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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계(玉溪) 노진(盧禛)1518년(중종 13)~1578년(선조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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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제/책임표시사항 養休堂集 / 盧禛 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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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사항 木板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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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사항 [刊寫地未詳] : [刊寫者未詳], 仁祖 23(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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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태사항 3卷2冊 : 四周雙邊 半郭 17.3 x 12.9 cm, 有界, 10行20字 註雙行, 黑口, 上下內向2葉花紋魚尾 ; 26.6 x 16.1 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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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사항
跋: 萬曆乙酉(1645)...丁焰
본 자료는 1988년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조사·영인한 자료로 그 영인본을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열람할 수 있음
복제본소장기관: 國立中央圖書館(古3648-15-25-1)
정염(丁焰) 1524년(중종 19)~1609년(광해군 1)
선조 17 1584 갑신 萬曆 12 61 겨울, 光州 牧使가 되다.
선조 18 1585 을유 萬曆 13 62 겨울, 후에 「司訟類聚」로 간행된 「司訟錄」의 발문을 짓다.
선조 21 1588 무자 萬曆 16 65 古阜 郡守가 되다. ○ 盧禛의 「玉溪集」을 간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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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日本) 존경각(尊經閣) 소장(所藏) 『양휴당집(養休堂集)』의 판본 고찰
초록 보기
이 논문은 일차적으로 그동안 실전된 것으로 알려진 『養休堂集』이 日本의 尊經閣에 보존되어 있다는 사실을 학계에 보고하기 위해 작성된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양휴당집』의 체제와 구성내용이 중간본인 『玉溪集』과 어떠한 차이가 있는지를 밝혀 판본적 의미를 구명하는 데에 목적이 있다. 『양휴당집』 3권과 『옥계집』 원집 5권을 대조해본 결과, 중간본을 간행할때 초간본에서 삭제한 내용은 寄金都事書라는 편지 1통 뿐이다. 그리고 詩32수, 賦3편, 表1편, 祭文18편, 墓誌銘1편, 墓碣記1편, 疏1편, 啓2편, 書1통이 새롭게 증보되었다. 이처럼 『양휴당집』은 『옥계집』에 비해 寄金都事書라는 편지 1통이 더 수록되어 있을 뿐, 작품의 수량이나 내용의 측면에 있어서는 중간본보다 새롭게 확인할 수 있는 사항이 없는 것으로 판단된다. 하지만 이러한 미묘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중요한 의미를 정리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초간본과 중간본을 편찬한 사람들 간의 학통 의식에 변화가 있었다. 초간본인 『양휴당집』은 1585년에 간행되었으므로, 남명학파의 위상이 퇴계학파에 뒤지지 않았다. 그런데 중간본인 『옥계집』은 1623년 인조반정으로 인해 남명학파가 정치적으로 몰락한 이후인 1632년에 중간되었으므로, 퇴계를 높이고 남명을 낮추려는 의도에서 만사의 제목을 수정한 것이다. 