 선발하여 군악대원으로 임명, 별도의 군악교육 없이 복무하게끔 하였다. 하지만 이런 병력 충원방법은 임시방편에 불과했다. 따라서 1975년 해군군악병 17명을 파견 받았고 이들은 해군에서 신병교육을 마친 후 군악교육은 해병대에서 받게 된다. 그 이후에도 약간명씩 해군에서 군악교육을 마친 해군군악병을 제1사단군악대로 파견했었다. 이 시기의 군악교육이란 것은 음악의 이론과 연주의 기능에 관한 것이 아니었고 기본행사에 활용가능한 행진 간에 필요한 제식훈련이 군악교육의 전부였고 악기에 대한 교육은 거의 이뤄지지 않거나 초보적인 수준으로 진행되었다.
1978년4월부터는 제1사단군악대에서 군악병을 모집하여(병354기 부터) 해병대 신병교육 전반기 6주를 마친 후 해군군악교육대에 위탁하여 8주간(해군군악교육대 42기-정규 16주간)의 군악교육을 이수한 후 해병대군악대에서 복무하도록 했다. 그 이후부터는 해군군악교육대 교육 정규 16주간을 모두 이수토록 하였고 이 군악교육 방식은 해병대사령부군악대
재창설 시기까지 이루어졌다.
1994년에는 군악대 병력을 충원하기 위해 전도봉사단장의 지시로 군악병 모병포스터를 만들어 전국에 배포하는 등 우수한 자원의 군악병 모집을 위해 노력하였다.
3. 제2사단군악대 창설과 고적대 해체
1970년 김포의 제5여단(후에 제2여단이 부대이동)군악대가 해체된 이후 1973년까지는 필요시에 사령부군악대가 행사지원을 했고 1972년에는 제5여단이 제2여단과 통합하여 제2여단(청룡부대)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1973년10월10일에 해병대사령부가 해체되자 사령부 소속이던 16인조 고적대가 제2여단 33대대에 편입되어 보병업무를 수행하다가 행사시에만 고적대 활동을 실시했다. 1975년에는 제2여단본부 소속으로 옮기게 된다. (고적대장: 군악2기 임용술하사서-1974.11.박흥선하사로 )
그 후 1981년4월16일 제2여단이 제2사단으로 승격되면서 고적대를 해체하고 제2사단 군악대(대장: 박흥선중사)로 개편하게 된다. 1970년 제5여단군악대가 해체된 후 11년 만에 군악대가 다시 창설된 것이다. 부대명칭은 제2사단군악대. 병력은 32명으로 편성되었다.
제2사단 역대 군악대장
군악대장: 박흥선상사('81) →서장원중사('93~) →배경남중사 →윤석철중사 →김기호중사 →정덕환준위('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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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해병대군악대 재창설과 부흥
(1987~2011)
1. 사령부군악대의 재창설과 재창설 기념일 (사령부 전 군악대장 박흥선의 구술에 기초하여 정리)
1973년10월10일 해체된 해병대사령부는 우여곡절 끝에 1987년11월1일에 재창설되었고 그로부터 6년 후인 1993년1월4일, 당시 해병대사령관 임종린중장은 김포의 제2사단 군악대장 박흥선(상사)을 해병대사령부 군악대장으로 임명하고 사령부군악대의 재창설을 준비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사령부군악대 해체 후 만 20년만의 감격스러운 일이었다.
박흥선 상사는 군악대장으로 임명은 받았지만 군악대 건물은 커녕 한명의 대원도 편성받지 못했다. 그는 당시 서울영등포구 신길동에 있던 해군본부군악대의 작은 사무실에서 재창설 준비업무를 시작하여 대원모집,악기구입,악보구입등의 예산 확보와 연습 공간 확보 등과 그 이외의 연주상 필요한 많은 것들과 부대비품들, 군악대 내무실 확보 등등을 위해 준비하는데 1년3개월이 소요됐다. 해군에서 해병대 예산을 편성하던 그 시절의 해병대사령부 입장을 생각해 보면 이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짐작할 수 있다.
