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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성지순례 자료집
1. 용수성지(사적지)
2. 김기량 순교현양비(사적지)
3. 관덕정(순례지)
4. 황사평성지(순례지)
5. 새미 은총의 동산(순례지)
6. 대정성지(순례지)
7. 황경한묘소(순례지)
1.용수성지,표착지 (사적지)
▼ 용수성지 라파엘호(김대건신부 귀국선)
주소 제주시 한경면 용수리 4266 교구 제주교구
■ 문 의 처 신창성당 (064) 772-4044 / 교구청 (064) 751-0145~7
제주도 한경면 용수리 포구는 한국인 최초의 신부이며 순교성인들의 첫 머리를 장식하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가 상해에서 사제 서품을 받고, 서해 바다로 귀국하는 길에 풍랑을 만나 표착했던 곳이다.
용수항은 한경면 용수리에 위치한 어촌마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규모 어항이다.
20척 미만의 어선이 정박하며, 용수리포구 또는 용수포구로 불리기도 한다.
용수항의 옛 이름은 쇠머리코지 자락에 있는 포구라 하여 ‘우두포’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용수항 앞바다에서는 제주도에서 가장 큰 무인도인 차귀도의 푸른 실루엣이 보인다.
부제 때 일시 귀국했던 김대건은 선박을 구입하여 '라파엘호'라 명명하고 1845년 4월 30일 이 배를 타고 제물포항(현 인천항)을 떠나 상해로 가게 된다. 그리고 동년 8월 17일 금가항 성당에서 페레올 주교로부터 사제 사품을 받는다. 8월 31일 조선 입국일 위하여 페레올 주교, 다블뤼 신부, 김대건 신부, 교우 및 선원 등 14명이 승선한 라파엘호는 상해항을 출항하였다. 출항한 지 3일 만에 서해 바다에서 풍랑으로 표류하다가 9월 28일, 이곳 용수리 포구에 표착하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2∼3일 동안 배를 수리하고 음식 등을 준비하여 10월 1일, 이곳을 떠난 일행은 10월 12일, 금강 하류 나바위에 도착하게 된다.
제주선교 100주년 추진위원회에서는 학계의 권위 있는 전문가에게 의뢰하여 라파엘호의 구조를 확인하고 150여년전의 선형을 복원하였다. 그리고 이 용수리 포구에 라파엘호를 정박시켰으며 1999년 이곳을 순례지로 선포하였다.
라파엘호 복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사제 서품을 받고 상해를 떠나 귀국할 당시 탔던 라파엘호가 원형대로 복원되었다. 학계의 권위있는 전문가의 고증에 의해 그 구조를 확인하고 150여년 전의 모습을 오늘에 되살려낸 것이다.
라파엘호는 어떤 배였을까. 승선했던 페레올 주교가 쓴 편지글에는 라파엘호의 외형이 다음과 같이 그려져있다. "그 배는 길이가 25자(7.5m), 너비가 9자(2.7m), 깊이가 7자(2.1m)입니다. 이 배를 건조하는 데는 쇠못 한 개도 들지 않았고, 널판은 나무못으로 이어져있습니다. …엄청나게 높은 돛대 두 개에는 서로 잘 꿰매지지 않은 거친 광목으로 된 돛 두 폭이 달려있습니다. 뱃머리는 선창까지 열려있는데, 그것이 3분의 1을 차지합니다. …갑판의 일부분은 자리로 되어있고, 일부분은 아무런 고정기구도 없이 그저 잇대어 죽 깔아놓은 나무판자로 되어있습니다. 거기다가 배 안으로 들어가는 구멍 셋이 있습니다."(한라일보 2010년 9월 6일)
라파엘호는 1999년 천주교 제주교구가 제주선교 100주년을 기념한 기념사업으로 편지글 등을 토대로 제주대에 용역을 의뢰한 것으로 덕판배의 일종이다. 관련 전문가의 연구 결과 실제 배의 길이나 너비는 편지글 내용보다 컸던 것으로 나타났다.
제주교구는 1999년 성산읍 오조간이조선소에 의뢰해 라파엘호를 복원했다. 오조간이조선소 대표는 지금은 고인이 된 김천년씨. 1996년 덕판배 복원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배 목수였다. 삼나무로 제작된 라파엘호는 못 하나 박지 않고 3개월여의 노력 끝에 완성, 1999년 7월 31일 진수식을 가졌다.