둘째, 현재 한국고전번역원에 DB화 되어 있는 『옥계집』 원문에는 상당 부분 빈칸으로 표시되어 있다. 『옥계집』의 원본 자체가 마모되어 판독할 수 없는 글자들을 빈칸으로 표시한 것이다. 그러나 『양휴당집』에는 판독할 수 없는 글자가 없으므로, 여기에 근거해 『옥계집』의 원문을 보완할 수 있다. 셋째, 『양휴당집』의 글씨체는 『남명집』 초간본과 매우 유사하다. 『남명집』 초간본의 경우, 許從善(1563-1642)이 글씨를 썼다. 두 문집의 글씨체를 대조하는 작업을 통해 남명학파 학자들의 문집 판본에 대한 연구를 심화시켜야 할 것이다. 넷째, 『양휴당집』에는 판목을 새긴 刻手를 표시하는 글자나 문양으로 판단되는 것들이 있다. 이 글자와 문양에 대한 고찰을 진행하여 조선 중기에 활동한 각수들에 대한 연구를 확대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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養休堂集.1 - 2 / 盧禛 著
노진
판사항複寫本(原本:木板本 1645)
발행사항서울: 國立中央圖書館, 1988
형태사항3卷2冊: 四周雙邊, 半廓 17.3 x 12.9 cm. 有界. 10行20字, 黑口, 注雙行. 內向二葉花紋魚尾; 26.6 x 16.1 cm
주기사항跋: 萬曆乙酉(1645)...丁焰
原本: 日本尊經閣文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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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 18 | 1585 | 을유 | 萬曆 | 13 | 62 | 겨울, 후에 「司訟類聚」로 간행된 「司訟錄」의 발문을 짓다. |
선조 | 21 | 1588 | 무자 | 萬曆 | 16 | 65 | 古阜 郡守가 되다. ○ 盧禛의 「玉溪集」을 간행하다. |
晩軒先生文集卷之二 / 跋 / 養休堂遺稿跋
盧君士誨。奉其先大夫遺稿來示。余受而讀之。葢未有偶然操筆而爲空言者也。有倡而酬之者若干篇。如應製月課諸作。所以供詞掖之職也。挽詩祭文行狀誌銘之屬。人道之最厚。而不可廢者也。乞養之䟽。辭職之狀。尤其勤懇。而不能自已者也。嗚呼。公實非用力於文字者。而其文固亦可觀。况其忠孝惻怛之心。可見於此。則其但藏諸一家而已矣乎。
按使金公泰廷。聞而可之。徵梓于旁邑。而與之助。故功易就。其亦幸矣。萬曆乙酉(1585,선조 18)閏夏上浣。
晩軒先生文集卷之二 / 跋 / 司訟錄跋
金侯伯幹。於事不放過。其爲郡縣。尤致謹於平反。嘗裒集决訟要覽。以便剖判。不惟爲聽訟者之指南。使人人得見法意。不肆其誣。則亦庶幾息爭訟之方矣。今監司泰廷。讀父書。試之一路而有裕。瓜滿將歸。刊板完山。亦可謂能繼其志矣。請余誌其顚末。於是乎書。萬曆乙酉(1585,선조 18)仲冬。光州牧使丁焰謹跋。
노사회(盧士誨) 1540~1579. 자는 계시(啓時), 호는 서간(西澗)이다. 옥계 노진의 둘째 아들로, 저술 《습열당유고(習悅堂遺稿)》가 있다.
내암집 제13권 / 비문(碑文)
익산 군수 노군 묘지명〔益山郡守 盧君 墓誌銘〕
군의 휘는 사훈(士訓), 자는 □□이며 본관은 풍천(豐川)이다. 휘 노유(盧裕)는 진사였는데 군에게 시조가 된다. 고조부 휘 노숙동(盧叔同)은 벼슬이 가정대부(嘉靖大夫) 사헌부 대사헌에 이르렀다. 증조부 휘 노반(盧盼)은 예문관 교리를 지냈고, 예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조부 휘 노우명(盧友明)은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홀로 즐거움을 누리며 벼슬하지 않았는데, 천거로 현릉 참봉에 제수되었는데 후에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조모 정부인 권씨(權氏)는 고려 시중 문탄공(文坦公) 권한공(權漢功)의 후손이다. 부친 휘 노진(盧禛)은 자헌대부 이조 판서를 지냈다. 호가 옥계(玉溪)인데, 문장과 덕행으로 중망을 얻은 것이 세상에서 으뜸이었다. 향인이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지낸다.
모친 정부인 안씨(安氏)는 문성공(文成公) 안유(安裕)의 후손으로 판관 안처순(安處順)의 따님이다. 판관 안처순은 기묘명현이다. 공은 태어나면서부터 아름다운 자질이 있었고 가정의 가르침을 받아 익혀 형 별좌 노사회(盧士誨)와 함께 집안의 자랑스러운 자식들이었다. 모부인과 판서공이 돌아가시자 상에 임하여 정성을 다하였고 몸을 상하면서 예를 지켰으니 그 집안 자제에 걸맞았다. 별좌 사회는 결국 그 때문에 몸을 상해 죽고 말았다. 군이 선친의 묘에 비석을 세우려고 억지로 일에 매달리다가 병이 들어 위태로워졌는데 겨우 살아남았다.
