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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육아란?
공동육아란 요즈음 흔히 '탁아' 혹은 '보육'으로 부르는 제도적 집단 양육방식을 말한다. 탁아, 보육, 공동육아는 각각 다른 시대의 사회적 요구에 대응하여 만들어진 말로 서로 다른 세계관, 인간관에 바탕을 둔 각각의 지향점이 본질적으로 다른 개념이다.
'탁아'는 금세기 초 일본에서 custodial child-care를 번역하여 만든 일본식 한자 조어로 어른들과 사회의 필요에 따라 '아이를 맡긴다' 는 뜻이다. 이는 '아이를 지키고 돌본다 는 custodial 의 의미보다 더 뚜렷이 어른 중심의 기능론적 의미를 강조한 번역말임과 동시에 근대 일본의 국가주의를 반영한 말법이다. 전쟁과 산업체의 필요에 따라 사회적으로 동원된 어머니들의 노동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거추장스러운 아이들을 국가가 만들어 놓은 '아동 보관소(러인 전쟁기의 일본의 탁아소 명칭)'에 맡기라는 사회적 명령을 뜻한다. 패전 후 일본은 '탁아' 대신 '보육', '탁아소' 대신 '보육원'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우리 사회는 영유아보육법 제정(1990년)을 통해 결과적으로 반세기 늦게 또다시 일본의 번역어를 수입한 셈이다. '보육(살피고 기른다)' 이란 말이 '탁아(아이를 맡긴다)'보다 뜻은 나아졌으나, 영유아를 가정에서 개인적으로 보호하기 어렵게 된 오늘의 육아현실은 사회의 변화와 삶의 변화가 낳은 결과이며, 이는 마땅히 사회적으로 함께 책임을 지고 해결해야 할 문제라는 인식을 포함되어 있지 않다. 또한 보육을 '보호와 교육'으로 풀어써서 '교육'을 강조하는 의견에는 우리 사회의 교육에 대한 고정관념을 어린아이들에게까지 그대로 적용시킬 수 있는 위험성이 내포되어 있다. 즉 취학 전 아동에 대한 '교육'은 '머리가 좋아지는' '남보다 빨리 하는' 조기교육이 되기도 하고, 학교 같은 공식적 조직체의 구성과 표준적 교육시설, 표준적 교과과정에 대한 강조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것은 바로 이기적 경쟁과 기계론적 세계관을 더 효율적으로 더 어린 연령층에게 내면화시키는 새로운 반생태적인 교육체제의 확산이란 결과를 불러올 수 있다.
공동육아의 개념은 우리에게 아직 생소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우리의 현실을 극명하게 표명하는 '탁아'란 개념이나 오용될 가능성이 있는 '보육'이나 '보호와 교육'이란 개념 대신에 주장된다고도 할 수 있다.
공동육아란 말 그대로 '아이들을 함께 키우자'란 뜻이다. 여기서 '아이들'은 '내 아이'를 맡기거나, '남의 아이'를 보호해줄 때의 '아이'가 아니라 처음부터 '우리 아이들'을 함께 키우자는 뜻의 '아이들'이다. 여기서 '함께'란 나뿐 아니라 이웃, 지역사회, 국가 모두가 우리 모두의 아이들을 함께 책임지고 키워보자는 뜻이다. 즉 육아에 대한 어른들의 인식변화와 동시에, 육아를 통한 어른들의 생활변화, 그리고 크게는 사회문화의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다.
공동육아의 정신
공동육아 어린이집이 다른 놀이방이나 유치원, 어린이집과 무엇이 얼마나 다른가 한마디로 말한다면 `살아있는 생명인 우리 아이들에게 열려있는 세계를 만들어 주자'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호기심 어린 눈으로 자연을 탐색, 관찰하고 자연의 생명력을 몸으로 느끼게 하고 행복해 할 수 있도록 도와 주는 일이다. 아동이 스스로의 힘으로 자연스럽게 성장하도록 북돋아 주는 환경을 만드는 일, 이것은 결코 꿈이나 유토피아가 아니라 우리와 아이들의 미래를 위한 절실한 요구이다.
생활과 철학
공동육아 어린이집의 생활과 교육의 특성은 우선 어린이들이 가까이서 자연을 탐색하고 관찰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여 자연과 교감할 수 있는 자연친화교육을 실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이들이 모래밭과 흙마당에서 장난도 치고 닭, 토끼에게 모이도 주고 작은 텃밭에 물도 주는 등 자연 속에서 마음껏 자유롭게 뛰어놀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따라서 공동육아 어린이집의 입지조건은 반드시 흙마당이 넓은 일반주택이어야 한다.
또한, 공동육아 어린이집에서는 모든 사람들의 인간관계가 열려져 있어 어린이와 교사, 부모사이에 권위적인 상하위계가 없는 평등한 인간관계를 형성하도록 하고 있다. 교사들과 어린아이들이 서로의 별명을 부르며 격식을 차리지 않고 생활함으로써 보다 친밀하고 자유로운 관계속에서 인간관계를 형성하는 등 새로운 방식의 유아교육을 실천하여 아이들의 사회성, 창의성과 주체성을 마음껏 키워주고 있다.
어린아이들에게 폐쇄된 공간에서 한글이나 숫자를 익히게 하는 인지교육과 집단적이고 획일적인 교육에서 탈피하여 흙이 있고 풀이 있고 바람이 있는 산이나 들판, 과수원을 비롯한 박물관, 연극관람 등의 나들이를 통해 자연 속에서 생활하며 자연을 느끼게 할 뿐만 아니라 다양한 세계와 접하게 함으로서 아이들에게 창의력과 탐구심을 기를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또, 아이들을 연령별로 구분하여 교육하고 생활하는 것을 극복하고 여러 연령에 속하는 아이들은 물론 장애아동과도 함께 생활하도록 하는 통합교육을 실시하고 있는데 다양한 측면의 교육효과를 보이고 있다.
설립배경과 특성
부모들이 마음놓고 아이들을 맡길 수 있고, 아이들이 제대로 생활하고 교육받을 수 있는 보육시설은 어떻게 하면 가능할까? 이러한 고민으로부터 출발한 것이 공동육아 어린이집이다. 기존의 관료화된 국공립 보육시설과 영리를 추구하는 상업화된 민간 보육시설의 낮은 보육의 질과 단순, 반복, 획일적인 교육의 문제점을 극복하고 창의력과 탐구심, 실험정신을 키울 수 있는 바람직한 육아와 교육을 위해 시도하고 있는 실험적 보육제도가 바로 공동육아이다. 공동육아 교육이념으로 만들어진 공동육아 협동조합 어린이집은 일정한 보육료를 지불하고 아이만을 맡기는 기존의 어린이집, 놀이방, 유치원과는 달리 0세부터 10세까지의 아동을 둔 30여가구가 한지역 조합의 단위가 되어 가구당 300-500만원(지역 전세금 시세에 좌우됨)의 출자금으로 설립되어 주민자치적으로 운영하는 새로운 형태의 보육시설이다.
공동육아 어린이집은 아이들이 장애정도, 부모의 혼인상태, 성별, 지역, 계층 등의 모든 사회, 문화, 경제적 차별과 불평등을 극복하고 함께 자랄 수 있는 공동체적 육아방식으로 조합원 하나 하나가 어린이집 운영에 직접 참여하여 조직형태, 정관, 교사채용 및 장소선정은 물론 시설, 어린이집 생활, 운영방법 등의 원칙과 내용을 함께 채워나감으로써 육아의 질을 높여 가는 열린 교육의 장이라 할 수 있다.
교육철학
삶 속에서 이루어지는 체험, 인간과 자연의 근원적인 관계 맺기. 공동육아의 교육철학을 한 마디로 정리하라면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어요.
교육이란 삶의 전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에요. 삶과 교육이 분리되지 않고 함께 성장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원리는 '관계맺음'이지요. 여기에는 두가지 차원이 있는데, 하나는 자연과의 관계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과의 관계예요. 자연을 큰 선생님이라고 한다면 인간은 작은 선생님인 셈이지요.
공동육아적인 삶의 방식은 공동육아에 참여하는 아이들뿐 아니라 부모, 교사, 지역 사회 사람 등 어른 모두에게 육아를 통한 새로운 공동체적 관계를 맺게 합니다. 그런 경험을 통해 삶과 교육이 분리되지 않는 일상의 구체적인 변화와 실천을 가능하게 한답니다.
자연과의 관계맺음
인간은 자연의 일부랍니다. 공동육아 아이들은 자연과의 근원적인 관계 속에서, 그리고 자연의 시간 안에서 성장하지요. 이러한 자연친화 교육은 환경보호 차원의 소극적 의미가 아니라, 인간과 자연의 상생관계를 인식하는 과정을 의미해요. 즉 자연을 대상화 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사는 세계의 일부로 인식하고, 그 가운데서 생명과 순환의 섭리를 깨달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지요.
때문에 우리 아이들에게 필요한 자연은 보는 자연이 아니랍니다. 이따금씩 포식하는 요리가 아니라 매일 먹는 음식과 같은 것이지요. 바로 우리 곁에서, 일상생활 속에서 찾고, 관계 맺는 자연입니다.