이 배는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 신부가 중국 상하이에서 사제서품을 받고 황해를 건너다 북군 한경면 용수리에 표착했던 배를 복원한 것이다. 이 배는 장거리 항해를 목적으로 지은 배이기 때문에 갑판이 있고 선실에는 밥을 지어 먹을 수 있는 장치가 되어 있다.
1999년 9월 복원한 라파엘호로 상해-제주 해상 순례를 시도했으나 높은 파도로 중단되었다. 라파엘호는 항해 재현 행사 후에 용수리 포구에 놔두었다가 천주교신창교회에 옮겨 보관하다가 김대건신부기념관을 짓게 되자 이곳으로 옮긴 것이다.
실제 배의 길이 13.5m, 너비 4.8m, 깊이 2.1m, 중량 27.2톤
2004년 10월 24일 성 김대건 신부 제주표착기념관 기공식을 거행한데 이어 2005년 10월 준공한 후, 2006년 9월 19일 5년 동안 신창성당에 안치되어 있던 라파엘호는 성 김대건 신부 제주표착기념관 동쪽으로 이전하였다.
성 김대건 신부 제주표착기념관은 60여억 원의 예산을 투자하여 대지 약 14,190㎡, 건물면적 약 554㎡ 규모의 2층 건물로 2006년 11월 2일 개관하였다.
2. 김기량 순교현양비 (사적지)
새로이 단장중인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 순교현양 탑과 기념관(공사중)
제주의 사도로 복음을 전한 제주 출신 첫 순교자
제주도 제주시 조천읍 함덕리 940-2 . (064)784-6173
김기량(金耆良, 1816-1867년) 펠릭스 베드로는 제주시 북제주군 조천읍 함덕리에서 태어났다. 배를 타고 장사를 하던 그는 1857년 2월 18일(음력 1월 24일) 약재와 그릇을 싣고 모슬포로 항해하다가 풍랑을 만나 표류하던 중 3월 26일 중국 광동 해안에서 영국 배에 의해 구조되었다. 그는 홍콩에 있는 파리 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로 보내졌고, 그곳에서 휴양 중이던 조선인 신학생 이 바울리노를 만나게 되어 지친 몸과 마음을 회복하면서 신학생을 통해 하느님을 알게 되었다. 이 바울리노에게 교리를 배운 그는 성령강림 대축일인 5월 31일 극동대표부의 부대표인 루세이유(J. J. Rousseille, 1832-1900년)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제주 사람으로는 처음으로 세례를 받은 것이다.
1858년 1월 의주를 거쳐 귀국한 그는 고향인 제주로 돌아가기에 앞서 육지에서 페롱(S. Feron, 權) 신부와 함께 있던 최양업 토마스 신부를 만났다. 그를 만난 최양업 신부는 이렇게 적고 있다.
“우리는 그가 겪은 모든 이야기를 들었을 때 참으로 하느님의 무한하신 인자와 섭리에 감탄해 마지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참으로 기묘한 방법으로 그에게 뿐만 아니라 제주도의 주민들에게까지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 사람의 말과 행동과 교우를 찾으려는 열성을 보면 진실한 사람이고 믿을 만한 사람이며 장차 좋은 교우가 될 사람임을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아직까지 복음의 씨가 떨어지지 않은 제주도에 천주교를 전파할 훌륭한 사도가 될 줄로 믿습니다. 그는 우리와 작별하면서 자기가 고향 제주도에 돌아가면 먼저 자기 가족에게 천주교를 가르쳐 입교시킨 뒤 저한테 다시 오겠다고 말하였습니다.”(1858년 10월 4일자 서한)
김기량은 고향을 떠난 지 1년 2개월 만인 1858년 4월 죽었으리라 생각하고 있던 가족들에게 돌아왔다. 그는 자신을 반기는 가족과 사공들에게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대한 천주교의 교리를 가르쳤고, 1859년 봄에는 육지로 나와 교구장인 성 베르뇌(S. F. Berneux, 張敬一) 주교를 만나 성사를 받기도 했다. 그를 만난 베르뇌 주교는 “이 새 신자는 제주도 사람인데, 총명하고 신앙이 발랄합니다. 집안이 40명가량 되는데, 그는 그들이 모두 개종할 것을 의심치 않고 있습니다.” 하였다.