1993년1월부터 군악병 모집을 했지만 응시자가 부족하여(대부분의 고등학교에 밴드부가 없다보니) 매월 약간명씩을 선발하여 신병훈련 수료 후 제1사단과 제2사단 군악대에 파견근무케 하여 군악대 경험을 쌓게 하는 한편, 5월부터 7인조 캄보밴드를 조직 운영하였는데 이 캄보밴드는 군악병 모집으로 입대한 신병 5명과 제1사단과 제2사단군악대에서 1명씩 차출한 2명 등 7명으로 어렵게 조직하였다.
그동안 힘들게 모집하여 제1사단과 제2사단군악대에서 파견근무한 군악대원들은 11월에 사령부군악대로 복귀하였다.
사령부군악대원으로 우선 42명을 확보, 합주연습을 계속하면서 사령부군악대 해체로 부터 21년 후인 1994년4월15일,
해병대 창설기념일에는 58명의 대원으로 드디어 사령부체육관에서 사령관을 비롯한 모든 장병들이 모인 가운데 대망의 첫 공연을 열게 되었다. 바로 이날이 해병대사령부군악대 재창설기념일이 되는 것이다.
1994년4월15일 당시 군악대의 구성원을 보면 사령부에서 배정한 정원은 20명(상사 1명,중사 1명, 하사 1명,대원 17명)이었으나 58명의 군악대원을 확보, 잠정 운영하여 오던 중 2003년에 와서 40명 선으로 감축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2. 군악대 기반 구축을 위한 노력 (사령부 전 군악대장 박흥선 준위의 구술에 기초하여 정리)
### 군악대 전용 현대식 건물 확보
1993년1월 해병대사령부에는 군악대가 사용할 건물이 없었기때문에 사령부군악대 재창설의 명을 받은 군악대장 박흥선(상사)은 당시 서울영등포구신길동에 있던 해군본부군악대의 작은 사무실에서 재창설 업무를 보기 시작한지 5개월 후에 임시 군악대 건물로 옮기게 된다. 이 곳은 해군본부가 1993년6월17일 계룡대로 완전 이전하기 1개월 전인 5월에 미리 이전한 해군헌병대 건물을 군악대가 임시로 사용하게 되었는데 전기와 수도,난방시설등이 다 끊긴 상태인지라 그 어려움이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전기는 곧 연결되었지만 수도는 해결이 안 되어 급수차를 동원해서 큰 드럼통에 저장하여 사용하였고 겨울에는 난방시설이 없어서 제2사단 전방에서 쓰던 난로를 갖다가 사용하는 등 불편을 겪으며 8개월을 지냈다.
1994년2월 군악대와 의장대는 아직 완공되지 않은 경기도화성군봉담읍 소재의 사령부 신청사로 사령부 전체부서가 입주하기 전에(사령부 전체 부서는 4월에 이전) 미리 입주하게 되었다. 군악대 건물이 별도로 없어서 임시로 기무부대 건물을 군악대 사무실로 사용했으며 1994년4월, 사령부 전체가 신청사로 이전할 때에는 군악대 사무실을 본부대대와 함께 사용하면서 내무실은 본부대대 통합막사를 사용하고 연습실은 체육관 부속건물을 사용하는 등 그 불편함은 계속 이어졌다.
1998년4월(군악대장 박흥선준위)에는 군악대 전용건물을 신축한지 1년여 만에 현재 사용중인 2층짜리 군악대 전용건물로 옮기게 되는데 타군의 군악대 시설(타군군악대는 모두 계룡대에서 신축건물을 사용중 이었음)의 미비점을 보완하여 군악대에 편리하고 적합한 건물을 준공하게 되었다.