선친의 오랜 친구에게 글을 청했는데 손에 넣지 못하여 항상 마음에 병이 되었다. 안씨 부인은 판서공보다 10년 먼저 죽었다. 판서공이 늙을 무렵 아내를 잃어 안에서 음식을 주관할 사람이 없는데도 그 모친은 아직 살아계셨다. 군이 직접 맛있는 음식을 갖추어 봉양에 어긋남이 없었다. 아우 노사심(盧士諗)이 겨우 이를 갈 나이에 부친을 잃어서 어루만지고 길러주는 것을 자신의 인생과 같이 하였다. 그 후한 태도를 죽을 때까지 변치 않았고, 군은 이로써 아버지의 뜻을 넉넉히 채웠다.
갑오년(1594, 선조27)에 헌릉 참봉(獻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병 때문에 나아가지 않았다. 병신년(1596, 선조29)에 발탁되어 예산 현감(禮山縣監)에 제수되었다. 예산현은 명나라 군대의 수륙요충지였는데 조치가 시의적절 하였기에 고을 백성들이 덕을 입었다. 문묘를 건립하였는데, 비록 시세에 꺾이긴 했지만 백성을 번거롭게 하지 않고 완성을 보았다. 도적의 군대가 열읍을 침략하자 고을을 지키는 수령은 쥐새끼처럼 숨었지만, 홀로 강토를 지켰는데 그 일이 알려져서 직급이 올라갔다. 후에 어떤 일로 체직을 당하자 현의 백성들이 대궐로 달려가 유임시켜 달라고 청하였는데, 허락을 얻지 못했다. 임인년(1602, 선조35)에 진위 현령(振威縣令)에 제수되었는데 사은숙배하기 전에 형조 좌랑으로 옮기라는 명이 있어, 열흘을 넘기고 정랑에 승진하였다.
무주 현감에 제수되어 막 떠나려 하다가 또 체직되어 공조 좌랑이 되었고, 곧 정랑으로 승진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익산 군수로 나가서 학교 교육에 힘쓰고 부역을 균등하게 하니 몇 달이 되지 않아 바른 정사가 이루어졌다. 전에 공조에 있을 때의 일로 체직당해 집으로 돌아가는데 행색이 서생과 같았다.
고을 선비들이 남계서원 원장으로 추대하였다. 어느 날 뜻하지 않게 병이 들더니 오래도록 낫지 못하고 갑진년(1604, 선조37) 10월 10일에 돌아갔으니 운명이었다. 향년 60세였다.
군은 우아하고 중후하였으며 단정하고 어질었다. 모습에 게으른 면이 없었고 말씨는 비루하지 않았다. 고요하고 평안한 성품을 지녔으나 행동은 과감하였고, 온화하고 부드러웠으나 결단력과 자제력이 있었다. 다른 사람의 허물을 들으면 진심으로 도와주었고 선한 점을 보면 마음으로 좋아하였으니, 모두가 천성에서 나왔다.
서산 유씨 부정 응(凝)의 따님과 결혼하였는데 부드럽고 순종적이었으며 부덕이 있었다. 남편보다 먼저 죽었는데, 2남3녀를 두었다. 장남 모(某)는 사인 최항경(崔恒慶)의 따님과 결혼하여 자녀를 두었으나 모두 어리다. 차남 모(某)는 사간 최상중(崔尙重)의 따님과 혼인하였는데 아우 노사첨(盧士詹)의 후사를 이었다. 장녀는 허모(許某)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사인 강응황(姜應璜)에게 시집가서 아들 하나를 낳았다. 삼녀는 이익빈(李益彬)에게 시집가서 자녀를 낳았다. 소실이 딸 둘을 낳았는데 큰 애는 여섯 살이고 둘째가 네 살이다.