그는 그 후로도 육지를 오가며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던 중 1865년에 두 번째 난파를 당하여 일본 나가사키에 도착하여 프티장(Petitjean) 신부를 만나기도 했다. 무사히 귀국한 후 육지로 나와 리델(F. Ridel, 李福明) 신부를 만났는데, 그 자리에서 사공 두 명이 세례를 받았다. 그는 이 무렵 “어와 벗님들아, 순교의 길로 나아가세. 그러나 순교의 길로 나아가기는 어렵다네. 나의 평생 소원은 천주와 성모 마리아를 섬기는 것이요, 밤낮으로 바라는 것은 천당뿐이로다. 펠릭스 베드로는 능히 주님 대전에 오르기를 바라옵나이다.”라는 천주가사를 지어 불렀다.
제주를 복음화하려는 그의 노력은 안타깝게도 1866년 병인박해로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박해가 일어난 직후 그는 거제도로 나갔고, 여비를 마련하기 위해 박하유(薄荷油)를 팔러 조선수군의 본부가 있던 통영으로 나갔다가 게섬(현 경상남도 통영시 산양읍 풍화리)에서 “박하유는 천주학쟁이의 물건이다.”라고 말하는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통영관아로 끌려간 그는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굳게 신앙을 지켰다.
옥에 갇힌 뒤 혹독한 매를 맞고도 네 명의 신자들에게 “나는 순교를 각오하였으니, 그대들도 마음을 변치 말고 나를 따라오시오.”라고 권면하였다. 그럼에도 목숨이 붙어있자 관장은 다섯 명 모두 옥으로 옮겨 교수형에 처하라고 명령하였다. 특히 관장은 그의 가슴 위에 대못을 박아 다시는 살아나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때가 1867년 1월(음력 1966년 12월)로 당시 김기량의 나이는 51세였다.
무속신앙의 영향이 강한 제주 지역에 처음으로 믿음의 씨앗을 뿌린 ‘제주의 사도’이자 최초의 순교자인 김기량의 행적을 밝혀줄 사료가 2001년에 대량 발굴되었다. 이를 통해 그의 영세 날짜와 순교 행적을 보다 정확히 밝힐 수 있었다. 특히 박해 시대 한국 순교자 중 세례 날짜가 정확히 밝혀진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러한 내용은 제주교구 시복시성추진위원회가 2001년 5월 28일 교구청에서 첫 전체회의를 가진 자리에서 김기량 순교자의 행적 등을 담은 서한 등을 공개함으로써 알려졌다.
광화문 광장에서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가 동료 순교자들과 함께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됨으로써 그 첫 열매를 맺었다.
“제주 첫 신자이자 순교자인 복자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1816~1867)를 기리는 기념관 기공식이 10월 24일 오전 11시 제주시 조천읍 함덕리 940-2 현지에서 제주교구장 강우일 주교 주례로 거행됐다.
기념관은 ‘제주 천주교 역사체험관 및 순례길 안내센터’를 정식 명칭으로 설립되며 가·나·다 3개 동에 대지면적 5893㎡ 건축면적 323.52㎡ 규모로 구성된다. 가동엔 경당과 기념관을, 나동은 안내실, 다동은 관리사가 들어서며 2021년 5월 준공 예정이다.“
3. 제주 관덕정(순례지)
주소 제주시 삼도1동 교구 제주교구 ■ 문 의 처 중앙 성당 (064) 753-2271
옛 제주시의 중심부인 삼도2동에 있으며 보물 제322호로 등록되어 있다. 1901년 신축교안 때에 이곳 광장에서 수많은 교우 및 양민들이 목숨을 잃었다. 조선 땅에 복음의 서광이 비치기 시작한 18C이후 100여년에 걸쳐 진행된 혹독한 박해는 수많은 교우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그들의 피와 땀은 이 땅 구석구석에 뿌려져 오늘날의 한국교회를 꽃피우는 밑거름이 된 것이다.
1886년 한·불조약을 계기로 박해 정책은 막을 내린다. 하지만 유학적 전통이나 인습에 젖어 있었던 당시 조선 땅에서는 공식적인 박해가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하루 아침에 이를 현실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웠다. 지방에서는 소규모 사건들이 지방 관리나 유림들에 의해 빈발하였고 어떤 사건은 그 규모가 공식적인 박해를 능가하는 예를 보이기도 했다.
이는 지방 관리와 교인들 사이의 분쟁이나, 교인들과 민간인 사이의 분쟁이라는 형태로 나타난다. 예컨대 충청도 아산, 전라도의 지도(智島), 황해도의 장연(장연), 강원도의 이천(이천) 등지에서는 계속적인 교난 사건이 발생했다. 부패한 관리와 완고한 유생들, 혹은 무당 등의 인습에 젖은 지방민과 천주교인들과의 충돌이 결국에는 박해라는 양상으로 바뀌었고 지역에 따라서는 대규모의 민란으로 나타났다. 그 중의 하나가 1901년 신축년에 발생한 제주도의 신축교안이다.