해병대군악대 역사상 처음으로 제대로 된 군악대용 건물을 사용하게 된 것이다. 이 건물에는 1층에 70평 규모의 방음시설을 갖춘 대형합주실(녹음실 포함)과 캄보밴드 연습실 1개, 타악기연습실 1개와 개인연습실 6개등의 연습실 시설 및 악기실,악보보관실 등을 갖추었고 2층에는 12명이 사용할수 있는 침상 마루식의 내무실 4개와 8명이 사용할수 있는 침상 마루방 2개등의 내무실 시설 그리고 대장실, 보좌관실 ,행정실, 당직실 등 행정요원 시설이 갖추어져 있는 등 현대식 건물을
군악대 전용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더구나 내무실에서는 동화에서 처럼 창밖에 푸른 산과 호수가 보이는 등 음악과 연결되는 낭만적인 분위기가 조성되어
타군에 비해 가장 늦고 부족했던 후발 우리 해병대군악대가 이제는 타군에 뒤지지않는 훌륭한 군악대전용 건물을 갖게 된 것이다. 이는 해병대군악대의 큰 도약을 위한 작은 첫 걸음이었다.
[아래 사진: 사령부군악대 합주실 연습광경] [자료제공: 前사령부군악대장 박흥선]
### 악기구입과 악보 확보 및 행사예복의 교체
1993년4월 해병대군악대의 이름으로 악기를 구입하게 되었다. 악기 구입을 위해 여러 경로를 거쳤는데 우선 악기편성과 구입내용은 해병대사령부로 보고하였고 구입신청은 해병대-해군경리단-국방부까지 보고하였다. 상급부대의 승인을
얻은 후 최종적으로 코스모스악기점이 납품하기로 결정이 되었으며 1993년9월 코스모스악기점으로 부터 악기를 납품 받게 되었다. 악기는 신청한데로 최신 제품, 최고급 악기가 수입되었으며 악기가 군악대로 납품될 때에는 해군경리단, 해군헌병대 그리고 사령부군악대장이 검수를 담당했다.
(당시 납품 받은 악기는 Piccolo, Flute, Oboe, Bassoon, Alto Sax.Tenor Sax, BaritoneSax. Horn, Euphonium, Trumpet, Trombone. Tuba, Sousaphone, Percussion 일체, Set Drum,T ube Bell, Marimba, Xylophone, Vibraphone, Elec.Guitar,
Elec.Bass, Synthesizer, Grand Piano, Double Bass 등이었다.)
악기만큼이나 군악대에 중요한 것이 바로 악보이다. 악보 확보는 조금 더 특별하고 신중하게 이루어졌다. 악보로는 기존의 관악곡들은 해군군악대 악보를 복사해서 사용했다. 하지만 타군 군악대와 차별화 된 조금 높은 수준의 군악연주에 대한 열망이 컸기때문에 악보 구입과 확보는 중요한 사업중의 하나였다. 당시 편곡료에 대한 세부적인 예산을 수립하고 국내의 수입악보 전문음악사를 통해서 외국의 유명 편곡자들이 현대감각에 맞게 최근에 편곡한 악보를 주문 구입하여 새로운 레퍼토리를 한곡 한곡 늘려 나갔다. 또한 국내 곡이나 군가는 국내의 유명 편곡자에게 의뢰하여 연주하므로서 연주회때마다 관객들에게 새로운 감동을 주는 국민을 위한 해병대군악대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동안의 행사예복은 1961년에 제작되어 처음 3년동안은 고적대만 착용하였으나 그 이후부터는 군악대 전체가 착용하던 행사예복(상의에 접고 펴고하는 빨간 옷깃이 부착된 의상)인지라 너무 오래된 디자인이고 다른 군악대와 어울리다 보면 명찰과 계급이 없어서 식별이 안 되는 등 불편한 점이 많았으나 1998년에는 해병대-해군본부-국방부 복제규정심의위원회를 거쳐 최종적으로 국방부장관의 재가를 얻어 현재 착용중인 멋진 디자인의 행사예복으로 바꿀 수 있게 되었다.