이를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어린이집 문밖으로 발을 내디뎌야 한다는 점이지요. 바깥 나들이를 통해 아이들은 바람과 구름과 하늘과 햇볕을 충분히 받고 계절의 변화를 느낄 기회를 가져요. 자연의 변화에 민감하고 풀잎 하나에도 섬세한 관심을 갖는 어른과 긴 나들이를 할 수 있다면 삭막한 도시의 하늘에서도 뭉게구름의 여러 얼굴을 볼 수 있고 매일 새로운 노을을 느낄 수 있을 거예요.
사람과의 관계맺음
공동육아는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이 사람과 사람이 단절되고 부정되는 곳이기를 원하지 않아요. 사람의 행복은 다른 사람과 행복한 관계를 맺음으로써 가능하기 때문이지요.
공동육아는 아이들이 긍정적이고 열린 관계를 맺음으로써 사람에 대해 신뢰하고 연대할 수 있기를 원해요.
공동육아에서는 아이, 교사, 부모 모두가 중요한 주체랍니다. 모두 교육의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상호 평등한 관계가 중요해요. 아이들은 자신과 다른 아이들, 자신과 교사, 자신과 다른 부모들, 교사와 부모, 부모 서로간에 평등하고 열린 공동체적 관계를 경험하는 과정을 통해서 다른 사람과의 바람직한 관계 맺는 법을 배워나갑니다.
생활중심교육
생활중심 교육이란 '교육은 자연스러우며 실제의 삶 자체'라는 것에서 출발해요. 교육은 일상생활 그 자체이며 가정의 연장선상에 있어야 해요. 아이들은 주어진 환경과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 배워요.
아이들은 건강하게 생활하고, 또 각자 나이에 맞는 발달 과정을 자연스럽게 겪어나갈 수 있어야 해요. 또한 아이들은 각자 고유한 발달 속도를 갖고 있기 때문에 개성과 특성에 따라 나타나는 것들이 최대한 존중받아야 해요.
공동육아는 이처럼 일상 생활 속에서 이루어지는 교육, 삶 속에서 이루어지는 교육활동을 중요하게 여긴답니다. 신발 신기, 밥 먹기, 옷 입기, 식사 후 그릇 설거지통에 넣기 등 아이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에 충분한 시간을 주고, 평등한 관계 속에서 자립성과 자존감을 키울 수 있도록 해요. 자존감 안에서 생기는 자유의지는 자기 존재를 알아가게 하고 자신의 역할을 배우게 하지요. 교육활동 역시 전체적이고 종합적인, 진짜 삶의 경험을 통해 자연스러운 삶을 배우며 삶의 주체로 우뚝 서 나갈 수 있도록 한답니다.
통합교육이란?
연령 통합, 성별 통합, 장애우 통합 등을 들 수 있어요. 연령 통합이란 아이들을 연령별로 구분하여 교육하고 생활하는 것을 극복하고 여러 연령에 속하는 아이들이 함께 생활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말해요. 식사시간, 자유놀이 시간 등 일상 생활을 통해 연령통합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음악, 미술, 전래놀이, 모둠, 나들이 등 통합 활동을 통해 이루어지지요.
장애우 통합은 서로 다르더라도 함께 살아가는 삶의 기본을 배운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져요. 장애우 통합교육은 단지 장애우만을 위한 것은 아니랍니다. 아이들이 장애우와 함께 생활하고 교육활동을 함으로써 장애우에 대한 편견을 갖지 않게 되고 또 불편한 친구를 배려하는 마음을 배울 수 있어요.
성별 통합은 말 그대로 여자와 남자의 성 역할을 고정하거나 성에 따른 차별이 없도록 일상생활과 교육활동이 이루어짐을 의미해요.
통합교육은 서로 다르다는 것 때문에 편견을 갖거나 차별받지 않는 것,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조화를 이루며 사는 것을 일상과 삶 속에서 배우는 과정이랍니다
나들이를 매일 가나요?
날씨가 너무 춥거나 더워서, 비가 너무 많이 와서, 특별한 사정이 생겨서 못 가는 경우를 빼면 매일 나들이를 다녀요. 나들이는 보통 매일 오전 10시부터 12시 사이에 이루어지는 활동이에요. 인위적인 환경을 벗어나 자연 환경을 찾아가는 자연친화 나들이와 박물관, 미술관, 지역 유적지를 찾아가는 문화 나들이, 동네 학교, 우체국, 재래시장과 대형마트, 큰 병원과 작은 병원, 주변의 관공서 등을 찾아가는 지역사회 탐색 나들이 등으로 구성되지요.
이 가운데 자연친화 나들이가 큰 비중을 차지해요. 나들이를 오가며 만나는 자연물을 보고, 듣고, 만지고, 맛보고, 냄새 맡으면서 오감을 살리는 경험을 매일 한답니다
전통세시놀이
공동육아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절기와 세시풍속 그리고 그에 따른 놀이와 음식문화를 체험한다는 것입니다. 자연 속으로 나들이를 자주 다니니 그 변화를 몸으로 느끼고, 제철, 제땅에서 나는 먹을 거리와 절기에 관심을 갖게 되는 건 당연한 일이지요.
어린이집에서는 24절기에 따른 놀이, 음식 만들고 먹어보기를 연간 교육계획 속에서 진행해요. 설날에는 쌀을 담궜다가 가래떡을 뽑으러 방앗간에 가고, 삼짇날에는 산에 나들이 가서 진달래꽃을 따고, 단오에는 씨름을 하고 익모초도 맛 보고 부채를 만들어 선물하지요. 세시풍속과 연관된 활동은 자연스럽게 우리 것에 익숙하게 하는 과정이자, 사라져가는 우리 노래, 우리 음식, 우리 놀이를 잇는 과정이기도 해요.
아이들은 24절기 외에 일상적으로도 전래놀이와 전래동요를 즐겨요. 주로 놀이와 함께 할 수 있는 노래를 많이 배우지요. 추석이 아니더라도 강강술래에 나오는 노래들(남생이 놀이, 개고리 타령, 고사리 꺽자, 덕석몰이, 손치기 발치기, 문지기 놀이, 잡았네 등)을 하나하나 따로 배우기도 하고 같이 하기도 해요. 다리세기와 함께 하는 '이거리 저거리 각거리', 시루떡을 쪄 먹으면서 부르는 시루떡 노래, 산도깨비 등을 부르며 놀지요.
장단에 맞춰 옹헤야, 밀양 아리랑, 진도아리랑 등 민요를 부르고 장고, 북, 소고 등 전통 악기도 배워요. 이밖에 공기놀이, 구슬치기, 딱지치기, 고누, 칠교, 실뜨기, 달팽이놀이, 땅 따먹기, 8자 놀이 등 전래놀이를 일상적으로 한답니다.
자기표현놀이
표현활동은 극놀이, 모둠, 미술, 음악, 신체, 놀이, 요리 등 다양한 영역으로 진행돼요. 극놀이는 언어활동, 신체표현활동, 음률활동, 미술활동은 물론 아이들간의 협력활동을 포함하는 종합적인 표현활동으로 역할놀이나 동극으로 진행돼요. 어린이집에서는 아이들과 많은 책을 보고 옛날 이야기도 해요. 주로 낮잠 자기 전에 이루어지는데 계속 하다 보면 아이들이 좋아하는 얘기가 생기지요. 아이들이 좋아하고 충분히 잘 하는 이야기를 동극으로 무대에 올려요. 배역을 정하는 과정에서 많은 의논을 하게 되고, 배역을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는 가면이나 띠를 만드는 과정도 함께 해요. 그리기, 바느질, 붙이기 등 준비 과정도 중요한 표현활동이지요. 충분히 즐겨서 익숙해지면 공연일정을 잡고, 초대장과 포스터를 만들어 붙이고 전달한답니다.
표현활동은 각 영역으로 나누어 진행되기도 하고 여러 가지 영역이 통합돼 이루어지기도 해요. 예컨대 지점토로 공기를 만들어 놀이를 하고, 꽹과리, 북, 장구, 징 소리를 듣고 느낌을 비교해서 그림으로 표현하는 등 각 영역이 유기적으로 연결된답니다.
자유놀이
아이들이 모두 등원하기 전인 오전 10시 이전, 하루 일과 속에서 활동 사이사이, 저녁 6시 이후에 이루어지는 놀이를 자발적인 놀이라고 해요.
아이들은 실내에서 블록쌓기, 소꿉놀이, 역할놀이, 말타기, 점토놀이, 종이로 꾸미기 등, 바깥에서 모래놀이, 물놀이, 고무줄놀이, 기차놀이, 눈싸움, 축구, 연날리기, 눈사람 만들기 등 무궁무진한 놀이의 세계를 펼칩니다.
교사는 특별히 안전에 관한 문제가 생기지 않는 한 개입하지 않아요. 아이들끼리 이끌어가는 활동이기 때문에 교사는 놀이의 한 구성원으로 참여할 뿐이지요. 아이들은 놀이를 반복하면서 새로운 방법도 찾고, 서로 의논하여 규칙을 정하기도 하고, 상호간의 의사가 반영된 더욱 발전된 놀이를 찾기도 해요.