지방 관리와 기득권을 주장하는 토호 세력, 그리고 일본인 밀어업자들의 결탁으로 유도된 이 사건은 중앙 정부의 조세정책, 즉 조정에서 파견된 봉세관(봉세관)이 온갖 잡세를 거두어가는 것에 불만을 품은 백성들을 선동하여 수탈정책의 시정을 요구하는 민란으로 출발하였다. 그러나 사건이 진행 과정에서 도정 책임자와 봉세관은 도피해 버리고 난민들은 공격 대상을 천주교로 돌렸다. 이에는 일부 신자들이 봉세관과 결탁하여 비리를 행한 사례도 원인의 하나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 신부를 타도하려는 일본인의 음모, 축첩과 인습에 젖은 토호 세력, 그리고 생존을 위협받게 된 무당 등의 작용이 결정적인 원인이었음이 틀림없다.
이리하여 제주시에 진입한 민군들은 신자를 포함한 양민 등 700여명을 살해하기에 이르렀다. 이 유서 깊은 관덕정 정자 앞 광장이 사형장으로 변했던 것이다. 서건이 수습되는 과정에서 당시 프랑스 함대장이 촬영한 사진에는 교우들을 죽일 때 사용했던 몽둥이들이 시신 옆에 놓여 있어 당시의 참상을 대변하고 있다.
이 때 희생된 교우들의 시신은 그 후 별도봉 기슭에 가매장되었다가 현재는 황사평에 안장 되었다.
4. 황사평 성지(순례지)
신축교안으로 희생된 순교자들의 안식처
제주도 제주시 기와5길 117-22. (064)721-0146
1886년 한불조약(韓佛條約)을 계기로 100여 년에 걸친 천주교에 대한 박해 정책은 끝이 났지만 지방에서는 소규모의 박해 사건들이 빈발했다. 더욱이 어떤 사건은 공식 박해를 능가할 정도의 대규모로 진행되기도 했다. 그 중의 하나가 1901년 신축년에 발생한 제주도 신축교안(辛丑敎案)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교우를 포함한 양민 수백 명이 희생되었다.
신축교안이 일어난 1901년은 신앙의 자유가 허용된 지 15년이 지난 때였고, 가톨릭 선교사가 제주에 들어와 본격적으로 전교 활동을 시작한지 채 2년이 못된 때였다. 1899년 5월 제주에 처음 발을 디딘 선교사는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의 페네(Peynet, 裵嘉祿) 신부와 한국인 김원영(金元永, 아우구스티노) 신부였다.
이 무렵 제주에는 봉세관(封稅官)이라는 제도에 대한 도민들의 원성이 높아 가고 있었다. 봉세관이란 1900년에 신설된 세제로 대한제국 황실의 재정을 채우기 위해 민초들로부터 세금을 더욱 악랄하게 거두어들이기 위한 제도였다. 조정에서 파견된 봉세관은 해당 지방의 백성들로부터 온갖 잡세를 거두어들여 지방 토착세력과 주민들로부터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다.
지방의 토착 관료들과 제주에 진출해서 어업 이권을 쥐고 있던 일본인 밀어업자들은 자신들의 이권이 달려 있던 이 문제를 둘러싸고 봉세관에 대한 주민들의불만을 교묘하게 이용하려 했다. 이들은 온갖 방법을 써서 당시 민중들의 불만을 천주교인들에 대한 반감으로 돌림으로써 무수한 인명을 희생시킨 제주 신축교안의 단초를 제공했다. 이렇듯 신축교안은 지방 관리와 기득권을 주장하는 토호세력, 그리고 일본인 밀어업자들의 결탁으로 유도되어 중앙 정부의 가혹한 조세 정책에 불만을 가진 백성들을 선동해 수탈정책의 시정을 요구하는 민란으로 출발했다.
사건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도정 책임자와 봉세관은 도피하고 민군들은 공격 대상을 천주교로 돌렸다. 이에는 일부 신자들이 봉세관의 중간 징세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주민들을 더욱 격분하게 한 것도 한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프랑스인 신부를 쫓아내고 한반도를 배타적으로 독점하려던 일본제국주의의 음모, 축첩과 인습에 젖은 토호세력, 토착민의 문화를 무시하고 신당을 파괴하고 신목을 베어 버린 일부 신자들의 무리한 행위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대규모 천주교 박해로 이어졌다.