오늘날 현역 군악대원들이 입고 있는 예복은 그 당시 디자인으로 선배들의 역사와 전통이 오늘날까지 자랑스럽게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3. 군악대의 연주 수준 향상을 위한 노력 (사령부 전 군악대장 박흥선 준위의 구술에 기초하여 정리)
### 군악대 연주활동과 연주력 향상을 위한 프로그램 개발
1994년4월15일, 1년전에 재창설된 해병대군악대는 대망의 첫 연주회를 개최하였다.
해병대 창설 제45주년 기념일에 58명의 대원으로 사령부체육관에서 사령관을 비롯한 모든 장병들이 모인 가운데 해병대군악대의 이름으로 실시한 첫 연주회는 모두에게 진한 감동을 전했다. 이때의 감동은 비록 군악대뿐 아니라 해병대 장병전체에게 전해졌고 모두가 하나가 되어 기쁨에 들떠있던 분위기였다. 해병대라는 거대한 조직에서 음악을 통해 우리 군을강하게 단련시키고 격려하는 군악대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다시 한번 해병대 모두가 느끼는 날이었다.
1995년4월20일에는 해병대군악대 제1회 정기연주회를 수원에 있는 경기도립 문화의 전당에서 예비역과 합동공연으로 치루었다.
이날의 군악대 편성은 Piccolo 1, Flute 2, Oboe 1, Clarinet 6, Bassoon 1, Sax.Section 6, Horn 3, Euphonium 2, Trumpet 6, Trombone 6, Tuba(Sousaphone) 3, Percussion 7, Elec.Guitar 1, Elec.Bass 1, Keyboard 1, Vocal 3.
[그날 연주에 참석한 예비역 연주자는 김용기(병72기-Bassoon) 김광길(군악4기-Trumpet) 최선배(군악5기-Trumpet)
김병두(군악6기-Sax.) 김창원(군악6기-Clarinet) 장경성(군악6기-Trumpet) 한창복(군악6기-Trombone) 이익재(군악8기Percussion) 서병익(군악14기-Set Drum) 강남규(군악20기-Clarinet) 맹완일(군악24기-타악기) 김하일(군악25기-Trumpet)님 등이 참여했다]
[아래 사진: 1995년4월15일 사령부군악대 재창설 첫 연주회-군악대 건물 옆 체육관]
[자료제공: 前 사령부군악대장 박흥선]
해병대사령부 자체 행사는 수시로 있지만 매년 정기연주회를 년1회로 설정하여 서울이나 수원의 대형 공연장에서 공연을 마친 후 모병선전을 겸하여 그 프로그램으로 전국 대도시 순회공연을 하고 있으며 이 이외에도 서해도서 주민 및 장병위문공연, 2000년대 중반부터는 "찾아가는 음악회"로 소도시나 문화 소외지역 주민을 위한 공연을 함으로서 대민봉사활동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
1973년에 해병대사령부가 해체된 이후, 해병대군악대는 해군군악대에 소속되었고 해병대에서 뽑은 군악병도 해군 군악교육대에서 8주간의 교육을 마치고 해병대군악대로 배치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교육제도는 군악대 운용에 제한사항으로
제기되어 1996년부터는 해병대군악대 자체에 군악교육대를 신설하여 4주간 교육을 수료하면 군악대로 배치되도록 교육제도를 개선시켰다. 이후 해병대군악대에서는 군악병의 연주력 향상을 위해서 자체적으로 실기교육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악기별로 음대교수와 교향악단의 유명 연주자를 강사로 초빙하여 정기적으로 대원들을 지도함으로서 대원들의 연주력 향상에 노력하고 있다.
초빙강사 중 해병대군악대 출신으로서는 김광길(군악4기-트럼펫 지도) 김병두(군악6기-색소폰 그룹지도) 맹완일(군악24기-타악기 지도)등이 강사로 참여했었다.
