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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갈라디아서1장1~5절
제목 : 아버지로 말미암아
오늘부터 갈라디아서를 통해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여러분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비난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반대로 내가 다른 사람을 비난한 적도 있을 것입니다.
비난 할 때는 모르지만 비난을 들을 때 그 기분은 어떠했습니까?
굉장히 언짢지요. 분노가 날 때가 있습니다.
비난을 할 때나 비난을 들을 때는 대부분 오해에서 비롯되어 집니다.
그 사실을 제대로 알지못하고, 속단하고, 함부로 정죄하는 일이 있습니다.
비난을 받을 때 그 상처는 굉장히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오해에서 비롯된 비난도 있지만,
어떤 경우에는 고의적으로 모함하기 위해서 고의적으로 모함할 때도 있습니다.
자기의 허물을 음패하기 위해서 오히려 모함할 때도 있습니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것은 그렇게 좋은 일이 아닙니다.
내가 비난 받을 때 느꼈던 감정을 안다면 함부로 다른 사람을 속단하고
비난하는 일은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비난을 받은 사람들이 여렸있습니다.
예루살렘의 할례자들이 이방인과 함께 식사했다는 이유로 베드로를 비난했습니다.
사도행전 6장에 보면 스데반 집사를 모함하고 비난하여 거짖 증인을 세워 돌로 쳐 죽이기까지 합니다.
예수님도 비난을 받았지요.
사도 바울도 비난을 받을 때가 있었습니다.
바울이 다메섹 동산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회심하였을 때 많은 사람은 그를 믿어 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비난하면서 그를 올무에 우리를 걸기위해서 그런 것이다 라고 비난했습니다.
그리고 유대출신 그리스도인들이 바울에 의하여 설립된 교회마다 찾아다니며
그가 사도라고 하는데 그가 예수님의 제자였는가?
제자가 아니지 않는가? 그의 사도는 믿을 수 없다.
그 사도직을 우리가 믿을 수 없다면 그가 전하는 복음,
그의 말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 얻는다”는 그가 전하는 복음도 모두 믿을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를 딸아 가다가는 잘 못되기 쉽다고도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이 말하기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 얻는 것이 아니라 유대교회에서 주장하는 대로 율법을 열심히 지키고, 할례도 받고, 그래야 우리가 구원을 이룰수 있다.”라고
가르치면서 바울의 인격을 무시해버리고,
바울의 사도직을 거짖 것으로 몰아 부치고,
그가 전하는 복음까지 잘 못된 것으로 매도 해버리는
엄청난 비난의 소리를 사도 바울이 들었습니다.
갈라디아 교회는 대혼란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바울의 마음은 천갈래 만갈래 찢기는 아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후에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키
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무효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할례와 율법을 통해서 구원을 얻는다는 주장에 대한 잘못됨을 지적하고 오직 구원은 믿음으로 얻는다는 진리를 전하기 위해서 이 편지를 쓴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갈라디아서를 살피면서 우리에게서도 보여지고 있는
많은 율법적인 부분들의 잘못을 깨달아야 할 것이고,
오직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바로 알아야 할 것입니다.
본문 갈1:1~5은 인사하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인사 속에 깊은 진리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1절은 어떻게 바울이 사도가 되었는가에 대하여,
2~3절은 사도바울의 축복기도에 대하여,
4~5절은 오직 영광은 하나님께만 있다고 말씀합니다.
본문 말씀을 통하여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된 바울 (1절)
1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이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서신을 띄우는 첫 인사에서 자신이 사도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사도직은 사람에게서 난 것이 아니며,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님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11절에서도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
12절에서도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강력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선지자나 사도는 대개 혈통을 타고 온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사도나 선지자가 되는 것을 안수형태를 따른 일종의 계승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사도직은 혈통이나 계승으로 인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서신을 통해서 자신의 사도직은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았다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예수님 생전에 같이 제자의 삶을 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다메섹 도상에 나타나시어서 바울에게 사도의 직분을 맡기신 것으로 확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을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자신이 사도된 것은 이 세상 창조 전부터 계셨던,
하나님 아버지의 예정 속에 있었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한때는 스데반을 죽이는데 동참했고,
그것으로 만족할 수 없어서 다메섹으로 예수 믿는 무리를 처벌하러 가기까지 한 살인자였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하나님이 만세 전부터 나를 선택하셔서 사도가 되게 하셨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사도로서 이러한 자부심이 없다면 주를 위해 살 수 없을 것입니다.