저항을 물리치고 봉세관과 천주교회가 있던 제주읍성을 함락한 민군은 천주교인을 포함한 양민 수백 명을 살해했다. 특히 170여 명의 신자들이 관덕정 정자 앞 광장에서 모진 매를 맞고 처형되었다. 교회에서는 대체로 500-700명 정도의 신자가 피살된 것으로 보았으나 당시에 공식적으로 집계된 희생자 명단 등 여러 자료를 종합하면 신축교안으로 희생된 신자 수는 대략 300-350명 정도로 추산된다.
당시 제주 지역의 선교를 맡았던 라크루(Lacrouts) 신부는 중국 상해에 있는 프랑스 함대에 구원을 요청했지만 그들이 도착했을 때 이미 관덕정에는 시체들이 즐비했었다. 1901년 당시 프랑스 함대장이 찍은 사진에는 교우들을 때려죽일 때 사용했던 몽둥이들이 시신 옆에 함께 놓여 있어 당시의 참상을 대변하고 있다.
신축교안으로 관덕정 등지에서 희생된 교우들의 시신은 다른 희생자들과 함께 별도봉(別刀峯)과 화북천 사이 기슭에 옮겨 가매장했고, 그 중 연고가 있는 분묘는 이장해 가고 무연고 시신들만 남게 되었다. 1902년 8월 제주를 방문한 뮈텔(Mutel) 주교는 매장지 확보를 강력하게 요구하였고, 프랑스 공사와 조선 조정과의 교섭 과정에서 피살자의 묘지인 영장지(營葬地) 문제가 1903년 11월 17일 최종 타결되어 황사평을 양도받아 이장하게 되었다. 이때 황사평으로 이장한 무연고 묘와 시신의 수는 합장한 묘를 합해 총 26기에 28구였다.
황사평묘역은 총 면적이 약 18,000평으로 현재 신축교안 당시의 순교자들뿐만 아니라 제주교구의 공동 안장지로도 사용하고 있다. 1980년 황사평 교회묘지를 공원묘지로 공사하면서 울타리 석축공사와 성상들을 건립하고 순교자들의 묘를 평장으로 이장했다가 1995년 11월 제주교구 선교 100주년을 준비하면서 28구의 유해를 합장하여 순교자 묘역을 새 단장하고 성역화했다.
또한 교구 성직자 묘지를 조성하여 초대 교구장인 현 헤롤드 대주교와 서귀포 본당 주임신부였던 나 토마스 신부의 유해를 성직자 묘지에 이장했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4년 11월 8일)]
5. 새미 은총의 동산(순례지)
삼뫼소 은총의 동산
주소 제주도 북제주군 한림읍 금악리 110 성이시돌목장 교구 제주교구
‘삼뫼소’는 세 개의 오름(봉우리)으로 둘러싸인 못이란 뜻이다. 전체 면적이 8만평에 달하는 이곳은 신자들이 언제 어디서나 찾아와 함께 기도할 수 있는 곳이 필요하다는 제주교구 사제들의 뜻에 따라 성 이시돌 목장을 세운 임피제 신부가 1992년부터 목장 뒤를 순례지로 본격 개발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제주교구장 김창렬 주교는 이 삼뫼소를 ‘은총의 동산’으로 명명하고 교구의 대표적인 순례지로 지정했다. 그리고 매달 첫 토요일 성모신심 미사와 셋째 목요일 성체와 가정신심 미사를 정기적으로 봉헌하고 있다.
은총의 동산은 1986년부터 조성된 묵주기도의 호수(삼뫼소)를 중심으로 400미터가 넘는 둘레에 돌과 나무를 이용해 15단 묵주 형태를 이루고 있다. 연못 앞 십자가에서 사도신경을 바친 후 연못을 한 바퀴 돌면서 묵주기도를 바친 후에는 자연스럽게 루르드의 성모동굴을 본뜬 동굴 앞으로 나오게 된다. 동굴에는 성모상과 제대가 설치되어 있고 그 앞쪽으로 4-5백 명이 앉을 수 있는 의자를 놓아 야외미사를 봉헌할 수 있도록 하였다.
삼위일체 대성당을 지나 묵주기도의 호수까지 십자가의 길 15처가 실물 크기의 조각상으로 설치되어 있다.대형 십자가 오른쪽으로 작은 동산이 있는데, 동산 위에는 7성사의 이름을 새긴 돌이 있고, 그곳으로 오르는 길에는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칠 수 있도록 14처가 준비되어 있다.
