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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마 11:28, 개정)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 11:29, 개정)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마 11:30, 개정)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지난 한 주간이 제게는 무척이나 힘이 들었습니다. 제가 많이 힘이 들 때면 저는 오늘의 본문을 마음으로 되새겨보곤 합니다. 그 이유는 제 마음에 쉼을 누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도 제 마음에 쉼이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성도들을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성도들이 만약 힘이 들다고 하면 어떻게 이끌어주지? 저 자신도 답을 못내린다면 성도들을 어떻게 이끌수 있단 말인가? 이런 생각이 들면서 저 자신이 쉼 즉 안식을 누리기 위해서 말씀을 곰곰이 묵상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멍에
마태복음 11장 29절에서 예수님께서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나의 멍에”란 도대체 무엇을 말씀하고 계신 것일까요? 쉽게 대답을 할 수 있을 것 같으면서도 그 대답이 쉽지 많은 않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멍에가 이 말씀 바로 전에 말씀하신 “예수님의 마음”을 말씀하신 것일까요? 다시 말씀드리면 예수님의 마음인 온유와 겸손이 우리들이 메어야 하는 멍에일까요?
학자들이 기록한 주석들을 보니 주석마다 그 설명이 다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랜드종합주석에서는 “멍에”에 대한 여러 설명을 하면서 결론적으로 예수님의 멍에는 그의 계명, 곧 산상수훈과 마태복음 10장에서 나타난 천국의 ‘의’를 말한다(Ridderbos)고 말했습니다.
핸드릭슨은 “멍에”에 대하여 여러 설명을 하다가 “멍에”와 “배우라”는 의미를 같이 묶어서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또는 “그리고 내 제자가 되라”라고 말씀하실 때 그는 “나의 가르침을 받아들여라, 즉 사람은 나를 단순히 믿음으로써 구원받는다”는 것을 의미하고 계신 것이다.》
(핸드릭슨 마태복음 주석. p. 216.)
카리스 종합주석 마태복음 주석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절에서 이 단어는 죄의 종에서 벗어나 주의 종으로서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고(갈 5:1) 더 나아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메고 따르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막 8:34).
(카리스 종합주석 마태복음 p. 166.)
그러나 이런 설명이 맞는 것일까요? 저는 “멍에”에 대하여 바르게 알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의미를 이해하고, 또한 이 주제에 대하여 말씀하신 다른 곳에서의 말씀과도 비교함으로 이 말씀이 지니고 있는 본래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지금 “내게 배우라”고 하심으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라”고 말씀하는 것이라고 핸드릭슨이 그 의미를 말했습니다. 이 전개에 대해서 토를 다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내게 배우라”는 의미가 바로 그런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가 되는 것에 대하여 마태복음 16:24, 그리고 마가복음 8:34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 16:24, 개정)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막 8:34, 개정)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이 말씀들과 마태복음 11:29을 비교해보면 우리는 “멍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쉽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마태와 마가가 기록한 말씀에서 주님을 따르기 위한 조건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것은 “자기를 부인하는 것과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멍에”가 바로 “자기를 부인하는 것과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조용기 목사님이 쓰신 4차원의 영성 실천편에 이런 간증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가 처음 목회자가 되기로 마음먹었을 때, 일반 교회에서 목회를 하시는 분들이 매주 설교를 준비해야 하고 자유롭게 다니지도 못하는 모습들을 보면서 저는 부흥사가 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저의 목표는 한국의 빌리 그래함 목사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유명한 부흥사가 되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부흥회를 인도하려고 하면 몸이 아팠습니다. 너무나 아파서 집회를 인도하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허약한 제 몸이 저에게는 큰 약점으로 다가왔습니다.
마침내 저는 이 문제를 놓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하나님 나라의 일에 얼마나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모르십니까? 제 꿈은 한국의 빌리 그래함 목사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제가 필요하고, 저는 하나님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왜 제가 유명한 부흥사가 되도록 축복해주지 않으십니까? 제가 지금 누구 때문에 이렇게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요. 이게 다 하나님을 위해서 열심히 일하는 거라고요.”
그러자 제 마음속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네가 누구인데 나를 위해서 일하느냐? 나는 오직 한 사람의 빌리 그래함만 필요하단다. 더 많은 빌리 그래함은 필요하지 않단다. 빌리그래함은 오직 한 명이면 된단다. 너는 빌리 그래함이 될 필요가 없다. 조용기가 되면 된다. 너는 세상에 오직 하나뿐인 조용기가 되도록 노력해라.”