믿는 우리들도 성도로서 자부심을 가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롬8:17절 ①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②우리는 하나님의 상속자입니다.
*빌3:20절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
*요13:1절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여러분에게 주신 성도의 직분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모두 성도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성도의 특성을 알고 성도다운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성도의 특성이 무었입니까?
마음에 소금을 두어 화목하는 것입니다.
참고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습니다.
항상 기뻐하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것입니다. 찬양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것입니다. 좋은 것을 쫓아 행하는 것입니다.
성도다운 삶을 살므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시기 바랍니다.
2. 바울의 축복(2-3절)
바울은 자신이 사도임을 밝히면서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
축복을 기도하고 있습니다. 2~3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2]함께 있는 모든 형제와 더불어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 [3]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그 축복의 기도 내용은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는 기도입니다.
은혜와 평강이란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전체 내용을 함축하고 있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기도한 은혜와 평강은
복음을 믿음으로 얻어지는 것입니다.
즉, 복음이 우리에게 주는 것은 은혜와 평강입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말씀입니다.
복음은 죽은 우리를 살렸고, 죄에서 구원했으며,
노예 된 인생에서 자유케 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나라로 인도합니다.
구약의 모든 말씀이 복음으로 완성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바울에게 있어서
은혜란 말은 이 세상에서 가장아름다운 말이며, 가장 사랑스러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실제로 체험하였고 실제로 자신이 은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은혜는 너무나 매력이 있는 것입니다.
은혜가 무었입니까?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선한 뜻과 행위(선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바울의 편지에만 101회 사용되었습니다.
바울의 서신에서는 모든 은사도 은혜로 주어지며,
신앙도 믿음도 구원도 은혜로 주어집니다.
은혜는 정말로 아름다운 선물입니다.
그러기에 감사했고 그래서 모든 사람에게 은혜가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또한 평강이 있기를 바랬는데,
평강은 은혜의 결과로 주어진 것입니다.
평강은 히브리어로 샬롬이라고 하는데, 원만, 건전, 안녕을 뜻합니다.
내적위로와 외적 번영(인간의 행복한 존재상황 자체)을 말합니다.
평강은 하나님과 나 사이에 교제가 이루어졌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평강은 믿는 자에게 주시는 영적인 큰 축복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죽으 심으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셨고, 부활하여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평강을 내려 주셨습니다.
바울은 오늘 이 본문에서 갈라디아 교회와 우리에게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는데 그 은혜는 과연 어떠한 은혜입니가?
첫째, 허물과 죄로 말미암아 죽은 우리를 살리신 은혜입니다.(엡2:1)
둘째, 절망과 좌절 속에 있는 우리를 소망과 희망으로 인도하시는 은혜입니다.
세째, 병들어 죽게 된 나에게 살게 하시는 은혜입니다.
네째, 이방인인 우리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게 하신 은혜입니다. 다섯째, 완전히 패배된 나의 인생을 승리로 이끌어 주시는 은혜입니다.
이러한 은혜는 오직 주 예수만으로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은혜와 평강을 외지교회 모든 성도님들이 마음껏 누리시기 바랍니다.
그러기위해서는 우리가 에베소서 강해 때 말씀 들었듯이 우리의 삶가운데,
첫째는 우리는 날마다 찬양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둘째는 우리가 구원 받은 자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셋째는 우리가 구원 받은 은혜를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네 번째는, 그리스도의 비밀(복음의 비밀과 교회의 비밀)을 알아야합니다.
다 섯번째로, 복음의 일꾼임을 알아야 합니다.
여섯 번째로 “성숙을 위한 기도”하여야 합니다.
3. 오직 영광은 하나님께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철저히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게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5절입니다. “영광이 그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바울은 ‘세세토록 영광을 받으실 분은 오직 하나님밖에 없음’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그의 삶의 목표였고 가치였습니다.
그리고 갈라디아서를 쓰는 목적이기도 합니다.
저와 여러분도 바울과 같이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는,
즉 삶의 궁극적인 목적과 비전이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영광을 돌려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바울 사도는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는 분명한 이유’를 설명하여 주십니다.
4절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
1) 악한 세대에서 건지심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에 따라서 우리를 이 악한 세대에서 건지셨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악한 세대’란 하나님을 대적하는 타락한 인간, 패역한 세상을 뜻하는 말입니다. 곧 심판 받아 멸망할 세상을 의미합니다.
또 ‘건지다’란 말은 ‘깊은 수렁에서 구출하고 끌어 올리다’란 뜻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을 그렇게 비관적으로 보고 있지 않다는데 있습니다.
