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정독회 <무명선無名線>을 알립니다.
사는 곳이 멀리 떨어져 쉬이 만날 수 없었던 친정의 세 사람– 고월, 부용, 청라-이 매월 마지막 주 토요일에 온라인 상에서 만나 지난 한 달간 함께 읽은 텍스트에 대해 그리고 텍스트의 빛과 그늘에 비춰본 우리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는 모임을 2022년 1월부터 갖추게 되어, 현재까지 아래와 같이 모였습니다.
2022년 1월 더불어-읽기: <여시아문>
2022년 2월 더불어-읽기: <일본의 굴레(1)>
2022년 3월 더불어-읽기: <일본의 굴레(2)>
2022년 4월 더불어-읽기(예정): <허수경>
친정독회의 이름, <무명선無名線>의 연원은 2022년 3월 모임 중, <무명의 말들>의 아래 인용구를 꺼내어 선보인 청라에 의해 <무명통신>으로 1차 제안 되었으며, 고월의 ‘세 글자 명칭’에 대한 제안을 반영, <무명실> <무명회> <무명단> 등의 추가 제안을 거쳐, <무명전선無名戰線>에 대한 부용의 제안을 참조, <무명선無名線>으로 최종결정이 되었습니다.
수난 서사는 피해자 중심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거기서 이야기되는 피해 사실들은 오로지 가해자의 폭력성을 입증하기 위한 사례에 불과하다. 이때, 폭력을 통해 피해자라는 위치에 강제적으로 놓이게 된 이들은 다시 피해자의 위치에 고정된다. 이 ‘피해자의 피해자화’는 그들이 지녔을 다양한 가능성들을 봉인한다.
이런 피해자화에 대한 저항을 생각할 때 떠오르는 것은 1959년에 일본 규슈 북부의 탄광지대에서 창간된 <무명통신>(無名通信)이라는 간행물이다. 당시 그 지역에서 활동하던 시인 모리사키즈에 중심으로 발간된 이 잡지의 성격은 창간사 ‘도덕 귀신을 퇴치하자’에 잘 드러나 있다. 이 글은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우리는 여자에게 덮어씌워진 이름을 반납하겠습니다. 무명으로 돌아가고 싶은 것입니다.” 이 글에서 먼저 비판 대상이 되는 것은 가부장제지만, 그 가부장제 속에서 형성된 ‘피해자의 자유’, 즉 아무도 해치지 않았다는 데서 오는 도덕적 안락함을 여성들이 버리지 않는 것이 가부장제가 재생산되는 원인이라고 날카롭게 지적한다. 그런 성찰 뒤에 이 글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렇게 보면, 과거 가부장제를 만든 권력을 뒤엎기 위해서 피해자로서 모이는 것만으로는 여자들의 근본적인 해방은 이룩할 수 없는 셈입니다. 자신을 가두는 껍데기를 우리 손으로 깨는 것. 그것은 피해자가 권력에 대한 가해자가 되는 순간입니다. 일상생활 속에서, 우리가 우연히 알게 된 동무들 속에서 이것을 하는 것 외에 다른 자리는 없습니다.” 주어진 이름을 반납하고 무명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스스로 새로운 이름을 짓기 위한 첫걸음이며, 그것은 권력에 대한 가해자가 될 때 가능해 진다. 154~6
앞으로도 친정사람들은 계속 만나고, 읽고, 이야기하려 합니다. 친정이 세상을 변화시키거나 구원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다만 우리를, 무명(無名/無明)의 우리를 구원하는 일에 최선을 다할 작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