공동육아에서는 교사의 개입 없이 아이들 스스로 꾸려가는 자발적 놀이를 교육활동 못지 않게 무척 중요하게 여긴답니다. 아이들의 진면목이 바로 자발적 놀이를 통해 나타나고, 교사는 이를 통해 아이들을 좀더 객관적이고 자세하게 볼 수 있어요. 또 서로 협력하여 놀거리를 찾고 꾸려가는 동시에 문제 상황을 스스로 풀어나가는 능력도 기른답니다.
공동육아 어린이집에서는 아이가 개별적으로 특기교육을 받기 위해 학원에 다니지 않아요. 특기교육 자체를 반대해서가 아니라 이 시기 아이들에게는 특정한 기능교육보다 오감을 균형있게 발달시키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보기 때문이지요.
어린이집에서 집단적으로 특기교육을 하기도 하는데 역시 기능적인 면으로 접근하지는 않아요. 공동육아에서는 기능습득 위주의 '특기교육'이란 용어보다는 '표현활동'이라고 부른답니다.
택견, 요가, 풍물, 그림책 지도와 미술, 과학 활동 등이 그간 이루어진 특기활동이에요. 이 가운데 택견은 외부 강사가 오기도 하고 도장으로 아이들과 교사가 가기도 해요. 다른 활동들은 교사회 내에서 전문성을 갖고 있는 교사가 맡아서 이끌지요. 조합원 가운데 특기를 가진 사람이 일주일에 한 두 번 맡는 경우도 있는데 이렇게 교사 이외의 사람이 활동을 담당할 경우에는 교사회와 충분히 논의하고 합의가 이루어져야 한답니다.
공부 안하고 너무 놀기만 하는 것 아닌가요
책상머리에 앉아 손에 연필을 쥐고 있어야 공부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이들에게는 처음부터 통합돼 있는 놀이와 배움을 억지로 떼어놓으려 하는 것에 불과해요. 아이들에게 놀이는 생활이요, 배움이요, 창조이자 삶 그 자체이기 때문이지요.
공동육아 아이들은 낱말카드로 글자를 익히고, 글씨쓰기를 연습하고, 학습지 하듯 수학을 배우지 않아요. 인지발달 역시 놀이를 통해, 자유로운 상호작용을 통해 이루어가지요.
공동육아 아이들은 매일 나들이 가면서 눈과, 귀, 코와 입, 그리고 살갗에 닿는 감각으로 자연의 변화를 느껴요. 풍부한 체험은 언어, 몸, 미술 표현으로 살아난답니다.
그림책과 동화책을 많이 읽어주고 보기 때문에 문자에 익숙해지고, 모둠을 통해 표현력과 다른 사람의 말에 귀 기울이는 훈련이 저절로 돼요. 아이가 어릴 때는 생일카드와 편지를 교사가 아이 말을 받아 적어주지만, 예닐곱살 정도 되면 틀린 맞춤법으로나마 직접 편지와 카드를 주고받는답니다. 시장놀이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셈을 익히기도 하구요. 텃밭가꾸기 등 장기 활동은 아이들이 한 가지 주제를 꾸준히, 깊이 있게 탐구할 수 있게 해주지요. 공동육아에서는 모든 활동을 충분히 놀면서, 그리고 자유롭게 한답니다.
심하게 놀면 너무 힘들지 않나요?
이들은 자기 몸을 혹사(?)시켜가면서 뛰어놉니다. 노는 것이 아이들의 일이거든요. 아이들은 충분히 노는 만큼 충분히 쉬고, 충분히 먹습니다. 열심히 뛰고 열심히 먹는 덕에 체력이 약했던 아이들도 웬만한 산 쯤 거뜬히 오를 정도로 튼튼해져요. 웬만한 감기에는 까딱도 하지 않고 일상을 영위할 수 있는 체력의 소유자가 되는 것이지요.
물론 선천적으로 몸이 약한 아이들에게 어린이집 일과는 힘들 수도 있어요. 교사들은 하루 일과나 프로그램을 아이한테 똑같이 적용하지 않고 아이의 특성과 상태에 따라 배려를 한답니다.
나이가 어린 영아방은 가능하면 독립적이고 조용한 곳으로 배치돼요. 조용히 쉴 수 있어야 하고, 낮잠도 충분히 자야 하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어린이집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몸을 많이 쓰지요. 그래서 어릴 때부터 체력이 튼튼해지고 각종 질병에 대한 면역력도 강해진답니다.
반말
그렇습니다. 하지만 "야!", "너" 식의 아랫사람에게 하는 반말을 쓰는 건 아니에요.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이 책 읽어줘" 식으로 동등한 관계에서 편안하게 주고받는 반말로 생각하면 됩니다.
공동육아에서 반말을 쓰는 이유는 평등성과 자유로운 표현 때문이랍니다. 어른과 아이가 자유롭고 대등한 위치에 서서 평등한 관계를 맺어나가고자 하는 것이지요. 아이는 어른과 평등한 관계에 놓일 때 자기 마음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어요. 자유로운 표현 속에서 진지한 대화가 가능하고, 교사는 이런 관계 속에서 아이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어요.
별명
반말을 쓰는 것과 같은 이유에요. 아이들은 별명을 부름으로써 권위적인 교사가 아니라 친구같은 친근함을 느끼고 의미있는 관계로 받아들인답니다.
"선생님!" 하고 부르는 것과 까마귀, 진달래, 꼬리 등 특별한 느낌과 이미지가 살아 꿈틀거리는 별명을 부르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어요.
교사들이 짓는 별명에는 대개 자신이 추구하는 교사상이나 자신의 삶을 담아내려는 바람이 들어있어요. 이는 교사로서의 삶을 다지는 깊이 있는 의미가 들어있다는 점에서 별명은 곧 그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 되지요.
반말과 함께 별명 부르기는 교사와 아이가 수평적인 관계 속에서 의미있는 만남을 맺어나기 위한 공동육아의 말법이랍니다.
버릇이 나빠지지 않나요
실제로 그런 걱정을 하는 분들이 많지요. 반말 쓰는 것이 버릇이 되어 학교에 가서도 선생님한테 반말을 쓰면 어떻게 하나, 할아버지 할머니한테도 반말을 하면 어떻게 하나...
아이들은 집에서 보통 엄마, 아빠에게 반말을 쓰지요. 그런 아이가 학교에 입학한다고 해서, 할아버지를 뵈었을 때 반말을 쓰는 경우는 드물어요. 아이들은 자신을 둘러싼 울타리의 안과 밖을 명확히 구분하기 때문이지요.
물론 아이가 어릴 때는 상황 판단이 잘 안 돼 반말을 쓰는 경우도 종종 있지요. 더러는 반말을 씀으로써 자유로워지다 못해 거칠거나 상대를 함부로 하는 모습을 보이는 경우도 있어요. 하지만 그것은 반말과 별명이라는 말의 형식에서 비롯됐다기보다는 관계에서 오는 신뢰, 즉 관계 안에 담겨있는 내용과 성격, 아이를 둘러싼 전반적인 환경 때문일 경우가 많답니다.
자유놀이
공동육아에서 자유놀이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공동육아는 아이들에게 자연의 일부로서 햇빛과 바람과 비와 그리고 흙을 느끼며 이를 온 몸으로 받아들이게 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이 안에서 다양한 또래와의 만남을 통해 자유로운 인간으로 성장하기를 추구한다.
아이들의 놀이는 생명력 그 자체이다. 한순간도 멈춤이 없이 자라고 있는 생명나무로서 몸의 세포 하나하나, 사고력, 감성, 상상력, 창의력, 그 모든 것이 한 순간도 쉼이 없이 자란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이 분출하는 생명력을 아이들은 어떻게든 발산해야 하는데 아이들의 자유로는 놀이야말로 바로 이같은 총체적인 생명력이 가장 잘 표현되는 활동이라 할 수 있다.
일반 유아교육기관에서의 자유놀이가 교사가 이끌어가는 많은 활동 속에서 잠깐 주어지는 규율에 의한 집단생활이나, 조각조각 나뉘어진 분절적 활동이라면 공동육아에서의 아이들의 놀이는 기본적인 생활리듬 외에는 아이 하나하나의 호기심과 자발적인 움직임으로 하루의 생활속에서 완만한 흐름으로 이루어지는 활동이다. 따라서 통합으로 이루어지는 프로그램에의 참여도 강요당하지 않으며 동생이나 형, 언니들의 방에 기웃거려 볼 수도 있다. 마당에 나가 놀기도 한다. ‘자유’ 로서의 자유놀이의 교육적 효과에 대해 공동육아가 확신하고 초조해하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아이들은 성장의 속도와 어떤 활동을 내면화해가는 시기가 다르므로 여러 가지 자유놀이를 탐색하며 자신감과 책임감을 키워나간다. 이러한 힘은 일부러 가르쳐서 되는 것이 아니라 어른들과 환경에 의해 키워지고 격려 받는다고 보고 있다.
놀이를 통해 유아는 자기의 신체적인 기교뿐만 아니라 신체기관의 능력을 발달시키고 특히 상상력을 발달시킬 수 있다. 이러한 발달은 유아에게 사물을 보는 힘과 변화시키는 능력을 길러주며 영혼의 힘을 불어넣기도 한다.