성 이시돌 목장 내에는 1972년에 설립된 성 클라라 수도회 제주 수도원이 있다. 1981년 수도원 성당을 건립하여 금악 공소 신자들과 함께 사용하면서 다음해 6월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또한 은총의 동산과 삼뫼소 중간에는 2001년 10월 14일 봉헌된 삼위일체 대성당이 자리하고 있다. 대성당의 전체 모양은 아일랜드식의 독특한 켈틱 십자가 형태를 취하고 있다. 십자가 아래쪽의 대성당은 약 3천여 명을 수용할 수 있고, 십자가 형태의 옥상은 중심에 제단을 두고 사면에 의자를 놓아 약 5천여 명이 함께 야외미사를 거행하거나 각종 공연 및 행사 공간으로 사용할 수 있다.
새미 은총의 동산에는 예수님의 공생활 중 12개의 주요 사건을 테마로 한 예수님 생애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2009년 5월 15일 제주교구는 성 이시돌 목장 내 새미 은총의 동산 및 십자가의 길 축복식을 가졌다. 그러면서 출처가 명확하지 않은 ‘삼뫼소’란 명칭을 역사적 사료를 근거로 ‘새미 은총의 동산’으로 변경하였다. 새미는 주님의 은총과 순례객의 기도가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끊임없이 이어진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또 영문으로는 SAEMI로 표기해 Sanctus(거룩한), Anima(영혼), Evangelium(복음), Meditator(중개자), Imago Dei(하느님의 모상)라는 뜻을 담았다.
새미 은총의 동산에는 예수님의 탄생부터 최후의 만찬까지 예수님의 공생활 중 12개의 주요 사건을 테마로 해서 조성된 ‘예수님 생애공원’을 비롯해 직접 십자가를 지고 갈 수 있는 십자가의 길 체험장과 대형 조각상으로 재현한 십자가의 길 14처가 새로 마련되어 있다. 삼위일체 대성당을 지나 새로 조성된 십자가의 길 14처를 지나면 묵주기도의 호수에 이르게 된다. [출처 : 관련 기사 참조(최종수정 2014년 11월 8일)]
이시돌 목장
성이시돌 목장은 아일랜드 출신 패트릭 제임스 맥그린치 신부가 1954년 4월 콜룸반외방선교회 소속으로 제주도에 온 뒤 가난한 제주도민들에게 자립의 기틀을 마련해 주고자 1961년 11월 성 이시돌 중앙실습목장으로 개장하였다.
이시돌은 중세 에스파냐의 농부로 하느님의 영토인 땅을 가꾸고 농사를 짓는 일에 열성을 다하였다 하여 후에 로마가톨릭교회에서 정한 농민의 주보 성인(聖人)이 되었다 한다.
패트릭 제임스 맥그린치(Patrick James Mcglinchey) 신부님의 우리나라 이름은 임피제이다. 지난 1973년 제주도 명예도민증을 받으며 '임피제'라는 이름의 한국인이 됐다.
한라산 중산간지대의 16만 5000㎡에 자리하고 있는 이시돌 목장은, 1962년 비영리 사업을 위해 이시돌 농촌산업개발협회를 설립해 양을 키우고 양털로 양모 제품을 생산하는 한림수직과 사료공장 등을 운영하였다.
1969년부터 뉴질랜드와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소·면양·종돈 등을 들여와 한때 100만 마리에 가까웠던 면양과 동양 최대의 돼지목장, 치즈·우유공장, 수천 마리의 소가 있었지만 지금은 젖소, 한우, 경주마를 사육하고 있다.
목장 외에 성이시돌양로원, 피정센터, 젊음의 집, 삼뫼소 은총의 동산, 천주교금악교회, 성이시돌어린이집, 글라라관상수녀원, 농촌산업협회 등이 함께 있고 삼위일체대성당이 있는곳으로, 목장보다는 천주교성지로 더 알려져 있다.
6. 대정성지(순례지)
정난주(마리아) 묘 [황사영 알렉시오 부인]
주소 제주시 남제주군 대정읍 보성동 교구 제주교구
신앙의 불모지인 이 땅에서 정 마리아는 수난하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자로서 신앙의 모범을 보여준 분이다. 그녀는 1773년 나주 본관 정약현(丁若鉉)과 경주 본관 이씨(李氏) 사이에서 태어나 명련(命連)이란 아명을 받았다.