군자가 이르기를 “지위가 덕에 걸맞지 않은 사람은 후손이 잘된다.”라고 하였으니 군은 아마 후손이 잘 될 것이리라. 이 해 12월 16일 주곡(酒谷) 언덕에 장사지냈다. 나는 외람되게도 판서공의 외가 친족이라 일찍이 인사를 드린 적이 있다. 별좌군에게 자못 인정을 받았고, 군은 나를 더욱 더 신뢰하여 얼굴만 아는 정도가 아니었다. 내가 소명을 받고 대궐에 있었는데 마침 군이 좌랑이나 정랑으로 있을 때였는지라 날마다 서로를 찾으며 좋은 일과 나쁜 일을 함께 나누었다.
아아! 예전에 벼슬살이 할 적에 판서공의 부음을 들었고 이어서 별좌공의 죽음을 애통해하였는데, 이제 죽을 때가 다 되어 또 군을 곡하는구나. 처음부터 끝까지 수십 년간 군의 한 집안 삼부자를 잃었으니 인간세상에서 어떠하겠는가?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
효성과 우애가 / 維孝與友
집안에 전해지는 경우가 드문데 / 人鮮家傳
군은 대대로 이어갈 수 있으니 / 君世克肖
조상에 영광이로다 / 有光于先
자신을 숨길 수 있고 드러낼 수도 있으니 / 能晦能明
그 뜻을 바르게 했기 때문이다 / 而正其志
덕을 쌓으면서도 없는 것처럼 하였으니 / 蘊德若無
또한 군자가 아닌가 / 不亦君子
함양 한쪽 산기슭 / 天嶺一麓
주곡에 언덕을 정하고 / 原卜酒谷
넉 자 봉분에 안장하니 / 安四尺封
여기가 군의 무덤이로다 / 是君攸宅
[주-D001] 노군(盧君) : 노사훈(盧士訓, 1545~1604)으로, 본관은 풍천(豐川), 자는 학고(學古), 호는 운고(雲皐)이다. 저술로 《운고일고(雲皐逸稿)》가 있다.
[주-D002] 노사회(盧士誨) : 1540~1579. 자는 계시(啓時), 호는 서간(西澗)이다. 옥계 노진의 둘째 아들로, 저술 《습열당유고(習悅堂遺稿)》가 있다.[주-D003] 노사심(盧士諗) : 1567~1609. 자는 충보(忠甫), 호는 서강(西岡)이다. 옥계 노진의 일곱째 아들이다.
ⓒ 경상대학교 경남문화연구원 남명학연구소 | 김익재 양기석 정현섭 (공역) | 2014
김태정(金泰廷) (1541~1588)
조선 명종(明宗)~선조(宣祖) 때의 문신. 본관은 광산(光山)으로, 찰방(察訪) 김백간(金伯幹)의 아들. 이황(李滉)의 문인들과 교유하였으며,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 등을 지냄. 《퇴계집(退溪集)》에 그의 문목(問目)에 답한 글이 실려 있음.
전주(全州) 화산서원(華山書院) 만력(萬曆) 무인년에 세웠으며 임인년에 사액하였다. : 이언적(李彦迪)ㆍ송인수(松麟壽)
나주(羅州) 경현서원(景賢書院) 만력 계미년에 세웠고, 정미년에 사액하였다. : 김굉필(金宏弼)ㆍ정여창(鄭汝昌)ㆍ조광조(趙光祖)ㆍ이언적(李彦迪)ㆍ이황(李滉)ㆍ김성일(金誠一)
화산서원(華山書院) : 전라북도 완주군 소양면 신원리에 있는 서원이다. 이언적(李彦迪, 1491~1553), 송인수(宋麟壽, 1487~1547), 육대춘(陸大春)을 배향하고 있다.