어른이 생각하기에 놀이와 일은 서로 반대되는 것이다. 또 아이들의 놀이는 피상적이며 부수적이고 중요치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주의력 있는 어른이라면 아이들의 놀이가 깊은 정성이 담긴 행위양식임을 알 수 있다. 성인의 일은 목표와 목적이 있으나 유아들의 놀이는 목적에서 자유롭고 마음껏 상상에 빠지는 충만된 삶 그 자체이다. 놀이를 통해 아이들은 자신을 스스로 세상 안으로 접합시켜 갈 뿐 아니라 세상을 능동적으로 만들어가기도 하는데 이렇게 함으로써 미래의 삶을 위한 중요한 의지의 자세가 생겨난다. 어린 시절에 내면적으로 상상력을 키울 수 있어야 어른이 되었을때 완성된 인간으로서 삶을 누릴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렇게 자유로운 놀이를 하며 얻을 수 있는 기쁨과 열정과 내면에서 키워진 힘은 성인이 된 후에 삶과 직업으로까지 연결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한다.
실제로 ‘사회 극적 놀이’라는 완성된 한 연구에서 sara smilanskysms는 유치원에서의 상상력이 풍부한 놀이와 나중에 학교에 들어간 후의 그 어린이의 행동과의 관계를 분석한 결과 놀이는 학교에서 지적 성장에도 영향을 끼친다는 결론을 내렸다. 잘 놀았던 어린이가 배우려는 의지력, 감성, 사회성에서 그렇지 않았던 아이보다 더 우수함을 증명했다고 한다.
공동육아에서도 교사들은 재밌는 결과를 알게 되었다. 1년 이상을 어떤 프로그램에도 잘 참여하지 않고 이방 저방 기웃거리거나 마당에서만 계속 놀던 아이가 어느 날 작업에 참여하면서 놀라운 감각을 발휘하는 것을 종종 보게 되는데 그 아이는 이미 놀이를 통해 자발적인 생명력을 얻게 된 것이다.
유아들의 놀이는 어른의 규칙과 교육적인 의도를 피하고 유아들의 순수한 힘에 그 행위를 놓아두는 데 그 의의가 있다. 순수한 힘에 의해 유아들은 여러 가지를 실험해 보고 자신의 의지를 행위로 옮기고 스스로 교육을 하게 된다. 놀이 안에서 아이는 스스로 내면 안에서 한 자세를 갖게 되며 이 때에 아이는 외부로부터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놀이는 목적을 향하여 겨냥된 것이 아니고 놀이 그 자체가 이미 그 안에 스스로 한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에 어른이 어떻게 개입을 할 것인가의 문제는 신중히 고려되어야 한다.
이러한 자유놀이는 유아 각자에게는 매우 진지한 작업이며 내적 욕구를 밖으로 자유롭게 표현하고 발산하는 시간이다. 그러므로 아이들마다 개인적인 발달 정도와 성향에 따라 놀이 방식이 다르다. 또래들과 함께 어울려서 노는 아이들도 있고 주로 동생들에게 관심이 있어 돌보아주고 싶어 하는 아이도 있고 심지어는 놀이 행위에 직접적으로 들어가지 않고 관망하는 자세로 임하는 아이도 있다. 그것이 어떤 형태이건 아이에게는 그것이 필요한 과정인 것이다.
놀이의 의의
유아들의 놀이를 바라보는 관점은 시대적 상황에 따라 변화하여 왔다. 고대 그리스 시대에는 놀이의 비합리성과 무질서에 초점이 맞춰졌으며 중세에 들어와서는 유용한 놀이와 쓸모 없는 놀이의 분류작업이 논의되었다고 한다. 또한 17,8세기경에는 놀이를 유치하고 하찮은 것으로 생각하였으나 현대에는 놀이를 유아의 성장 발달에 필수적인 활동으로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놀이의 의의와 전인적 발달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대다수의 교육학자들이 주장하는 견해를 요약하였다.
1) 유아의 입장에서 놀이는 학습이다
놀면서 배운다는 말은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즉 놀이를 통해 자연스럽게 앎의 지평을 넓혀가며 감각 운동적인 능력과 기능을 형성해간다. 또 놀이 기술이나 규칙에 친숙해지고 놀이의 내용을 알게 되며 새로운 창작을 할 수 있다. 또 지적 이해를 가능케 해주며 동시에 정서적 발달과 사회적 학습의 기회를 제공한다
2) 교사와 부모에게 놀이시간은 교육시간이다
이제까지 많은 심리학자와 유아교육 전문가들이 놀이를 유아교육방법으로 활용해야 할 것으로 역설하였다. 즉 놀이는 유아기 교육의 조화적인 발달, 종합적인 학습을 성취시키는 최상의 방법이다
3) 놀이는 평가시간이다
유아는 놀이를 통해 자신의 모든 것을 표현할 뿐 아니라 놀이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므로
인위적으로 유아를 조사하는 방법보다 자연스런 상황에서 어린이의 있는 그대로를 관찰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4) 놀이시간은 치료시간이다
놀이에는 어린이의 기쁨, 슬픔, 불안, 좌절, 질투, 공포, 분노 등 모든 감정이 표현되는데 많은 학자들은 이러한 감정의 표출을 통해 어린이의 정서 부적응이나 기타 문제 행도이 자연스럽게 치료된다고 보았다
놀이가 유아의 전인적 발달에 미치는 영향
1) 놀이는 신체적 발달을 돕는다
놀이 동작은 유아기 어린이의 신체성장을 촉진시킨다
다양한 놀이 동작은 함으로써 바른 자세를 형성할 수 있으며 놀이동작을 통해 기본 운동능력이 증진된다. 이 시기는 신체가 유연하여 새로운 기술을 갈등 없이 받아들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모험심이 많아서 새로운 동작을 시도해보려는 열의를 가지고 있어 똑같은 놀이 형태를 반복함으로써 대근육운동과 소근육운동 능력이 발달될 수 있다
2) 놀이는 사회성 발달을 돕는다
유아의 놀이는 작은 세계이다. 그 속에서 친구들과 협동하고 사이좋게 놀거나 경쟁하고 싸움을 하면서 다른 어린이와 함께 살아가는 지혜를 배우게 되고 도덕적 기준이나 규칙, 성역할 등 수많은 사회적 학습을 하게 된다.
3) 놀이를 하면서 스스로 인지학습을 한다.
놀이를 하면서 여러 가지 놀이감과 흙, 나무토막, 돌맹이, 나뭇잎 등 구체적인 사물을 가지고 노는 동안 물체의 무게, 질감, 색깔, 크기 등 물리적 지식을 학습하게 되고 여러 가지 논리적 수리적 지식도 습득하게 된다.
4) 놀이와 언어발달은 상호 강화의 관계에 있다
놀이를 통해 다양한 어휘를 배우고 역할에 맞는 적절한 언어를 사용할 수 있게 된다. 또 놀이친구들과 사회적 관계를 맺음으로써 점차 자기중심적인 언어에서 탈피하여 남의 말에 귀를 기울여 이해하고 자신의 의견을 교환하는 의사소통능력을 기르게 된다.
5) 놀이는 정서발달에 도움이 된다
유아기는 언어사용 능력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자연히 놀이를 통해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을 나타내는 경우가 많다. 특히 유아의 부정적인 정서가 정당한 구실로 표출될 수 있기 때문에 정신 건강에 도움을 주게 된다. (동생에 대한 질투심을 인형을 통해 때려주거나 주사를 놓는등 적대적인 행동을 자연스럽게 할 수 있어 질투심이 정화된다) 또 기쁨을 주기도 한다. 예를 들면 퍼즐 맞추기를 끝냈을 때의 성취감, 역할놀이를 했을 때의 만족감, 쫓고 쫓기는 놀이의 스릴과 웃음을 통해 긍정적인 자아개념, 자율성, 인내심, 성취감등 건전한 정서도 형성하게 된다.
6) 놀이는 창의성을 발달시킨다
첫째, 어린이의 놀이에는 행동이 많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에 놀이를 하면서 다각적인 탐색을 하며 이로 인해 광범위한 기술과 반응 레퍼터리를 습득하게 될 뿐 아니라 융통성 있는 사고를 하게 되고 그 결과로 창의성이 증진된다.
둘째, 놀이는 어린이의 구체적 사고력을 추상적 사고력으로 전환시키는 역할을 한다
나들이
신체 발달과 나들이
성장기의 생물체는 세포분열 및 세포 증대로 인해 생장한다. 이 생세포에서 에너지원으로 흔히 이용되는 것은 포도당이며 포도당은 완전 연소되어 이산화탄소와 수분으로 분해되는데 이때 유리 에너지를 생성한다. 유리에너지는 대부분은 열로 방출되어 우리 몸을 따뜻하게 사고 일부는 세포에서 필요로 하는 아미노산 등으로 전환된다. 이 포도당의 연소에는 산소가 필요하다. 원할한 산소 공급을 위해 생물체는 호흡이라는 기제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원할한 호흡이 제대로 된 성장의 필수 요소임을 알 수 있다. 원할한 호흡은 몸을 활발하게 움직임으로써 이루어진다. 이 원할한 산소 공급을 위해서는 다 성장한 어른도 하루 30분의 운동이나 1만보 이상 걷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성장기의 아동과 청소년에게는 그 몇 배의 원할한 몸놀림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옛사람들은 이러한 신체 성장의 논리를 ‘아이들은 놀면서 커야 돼’ 라는 삶의 지혜로 표현하였다. 노는 아이들은 잘 먹게 되어 있다. 인공 조제된 영양소나 특별 영양식을 먹이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나이에 맞지 않게 빨리 한글을 깨친 애라면 ‘애가 영리 하네요’ 라는 소리를 듣게 된다. 그러나 이렇게 영리한 아이를 원하는 부모들이 모르고 있는 사실이 하나 있다. 최근 연구 경과에 의하면 두뇌는 전신의 신체적 기능과 일대일로 대응하고 있음이 밝혀졌다. 이는 전신의 균형 있는 발달이 두뇌 발달의 기초이며 그 역은 아님을 말해 준다. 뇌는 몸의 일부이고 따라서 몸의 부실은 뇌의 부실이고 이는 요즘 부모들이 그토록 원하는 창의력의 부실화로 이어진다. 건강한 몸에서 건강한 생각이 나오듯이 건강한 아이들만이 건강한 두뇌 발달을 할 수 있다.