일찍부터 천주교에 입교하여 전교에 힘썼던 당대 최고의 실학자 약전(若銓), 약종(若鍾), 약용(若鏞) 형제가 그녀의 숙부들이었고 어머니는 이 나라 신앙의 성조인 이벽(李檗)의 누이였다. 황사영(黃嗣永)과 혼인한 그녀는 1800년에 옥동자 경한(景漢)을 출산하였다. 남편인 황사영은 1775년에 태어나 약관 16세 초시, 17세에 복시에 장원급제하여 정조대왕으로부터 칭찬과 학비를 받은 매우 영특한 인재였으나 천주교를 신앙함으로써 현세적 명리에 등을 돌렸다.
중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에게 세례를 받은 그는 전교에 전력을 다하다가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충북 제천의 배론으로 피신하여 이른바 황사영 백서(帛書)를 썼다. 박해의 실상을 기술한 이백서는 북경 구베아 주교에게 발송되기 직전에 발각되어 황사영은 대역죄인으로 체포되고 동년 음 11월 5일 서소문 밖에서 능지처참으로 순교하였다. 그 결과 어머니 이윤혜는 거제도에, 처인 정 마리아는 제주도에, 아들 경한은 추자도에 각각 귀양을 가게 되었다.
정 마리아는 1801년 음 11월 21일 두 살 난 아들을 품에 안고 귀양길에 올랐으며 추자도에 이르러 어린 아들과 생이별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추자도에 격리된 아들은 어부 오씨(吳氏)에 의해 하추자도 예초리에서 키워졌으며 그 후손은 현재 추자도에서 살고 있다.
제주목 관노로 정배된 정 마리아는 온갖 시련을 신앙으로 이겨냈으며, 풍부한 교양과 학식으로 주민들을 교화시켜 노비의 신분에도 불구하고 ‘서울 할머니’라 불리우며 이웃들의 칭송 가운데 살아갔다. 신앙만을 유일한 위안으로 삼고 37년 동안 하느님께 봉헌된 삶을 살다가 1838년 음 2월 1일 병환으로 숨을 거두자 그녀를 흠모하던 이웃들이 유해를 이곳에 안장하였다.
정마리아의 삶은 그 자체가 복음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신앙 증거의 연속이었기에 우리는 그녀를 ‘신앙의 증인’으로 추모하면서 제주 선교 10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이 묘역을 새로 단장, 성역화하였다. 그녀의 삶은 우리들의 신앙 생활에 새로운 결단의 계기를 마련해 줄 수 있는 영원하고도 소중한 표양이 될 것이다.
7. 황경한 묘소 (순례지) 추자도
▲ ▼ 황경한의 묘
▲ 묘지에서 보이는 황경한을 내려놓은 바위 (왼쪽 바다 돌출한 바위)
황경한의 묘소에서 동쪽으로 바라보면 바다로 돌출한 바위를 한눈에 볼 수 있다. 바로 이 갯바위가 두 살 된 황경한이 놓여져 울고 있던 바위이다. 제주도로 귀양 가는 정난주 마리아는 이 바위에 젖비린내 나는 어린 것을 내려놓고 쓰라린 가슴을 움켜안은 채로 떠나가야 했던 것이다.
▲ 황경한이 살던 집터.
갯바위에서 울던 두 살 아기는 어부 오씨에 의해 발견되었다. 웃옷에 쓰여진 내용에 의해 이름과 생년월일을 확인하였다. 이리하여 황경한은 오씨 집에서 성장했다.이 집터가 조그마한 포구 마을인 하추자도 예초리에 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집은 그 후 불타 버리고 집터만 남아 있다고 한다. 현재 경작지로 이용되고 있다.
하추자도 황경한 묘소
두 살에 유배 당한 황경한의 애절한 사연이 깃든 추자도
제주도 제주시 추자면 신양리 산 20-1 . (064)742-3777
관련기관: 서문 성당 추자 공소
어머니가 계신 제주도가 바라보이는 바닷가 언덕 위에 자리 잡은 황경한의 묘. 제주도는 조선 시대에 중죄인을 세상과 격리시키는 유배지였다. 추자도는 제주항에서 북쪽으로 약 45km 떨어진 섬으로 상 · 하 추자, 추포, 횡간도 등 4개의 유인도와 38개의 무인도로 이루어져 있다. 바로 이곳 하추자도에 황사영의 아들 황경한(黃景漢)의 묘소가 있다.