晩軒先生文集卷之二 / 雜著 / 上方伯請建玉溪書院
生等伏以秉彝好德。出於天理之自然。而人心之所不能自已者也。是故。盡同然之理者。必有以感同然之心。生而歆豔之。死而至於崇奉之。是豈千百人之心。私於一人而爲之哉。所謂好德之良心。不期而然者也。故判書盧公。深沈德量。固已見重一世。而吾鄕人覿德。最深且久。葢有他人所不能及知者矣。公之少也。受學於吾鄕斯文安先生之門。而鄕之朋士。得與從游。自當時皆自以爲不可及。狎而敬之。畏而愛之。瞷之熟而悅之深矣。及其出爲世用。而往來經由之便。亦嘗在於是府。故鄕士之相知者。無歲不相從。而數十年間。未嘗見其德履之或變。所養者益熟焉。則非懋於克念之功者。能如是乎。天喪斯文。不幸而奄忽焉。其爲樑摧之慟。曷其能已。生等方欲建院立祠。以寓尊尙之意而瞻思焉。顧以事在一鄕。不由於在上者之頷可。則人亦未必信其爲。而工役之費。况難辦於私者乎。且非不知此事體面重大。不容輕擧。而汲汲於爲此者。抑有意焉。恭惟閤下好賢愛士。諭於士夫之心者有素。而於吾公未必無一日之雅。則談論之間。一芝一蘭。其臭味。應不相遠矣。此乘之會。意其在此。不審閤下以爲何如。生等瞢學淺識。固未足以論公之世。且以狂僭之說。爲閤下請焉。竊嘗思之。公雖由科第出身。其學也曰記誦未也。曰詞章未也。不見其有講習之勞。而能發明聖賢之底蘊。則所務者非徒博也。不見其雕鐫之功。而發於程文者。亦要其有實用。則所尙者非空言也。不必矜持而心未嘗放。不必端斂而體未嘗肆。不有意於謹言而發於口者。無蔓辭焉。不有意於修行而施於爲者。無苟擧焉。處世應物。不露圭角。渾厚溫醇。未易涯涘而發於光輝者。有不得而掩者。殆所謂默而成之。不言而存者歟。然而曠度宏量。謙退不伐。一時名道學者。莫不歷訪而事友之。至其所以爲受用者。則疑別有自得處。而亦未嘗語人也。平生仕宦多任外寄。而且以常調自處。不敢涯異於人。故譽望雖隆。而未必知其所資之深也。朝夕擬以公輔。而亦未必目爲儒宗也。君子一言以爲知。一言以爲不知。生等之不知宜矣。不知如何而可謂之好學。如何而可謂之成德乎。生等之以是觀公而稱思者。非阿其所好也。非故爲好事也。乃其所見者然也。雖然。此特論其所存者。今其諸孤創鉅痛深。雖未及紀次之事。而宜必有狀其行者。闡揚其幽微。則生等之言。始訂其不誣也。閤下其亦信否。第念吾東方書院之說。古所未聞。而肇自我國朝。其始也創見而誇美之。固以爲昭代之盛事矣。其後踵以爲之者。又不知其幾所。則人情貴耳而輕目。在古則未爲不可。在今則或爲不然。事久而翫。情狃而衰。已有議其不可爲者。則吾道盛衰之機。未必不由是而知之。爲吾徒者。豈不寒心矣乎。當此之時。閣下苟以此爲出於摹倣之爲。而不留意。則生等亦何所望哉。况府是南中雄邑。士子之多。示諸州爲最。而學校之外。迨未有藏修之所。則凡干右文之事。其不係於方面之寄者。閤下誠能不以爲不可。則晦齋▦書院者。乃前監司沈相公所寘力者也。取其見成措置行下。不勝幸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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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시만(蘇始萬) 1734년(영조 10)~1765년(영조 41)
