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면 감정을 소화시키기 위해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결국 “부처님하고 중생이 똑같지만 중생은 번뇌망상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수도라고 하는 것은 마음속의 번뇌망상을 녹이기 위해서 하는 거 아닙니까”하고 결론짓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말은 틀린 말은 아니지만 꼭 맞는 말은 아닙니다. 그 말대로라면 10년 전에 공부를 시작했다면 지금 번뇌망상이 다 녹여져야 합니다.
그런데 그대로 있거든요. 왜 그럴까요? 그것은 지혜가 부족해서 그렇습니다.
뭘 모르고 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럴 때 어떻게 해야 됩니까? 번뇌망상이 있기 때문에 번뇌망상을 녹여야 된다는 생각이 잘못입니다.
번뇌망상은 본래 없는 겁니다.
‘저는 많은데요’ 하겠죠? 그것은 착각입니다.
어떤 사람이 물었습니다.
“번뇌망상에서 어떻게 하면 벗어나겠습니까?”
선지식이 껄껄 웃으며 “미친 놈아!”하거든요.
그러자 제자가 이렇게 묻습니다.
“번뇌망상이 많아 그 번뇌망상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하는데 왜 미친 놈이라고 합니까?”
“없는 것을 있다고 하니 그러지. 허공에 페인트칠을 해 봐라. 허공에 아무리 칠한들 칠해지냐?”
이 비유에서 알 수 있듯 실제로 번뇌망상이 없습니다.
그림자 살짝 비친 것일 뿐인데 그림자에 사로잡히니까 문제입니다.
마치 호수에 비친 달을 붙잡겠다는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감정에 사로잡히면 현실이 안 보입니다.
현실을 볼 때 특별한 기술이 필요하나요?
기술이 필요 없죠.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면 그 생각만 털어 버리면 됩니다.
단지, 놓치지 말고 현실을 바로 보라 이 말입니다.
우리는 몸은 현실에 있는데
머리 속엔 지나간 과거, 오지 않은 미래로 가득
차 현실이 안 보입니다.
이렇게 슬픈 일이 어디 있어요?
먼 곳이라면 할 수 없지만 제일 가까운 자리를 못 보니 말입니다.
깨친 선지식에게 물어보면 “나는 가장 가까운 곳을 바로 봤다”고 합니다.
생각하면 가려서 안보입니다. 생각이 생사(生死)입니다.
화두는 “지금 이 자리를 바로 보아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온갖 생각을 하다보니, 목전(目前)의 이것이 안 보입니다.
처음엔 뭔가 나올까 싶어 눈감고 있어 보지만 아무리 찾아도 도저히 안나옵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기진맥진해 가지고 자기도 모르게 모든 생각에서 벗어날 때가 되었을 때,
그때 법당에서 덩~ 종치는 소리를 들었을 때, 아차 이제 보니 종소리구나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항상 종소리였는데 몰랐구나 하고 웃음이 나오게 됩니다.
두두물물(頭頭物物)이 다 불법이고 진리 그 자체라는 말입니다.
몰랐을 때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는데 이제 생각에서 벗어났다는 겁니다.
그러니 생각에서 벗어나서 밥할 때는 밥하는 모습, 일 할 때는 일하는 모습,
항상 그때그때 목전과 하나가 돼라 이 말입니다.
수행이라고 특별한 모습, 특별한 장소가 없습니다.
걸림없이 살고 쓸데없는 생각만 멈춰라
목전을 똑바로 직시하면서 10년을 한다면 10년 후에는 얼굴이 확 달라집니다.
생사해탈 해 버려요.
이게 거짓말이 아닙니다.
(출처 - 지유스님 / 아비라카페 알맹이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