참고로 해군군악대에서는 1954년부터 매년 해군사관학교졸업반 생도들의 원양항해 훈련함대에 동승하여 약 3개월간 기항지마다 그 나라 항구도시에서 의장대시범과 시가행진 및 군악연주를 실시하였다. 외국인에게 대한민국의 전통과 문화
그리고 한국군 군악대를 알리는 의미있는 기회에 우리 해병대군악대와 의장대도 2002년부터 동참(당시 6명 참가)하여 군문화사절단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4. 2011년 해병대군악대 주요 활동
2011년 해병대군악대는 지난 60년 선배 해병대의 역사와 전통을 더욱 값지게 빛내기 위하여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해병대와 그 규모나 지원면에서 큰 차이를 보이는 타군 군악대와 같은 걸음으로 나아가기 위해 오늘도 늦은 밤까지 해병대군악대 합주실에서는 음악소리가 흐르고 있다. 2009년 장교 2명을 군악대장으로 선발하여 타군 군악대와 같은 위치에서 같은 크기의 목소리로 소통하고 있다.
진해군악의장페스티벌, 원주 따뚜, 계룡 군문화축제 등 국내 주요 관악행사에 참가하여 해병대군악대의 음악적 실력을 키워 나가고 있으며 제주도, 백령도 등 해병대 주둔 주요 도서지역 순회연주를 통해 장병들을 격려하고 해병대와 동고동락을 함께 하는 지역 주민들에게 감사함을 전하고 있다. 또한 도솔산 전승기념행사, 군산 장항 이리지구 전승기념행사, 인천상륙작전 및 서울수복 기념행사 등 우리 해병대의 주요 전투 전승 행사에 참가하여 우리 해병대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더욱 빛내고 있다.
5. 군악대 재창설과 부흥기 주요 인물
### 해병대군악대의 살아있는 역사 박흥선 준위
1973년12월3일 해병대에 부사관으로 입대한 박흥선은 부사관 교육 후, 제2여단(김포)소총소대에서 분대장 직책으로
6개월간 복무한 후인
1974년11월, 제2여단 고적대장으로 임명되었다.
1975년6월에는 33대대에 소속되어 보병업무와 고적대업무를 병행하던 고적대를 여단본부 소속으로 이전케 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1981년4월에는 제2여단이 제2사단으로 승격되면서 16인조 고적대를 해체하고 제2사단군악대가 창설될 때, 박흥선(중사)
은 제2사단군악대장에 임명되면서 군악대 편성을 32인조로 확대 조직하게 되었다.
제2사단군악대 창설시 고적대용 악기만 있고 군악대용 악기가 없는 관계로 해군본부군악대를 왕래하며 중고악기
를 지원받아 사용하기도 하는 등 군악대 운영에 많은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1993년1월4일, 당시 사령관 임종린중장의 명을 받아 사령부군악대장으로 임명되어 1년3개월의 준비기간을 거쳐
1994년4월15일 사령부군악대 창단연주회를 함으로서 이루 말할 수 없는 난관을 헤쳐가며 부사관의 입장에서 해병대를 대표하는
사령부군악대를 재창설해 낸것이야 말로 해병대 사나이 박흥선, 그가 이루어 낸 해병대군악대 전체의 쾌거라 아
니할 수 없다. 1973년에 입대하여 해병대를 위해 헌신한 공이 인정되어
1996년9월에는 원사,
1998년8월에는 준위로 진급하였으며 박흥선은
2010년3월29일, 군악동우회원 31명을 포함, 많은 친지와 전우들의 축복속에서 37년간 정든 해병대를 자랑스럽게 떠나는 정년 퇴
임식을 가졌으며, 이로써 해병대군악대 60년사상 제2사단과 사령부군악대 재창설등 군악대 창설 2개 부대와 군 악대 사상 최장수 복무 기록도 갖게 되었다.
### 새로운 도약을 향한 힘찬 걸음 김대성 중위 & 허태진 중위
우리 해병대군악대에서는 1983년 제1사단군악대장으로 예편한 이상은중위(해간 62기)를 끝으로 군악장교를 모집하지 못했다. 그 후 26년동안 해병대군악대는 타군 군악대장과의 계급 차이로 그 능력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부분이 많았다. 이는 해병대군악대의 성장을 막는 요소로 작용하기도 하였다. 이에 해병대도 외형적인 모습을 타군과 같은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군악장교를 선발하였다.
