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지탐방 일정 : 2024년 10월 3일(목)
▶장소 :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 가이드안내: 100주년 기념교회 & 윤석경집사
선교사소개(실내영상물)->묘원안내->양화진홀 코스로 보통 1시간 30분 소요되는 코스
▶ 일정
오전 6시 교회출발
오전 10시 30분 묘원도착
탐방 : 11시~ 12시30분
점심 : 오후 1시~2시 합정역 주변 식당가에서 조별식사
오후 2시 30분 묘원출발
오후 7시 교회도착
▶ 교통편
45인승 버스 2대
탑승인원 : 90명 / 등록자 64명 + 스탭및 교역자 10명 + 16명( 회비 3만원 : 미션스쿨 1기 수료자 우선)
양화진 외국인선교사 묘원 : 링크 연결
양화진의 역사
안내 참배객 100만명 기념 동영상
명칭: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위치: 서울시 마포구 합정동 144
면적: 13,224㎡
안장자 수/국적: 417명/15개국(남아공, 뉴질랜드, 덴마크, 독일, 러시아, 미국, 스웨덴, 영국, 이탈리아, 일본, 캐나다, 프랑스, 필리핀, 호주, 한국)
최초 안장자: 1890. 07.28 J.W.헤론
관리: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교회
양화진의 역사적 배경
양화진, 버들꽃나루, 한강을 중심 무대로 삼은 조선왕조에서 교통과 국방의 요충지였습니다. 양화진의 깊은 강물에는 대규모 선박들이 하역할 수 있어서 제물포로 들어오는 전국 각지의 생산물이 양화진을 통해 도성과 궁궐로 배분되었습니다. 반면 이러한 천혜의 입지조건으로 인해 양화진은 한성을 넘보는 외적들이 쉽게 들이닥칠 수 있는 국방의 취약지이기도 했습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양화진의 전략적 중대성은 더욱 부각되어 영조 30년에(1754) 군사적 주둔지로서 군진(軍陣)의 설치가 완료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한 때 그 명칭이 양화진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구한말 조선과 서구 세력의 물리적 충돌은 주로 수상(水上)에서 일어났는데 양화진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대원군의 천주교 탄압을 응징하고자 프랑스 군함 세 척이 1866년 3월에 양화진까지 침범했다가, 같은 해 10월 강화도에서 패퇴하는 병인양요가 발생하였습니다. 이 사건으로 대원군의 척화 의지는 더욱 강화되었고 천주교도들에 대한 박해도 극심해졌습니다. 대원군은 양이(洋夷)에게 더럽혀진 한강을 사교(邪敎)들의 피로 씻는다고 하면서 양화진 앞 강물을 천주교도들의 피로 물들였습니다. 양화진은 갑신정변(1884)에 실패하고 일본으로 망명했던 개화파의 거두 김옥균(金玉均) 이 1894년 조선 왕실에 의해 능지처참되어 효시 당한 곳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양화진은 낯선 서구의 물결과 조선의 묵은 정신세계가 순순히 합류하지 못하고 충돌하여 엄청난 파장을 일으킨 곳이었습니다.
외국인 묘지로서 양화진의 시작
대원군의 섭정을 종식시키고 고종의 친정체제를 구축한 민비와 외척들은 왜국의 빗장을 벗기고 서구열강들과 국교를 수립하였습니다. 이러한 지각변동을 틈타 주로 영어권의 개신교 선교사들이 조선의 복음화를 목표로 제물포에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갑신정변 (1884) 당시 민영익(國 )을 구사일생으로 살려낸 서양 의사 알렌(Horace Newton Allen)덕분에 선교사들과 왕실 사이에 밀접한 관련이 맺어지고, 이는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광혜원 의 설립으로 이어졌습니다. 금 교령(敎令)으로 인해 복음전파가 허락되지 않았으므로 선교사들은 주로 서구의 의료와 교육, 자선 사업을 통해 봉건적인 조선사회에 침투하고자 하였습니다. 당시 조선의 반기독교적인 정서의 영향으로 선교사들은 직접적인 개인전도보다는 사회 제도 전반에 걸친 간접적인 선교를 모색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것은 결과적으로 교회사가 추후 민족의 역사와 얽히는 근거가 되었습니다. 한편 알렌에 이어서 광혜원(廣惠院)의 원장이 된 헤론(Heron, John W.)은 전염병에 걸린 환자들을 돌보던 중 자신도 이질에 걸려 1890년 7월 26일, 40 세로, 삶을 마감하였습니다. 당시 헤론의 시신을 어디에 매장할 지가 화급한 문제로 제기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삼복더위 중에 시신을 당시 유일하게 외국인 묘지로 사용되던 제물포까지 옮기는 것은 불가능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에 유족과 선교사들은 미국 공사 어거스틴 허드 2세(Augustine Heard II) 를 통해 한성 가까운 곳을 매장지로 해줄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이때 마침 조선은 통상지역 안에 외국인의 묘지를 무상으로 조성해야 한다는 수호통상조약을 영국과 체결하고 있었는데, 미국 공사 허드는 최혜국 조관를 근거로 헤론의 매장지를 한성 가까운 곳에 요구했던 것입니다. 이에 조선독판교섭통상사무 민종묵 과의 급박한 서신 왕래 끝에 양화진이 매장지로 정해졌습니다.