따라서 건강한 몸과 정신을 만들어주는 나들이도 이따금씩 폭식하는 요리가 아니라 매일의 음식 같은 것이 되어야 한다. 매일 먹고 소화함으로써 우리가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게 하는 필수 영양소 같은 것이다.
통합성과 나들이
현대인의 삶은 분절적이다. 직장과 거주지, 어른과 아이, 배움과 생활, 그리고 우리의 몸과 마음, 이 모든 것이 분절되어 있다. 분절하는 삶은 뿌리내리지 못하는 삶이다. 여기서 배운 것이 저기서 통용되지 않으니 늘상 다시 배워야 하고 서투르고 늘상 바쁘게 뛰어다녀도 충족할 수 없고 소외감만 짙어진다. 삶은 안정된 유기체적 연결망을 상실했다.
아이들의 배움도 마찬가지다. 한 시간 국어 했다 다음 시간에는 사회, 며칠 전 배운 것을 까먹을 즈음 다시 진도를 나가는 역사, 지리 등등..유년기에도 이 같은 분절성은 심각하다. 매일의 교육 프로그램이 시간과 분 단위로 쪼개져 제시되어 있는 유아교육 지침서에 따라 교사가 아이들의 하루 생활을 제단할 때 아이가 스스로 지내는 생활은 사라진다. 아이는 교사가 짠 시간대와 프로그램에 맞춰 움직이는 꼭두각시가 된다.
반면 공동육아 어린이집의 하루 생활은 연결되어 있고 통합성의 중심에는 나들이가 놓여 있다. 나들이에서 본 벌레, 풀, 꽃, 풀들을 그림으로 그려보고 큰 아이들은 도감을 들춰 이름을 찾아보기도 한다. 나들이에서 따온 칡 잎을 토끼에게 점심으로 주고 애기똥풀을 천에 물들여보기도 한다. 아이들은 이러한 통합적인 생활 속에서 자신의 경험을 의미 있는 것으로 축적해 나가고 그를 통해 또 다른 활동의 욕구를 만들어낸다.
여백이 있는 나들이
공동육아의 삶은 무계획적은 아니지만 반계획적이거나 비계획적이다. 다른 어린이집들이 아이들의 하루 생활 리듬을 분 단위로 나누어 구획적으로 관리하고 있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관리되는 아이들의 삶에서 우발적인 탐험이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공동육아에서는 언제나 이런 우발성이 도사리고 있다. 우발성은 아이들이 주어진 시간을 자기 것으로 활용할 수 있게 한다. 교사들은 이같은 우발성에서 열려 있는 아이들의 시간이 성장의 시간이 되도록 해야 한다. 따라서 교사는 열려있는 시간을 교육적으로 인도할 수 있는 소양을 갖추고 있어야 하기 때문에 제대로 된 공동육아 교사 노릇은 열심히 교재 준비만 하면 되는 일반 어린이집 교사 노릇보다 사실상 훨씬 힘들다.
나들이를 뒷산으로 정했지만 그 가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것들은 이 우발성에 의해 진행된다. 어제는 없던 거미가 아이들 눈에 띄면 10분이고 20분이고 아이들의 호기심이 채워질 때까지 앉아서 구경하고 이야기를 나눈다. 그리고 갑자기 청설모가 달려가는 게 보이면 그 길이 뒷산 가는 길이 아니어도 아이들은 달려가고 교사는 함께 따라가 준다. 그리고 사라진 청설모를 함께 확인하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다시 뒷산 가는 길로 되돌아온다. 또 어떤 날은 뒷산에서 밤을 줍는 아주머니에게서 한아름 밤을 얻어오기도 한다. 이렇게 아이를 둘러싼 환경이 제공하는 수많은 호기심거리와 놀거리들을 아이들은 어느 것 하나 가벼이 여기지 않고 모두 가지 것으로 의미를 만들어 나간다.
고립된 가정에서 어머니와 아이만으로 극복할 수 없는 이런 자연과의 접촉의 결핍, 직접 경험의 결핍 현상을 ‘네오 호스피탈리즘’이라고 한다. 즉 반세기 전 영국의 볼비가 고아원이나 탁아소 등에 수용된 아이들 중 어머니-모성적 애정-와의 접촉이 결핍되어 나타난 발달지체 상채를 지적하여 이름 붙인 ‘호스피탈리즘-시설병’에 대응하는 개념으로 반생태적 도시 공간 속에서 사회적으로 고립된 어머니하고만 상호작용하는 어린이들이 텔레비전 등의 매스컴과 상업 문화의 일방적 소비자로서 수많은 상징의 자극만을 과도하게 받게 될 때 나타나는 일종의 ‘감각 차단 현상’을 말하는 것이다.
18세기 부패, 허위, 위선으로 가득 찬 프랑스 사회를 비판하며 사회변혁의 힘을 교육을 통해 기르려고 했던 루소의 다음과 같은 주장은 지금 우리가 귀담아 들을 만 하다.
‘사람들은 아이들 보호할 생각만 하고 있다. 그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아이들이 어른이
된 후, 자신을 보호하고 운명의 타격을 감내하고 풍족함과 비참함을 도외시하며 아이슬란
드의 얼음 속에서나 말타 섬의 찌는 듯한 바위 속에서도 난관을 극복하고 살아갈 수 있도
록 가르쳐야 할 것이다. 아이를 죽지 않도록 하는 것보다 살아가게끔 하는 것이 더 중요하
다. 산다는 것은 호흡한다는 것이 아니고 행동하는 것이며 우리들의 기관, 감각, 능력 기타
우리에게 생존의 감정을 줄 수 있는 모든 부분을 활동시키는 것이다. 가장 장수를 한 사람
이란 가장 오랜 세월을 산 것이 아니고 가장 삶을 감지한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세상에는
백년의 장수를 해도 생후 곧 죽은 것과 같은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이 오래 사는 것은 차
라리 젊어서 무덤으로 가느니만 못할 것이다.‘
교육은 아이를 살리는 활동이기 때문에 아이들이 살아있는 느낌이 들도록 살아있는 체험을 제공해야 한다. 오늘을 적극적으로 사는 아이가 미래를 주체로서 힘차게 열어나갈 수 있다.
오늘을 개척하는 아이가 미래를 개척하는 사람이 된다. 그래서 루소는 ‘알지도 못하는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고 모든 종류의 쇠사슬로 아이를 구속하고 결코 즐길 수 없는 가상의 행복으로 어린 시절을 불행하게 하는 것 같은 그러한 교육을 하는 학교라고 부르는 가소로운 건물을 공교육 기관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고 말했다. 우리는 유년기 아이를 집안에서 조기교육의 교재, 학습지, 잘 만들어진 비디오로 교육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망상에서 하루빨리 벗어나야 한다. 이것은 교육이 아니라 교륙(絞戮)이다
공동육아 나들이는 ‘아이들은 밖에서 커야 한다. 이것이 아이가 삶의 순리를 심신으로 아는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게 한다’ 는 단순한 믿음에 기반 한다.
모둠을 통해 결정하는 나들이
나들이 장소는 대개 월요일 아침 전체 유아의 모둠 시간에 결정된다. 나들이 장소를 정할 때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유아들은 저마다 생각나는 곳을 얘기한다. 한 유아가 다른 아이의 의견에 반대 의견을 말하기도 한다. 때로는 유아들이 시위를 하듯 어떤 장소를 함께 외쳐서 회의가 진행되지 않기도 한다. 의견이 상충될 때는 다수결의 원칙을 따르기도 하고 두 곳 정도로 장소를 정해서 소수를 보호하기도 한다. 교사들은 모둠 시간에 결정된 나들이 장소와 모둠에서 있었던 대화 내용을 게시하고 일주일 도안 유아들과 정한 장소로 나들이를 간다. 나들이 장소에 대한 모둠의 의의는 유아들이 일주일의 계획을 세우고 실행한다는 데 있다.
놀며 탐색하며 가는 나들이
나들이는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며 거기에서 노는 것만이 '나들이 활동‘은 아니다. 오고 가는 길조차도 나들이 활동의 일부이다. 교사는 교사들대로 유아들은 유아들대로 오가는 길에서도 놀이와 탐색활동을 한다. 이것은 가서 노는 건 재미있지만 가는 건 싫다‘ 는 생각을 떨쳐버리고 유아들이 자발적인 흥미로 활동에 참여하게 한다. 이런 놀이와 탐색 활동으로 경우에 따라서는 나들이를 가는 길에 목적지나 일정이 바뀌기도 한다.