그래서 저는 하나님께 다시 질문했습니다.
“세상에 오직 하나뿐인 조용기가 되려면 제가 어떻게 하면 됩니까?”
하나님은 대답해주셨습니다. “나는 너에게 나의 양들을 돌보고 먹이는 목회의 은사를 주었다. 이 일을 잘 감당하도록 노력해라.”
“주님, 그것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저는 그런 일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너는 근본적인 마음의 자세가 잘못됐다. 내가 너에게 원하는 것은 목회자가 되는 것인데, 너는 네 마음에 좋은 것만 하려고 한다. 그것이 잘못되었다. 너는 내가 원하는 목회를 해라.”
“하나님, 다시 한 번만 생각해보십시오. 저는 부흥사가 되기 원합니다.”
“내가 너의 주인이다.”
결국 저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성도들을 돌보고 말씀을 먹이는 일에 열심을 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축복이 넘쳐나기 시작했습니다. 제 자신을 살펴보면 부족한 부분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목회자로서의 은사를 주셨고, 제가 이 일에 순종하고 충성을 다하자 크게 성공할 수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조용기 『4차원의 영성 실천편』 서울: 교회성장연구소, pp. 197-199.)
“하나님, 다시 한 번만 생각해보십시오. 저는 부흥사가 되기 원합니다.”
“내가 너의 주인이다.”
멍에를 멘다는 것 무엇인지에 대하여 잘 설명해주는 예화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나의 멍에" 즉 "예수님의 멍에" 아래에 머문다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절대적으로 순종해야 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제가 왜 지난 주에 무너졌을까요? 곰곰이 생각해 보니 답이 나왔습니다. 예수님의 멍에를 메지 않은 것입니다. 즉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았기에 무너졌던 것입니다.
우리들이 왜? 안식을 잃어버릴까요? 그렇게 주님을 사랑했던 베드로가 왜 평안을 잃어버리고 낙심케 되는 실패를 경험하게 된 것일까요? 같은 맥락입니다.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을 인정하지 않아서 결국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게 된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크게 세 가지 면에서 부인하는 것입니다.
(요일 2:16, 개정)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또한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자신이 감당해야 하는 몫이 다른 것입니다. 조용기 목사님이 빌리그래함처럼 부흥사가 되고 싶어했지만 하나님은 너는 목사가 되라고 하셨을 때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어깨에 메워질 멍에는 모두가 같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맞지만 그 짊어질 분량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이를 간과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처럼 살려고 평범하게 살려고 하다가 예수님과의 관계가 흐려졌습니다.
목사가 짊어져야 하는 멍에가 있습니다. 일반 성도들이 짊어져야 하는 멍에가 있습니다. 장성한 자의 멍에가 다르고, 초신자의 멍에가 같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사명입니다. 멍에는 예수님의 주권 아래에 머무는 것이고, 십자가입니다. 우리들에게 주어진 멍에를 잘 감당해야 합니다. 자신의 분량 이상으로 넘어가면 안될 것입니다. 각 사람의 일을 정하시고 인도하시는 분은 우리의 머리되신 예수님이십니다.
(마 11:29, 개정)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제까지 우리들은 예수님의 멍에에 대하여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이제부터는 “내게 배우라”는 말씀이 가지고 있는 의미에 대하여 나누겠습니다.
부정과거 「마데테」(μάθετε, 배우라)는 능동태입니다. 억지로 배우는 것이 아니라 자원하는 마음으로 배우라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우리들이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예수님께 배우게 될 때 우리의 마음이 쉼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데테」(μάθετε, 배우라)는 부정과거형으로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을 “단 한 번에 (once for all) 배우라”는 뜻입니다. 우리들이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을 어떻게 “단 한 번에 (once for all)" 배울 수 있을까요?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머리 속에서 "이것이 맞는 것일까?" 고민하고 망설이기도 하고, 또는 바리새인들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자신이 배우고 익힌 어떤 사상들과 비교하여 아니면 배척하기도 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아무리 좋은 말씀을 전해도 그들에게 무익할 뿐입니다. 왜냐하면 그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실 때 「마데테」(μάθετε)」라는 단어을 사용하셨습니다.
