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이버 지식백과] 양천룡 [梁天龍] (두산백과)
상훈과 추모
1441년(세종 23) 충효의 정문(旌門)이 내려지고, 편액 ‘대방군 문하시중 남원양공천룡 충효지려(帶方君 門下侍中 南原梁公天龍 忠孝之閭)’는 예조판서 민의생(閔義生)이 썼다.
당초 충효문은 목조 기와 다포집 2평으로 세워져 있던 것을 1955년 도로 개설 공사로 철거하게 되자, 남양양씨 문중에서 충청북도 옥천군 청산면 명티리 가사목으로 옮겨 관리하다가 1989년 다시 남원으로 옮겼다. 현재 양천룡의 정려는 전라북도 남원시 송동면 송상리 문치고개 위 남원-송동 간 길가에 위치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양천룡 [梁天龍]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양천룡(梁天龍)
[상세내용]
생졸년 미상. 본관은
남원(南原), 호는
운룡(雲龍).
조부는
한림학사(翰林學士) 양준(梁俊)이고, 부친은
판도판서(版圖判書) 양우(梁祐)이다.
고려(高麗)의 효자로
공민왕(恭讓王) 때 벼슬이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렀다.
고려의 세력이 기울자
남원(南原) 땅에 은거하며 1395년(태조 3) 정2품(正二品)
집현전대제학(集賢殿大提學)을 제수하여 세 번이나 불렀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조선 조에는 벼슬하지 않고 부모가 병으로 연이어 돌아가시니 시묘살이를 6년간 하였다. 이에 1442년(세종
24)
남원에 정려(旌閭)가 내려졌는데, 1928년 철로공사로 철폐되고 충효문(忠孝門)이 1955년
충북 옥천군 청산면 삼방리에 이건(移建)되었다.
위 자료에서 보듯이 天龍(문하시중派祖)할아버지께서는 남원에 은거하시며 지극하신 효행으로 후세에 귀감이 되게 하셨고.
또 6년간의 시묘살이를 했다는 것은 둘째 아드님이시면서 부모님을 직접 모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다른 파조에서 동방의 백의,숙제로 표현 하고 있는 선조가 10세 (祐)할아바지라기 보다는 11세(天龍)할아버지이시며
시묘살이 6년 이후 다시 보은 俗離山(속세를 떠나있는 산이라는 뜻)에 은거 하셨고 이후 시중공파는 보은 속리산 일대(마로면 갈전리(증산) ,속리면,삼승면 달산리 등에 삶의 터전을 마련하게 되었다.
후손들이 가슴에 새겨야 할 부분은 다른 파조가 서로 자기 직계 조상님들을 크게 부각 시키고 있으나 시중공 할아버지 후손들은
이를 다분히 소흘히 여기는게 아닌가 하는 점에 대해 너무나 안타깝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