외국인 선교사 묘지로서의 양화진
양화진에 묻힌 분들 가운데는 일제 암흑기 한민족을 위해 자신의 인생을 헌신했던 선교사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전도 양양한 젊은이로서 모국에서 누릴 수 있었던 수많은 권리들을 포기하고, 당시 세상에서 가장 덜 알려졌던 나라 'COREA'에 복음의 빛을 나누기 위해서 헌신했습니다. 이들은 병원과 학교의 설립과 같은 사회제도에서 뿐만 아니라, 신분제와 남존여비 관습의 철폐와 같은 무형의 정신 세계에서도 한국민에게 심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더욱이 일부는 일제의 무단강점을 한국민과 같이 아파하였고 한국의 독립을 위해서 기꺼이 위험을 감수하였습니다. 우리는 이들을 통해 뿌려진 복음의 씨앗들이 모늘날 한국교회와 사회 전반에 걸쳐서 어떠한 열매들을 맺고 있는지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한국기독교 100주년 기념사업협의회 에서는 이러한 양화진의 참된 정신을 계승하고 보존하기 위해서 100주년 기념교회를 설립하였습니다. 서울시와 마포구청도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을 조성하고 지금은 양화진의 국가 사적지 지정을 위해서 힘쓰고 있습니다. 외국인 선교사 묘지와 천주교의 양화나루 . 잠두봉 사적지를 연결해서 양화진 일대를 세계에서 보기 드문 신 · 구교 만남의 성지로 조성하려는 것입니다. 복음의 씨앗으로 이 땅에서 썩어지고 양화진에 묻혀있는 선교사들의 삶은, 선교 200 주년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한국 교회의 소중한 자산이자 밑거름입니다. 또한 이곳은 한민족의 지난했던 근대사를 반추해 볼 수 있는 사색의 공간이기도 합니다. 양화진을 한국 교회의 성지로서 또한 민족사의 기념비적인 장소로서 기억하고 속하는 것은 우리 시대의 요청입니다.
안장된 인물들
대한매일신보의 발행인 어니스트 베델(배설), 장로회 선교사이자 연세대학교 설립자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배재학당의 설립자인 헨리 아펜젤러, 이화학당의 설립자 메리 스크랜튼, 연세대학교 세브란스병원의 설립자 더글러스 B. 에비슨, 감리회 선교사이자 독립운동과 한글 발전에 큰 역할을 한 호머 헐버트 박사, 대한제국 애국가를 작곡한 음악가 프란츠 에케르트의 묘도 여기에 위치하여 있다. 최초로 안장된 인물은 헤론(J.W.Heron)으로, 1890년 7월 28일이다.
외국인 개신교 선교사 묘지라는 이미지 때문에 구미권 출신 인사의 묘만 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소다 가이치(曾田嘉伊智, 1867~1962)라는 일본인도 안장되었다. 처음엔 YMCA의 일본어 교사로 활동하다가 이후 감리회 전도사로 활동하였으며, 한국의 독립을 지지했고 용산구 후암동의 가마쿠라보육원(현 영락보린원)에서 한국인 고아들을 보살폈다. 8.15 해방 후 1947년 일본으로 돌아갔다가 1961년 다시 내한했고, 1962년 3월에 영락보린원에서 향년 95세를 일기로 소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