언니노릇하며 가는 나들이
통합나들이는 언니,오빠, 형, 누나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나들이 길에 만나는 사람들
유아들은 나들이를 통해 어린이집 안에서만 머물러서는 만나볼 수 없는 사람들과 만나게 된다. 예를 들면 골목을 지나며 만나는 동네 아줌마, 상점 주인들, 산에서 만나는 할아버지, 약수터에서 만나는 아저씨, 놀이터에서 만나는 다른 어린이집 유아들이나 동네 아이들 등 유아들이 만나게 되는 사람들은 다양하다. 비록 그 사람들과 유아들 간에 적극적인 상호 작용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작게 부딪치는 사람들 간에도 유아가 경험하게 되는 폭은 다양하다. 그 순간의 만남은 유아들에게 호의적이기도 하고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다.
어린이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들이 길에서 지켜지는 몇 가지 행동지침을 통해 유아들은 골목길의 교통안정을 몸에 익히게 된다. 차가 다니는 골목길에서는 길 한가운데로 다니지 않는다. 길 가로 걸어가며 차가 올 경우 비록 멀리서 오는 경우라고 교사들은 유아들에게 차가 온다는 것을 알려 줌으로써 미리 길가로 몸을 피할 수 있는 여유를 준다.
돌아올 때 교사들은 흔적을 남기지 않도록 주의한다. 어지른 부분을 청소하고 정리를 하게 하고 올바르게 이용하도록 가르친다. 이때 유아들이 같이 참여하고 자신이 한 일은 스스로 해결하므로 유아들은 공고시설물에 대한 바른 태도를 실천하게 된다.
높임말 권하는 사회에서 반말하기
- 홍정연 고양 자유학교 학부모 글 발췌
우리나라 같이 높임말 권하는 사회에서 어린이가 어른에게 반말을 하도록 의도적으로 유도하는 문화가 거부감을 주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공교육과 미디어부터 어쩌다 마주치는 동네 어른들까지 가능하면 어릴 때부터 우리말의 복잡한 경어법을 익혀서 내가 존대해야 할 사람에게 적절한 예의를 표시하는 것이 올바른 태도라고 권장한다.
‘어떤 말을 쓰는가에 따라 마음까지 달라지기 때문에 어릴 적부터 상대를 존중하는 마음을 길러줘야 한다’ 는 아주 타당해 보이는 말부터 ‘알고 보면 아주 좋은 아이인데 형식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어른들 때문에 높임말 쓰는 걸 제대로 못 배워서 나중에 사회생활에 지장이 많았다’는 내용의 전설까지..
이렇게 높임말 사용을 강하게 지지하는 기존의 문화 속에서 대안교육 현장의 공공연한 반말 문화가 안팎으로 이런저런 저항에 부딪치면서 지난 십 몇 년 동안 꾸준히 확산된 것은 또한 그 나름의 긍정성과 생명력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반말문화가 공식적으로 등장한 것을 1980년대 후반에 시작된 ‘또 하나의 문화 어린이 캠프’에서였다)
아이들은 가끔 어른들이 다양한 근거와 이론을 제시하며 오랫동안 머리를 싸매고 푸는 문제를 한 마디로 아주 명쾌하게 정리해버릴 때가 있다. 나래도 세 돌쯤 됐을 때 우리들의 언어문화에 대해 아주 함축적인 말을 한마디 던졌다.
어린이집에서도 집에서도 높임말 하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는 나래가 어느 날 갑자기 동네 어른들에게 높임말을 하기 시작했는데 이 또래 아이가 그렇듯 나래는 자신이 새로 익힌 재주를 남들이 보고 칭찬해주길 바라면서 아주 의기양양하게 높임말을 하고 다녔다.
“ 어? 나래, 높임말 하네?”
“그래, 엄마. 어른들한테는 이렇게 말하는 거야.”
“그래? 그럼 엄마도 어른인데 엄마한텐 왜 높임말 안 해?”
“우리가 남이야?”
나는 이 말이 아직도 신통하다.
많은 어른들이 대안교육을 받으면서 기존 문화 속에서 살아가는 아이들이 겪을 혼란을 이유로 드는데, 실생활에서 보면 정작 아이들은 전혀 혼란스러워하지 않는다. ‘우리가 남이야’란 말 속에는 아이들이 혼란스러워하지 않을 수 있는 나름대로의 합리적인 범주화의 근거가 드러나 있다. 그리고 ‘높임말’의 언어적인 속성과 우리가 대안교육 현장에서 별명과 반말을 쓰는 의도도 함축적으로 담겨 있다.
나래는 ‘남’ 곧 자신과 친밀하지 않은 어른에게 쓰는 말이 높임말이라고 인식했다. 경어법 체계가 가진 ‘높임의 기능’과 ‘차이의 표시’라는 두 가지 속성을 인지적으로 알 수는 없었겠지만 직관적으로는 알았다고 이야기하면 엄마가 너무 푼수를 떤다고 할까? 그런데 나래만 그랬던 게 아니라 대안교육 현장의 반말문화를 경험한 유아들은 거의 비슷한 인식체계를 가진 것 같다.
할아버지와 가깝게 지낸 아이들은 그렇지 않은 아이들에 비래 훨씬 늦게까지 할아버지에게 반말을 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기존 사회가 요구하는 것에 점점 많은 영향을 받기 때문인지 아이들은 차츰 높임말을 쓰는 대상을 넓혀갔다. 초등학교에 입학해서 일반적인 공교육을 받기 시작한 다음부터는 지극히 한정된 대상을 제외한 거의 모든 어른에게 높임말을 Tm는 것을 스스로 편안해했다.
반말과 별명으로 확보되는 공간
아이들은 거의 모든 어른에게 높임말을 쓰게 된 다음에도 대안교육 공동체에서 형성된 언어권이라 판단이 들면 예전과 다름없이 교사들의 별명을 부르고 반말을 했다. 또 하나의 문화 캠프나 일산에서 꾸렸던 방과후에서는 초등학교 입학 후에 반말 문화를 접한 아이들도 많았지만 대부분 비슷한 모습을 보였다.
일산에서 엄마들이 모여 지역 방과후를 꾸려갈 때 엄마들이 교사를 맡기도 했는데 아이들은 ‘나래엄마’로 말을 시작할 땐 높임말을 하고 ‘동땡’이라고 별명을 부를 땐 반말을 했다. 아이들과의 관계가 친밀해지면서 나래엄마와 동땡의 차이는 차츰 줄어들었고 평소에도 반말을 하는 아이들이 차츰 늘어갔다. 아이들은 별명을 부르고 반말을 하는 특수한 언어 상황에서 훨씬 더 쉽게 마음을 열고 친근하고 편안하게 자신을 표현했다.
대안교육에 참여하는 동안 아이들과 함께 여행 다닐 기회가 많았는데, 아이들은 일반적으로 관광버스 기사 아저씨께 높임말을 하며 친근한 교류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어느 기사분이 마이크를 잡고 “얘들아, 나는 타잔이야.”라고 소개를 한 순간, 아이들은 “으응, 타잔”하는가 싶더니 “타잔, 그런데..”하며 다가가서 말을 걸고 휴게소에 내려서도 스스럼없이 다가가고 여행지에 도착해서도 함께 놀았다. 그 분이 아이들에게 마이크를 들고 버스기사인 자신이 왜 별명을 쓰고 대안교육에 관심이 있는지 구구절절 설명한 것도 아니고 단지 ‘나 타잔이야’하고 한마디 했을 뿐인데도 순식간에 많은 부분에서 암묵적인 합의가 형성된 것이다.
아이들이 특정한 언어문화를 통해 친근하고 쉽게 어른과 교류할 수 있고, 사회적으로도 일정한 공감대를 확산해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왜 반말을 하고 별명을 부르는가’ 에 대한 답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반말로 배우는 존중
반말 문화의 가능성을 인정한다고 해도 ‘아무에게나 함부로 말을 놓는 이 문화의 무례함을 친밀함과 혼동하게 만들고,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것을 배울 수 없기 때문에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하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나는 우리가 대안교육에서 추구하는 ‘예의와 존중’은 반말의 틀 위에서 배워나가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우선 반말은 무례한 말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말이다. 높임말을 쓰자고 주장하는 사람 중에는 높임말에 ‘차이와 강조’하는 속성이 있어서 덜 자연스럽다는 점에 선뜻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언어학적으로도 ‘경어법’은 원래 ‘차이’, 더 정확히 말해 ‘너와 나는 다르다는 거리감’을 부각시키기 위해 발달한 체계이다. 그리고 우리의 언어습관을 찬찬히 살펴보면 자연스럽고 일상적인 상태에서 사용하는 말이 반말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가뭄 끝에 비가 올 때 ‘비가 오신다’ 는 말로 물에 대한 경외감을 표현하긴 하지만 평소에 벌컥벌컥 물을 마시며 ‘물이 정말 시원하시다’고 표현하지는 않는다. 연세 지긋한 어르신 중에 어렸을 때부터 존중해줘야 한다며 “우리 아기 오늘도 잘 지내셨나”하는 높임 표현을 하는 분이 드물게 계시지만 아이의 재롱을 보며 “ 아이고 깜찍하기도 하시지”하는 높임말을 쓰는 경우는 아직 보지 못했다.
