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을 '3·1혁명'으로!!!
자랑스런 역사에 올바른 이름을 붙여주세요.
(2.28까지 20만명 서명 목표)
▶ 청와대 서명 참여하기 ☞ http://bit.ly/2SeD0R5
1919년 '3·1혁명'은,
참여 인원이 2백만여 명에 만세 시위 건수가 1,542회, 사망자가 7,509명, 부상자가 15,961명, 체포된 사람이 46,948명이라 합니다.
(「함께 보는 한국근현대사」)
이제라도 우리는, 저렇게 많은 선열들이 목숨 걸고 투쟁했던 역사에 바른 이름을 붙여야 합니다.
자주 독립을 위해 희생하신 분들의 정신과 활동을 올바로 기록하고 기념해야 합니다.
'3·1운동'을 '3·1혁명'으로 바꿔달라는 20만 서명에 동참해 주시고,
널리 널리 전파해 주세요.
○ 제안자 : 3.1혁명 100주년 기념 범시민 추진위원회
▶ 청와대 서명 참여하기 ☞ http://bit.ly/2SeD0R5
아래는 '3·1운동이 아닌 '3·1혁명’이라고 바른 이름을 붙여야 하는 이유입니다. (이하는, 김삼웅 전독립기념관장의 글에서 인용했음)
첫째, 국치 9년만에 소수의 친일파를 제외한 전민족이 하나가 되어 자주독립을 선언하였다. 인구의 10분의 1 이상이 시위에 참여한 것은 세계혁명사에서 처음이다.
둘째, 군주제를 폐지하고 근대적인 민주공화제로 전환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민족대표들이 법정에서 독립하면 민주공화제 국가를 수립할 것이라 진술하고, 각종 지하신문은 민주공화제를 추구했다.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이를 받아 민주공화제를 채택했다.
셋째, 여성이 사상 처음으로 역사현장에 등장하였다. 4천년 동안 남성위주의 가부장제도에서 신음해오던 여성들이 독립된 주체로서 사회에 참여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넷째, 신분해방의 측면이다. 조선사회의 ‘천민계급’에 속해 있던 기생ㆍ백정ㆍ광대 등 하층민들까지 조국해방투쟁에 참여하여 평등사회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다.
다섯째, 비폭력투쟁이다. 3ㆍ1혁명의 지도부는 처음부터 비폭력, 일원화, 대중화를 지침으로 하였다. 이 사실 역시 세계혁명사의 초유의 일이며, 촛불혁명의 모형이 되었다.
여섯째,세계피압박민족 해방투쟁의 봉화역할을 하였다. 중국의 5ㆍ4운동을 비롯 인도와 이집트, 중동과 아프리카 제국의 반식민지 해방투쟁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일곱째, 국치 이래 독립운동 일각에서 진행되어온 존왕주의 복벽운동을 중단시키고, 주권 불멸론 - 국민주권승계론에 따른 국민국가시대를 열었다.
여덟째, 국내 만이 아니라 해외에 나가 살던 이주민과 망명자들까지 하나로 묶어내는 한민족의 정체성을 이루었다. 한인이 거주하는 세계 곳곳에서 독립 만세에 참여하였다.
아홉째, 독립의 당위성과 함께 일제의 패권주의와 침략성을 폭로하고, 인류가 지향해야 할 국제평화, 평화공존, 인도주의 등 이상을 제시하면서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등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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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제국주의자들은 3·1혁명을 ‘조선폭동’, ‘조선난동’이라 부르며 짓밟았습니다. 그러나, 중국의 신문ㆍ잡지들은 ‘조선혁명’, ‘조선 3·1혁명’, ‘대혁명’ 등으로 표기했습니다.
임시정부와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주역들은 '3·1혁명운동', '3·1대혁명운동' 등으로 불렀습니다.
그러나, 해방 후 구성된 제헌의회의 헌법 기초위원들 중에서 친일파들이 중심이 된 한민당 계열의 일부 국회의원들이 ‘혁명’이란 용어에 거부 반응을 보였고, 이승만 등이 이에 동조하면서 '3·1혁명'이 아닌 '3·1운동'이라는 명칭이 헌법 전문에 표기되게 되었습니다.
(자세한 경과는 아래 링크를 참조)
▶ '3·1혁명'이 '3·1운동'으로 바뀐 이유는?
http://bit.ly/2FU05Tm
▶ 1.17. 정명 토론회 자료집 받아보기
http://bit.ly/2Mfjn5Q
▶ 10000인 범시민추진위원 동참하기
http://bit.ly/2QKtaq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