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구, 꽃은 핀다, 45.5x53.0cm, oil on canvas. 2023(9)
29번째 개인전
<꽃은 핀다>
얼마 전 청년기에 보았던 책을 다시 구입해 읽었다. 익숙한 것 같은데 생소하다. 그간의 내가 스친 시간들은 어디에도 없었다. 가끔 끄적이던 메모 같은 일기와 기념일 정도의 기억들 외에는 시간이 소멸되었다. 40대의 시절을 삭제해야만 했던 절박함, 정신적 피로도의 포화로 그 시간을 잘라내야 살 수 있었다.
작업실에 집중한 시기, - 그것은 십여 년 전부터이다. 공식적인 사회의 일정들을 멈추고 그림그리기에 집중했고, 사이, 가족의 수가 한분 줄었고, 작업실을 옮겼으며, 몇 번의 개인전과 매년 그림시장 전시회에 참여했다.
그림을 그리는 일, 가끔 작업실 주변의 풀을 뽑고 채소 조금 심거나, 강변을 걷고, 커피를 마시거나, 한해에 오랜 지인 한 둘과 만나는 것이 지난 십년의 일상이었다.
나는 사람의 <웃는>모습 그린다. 감정표현 하나와 작품주제로 만난 것이다.
웃음은 종류가 다양하지만 ①유쾌한 웃음, ②허탈한 웃음, ③깨달음의 웃음, ④비웃음으로 분류해 본다.
유쾌한 웃음은 박장대소 등 긍정적인 것이고, 허탈한 웃음에는 뜻밖의 일이나 어처구니없는 상황에서 나오는 웃음이다. 깨달음의 웃음은 인간과 자연, 사물의 이치 등에 대해 깨닫게 될 때 번지는 조용한 웃음이다. 비웃음은 부정적 요소를 가장 많이 지닌 웃음이지만, 한편 비판의 웃음이기도 하다. 그러나 웃음에는 이 네 개의 분류 외에 수십 가지의 다양한 감정이 포함되어 나타난다. (해학諧謔이 가져다주는 복합적인 요인에 의한 웃음에 대해서는 다음기회에 논해야겠다.)
내가 그리는 <웃음>은 모든 감정을 내려놓은 아무 뜻이 없는 <무명한 맑은 웃음>이었으면 한다. 그림을 대할 때 덩달아 좋은 그런 웃음 말이다.
아기웃음, 허탈해도 맑은 웃음, 걸걸해도 투명한 웃음, 천진난만 장난기 가득한 웃음, 까르르 터트리는 어린애들의 웃음은 생각만하여도 유쾌함을 가져온다.
생래적(生來的)인 사회구조가 변화되었지만 여전히 지속되는 삶의 이상추구 중에 하나는 웃음을 잃지 않겠다는 바람일 것이다. 그래야 삶이 행복하기 때문이리라.
2012년 개인전 작가노트를 여기에 옮긴다.
“히말라야 시가르탕(ShigarTang)계곡은 “꽃들의 거처”라 불린다. 이곳 여인들의 웃음과, 남태평양 솔로몬 제도의 아누타 섬 주민들의 삶에서 인간의 행복한 <웃음>을 보았다. 순수한 <웃음>의 표본으로 생각되었다.
웃음이란 본래 그런 것이다. 웃는 뇌관을 건드리는 것은 솔직한 삶의 형태에서 연유한다는 것을 입증하는 TV다큐 장면이었다. 밝고 맑은 웃음은 권력과 과한 물욕에서 벗어난 결과이다. 삶의 의욕과 그 근원에서 터져 나온 봇물이기에 그들은 끊임없이 웃고 있었다.
나는 웃는 얼굴을 그리면서 줄 곳 이러한 순박한 웃음을 찾으려고 하였다. <웃는얼굴>을 그린다는 것에 대해 미학적으로 무엇이냐고 물으면 “그냥 웃는 그림”이라 말한다. 작품의 실물을 보지 못하고 만화분야로 오해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런 오해 때문에 내 그림에 대해 앞서 이런저런 것을 밝힌 바 있다.
<웃는 얼굴> 그림은 복합적이다. <웃는 얼굴>은 만화의 특징인 간략화 된 형태를 사용했고, 유화나 아크릴 물감을 사용한다.
회화의 형상과 만화의 선적인 외형은 한 곳에 뿌리를 두고 있다. 20세기가 되어서 만화가 하나의 예술장르로 분류된 것이니 독자적 영역으로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시각예술에서 각 분야의 구분이 모호한 것들이 많다. 회화, 조각, 디자인, 일러스트레이션, 만화 등의 형상성은 공통적인 요소를 함께해 왔다. 다만 현재와 같은 분류는 전문화 과정에서 세분화 되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한 작품에는 복합적이 요인들이 포함되고, 포스트모던 이후 이러한 복합적인 양상이 미술계의 흐름이니 내 작품의 유형은 굳이 한 분야로 분류하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회화면 어떻고 만화면 어떠한가.
오래전부터 관심을 둔 것은 고졸미(古拙美)이다. 기교 없어도 예스럽고 소박한 맛이 드러나는 친근감과 천진한 웃음은 이것과 통한다. 세련되고 뚜렷하게 드러남 보다 조금은 촌스럽고 투박한 맛을 내는 오래된 질그릇 같은 웃음을 찾을 수 있을까?
사람들이 만들어 낸 물건들은 시간에 의해 다듬어지고 숙성되어 유무형의 익숙함에서 배어나오는 아름다움이 깃들게 된다. 이처럼 자연스러움에 근거한 웃는 모습을 만들고 싶다.
웃음은 자연 상태에 가까우며 ‘스스로 그러한 것’이다. 내가 그리는 그림은 웃음의 기호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피어나는 그런 웃음꽃, 가장 소통이 편한 맑은 웃음을 찾아 볼 것이다.”
2023. 9. 이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