백서(帛書) 사건으로 유명한 황사영(黃嗣永)은 1790년 진사시에 급제한 해에 다산 정약용의 맏형 정약현(丁若鉉)의 딸인 정난주(丁蘭珠, 본명 命連) 마리아를 아내로 맞이하여 1800년 아들 경한을 낳았다. 1801년 신유박해 때 백서 사건으로 체포되어 11월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 후 홀어머니는 거제도로, 부인은 제주도로, 외아들 경한은 추자도로 각각 유배되고, 가산은 모두 몰수당해 한때 명문 세도가였던 가문은 풍비박산 나고 말았다.
제주도에 있는 어머니를 그리워한 황경한의 간절한 마음을 느낄 수 있는 모정의 쉼터가 추자도이다.
남편을 잃은 정난주가 아들을 데리고 하염없이 뱃길을 가야 했던 곳이 바로 제주이다. 게다가 겨우 두 살 난 젖먹이 아들 경한을 데리고 떠나는 유배의 길은 너무나도 외롭고 고통스런 일이었다. 죄인으로 제주 땅을 밟으면 자신은 물론 아들마저 죄인의 자식으로 평생을 멸시받으며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모정은 차마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래서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궁리를 거듭하던 정난주가 호송선의 뱃사공에게 뇌물을 주어 매수하고 사공은 다시 두 명의 나졸에게 술을 먹여 역시 그들을 매수한 뒤 젖먹이를 하추자도 예초리(禮草里) 서남단의 황새바위에 내려놓는 데 성공했다고 한다. 나졸들은 뱃길에서 아이가 죽어 수장(水葬)했노라고 보고함으로써 이 일은 무사히 마무리되었다.
하추자도에 남겨진 경한은 오씨(吳氏) 성을 가진 한 어부의 손에 의해 거두어졌다. 경한이 추자도에 떨어뜨려졌을 때 그가 입고 있던 저고리 동정에서 나온 이름과 생년월일에 의해 그가 바로 황경한임을 알게 되었고 오씨의 아들로 키워졌다고 한다. 오씨의 집에서 장성한 경한은 혼인하여 두 아들 건섭(建燮)과 태섭(泰燮)을 낳았는데, 그 후손이 아직도 추자도에서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난주 마리아가 갓난아기를 내려놓고 간 예초리 갯바위로 가는 길.낯설고 외로운 유배지에서 생을 다한 황경한은 사망한 후 신양리 남쪽 산의 중간 산등성이에 묻혔다.
이후 그의 후손들이 하추자도에서 거주하기 시작했으며 추자도에서는 오씨와 황씨가 결혼을 하지 않는 풍습이 생겼다고 한다. 하추자도의 황경한이 살던 오씨 집은 1965년 불타 없어졌고, 그때 그 집안에서 간직해온 경한의 젖먹이 때 옷이나 가첩 등도 모두 소실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일성록”(日省錄)이나 “사학징의”(邪學懲義) 등에 의하면 황경한이 추자도로 오게 된 것은 “나이가 2세 이하로 어려 법에 따라 교수시키지 않고 영광군 추자도에 노비로 유배시킨다”는 판결문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정난주는 젖먹이 아들이 평생 노비로 사는 것을 피하고자 유배를 가던 도중 추자도 예초리의 바닷가 바위 위에 아들을 남겨 놓았고, 다행히 오씨 집안사람에게 발견되어 그 집에서 성장하게 된 것이다.
1900년에 제주 선교를 위해 파견된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라크루(Lacrouts, 具瑪瑟) 신부가 추자도를 왕래하던 중 1909년 황경한의 손자를 만나 전후사정을 알게 되었다.
라크루 신부는 샤르즈뵈프(Chargeboeuf, 宋德望) 신부에게 서한을 보내 순교자 황사영의 아들 경한과 그 후손들의 비참한 생활을 알렸고, 샤르즈뵈프 신부는 이 사실을 전교잡지에 소개했다. 그 후 라크루 신부는 프랑스 은인들의 후원금으로 황경한의 손자에게 집과 농토를 사주었다.
1908년 5월부터 선교사가 들어와 전교한 기록이 남아있는 추자도에는 1956년부터 제주중앙 성당 관할의 공소가 시작되었다. 1988년 상추자도에 있는 추자 공소는 서문 성당 관할로 이관되었고,
제주교구는 1999년 제주 선교 1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하 추자도에 있는 황경한의 묘소 주변 부지 600여 평을 매입하여 소공원을 조성하는 성역화를 추진했다.
[최종수정 2013년 10월 11일]
첫댓글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잘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