菊軒集卷之下 / 書 / 代華山書院儒生上院長
竊惟祠院之創設。其始出於先輩之景慕。而其地又極一方之名勝。則信乎其事之重且大。而非後生之所可輕議也。然而俎豆之崇奉無窮。山川之變換不常。捨舊卜新。勢不容緩。而猶且拘其重嫌其輕。有所俯仰。則是將得罪於先輩。而塵埃草萊之責。其愧不鮮矣。本院建在華山之麓。其時盖就溪山之勝。峯秀湍淸。初非不美。而歷年玆久。觀瞻異態。昔之巃嵸者漸而丘垤。前之淨淙者變而湫汸。夫惟羹墻之慕。固不待顓眺之興。而山高水長。猶可像想於道德之風。則顧此荒陋。何足爲兩先生妥靈之所乎。其中所可懼者。復有深於斯者。本院地處山腰。山土而崖絶。時當春夏之交。水潦奔洴。左右䨦霈。深谷巨壑。式月斯生。居人蕩析。姑置不論。墻宇之不近。特絲髮間耳。多楗松柏。用力宣妨。雖能殺得一時之勢。終非久遠之可恃。又山多大石。罅隙之所凌淫。沙礫之所推盪。其患其灾。將不如水潦而止。不幸有三日之雨。再如今年之盛。則其將何以哉。伊時憂虞。實有所不敢歷言者矣。此生等之所大懼。而此其懼又不可一例於水石之無稱耳。夫以一鄕之相與揭虔。而瞻聆至此。猶可寒心。矧乎斯院恩額之斯煥。祀典之所列。顧其事體。又關如何。而忍頹忍廢。俾之可忘。而遷移之擧。乃可委之重大乎。如是而其敢曰敬君命乎。慕先賢乎。自昔先輩。盖嘗有志于移建。博謀詢採。積有年所。而顧以財力之未逮。成毁之有數。以至于今日。而水潦之憂。非復前日比矣。生等自惟誠淺才薄。極知於大事。不能擔當辦就。而以此顧瞻逡廵。復有所待。則向所謂草萊之責。無辭以解矣。惟是之懼。輒不自揆分度力。玆於秋丁行事之後。合席歸一。已於近地。相卜基址。將以明春始役擧行。竊念玆事係不可已。而事大力微。尙恐有始無終。以負其罪。爲此悚汗耳。玆敢合辭仰稟。伏朢俯察明賜指敎。千萬幸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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華山書院廟庭碑 莘巷書院重修記 癸丑四月○宋時烈撰 宋圭菴
규암(圭菴) 송인수(宋麟壽)1499년(연산군 5)~1547년(명종 2)
圭菴先生文集卷之三 / 附錄 / 華山書院廟庭碑 宋時烈撰
自古書院之設。皆占溪山林壑之勝。而獨完山所建。在於城府之傍。豈李宋二先生遺敎。在人不泯。故居一邑之正處。思與甿俗胥徒。共其瞻依嚴奉之禮歟。我孝宗大王崇奬儒道。命頒恩額。於是。府之諸君子。議立牲繫。將以記事始終。而仍以侈上之賜。猥以屬筆於余。余不敢辭。而將惟命矣。有問二先生其敎如何者。余曰。此非所敢知。而但有一焉。曩在昏朝。廢母之議橫流稽天。而完之多士。能守正論。四隣之人。亦不從難。玆非其一端之可徵者歟。故有記李先生之治者曰。道德齊禮。其論宋先生之化。則南俗丕變。信不虛矣。蓋惟李先生。從祀聖廡。而其書徧布國中。宋先生。爲一時儒林之領袖。蒙難明夷。而李先生以身扶護。同其禍敗。則二先生之道德。宜無待於後生之容喙矣。然亦尙有可論者。本朝雖號文治。而其抽關啓鍵。發明聖賢微言。則自李先生。不可誣矣。故退溪文純公。尊尙講服。推以爲宗主。士氣銷鑠之後。獨以聖賢謂必可學。三代爲必可復。則宋先生之學。可謂正矣。故栗谷文成公。