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대 할아버지의 휘(諱)는
생전의 함자(函字)를 그대로 부르는 것은 예의가 아닌 것입니다.
따라서 본 종친회도 "창응화수회"라 이름지었으나,
저희 섭자 항렬를 기준으로 4대봉사를 대진(代盡)한 제5대조인 昌(자) 應(자) 할아버지나
고조이신 榮(자) 達(자) 할아버지 모두 생전에 쓰시던 함자를 그대로 부르고, 그 뒤에 자(字) 를 붙인다 해도 최선의 예의를 차린 것으로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함자는 자신 이외에 임금, 스승, 아비(君師父)가 아니어든 함부로 부르지 않는 것이기 예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후배,후손, 후학들이 존경하는 선배, 선친, 선생을 부르는 데 있어 반드시 호(號)를 지어 부르도록 하였던 것입니다.
저희의 양소공파'라는 종파(宗派)의 시조이신 19대 조부를 맹암할아버지라 부르는 것도 그 분의 함자가 英자烈자임에도 그 분의 호가 "맹암(孟巖)"이라서 후손들이 그리 부르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이러한 연유로 우리가 선대할아버지의 호(號)를 지어 올리려는 것입니다.
자고로 호는 소처이호(所處以號)를 원칙에 따르는 것이 무난하다 하였으니 선대 할아버지들께서 생전에 주거하셨던 처소를 알아 보았습니다.
昌자應자 할아버지께서는 고삼면 쌍녕리에 사셨으나, 이후 자손들이 바드실로 거소를 옮겼습니다.
따라서 묘소 또한 '바드실"에 있다는 것을 참고할 수 있겠고, 바드실이라 함은 마을 모양이 '바디(베틀을 짤 때, 날줄을 내리 쳐 촘촘히 하는 기구)'모양이라서 그리 부른 것이라 합니다. 그리하여 '바디 성(筬)'자에 맹암할아버지의 호에서 '바위 암(巖)'을 빌어 筬巖(성암) 할아버지라 지어 드리고 싶습니다.
榮자達자 할아버지께서는 삼죽면 가현리(이후 보개면 북가현리)에 사셨으며, 그 가운데서도 '돌모루"에 터잡아 현재까지 가문의 터전을 일구신 분이십니다. 이후 자손이 번성하여 속칭 '돌모루 김씨'의 원조가 되셨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돌모루'는 '돌모퉁이'라는 뜻으로 돌은 이미 맹암에서 빌어 쓸 '바위 암(巖)'자와 뜻이 중복되니 피하고 '모퉁이 우(隅)'자를 앞에 붙여 隅巖(우암) 할아버지라고 지어 드리고자 합니다.
여러 어르신과 회원분들께서 달리 생각하신 바가 있으신지요?
참고로
휘(諱)는 돌아가신 분들의 함자를 이르는 말입니다.
4대 봉사란 기제사(매년 1회씩 돌아가신 날에 드리는 제사)를 1대인 아버지, 2대인 할아버지, 3대인 증조할아버지, 4대인 고조할아버지까지 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5대 조부모는 시향 또는 묘제를 드리 수 있는 전답이나 임야 등 위토(位土)가 있는 경우 3월이나 11월에 묘제를 드리는 것으로 이러한 위토가 없는 경우 제사를 드리지 않는 것이 상례입니다.
위토(位土)란 4대봉사가 끝난 조상의 신위(神位)를 모시기 위한 전답(田畓)을 말하며, 보통 시향답(時響畓)이라고 합니다. 선대 조상에게까지 때를 맞추어 향(香)을 올리려면 문중의 공동의 재산이 필요한 것입니다. 저희 문중도 제5대이신 昌(자)應(자)할아버지의 위토를 미리 마련하여 묘제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위토를 마련하여 4대봉사가 끝난 조상에게 묘제를 지내려면 문중이 상당한 경제력이 갖추어야 공동재산을 마련할 수 있는 것입니다. 참고로 저희 집안은 아직도 4대 봉사가 끝나지 않은 高祖이신 榮(자)達(자)할아버지의 위토가 아주 옛날부터 마련되어 있을 만큼 과거에는 문중이 매우 부유한 때도 있었습니다.
사시제(四時祭)란 권세가 대단한 가문에서는 매년 기제사를 드리는 4대 조부모의 산소에 가서 봄, 여름, 가을, 겨울 사시마다 시제를 올렸습니다. 기제사를 포함하여 년 5회의 제사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유학이 지나치게 성했던 조선제례의 영향으로 과례(過禮)가 분명합니다. 저희는 사시(춘하추동)는 아니지만, 기제사를 드리는 高祖이신 榮(자)達(자)할아버지를 춘3월에 시제를 올리고 있는 것입니다. 일종의 묘제의 예행연습이라고도 보셔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