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에 대한 불만은 다른 모든 것들로 이어졌다.
혼잡한 버스와 기차, 누추한 게스트하우스보다 더 견디기 힘든 것은 그의 끝없는 불평이었다. 천정에 붙은 초록색 도마뱀은 재앙이
었다. 갑자기 퍼붓는 소나기는 저주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는 새로운 장소에 도착하면 지난번 장소가 훨씬 나았다! 불편함에
흔들리면서도 아름다운 것을 찾아 나가는 것이 여행일 텐데도…...
전염성 강한 그의 불만은 내 안의 기쁨을 꺾어 버렸다. 그가 기차역에서 산 조금 못생긴 케샤르 망고에 대해 투덜거리는 순간, 나는
더 참지 못하고 그를 잠깐 기다리라 하고는 구름다리 건너 맞은편 플랫폼으로 가서 아무 기차나 올라타고 떠나 버렸다. 두 달 후
한국에 돌아와 보니 그는 일찌감치 귀국해 있었다. 그를 그렇게 미아처럼 기차역에 두고 떠난 일이 두고두고 미안해 그 이후 만날
때마다 내가 밥을 샀다.
세상과의 불화가 나날이 늘어날 때 혹시 기쁨의 근원이 내 내면에서 줄어든 것이 아닌가 의심해 봐야 하지 않을까? 삶에 대한 신뢰와
열정이 식은 것은 아닌가도. 나 역시 기쁨의 샘이 말라 있을 때 내가 가는 길들은 불만과 실망으로 얼룩졌다. 자존감과도 멀어졌다.
처음 티베트를 여행할 때 나는 고산병이 심해 거의 아무것도 먹을 수 없었다. 시가체의 타쉬룬포 사원을 향해 걸어갈 때였다. 허기에
지친 내 시야에 오두막 앞에 앉아 무엇인가를 먹고 있는 티베트인들이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감자였다.
말이 통하지 않았지만 몸짓과 표정을 보고 그들은 내가 원하는 것을 이해했다. 그날 그 티베트인들과 함께 양지바른 곳에 앉아 껍질을
벗겨 가며 삶은 감자를 먹던 일을 잊을 수 없다. 옷차림과 행색으로 보아 무척 가난한 사람들이었는데도 불행한 기색이 조금도 없었다.
말과 몸짓이 자연스럽고 평화로웠다. 우리는 계속 웃었다. 나는 그들이 정말 좋은 사람들이라는 걸 느꼈다. 중국의 침략을 받아 모진
고통을 겪은 사람들이 어떻게 그렇게 내면의 기쁨을 잃지 않을 수 있는지, 어떻게 원망과 증오로부터 자신의 영혼을 보호할 수 있는지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세상에 대한 불만이 아니라 세상에 대한 애정으로 채식을 실천하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자신이 하는 일의 원천이 무엇인지 스스로
물을 필요가 있다. 자아의 한가운데서 우러날 때 감정과 감수성에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새가 하늘을 만나면 기쁨의 근원과 하나가
된다.
얼마 전 읽은 이야기가 있다. 프랑스인으로 파스퇴르연구소의 촉망받는 분자생물학자였다가 서구 문명을 등지고 히말라야 산으로
들어가 티베트 불교에 입문한 마티유 리카르는 네팔에서의 일을 들려준다. 어느 날 그는 사원 계단에 앉아 있었다고 한다. 우기의
폭풍우가 불어 사원 안마당이 꽤 넓게 진흙탕으로 변해 있었고, 드나드는 사람들을 위해 승려들이 벽돌 징검다리를 놓았다.
그때 한 친구가 사원 입구로 들어왔다. 그녀는 진흙탕과 군데군데 놓인 벽돌들을 불만스럽게 바라보더니 징검다리 하나하나마다
투덜거렸다. 마티유가 있는 곳까지 건너온 그녀는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에이, 저 더러운 진흙탕에 빠지면 어쩌라는 거야? 하여튼 이 나라는 모든 게 더러워!"
그녀를 잘 아는 마티유는 위안을 주기 위해 무언의 동의를 표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몇 분 뒤 또 다른 친구가 사원의 입구에 들어
왔고, 그녀는 노래를 부르며 진흙탕 길의 벽돌 징검다리를 하나씩 건넜다. 그리고 마른 곳에 이르자 탄성을 지르며 말했다.
"정말 재밌어!"
그러고는 기쁨으로 눈을 빛내며 덧붙였다.
"장마철의 좋은 점은 먼지가 하나도 없다는 거야!"
어느 곳이든 세상을 한번 보라. 완벽한 곳은 없다. 또한 아무리 부정하거나 외면하려 해도 아름다운 것을 한 가지라도 발견할 수
없는 곳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일화를 전하며 마티유는 말한다.
"두 사람이 있으면, 사물을 바라보는 두 가지 방식이 있게 된다. 60억의 사람이 있으면 60억 개의 세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