稱道景慕。著之簡策。此則後學所宜知者也。故嘗竊以爲二先生之敎則可能也。其所以爲敎則非俗吏之可能也。二先生之道。可知也。而其所以體用一源。理事無間。則非世儒之可知也。然則思其敎。不若師其人。師其人。不若求其道。欲求其道。豈外於讀其書究其學。知其用之本於體。事之根於理。而精粗本末。粹然出於一貫之妙哉。今諸君子苟能如是。則我聖考崇奬之意。亦將不孤矣。余於是。又竊有所感焉。李先生之書。家藏而人見。則其道可謂大明矣。至於宋先生。則大禍之餘。爲世所諱。其至性醇行。見於文成公之書者。只寂寥數語而已。可勝歎哉。余。先生之從曾孫也。嘗得於家庭之所傳。則先生自幼。極其仁恕。宗族稱之曰。汝心之仁。宜得汝名矣。及仁宗薨。先生請於大臣曰。先誅尹元衡。然後入告簾中。策立太弟。只此二者。可見先生之大略矣。李先生諱彥迪。字復古。諡文元。嘉靖戊戌。爲府尹。宋先生諱麟壽。字眉叟。諡文忠。擯於金安老。甲辰。出爲觀察使。書院之創在於萬曆戊寅歲云。按諡狀曰。芑,衡惡先生。黜爲全羅監司。而此云擯於安老。二文皆尤菴所撰。而如是相左。或傳寫之誤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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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암(圭菴) 송인수(宋麟壽)1499년(연산군 5)~1547년(명종 2)
圭菴先生文集卷之三 / 附錄 / 莘巷書院重修記 癸丑四月○宋時烈撰 宋圭菴
淸州。湖右之一大都會。而章甫之冀北也。歲在隆慶庚午。創建書院於州東十里之地。有林泉之勝。立祠其中。以祀慶徵君,朴江叟,金沖菴,宋圭菴四先生者。其後又醊之以韓松齋,宋泉谷二先生。又其後崇禎丙申。章甫相謂以祠廟歲久傾圮。兼且牧隱李先生當勝國之季。編配此州。禍將不測。天適示警而免。其精忠高節。震耀今昔。栗谷李先生嘗莅州民。雖未期月而遞去。其遺敎尙在。今因修改稍闊廟制。而幷享二先生。則其於事爲宜。遂以遍告于遠近。則咸以爲栗谷先生當專享矣。乙巳。廟宇旣新。遂從退溪李先生遺訓。隔截近北之東邊。以棲其神位。而西邊則七先生位以世代焉。又州之章甫。以西溪李公。深明易學。亦有功斯文。嘗以侑于西壁而面東。蓋九先生道德學問。雖有不同。而其模楷一時。風範後世者。爲不窮矣。今上初服。賜額曰莘巷。蓋取朱夫子所賦白鹿洞第三十句之義也。蓋濂溪周子嘗曰。伊尹恥其君不如堯舜。一夫不得其所。若撻于市。顏淵不遷怒不貳過。三月不違仁。志伊尹之所志。學顏淵之所學。五峯胡氏論其說曰。周子患人以發策決科。榮身肥家。希世取寵。爲事也。故曰。志伊尹之所志。患人以廣聞見工文辭。矜智能慕空寂。爲事也。故曰。學顏淵之所學。於是乎朱子以是爲學問之大法。而以莘摯所志。巷顏攸執。勸勉洞中來學之士。而今我聖上。又以此賜爲恩額。其意深矣。嗚呼。九先生之所學。亦豈外於此哉。國朝書院。其嘉號雖多。而若論其體用之全。綱條之備。則此其爲最者也。諸君子其可不精察而力行之。以毋負聖上作人之意哉。抑九先生嘉言懿行。書在史氏。著于家乘。皆可爲後生之矜式。而至於栗谷先生鄕約之法。又嘗所以敎于州民者。尤不可不修而明之。而垂敎思於無窮也。