혼잣말을 하거나 자신의 생각을 정리한 글을 쓸 때 우리는 반말을 쓴다. 이렇게 편안하고 일상적인 영역에서 반말을 쓰는 이유는 상대방을 낮추려는 의도가 있어서가 아니라 반말이 특별히 높임이나 낮춤의 기능이 없을 때 사용하는 ‘예사말’이기 때문이다. 반말에 상대를 낮추는 ‘하대’의 기능이 있긴 하지만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반말은 ‘하대’가 아닌 예사말이고 아이들이 어른에게 사용하는 반말은 더욱 그렇다.
대안교육 현장에서 아이들이 어른에게 반말을 하면 어른을 무시하게 된다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아이와 어른이 별명을 부르고 반말을 해도 아이들은 여전히 그 어른이 자신들의 선생님이라는 사실을 잘 인지하고 있다. 그래서 반말을 해도 ‘~냐, ~라, ~디?’같은 종결어미나 하대하는 어휘는 쓰지 않는다. 별명과 반말을 사용해도 아이들은 아프면 교사에게 달려가서 위로를 받고 다툼이 있을 때는 조정 역할을 해주길 기대하고 신뢰하며 따른다. 아이들은 자신들이 편안하게 반말은 하는 교사가 높기 때문이 아니라 소중하기 때문에 존중하는 것이다.
대안교육에서 아이들이 배우길 기대하는 예의와 존중은 ‘높여야 할 대상을 알아보고 적절하게 행동하기’가 아니라 ‘작고 낮은 것까지 똑같이 귀하고 소중하다는 것을 알고 행동하기’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들이 사용하는 자연스러운 예사말은 예의와 존중을 배우는 데 더 적절한 언어라고 생각한다.
말보다 중요한 것
‘이게 다 아이들이 교사에게 반말을 하면서 편안하게 생활한 덕분이니 앞으로 모든 대안교육 현장에서는 아이가 교사에게 반말을 해야 한다’ 고 주장할 생각은 없다. 반말이 편안한 관계를 쌓기에 좋은 토대라고 생각하지만 ‘삶 전체’를 놓고 볼 때 언어가 차지하는 비중은 결정적인 수준은 아닌 것 같다.
가끔 방송에 아이에게 욕설이나 매질하고 아이와 부모를 무시하는 ‘엽기교사’이야기가 나온다. 일반 학교에 그런 교사가 흔치는 않지만 아이들은 굳이 욕을 하지 않더라도 교사가 아이들을 무시하거나 억압하거나 차별할 때 상처받고 주눅 든다. 반면 자신의 이상에 따라 나름대로 아이에게 깃든 영성을 북돋아주려고 노력하는 대안교육 교사라고 할지라도, 아이들과의 관계가 관념 속에 머물고 현실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면, 아이들은 ‘차라리 옛날 학교로 돌아가는 편이 낫겠다’ 고 반발하기도 한다. 어른들도 마찬가지겠지만 현재에 충실한 아이들에게는 더욱 ‘어떤 언어를 쓰는가’ 보다 ‘어떻게 사는가’ 가 더 중요한 문제인 거 같다.
나는 우리 아이가 앞으로 어떤 말을 쓰며 살든 어릴 때 자신이 속해 있던 교육 공동체에서 사용한 반말의 언어체계에 실린 평등하고 자유로운 가치를 내재화시키고 세상을 즐겁게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내가 할머니가 되고 우리 아이가 중년이 된 다음에도, 혹시 아주 오래 살아서 둘 다 할머니가 될 때까지 산다고 해도 아이와 평생 반말을 하면서 서로를 존중하며 즐겁게 살고 싶다. 그리고 우리 아이가 대안교육 현장에서 만난 교사들과 늙어서까지 별명을 부르고 반말을 하며 가깝고 편안하게 지낼 수 있으면 좋겠다.
동시에 우리 아이가 앞으로 살면서 반말을 싫어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도 그 사람의 언어를 이해하고 그 사람의 내면을 존중해줄 수 있는 아이로 자라기 바란다. 원래 ‘다른 사람의 내면을 이해하고 배려할 수 있는 관용과 너그러움’은 심리학에서도 발달단계상 가장 늦게 발달하는 고차원적인 기제라고 한다. 대안학교 생활의 즐거움이 우리 아이들과 어른들이 관용과 너그러움을 배워가는 데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으면 좋겠다.
모둠
최형숙 (시루떡, 강동 꿈나무학교 교사의 글 외)
모둠은 주로 아이들과 차를 마시면서 하는 회의-생각나누기-를 뜻한다. 주로 월요일 아이들과 함께 한다.
모둠은 아이들의 다양한 생각과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많이 나올 수 있으면 좋다고 생각한다. 모듬이 어느 정도 정착되면서 부터는 아이들 스스로 주제를 가진 토론 까지도 만들어가는 것을 보았기에 교사들의 조급한 개입은 조금 삼가해야 한다.
모둠회의를 통해 서로 다른 생각을 알고 이해하고 가장 적절하고 민주적인 방식으로 생각들을 모아내고 조정하는 능력을 키워내 공동체 생활을 보다 건강하게 만들어 갈 수 있도록 하는데 주력해야 하겠지만 아이들이 모둠의 중요성을 알아가고 느끼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 생각된다.
기다려 주기/
이야기 하고 싶게 만들기/
모둠을 깨지 않을 최소한의 예의 만들기에 조언하기/
모둠회의 내용을 성의껏 공동체 학교 내에서 실천하기/
아이들 이야기를 진지하게 듣기,기록하기/ 등이 교사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가 아닐까?
1) 자연스러운 일상의 이야기를 끌어내는 차 모둠 부터!!
이 말 ,저 말 하고 싶은 말이 많은 아이들의 이야기를 그냥 들어주는 일만 해 보는 것도 아이들의 말문을 트이게 하고, 즐거운 분위기를 만드는 것 같다. 그러기 위해 뜨거운 차나 마실 거리를 준비하면 좋다. 매주 이런 분위기를 만드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차 모둠이 정착하면 차츰 아이들이 모둠을 좋아하게 되고, 생활하면서 느낀 생각, 학교에서 느낀 생각 , 친구, 가족 이야기 등 다양한 일들에 대한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았다. 그냥 매주 차 모둠을 하는 것 ! 그리고 진지하게 들어주는 것! 그것은 출발이다.!!!
2) 차 모둠에서 자연스럽게 한가지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 해 보기
차 모둠을 오래 하다보면 개인 적인 이야기말고 공동으로 함께 이야기 해 보았으면 하는 문제가 있을 것이다. 그것을 한 가지씩 끌어내어 이야기 나눔을 해 보는 것 그것이 공동체 생활을 하는데 어려움을 만드는 문제라면 아이들의 자발적인 문제인식이나 교사의 권유로 이야기 나눔을 해보는 것이 좋다. 이때 회의를 하는 방식에 대한 고민이 생기기 시작한다
3) 자연스럽게 아이들이 중심이 되는 회의로 정착시키기
주제를 선택하여 이야기 나눔을 하게 되면 나름 데로 그 이야기를 끌어내고 마무리하는 진행자가 있어야 하고 그것을 실천하기 위한 기록이 따라가야 한다. 아이들이 스스로 인식하게 되면 진행자와 기록하는 일에 대한 분담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이야기를 하게 한다. 그것이 결정되면 이제 모둠회의 틀은 갖추어 진 셈이다.
아이들이 진행하는 회의가 교사에게 답답할 수 도 있겠지만 조금 기다려 주면서 " 내 생각은---이렇게 하면 어떨까?" 하고 가끔씩 제안을 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차츰 아이들이 중심이 되는 모둠회의가 정착이 될 것이다. 매주 또는 일정하게 모둠회의를 하는 일과, 필요한 부분(교육활동에 관한 것 또는 기타), 소모둠을 하는 일이 계속 일어나면서 아이들의 자치 공동체가 형성되는 것이다.
4) 모둠에서 나온 이야기 실천하기와 점검하기
모둠회의에서 결정된 일은 반드시 모두에게 알리고 실천하여야 한다. 그리고 그 실천 속에서 느낀 점과 다시 조정해야 하는 일이 보이면 다시 모둠을 통해서 새로운 방식이 고민되고 결정되어야 할 것이다.
5) 모둠에서 지켜 야할 몇 가지 원칙
ㄱ) 친구의 이야기 진지하게 들어주기
ㄴ) 비난하는 말이나 놀리는 말, 특정한 사람을 지칭하는 것 삼가하기
ㄷ) 친구들 이야기에 방해하지 않기
ㄹ) 한 사람이 계속 이야기 하지 않기--기다리면서 많은 친구들 이야기 듣기
ㅁ) 많은 사람의 의견을 모아 결정하기
** 모둠회의는 아이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건강하게 정착할 수 있도록 교사가 꾸준히 인내하고 기다리고 아이들에게 협력하면서 이루어 내야 할 중요한 교육활동이다!!!