이 단어의 시제는 과거형으로 렌스키가 설명한데로 우리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한번에 배우라는 의미인데 이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그 생각이 "이미 이것은 내 것이다"하고 수용하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옳은 것일까? 하는 의문을 제기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다고 하면 그런 것이다"하고 따르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복음에 대하여 설명할 때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롬 1:17, 개정)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복음을 설명한 바울의 말에서 우리들이 주목할 부분이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는 대목입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믿음에 이르게 됩니까? 그 방법이 무엇입니까?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마데테」(μάθετε)」, 내게 배우라는 의미가 이런 것입니다. 우리들이 이런 믿음의 과정을 통하여 우리들은 쉼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무엇보다 먼저 "말씀이 그렇다고 하면 그런 것이다"하며 말씀을 인정하고 수용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 말씀에서 마음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프쉬케"입니다. 이 단어는 “숨쉬다”에서 온 말로 70인 역에서는 주로 히브리어 “네페쉬”의 번역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시는 "쉼"이 무엇을 의미하고 어떤 삶이 주어질 것인지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삶이 힘들고 지칠 때, 답답하다, 숨이 막힐 것 같다는 표현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들을 부르시면서 이렇게 답답하고 숨이 막힐 것 같은 삶을 편하게 해서 우리들로 하여금 쉴 수 있게 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주님을 따라가면서 우리들의 삶이 편안해질 것을 바라봐야 하고, 그리고 우리들 스스로가 이렇게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여기서 “얻으리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휴레세테(εὑρήσετε)”는 원래 “찾다”, “발견하다”는 뜻을 지닌 동사 “휴리스코(εὑρἱσκω)”의 2인칭 복수 미래 능동태로서 “너희가 발견할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살면 우리들의 심령에서 자연스럽게 쉼(안식)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예를 사마리아 수가라는 동네에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요 4:39, 개정) 여자의 말이 내가 행한 모든 것을 그가 내게 말하였다 증언하므로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요 4:40, 개정) 사마리아인들이 예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유하시기를 청하니 거기서 이틀을 유하시매
(요 4:41, 개정) 예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가 더욱 많아
(요 4:42, 개정)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 하였더라
요한복음 4장에 나와 있는 사마리아의 수가라는 동네에 사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배워서 예수님께서 세상의 구주이신 것을 발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이 그들의 심령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발견하게 되었던 것을 증명하는 말씀입니다.
(마 11:28, 개정)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우리들이 어떻게 쉬게 될까요? 먼저 쉰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아보겠습니다.
“쉬게 하리라”는 의미에 대해서도 옥스포드 원어대전에서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여기서 ‘쉬게 하리라’로 번역된 ‘아나파우소’는 ‘쉬게 하다’, ‘영적인 휴식을 주다’, ‘안식하다’라는 뜻을 가진 ‘아나파우오’에서 유래하였다. 특히 ‘아나파우오’에서 유래한 명사 ‘아나파우신 ’ 즉 ‘쉼’은 ‘안식’과 동의어이다(히 3,4장). 따라서 원어적으로 본문은 ‘예수께서 너희에게 안식을 주시겠다’는 약속으로 이해할 수 있다.》
(옥스포드 원어대전 마태복음 p. 88.)
쉼이라는 것이 안식이라는 말과 동의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어떻게 안식을 누리게 될까요? 이제까지 우리들은 진정한 안식을 누리기 위하여 그 방법을 찾으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첫째 멍에를 메야 한다고 했습니다.
멍에라는 것이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것이라고 알았습니다.
둘째 배우라는 말의 의미도 알았습니다.
계산하지 말고 수용하라는 말이었습니다.
셋째로 이렇게 하면 쉼을 얻을 것이라고 했는데 발견할 것이라고 했는데 여러분의 마음에 쉼이 있습니까? 안식이 있습니까? 도대체 안식의 실체는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스스로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마 12:8, 개정)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
이 말은 우리의 안식의 주인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언제 우리들이 안식을 누리게 될까요? 예수님께서 우리들의 마음에 들어오실 때 우리들은 참 안식을 누리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멍에 즉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면서 주님과 동행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과 동행할 때 예수님께서 우리들과 함께 하시며 우리들의 심령에 참된 쉼과 안식을 부어주실 것입니다.
(계 3:20, 개정)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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