2009년에 사관후보생 106기(해간95기)로 김대성(경희대음대 Trumpet)소위와 허태진(연세대음대 Trombone)소위 등 두명의 군악장교가 임관하면서 26년동안 끊어졌던 군악대 역사의 맥을 이어 나가기 시작했다. 비록 군악장교의 편제 편성이 없어서 정훈장교편제로 입대하여 군악대장의 업무를 수행하고는 있으나 언젠가 군악장교 편제가 반영되고 해병대군악대가 비상할 그날을 준비하고 있다. 군악대의 도약을 기대하는 많은 사람들의 노력과 소망으로 특별하게 선발된 두 장교는 사령부와 제1사단에서 각각 군악대장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특히 허태진 중위는 해병대 군악병 출신으로 해병대와 군악대에 대한 애착이 대단하고 대원들의 고충을 그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며 군악대를 이끌고 있다. 그는 군악대가 음악을 통해 해병대의 자긍심을 고취시키고 군악병들이 꿈을 이루어
나가며 음악인으로 성장할 수 있는 또 다른 음악학교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또한 김대성중위는 경찰악대에서의 음악적 경험을 바탕으로 군악대와 경찰악대의 차이들을 살펴 군악대에 적용하고 있으며 본인의 전공악기인 트럼펫을 늘 연습하는 모습으로 대원들에게 본보기가 되고 있다.
김대성중위는 사령부군악대장으로, 허태진중위는 제1사단군악대장으로 복무하다가 2011년5월에는 김대성중위가 제1사단군악대장으로 허태진중위는 사령부군악대장으로 임지를 교체복무하게 되었다.
*** 맺는 말 ***
창설 초기인 1950~60년대에는 해병대에 4개 군악대가 있었다. 이후 해병대가 시련을 겪었던 1970~80년대에는 제1사단에 제1사단군악대 혼자서 그 명맥을 이어 나갔다. 해병대가 새로이 도약하던 1990년대 군악대는 다시 3개의 군악대로 편성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제 우리 모두의 노력이 필요한 시기이다. 군악대 구성원 모두는 수준 높은 군악대로 거듭나기 위해 이전보다 더 많은 시간을 연습하고 좋은 교육프로그램을 연구하고 개발하는 등의 투자가 이루어져야 한다.
변화가 없는 과거의 답습은 또다시 시련을 겪게 할 것이다.
해병대군악대의 새로운 역사를 기대하는 많은 이들의 꿈과 소망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군악대 모두의 노력이 절실함은 물론이고 해병대 전 장병의 관심과 지원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우선 연주인원이 음악적으로 이해가 되는 현실적인 인원으로 편성되어야 하겠고 지속적으로 연주능력을 향상시켜 운용 가능한 군악 간부도 많이 양성하여 선진국처럼 수준높은
군악대와 같은 모습으로 성장해야 하겠다.
지난 60년동안 창설과 해체를 반복하는 과정에서 해병대군악대는 너무 많은 것을 잃었다. 그 모진 풍파를 이겨내며 우리
군악대는 어느덧 60살 장년의 군악대로 성장하였다. 이제 지난 날 잃어버린 아픈 역사와 시간은 잠시 접어두고 더 먼 내일을 바라보고저 한다. 비바람을 모두 이겨내고 성장한 뿌리깊은 튼실한 나무와 같이 우리 해병대군악대가 더욱 튼튼하게 자리매김하고 푸르게 빛나기를 기대하면서 후배들의 걸음 걸음을 격려와 응원으로 함께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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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12월1일 제주도에 해병대 제9여단이 창설됨과 동시에 제9여단 군악대도 창설되어 현재 해병대에는 과거처럼
4개 부대의 군악대가 활동하고 있다.
1. 사령부 군악대 (봉담)
2. 제1사단 군악대 (포항)
3. 제2사단 군악대 (김포)
4. 제9여단 군악대 (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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