세시와 절기
공동육아 현장은 전통문화가 생활 속에 녹아 있는 것을 추구하며 자연과 더불어 계절에 맞는 삶, 우리 문화가 전승되는 삶, 그리고 그것의 구체적인 생활방식으로 절기행사와 세시풍속에 의미를 두고 그에 따른 놀이와 음식문화를 즐김으로써 우리 민족의 삶의 방식을 배우는 것을 교육의 중심에 두고 있다. 절기와 세시문화는 농경사회와 관련이 있지만 비록 오늘날 우리가 직접 농사를 짓지 않더라고 자세히 들여다보면 절기와 세시는 자연과 항상 맞물려 있어 계절의 변화나 자연의 이치에 맞게 우리의 생활을 이끌어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때가 되면 절기에 맞는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때마다 즐기는 놀이를 하므로 자연스럽게 계절의 흐름을 따라가게 되는 것이다. 특별히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도 어린이집에서 한 해 한 해 지내다 보면 이것이 생활 속의 문화로 아주 자연스럽게 다가옴을 느낄 수 있게 된다.
산에 진달래가 피면 ‘화전 해 먹어야겠네’ 라고 누군가가 불쑥 말하게 되고, 텃밭에 냉이가 나오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냉이를 캐고 쑥에 새 순이 돋으면 쑥을 뜯는다. 처음 연하게 나오는 새순은 쑥버무리를 해먹고 쑥이 조금 억세질 무렵에는 쌀가루와 함께 빻아서 쑥개떡을 해먹을 줄 알게 된다. 이러한 것들을 시장에 가서 사 먹으면 그저 식품 그 자체지만 늘 자연과 접해 있으며 자연의 일부로 살아가려는 공동육아에서는 이런 행위도 매우 자연스러운 자연의 일부인 셈이 된다.
또 경칩이 지나면 개구리 알을 보러 가고 그 알이 자라서 올챙이가 되고 후에 개구리가 된다는 것도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더위가 찾아오면 부채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단오부채도 만들고 어린이집 모래마당에서는 씨름판이 벌어진다. 어른들은 달력을 보며 이를 계획하고 준비하지만 아이들은 이러한 음식을 먹고 놀이를 하고 이야기를 들으며 대보름도 알고 추석이나 단오를 알게 되며 절기와 세시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아이들에게는 그저 ‘단오가 어떻고 우리 조상이 이 날 뭐를 했고 지금 우리가 단오행사를 하는 이유는 말야’하는 식의 설명이 필요한 게 아니고 그저 옛날 이야기처럼 우리가 하는 활동을 자연스럽게 해 주면 될 것이다. 아이들은 훗날 햇살이 따가워지기 시작했던 어느 날인가 땀을 많이 흘리며 씨름을 하고 마당에서 장명루를 팔에 두르던 기억과 쓴 익모초를 갈아 마시며 토하기도 하고 얼굴을 찡그렸던 모습과 함께 머리에 입 달린 괴물이야기를 기억해낼 수 있을 것이다.
나들이 길에선 자연이 바뀌는 여러 가지 변화를 보면 또 아이들은 계절의 변화를 온 몸으로 맞이한다. 찔레순이 나오면 찔레순을 따먹고 괭이밥이나 싱아 잎을 뜯어먹어 보고 꿀풀에서 꿀을 쪽 빨아먹기도 한다. 그리고 지천으로 널려있는 노란 애기똥풀을 마주하면 줄기를 잘라 손톱에 칠해 보기도 한다. 여름철 내내 매미가 장하게 울고 난 후 숲에서 매미 허물을 발견하게 되고 장마와 태풍이 지나간 숲에서는 바람에 쓰러진 커다란 나무와 부러진 나뭇가지들을 보며 그 흔적을 느끼기도 한다. 또 하늘이 조금씩 파래져갈 무렵에는 뒷산에서 밤이랑 도토리도 줍고 낙엽을 던지며 쌀쌀한 바람결을 느끼면 어느 새 숲은 하얀 눈으로 뒤덮인다.
나들이를 통해 공동육아가 하고 있는 자연을 통해 바라보고 느끼고 만져보는 이러한 많은 활동들이 아이들에게는 조금도 어색한 일이 아니다. 자연의 변화를 통해 우리가 아이들과 하는 모든 절기와 세시활동도 우리가 누리는 자연 속의 일부인 것이다.
세시활동을 통한 놀이문화도 어린이집에서는 아주 중요한 부분이다. 어린이집에서 세시때 해왔던 놀이들이 계절별로 어느 정도 일상화되고 있다. 대동놀이나 씨름, 줄다리기, 산가지 놀이, 윷놀이, 까막잡기 등의 놀이는 우리 아이들에게 이제 자연스런 생활의 부분이 되어 해가 갈수록 틀이 잡히고 있다.
절기에 맞는 먹거리도 공동육아에서는 중요하다. 인스턴트나 햄버거 청량음료가 요즘 아이들에게 인기가 있긴 해도 어린이집에서 절기마다 해먹는 진달래화전이나 쑥개떡, 송편, 팥죽, 만두, 강정, 부침개, 오미자화채, 식혜, 수정과 등은 우리 아이들 입맛에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무엇보다 제철에 나오는 나물을 먹을 줄 아는 것이 큰 수확이다.
절기란?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1년을 춘하추동의 4계절로 나누고 그것을 다시 24절기로 나누어 놓았다. 절기와 절기 사이는 약 보름 정도이며 예로부터 농업을 주로 하던 우리 조상들은 절기에 따라 농경생활을 해 왔고 어업과 관혼상제를 치르는 데도 이를 적용해 왔다.
농사를 제때 짓기 위해서는 계절과 시간에 큰 변화가 없는 태양력을 사용해야 했다.
봄 : 입춘, 우수, 경칩, 춘분, 청명, 곡우
여름 : 입하, 소만, 망종, 하지, 소서, 대서
가을 : 입추, 처서, 백로, 추분, 한로, 상강
겨울 : 입동, 소설, 대설, 동지, 소한, 대한
세시란?
세시란 설, 정월대보름, 삼월삼짇날, 단오, 유두, 백중, 추석, 동지 등과 같이 음력 정월에서 섣달까지 같은 시기에 반복되는 주기적인 전승 의례를 말한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음력으로 지내는데 엄밀히 말하면 순전한 음력은 아니고 태양력을 가미한 태양태음력을 기준으로 한다. 세시풍속이 행해지는 이러한 세시명절은 일상의 날과 구별되는 각별한 날로서 대체로 다달이 있어 1개월을 간격으로 긴장과 이완의 순리를 반복함으로써 주기적으로 다음 생활의 활력과 삶의 탄력을 얻는 재충전의 기회이기도 했다. 또 일년을 계절적으로 나누어 계절의 고비마다 쇠퇴하고 약화된 우주의 생성력을 촉진하고 인간의 생존력에 활력을 불어 넣어주는 통과 의례적인 의미도 지닌 계절의례의 성격을 갖는다. 그러나 매 달 큰 축제가 있는 것도 아니고 농사가 바쁘거나 마을 전체가 품앗이를 해야 하는 경우 등을 따져 크고 작은 축제가 어우러지게 됨으로써 강박의 생활 공동체적 리듬을 가졌다.
전통사회에서는 우리의 생업이 농업이었으므로 농경의 주기는 세시풍속의 주기와 맞물려 있는 생활의 주기였다. 농사의 개시와 파종, 제초, 수확, 저장 등 농경주기와 일상생활의 주기와도 무관하지 않았다. 세시풍속이 행해지는 세시명절에는 놀이를 하거나 휴식을 취하며 각별하게 보냈기 때문이다. 또 이를 통해 농사가 잘되기를 기원하고 감사했으며 복을 빌었다. 즉 세시풍속의 궁극적인 목적은 인간의 삶에 활력을 불어 넣어주며 액을 때우고 복을 빌게 됨으로써 풍농과 건강을 획득하고자 하는 데 있었던 것이다.
또 여기에는 이와 관련된 이야기와 유래가 꼭 뒤따라 다닌다. 따라서 놀이 하나 행위 하나에는 모두 철저하게 의미가 들어있다.
-대보름 때는 일년 중 달이 가장 큰 때이므로 품앗이 공동체를 이루었던 한 마을 단위로
그 해의 풍년과 무사태평을 기원하는 놀이(당산제, 줄다리기 등)가 주를 이룬다. 농사와
관련해 지신밟기, 쥐불놀이를 하고 영양이 가장 부족한 이 때 부럼이나 묵은 나물을 꺼
내 해 먹음으로써 영양보충을 하기도 한다
- 진달래가 활짝 피는 삼월삼짇날에는 진달래꽃을 따서 화전을 부쳐 먹는다.
-단오는 일년 중 양기가 가장 왕성한 날이며 더위가 시작되는 날이므로 그에 걸맞는 여러
가지 행위와 놀이들이 이어진다. 여름 내내 더위 먹지 말라고 익모초 즙을 내 먹고 몸에
좋은 쑥이나 수리취 나물을 뜯어 떡을 해먹는다. 맛이 매우 쓴 익모초를 먹이기 위해 아
이들에게 ‘머리에 입 달린 괴물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은 우리 조상들의 슬기가 아닐 수
없다. 또 농사가 바쁜 때이므로 다른 명절과 달리 단오 때의 놀이는 며칠 간 계속 되는
것이 아니라 하루로 끝난다.
-동짓날에는 팥죽을 쑤어 먹는다.
첫댓글 오~! 정리가 잘 되어있네요. 보기 좋아요, 도토리
도토리~~~~~! 멋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