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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데뷔를 원하는 예비 작가들의 소설을 심사할 때가 있는데 컴퓨터로 써 온 원고는 대번에 알아챌 수 있지. 컴퓨터 냄새가 나거든. 개인적인 바람이라면 젊은 작가들이 소설을 쓸 때 원고지에 쓰고 그 다음에 정리만 컴퓨터로 했으면 좋겠어.” 두 작가의 생각을 인용한 글이다. 앞의 글은 김훈의 수필집 <밥벌이의 지겨움>에서 일부를 따 왔고 뒤의 말은 최인호가 어떤 언론매체와 나눈 인터뷰의 한 꼭지이다. 대한민국의 산문 문학에서 빼 놓을 수 없는 거물들. 오늘을 사는 이 땅의 사람 치고 이분들의 소설 한권쯤 안 읽어 본 사람이 있을까? <칼의 노래>나 <상도>를 읽은 사람들은 그 독특한 문채와 유려한 입담에 누구 할 것 없이 혀를 내둘렀을 것이다. 인용된 글에서 짐작했겠지만, 이들 작가의 공통점은 컴맹이다. 한 사람은 연필로, 한 사람은 만년필로 원고지를 메우는 차이만 있을 뿐이다.
아직도 컴퓨터의 도움을 받지 않는 글쓰기가 가능하다니? 그러면서도 그들이 생산해 내는 글의 양을 생각하면 실로 경이로운 일이다. 온몸으로 한 자 한 자 밀어서 적어 가는 우직함과, 생각의 궤적을 흐트러짐 없이 문자로 형상화해 내는 달인의 내공이 아니고서야 흉내도 내지 못할 일이다. 당연히 그들의 글에서는 워드 프로세서에서 뽑아낸 글에서는 맡을 수 없는 성찰과 사색의 곰삭은 향기가 난다. 마우스의 오른쪽 버튼을 클릭해서 복사하고 옮겨 붙이는 성형수술과 짜깁기의 흔적도 있을 수 없다. 항간에 논란거리가 되고 있는 자기복제나 표절, 중복의 개연성도 거의 없다. 아날로그의 글쓰기는 그만큼 둔할지언정 순도가 높다. 디지털 기술에 아날로그의 체온을 담은 디지로그
자타가 고루 인정하는 대한민국의 대표 정보통신 회사 SK텔레콤의 기업광고 “사람을 향합니다” 캠페인도 바로 그러한 사례의 전형으로 볼 수 있다. 2005년 추석 연휴 어름해서 브라운관에 얼굴을 내밀기 시작한 연작 광고들이 그것이다. ‘새로운 세상을 만날 때는 휴대폰을 잠시 꺼두셔도 좋습니다.’ ‘꼭 011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라는 광고카피에 담겼던 일등의 여유와 느림에 대한 찬미가 다시 부활한 듯하다. 새삼스레 칭찬받아 마땅한 기법은 아니지만 흑백 톤의 질박한 화면도 광고의 깊이와 운치를 한껏 높이고 있다. 세월의 더깨를 얹은 초라한 시골역의 정경과 남북한 할머니의 무감한 시선....그 너머로 흘러나오는 비틀즈의 ‘렛잇비(Let it be)’는 전혀 예상 밖의 충격이었다. 애써 기계를 밀쳐 버리고 영상연출의 군더더기를 걷어낸 앵글에 비쳐진 투박한 손마디, 주름진 얼굴, 무심한 몸짓들… 그 행간 사이사이로 사람이 보였다.
<북한 화상전화>편과 함께 방영된 <손가락>편도 독특했다. 우선 다른 광고에 비해 유난히 긴 러닝타임이 눈에 띈다. 분명 이동통신회사의 광고인데 휴대전화 하나 등장하지 않고 꽤 긴 시간 동안 그냥 손의 움직임만 보여준다. 휴대폰이 들려있지 않아도 손의 움직임만으로 문자메시지를 통해 수다를 떨고, 결심을 하고, 화를 내고, 어떨 때는 사랑을 고백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문자메시지는 단순한 글이 아니라 사람의 기분과 감정까지 전달하는 메신저로서 사람을 향해 진화한 기술의 절정임을 그런 식으로 말하고 있다. “기술 안에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을 향합니다. SK Telecom.”으로 마무리 되는 자막 카피가 그런 컨셉을 분명하게 확인시켜 준다.
주체할 수 없는 집단흥분, 현란한 테크놀로지의 오로라가 사라진 자리에 아날로그식 광고는 진짜 휴머니즘의 아우라를 드러냈다. “축구는 인생, 아니 전쟁. 누군가에겐 일, 가슴을 울리는 뉴스거나 드라마. 대한민국 사람의 희망을 응원합니다. 사람을 향합니다.”라는 카피의 <축구>편도 월드컵의 열기로 들떠 있던 2006년, 6월의 안방에 잔잔한 감동으로 다가왔다. “사람의 손은 들리지 않는 이야기를 합니다.”라고 말하는 <스킨십>편, “기술은 길입니다. 찾아나서는 건 사람입니다.”라는 <미아찾기>편 등도 기술은 궁극적인 답이 될 수 없고 결국은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는 당연한 명제를 영상으로 일깨워 주고 있다. 싸움의 장을 바꿀 여유와 통찰이 있는 자에겐 전혀 다른 화두와 그것을 말하는 이야기 솜씨가 자연스레 따라온다. 인간과 인간의 소통을 전하는 이야기 솜씨
하지만 이 광고는 어딘가 허한 느낌을 남긴다. 광고는 어디까지나 ‘우아한 제안’으로만 그칠 우려가 높다. 현실의 제품이 그러한 주장을 뒷받침하지 않으면 SK가 주장하는 ‘고객의 행복’은 공염불일 수 있다. ‘싸가지’ 없는 몇몇 디지털 기능들을 없애는 것으로 아날로그의 유토피아는 쉽사리 실현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만 우리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발견되고 있는 몇몇 디지로그의 풍경들을 참고삼아 해법으로 귀띔할 따름이다. MSN 메신저에 추가된 ‘잉크’ 대화 기능, 셔터 소리와 수동 기능을 갖춘 디지털 카메라, 한국인 고유의 사이 문화에 문화 마인드를 입힌 싸이월드의 일촌맺기 캠페인, 아이포드(ipod)와 아이튠스(i-tunes)의 기술력을 결합한 애플의 MP3 등등…
현재 동의대학교 광고홍보학과 교수. 제일기획 등의 광고대행사에서 카피라이터와 크리에이티브디렉터로 일하면서 다양한 광고를 제작하고 브랜드를 세상에 기억시키는 일을 해 왔다. 저서에 <광고,묘약인가 마약인가?> <광고발상과 전략의 텍스트> 역서에 <광고글쓰기의 아트> 등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