栗谷諱珥。字叔獻。牧隱諱穡。字穎叔。徵君諱延。字大有。沖菴諱淨。字元沖。江叟諱薰。字馨之。圭菴諱麟壽。字眉叟。松齋諱忠。字恕卿。泉谷諱象賢。字德求。而諱得胤。字克欽。卽西溪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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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암(圭菴) 송인수(宋麟壽)1499년(연산군 5)~1547년(명종 2)
圭菴先生文集卷之三 / 附錄 / 魯峯書院廟庭碑銘 幷序○後學宋煥箕撰
文義之縣北楮山。有圭菴宋先生衣履之藏。縣西獐山。有北牕鄭先生薖軸之墟。粤在萬曆庚戌。縣士止善亭吳公名立。與進士柳公興霖。慨然歎曰。凡我士林之尊慕兩先生者。盍設祠院於玆土。使學者日夕瞻望而興起焉乎。爰始經紀。閱五載而竣工。唯玆魯峯。有巖壑林泉之勝。而于以建祠醊侑。允愜群情矣。孝宗戊戌。請額蒙允。顯宗壬寅。宣額賜祭。廟貌院規。益復隆重。後三十三年肅宗甲戌。尤菴宋文正先生。追奉躋享。甚縟擧也。於不休哉。圭菴先生諱麟壽。天姿近道。誠心好學。出言制行。動合古訓。當己卯斬伐之餘。士氣銷鑠之時。獨以聖賢爲必可學。三代爲必可復。至其立朝事君。則期展所學。盡誠殫心。明廟乙巳。削官退處于淸州之先墓下。一室圖書。對越神明。及丁未壁書之變出而後命至。則沐浴具冠帶。顏色不亂。從容就命。貽書門人曰。皇天后土。可表此心。遺訓胤子曰。勿以我爲戒。怠於爲善也。宣廟卽阼。特命伸冤復官。顯廟朝。贈吏曹判書。諡曰文忠。北窓先生諱𥖝。生而靈異。博通三敎。全以聖學。爲立心之本。不由工夫。自到高明。以至方技衆藝。各臻奧妙。嘗曰。聖學以人倫爲重。不論其要妙處。仙佛則以修心見性爲本。下學處全闕。此三敎所以異也。凡其玄通之識。沈冥之迹。非局儒曲學所能闚。而事有難言。號泣以隨。則實出於忠孝之篤矣。解縣紱而養疾于掛蘿里。抑亦逸民之中淸中權者歟。尤菴先生諱時烈。道學之正。事業之盛。實有繼往開來。而膺孝廟魚水之契。秉春秋之義。任世道之責。蔚然爲百代之師宗矣。嘗於本院。久居山長師席。講誘掖。啓迪多士。德化甚盛。不幸黃巴禍作。後學靡所倣仰。逮至更化之初。特蒙復爵賜諡。朝家之崇報。至矣。而亦旣從祀聖廡。至正宗朝。曠世恩典。益無餘蘊。一世以宋子稱焉。嗚呼。三先生之遺風餘韻不沫。百世之下。孰不興慕。斯院之存。儘得以寓高山景行之懷。而永有所瞻依也。同春宋文正公追享。亦曾在丁卯。而乙亥。以其有院享疊設之禁。移奉于黔潭。兩院相距。莽蒼而近。諸章甫。克伸其共尊之誠。猗歟盛矣。竊惟三先生門庭造詣。雖有異焉者。要皆以仁義爲性。而忠孝爲行。聖賢爲法。辭闢爲功。則不害爲殊轍而同歸也。凡入斯院者。可不惕然有以想像模範乎哉。院宇之創。今數百歲。始立牲繫之石。遂書之如此。董成斯役者。止善吳公之來孫鉉燮也。銘曰。
猗我三賢。義闡精微。學雖殊轍。道則同歸。聖朝儒賢。明時逸民。遺風百載。啓佑後人。人所興慕。苾芬以祀。唯玆魯峯。巖泉淸邃。有煌院榜。墻瓦莫苔。凡我衿紳。永言瞻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