그들은 이 세상을 불의와 죄악으로 가득 찬 곳으로,
그래서 반드시 멸망할 수밖에 없는 곳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느 잘나가는 여당 국회의원 보좌관이 정치인들의 룸살롱 문화를 비판하는
기자에게 “솔직히 그런 것이 없으면 무슨 재미로 사느냐”고 반문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현실입니다. 그들은 세상을 얼마든지 즐기면서,
자자손손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곳으로 생각합니다.
때문에 그들은 굳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아 천국백성이 되어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합니다.
그들은 세상에서 악을 행하며 불의한 삶을 살아가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노아시대의 백성들처럼,
소돔과 고모라의 도성 사람들처럼,
결국 부지불식간에 멸망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사는 세상은 죄악으로 가득찬 ‘악한 세대’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결국 멸망할 세상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멸망할 이 세상에서 우리를 건져주시는 방법으로
아주 놀라운 방법을 택하셨습니다.
2)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따랐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은 악한 세대에 자기 아들을 보내셔서 수많은 모욕과 고생을 당케하사 십자가에 죽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하신 이유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를 깊은 죄의 수렁에서 구출하기 위하여
그리스도, 곧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신 것입니다.
그리므로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다”고 말씀합니다.
바로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오늘날 많은 신앙인들이 ‘십자가를 장식품으로 많이 애용’하지만,
예수님 당시의 십자가는 ‘가장 처참하고 참혹한 형벌’이었습니다.
십자가형을 가하기 전에 먼저는 크게 매를 치고,
엄청나게 무거운 십자가를 직접 지고 형장으로 가게 합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 때에도, 손바닥에 못을 치면 체중으로 매달려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손목 부위의 삼각 뼈 사이에 못을 칩니다.
그러면, ‘매로 인한 고통과, 혈액의 과다 유출로 사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얼마나 심하게 매를 맞고 고통을 당하셨는지,
‘아침 9시에 십자가에 달리셔서 오후 3시에 운명’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십자가형은 매달린 사람의 옷을 다 벗깁니다.
육체적 고통과 더불어 수치심도 주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그냥 편하게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이와 같은 엄청난 고통이 뒤따른 것입니다.
우리에게 “은혜와 평강을 주시기 위하여”, “악한 세대에서 건지시기 위하여” 몸과 영혼, 자존심과 육체적인 능력까지 다 드린 것입니다.
이를 통하여 우리가 나음을 입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축복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십자가의 사랑을 통한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을 믿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우리들 입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십자가의 은혜를 아는 사람은 변화합니다.
불평과 원망이 감사와 찬양으로 바뀝니다.
삶의 목표와 가치가 바뀝니다.
“세세토록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예화]
한 아이가 일곱 살의 나이에 어머니를 잃었습니다.
그리고 그 때의 상처로 성격이 비뚤어지고, 난폭하게 변하였습니다.
급기야는 ‘아프리카의 흑인을 잡아서 노예로 파는 노예상인’이 됩니다.
그러던 중, 1748년 3월 1일에 ‘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란 책을 읽고 회심하였고, 훗날에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목회자가 된 후에도, 그의 가슴에는 항상
‘노예 상인이었던 자신과 같은 죄인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며 사역하였습니다.
그리고 유명한 찬송시를 작시합니다.
바로 찬송가 305장인 ‘나 같은 죄인 살리신, Amazing Grace’입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이란 찬양은 존 뉴턴 목사님의 자기 고백입니다.
‘잔인한 노예상인으로 살았지만 자신을 존귀하게 여기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합니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은혜와 사랑을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을 체험’합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세세토록 영광을 돌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독생자까지 주신 사랑,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깨달아야만
온전히 ‘세세토록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를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사하여 주셨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와 같은 악한 세대에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셨으니 이제 우리는 내 중심 보다는 하나님 중심으로 살고,
자기중심이 아니라 이웃 중심으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세상의 권력과 명예 중심이 아닌 예수님 중심,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
모든 것에서 승리하며, 은혜와 평강이 넘쳐흐르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렇게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신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우리의 남은 일생을 통해
세세토록 무궁한 영광을 돌리실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은혜를 베풀어 주심을 감사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고,
하나님의 아버지로 말미암아 성도가 되었고,
자녀가 되었고, 상속자가 되었고, 하늘나라의 시민권을 갔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은혜와 평강을 주심을 감사합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내적 위로와 외적 번영을 통하여,
주안에서 행복을 누리게 하시고,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게 하여 주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