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문화재 사랑 2019년 8월호를 펼쳐보니 방송으로 자주 듣던 통일전망대가 있는 곳이 오두산성 정상이라는 사실에 새삼 깜짝 놀란다. 오두산성과 통일전망대가 묘한 오버랩을 이루며 과거와 현재를 연결시켜준다.
‘문화재 사랑’에 실린 내용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실린 내용을 중심으로 오두산성에 대해서 소개한다.
파주 오두산성과 오두산 통일전망대
1) 삼국의 접경지, 오두산성
오두산성은 임진강과 한강이 마주치는 곳에 위치하고 있는데, 지형이 높고 험하다. 동쪽으로 산기슭과 접하여 있으며 삼면이 강물로 둘러싸여 있다. 군치소(郡治所)와는 서북쪽으로 14리 떨어져 있다.
기록에 보면 산성 명칭에 대하여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대동지지(大東地志)』에는 조두성(鳥頭城)으로,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오두산성(鷘頭山城)으로, 『세종실록』 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오조성(烏鳥城)으로 기록되어 있다.
오두산성은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성동리에 위치한 오두산(해발 119m) 정상의 8부 능선을 따라 축조된 퇴뫼식 산성이다. 오두산 높이가 불과 120여 미터에 지나지 않지만 임진강과 한강 두 강이 마주하는 곳이라 수상교통의 길목을 감시하는 곳이다. 두강이 교차한다는 뜻의 교하(交河)라는 옛 지명도 또한 이를 잘 나타내주고 있다. 성벽의 길이는 1,200m정도로 추정되며 전체적으로 북쪽을 위쪽을 ‘ㄱ’자 형태를 이루고 있다. 강가에 우뚝 솟은 오두산은 사면이 가파르고 서쪽으로는 임진강이, 남쪽으로는 한강이 흐르며 동쪽 역시 최근까지 물이 드나들었던 마을이 있다.
성으로 진입하는 주도로가 있는 북쪽은 산록과 연결되는데 성문으로 추정되는 북문지가 있다.
이 성에 대해서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각종 역사서와 지지자료에 언급되어 있는데 멀리서 바라볼 때 ‘까마귀 머리’를 닮았다 하여 오두산성(烏頭山城), 오도성(烏島城)으로 불리기도 하고 ‘자라 머리’와 유사하다하여 오두산성(鼇頭山城)으로 기술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오두산성의 한자표기 지명이 여러 개인 것은 아마도, 순 우리말로는 본래 하나였을 이름이 시대에 따라서, 표기하는 사람에 따라서 음차나 훈차로 적다보니 생겨난 결과로 보아진다.
한자로야 그럴듯하게 지었지만 상상만해도 오두산의 인상이 매우 우뚝 솟은 모습으로 느껴진다. 대부분의 지명이 한자 뜻으로만 해석하면 편협되거나 오해하기가 쉽상인데, 발음이 비슷한 우리말로 생각해보면 그 뜻이 더 그럴듯할 때가 많다. 여기 오두산성 역시 우리말 식 풀이 ‘오뚝한 산성‘으로 불렸을 것이라고 생각해본다.
임진강과 한강의 두 강물이 합쳐지는 두물머리 지점에 우뚝 솟은 산의 모습, 사방을 굽어보기에 더할 나위없는 전망을 가지고 있는 곳이니 이런 곳에 산성을 쌓고 지킬 수밖에는 없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오두산성은 현재 사적 제351호로 지정되어 있으나 정상부에 통일전망대가 설치되고 주변에 설치된 군사시설로 인해 사적 본연의 모습인 산성의 흔적에 접근하기는 어렵다. 오두산성은 1992년 경희대학교 박물관에서 몇 차례에 걸쳐 기초적인 발굴조사를 실시하였고, 최근에는 문화재청에서 오두산성 성곽의 보수와 정비를 위한 동벽 유구 조사를 통해 산성의 축성방법과 잔존 실태를 확인하는 작업을 진행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 성은 내성과 외성으로 구성된 복곽성으로 외성 둘레 1,228m, 내성둘레 1,240m의 석성(石城)과 호성석벽(護城石壁)의 토성을 갖추고 있으며, 현재 약 6군데의 성벽 흔적이 남아 있다. 성의 축조방식과 백제세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기와조각으로 보아 축성시기를 백제로 볼 수 있으며, 통일 신라를 거쳐 고려,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수차에 걸쳐 증축되어 사용되어 왔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 오두산성은 『삼국사기』에 ‘사면이 가파르고 바닷물에 둘러싸인 [四面峭絶 海水環繞]’ 백제의 관미성(關彌城)으로 비정되어 많은 관력학자들의 관심이 집중 되어 있는 유적지이다. 한편, 출토 유물 중에는 ‘천(泉)’, ‘천정(泉井)’ 글자가 새겨진 기와편이 다수 있는데, 이로보아 오두산성은 신라 경덕왕대에서 교하군(交河郡 현재 파주시)으로 개명되기 이전에는 고구려식 지명인 천정구현(泉井口縣) 혹은 천정구성(泉井口城) 등으로 불리었을 것이다 출토유물과 삼국의 변경지역으로서의 전략적 위치로 볼 때 오두산성은 백제와 고구려, 신라 사이에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며 차지하려고 했었던 군사적 요충지였을 것이다.
- 오두산성 성벽 - (월간 '문화재 사랑'에 실린 것을 촬영한 것임)
![](https://t1.daumcdn.net/cfile/cafe/99DDA1405D4D13AF28)
2) 통일전망대
이곳은 한국전쟁을 겪지 않은 젊은 세대들에게 민족 분단의 실상을 이해시키고 통일교육을 활성화시키기 위한 현장 체험 통일 교육장소로서 제공될 목적으로 오두산성 정상에 통일전망대를 세웠다. 총 5,195평 부지에 연면적 2,654평으로 지하 1층, 지상 4층 구조로 지어졌다. 실향민들의 망향의 설움을 달래며 망향제(望鄕祭)를 지내는 곳이기도 하다.
오두산 통일전망대는 1991년 6월4일 착공하여 1992년 9월 8일 첫 개관한 이래 2019년 현재 총 방문객이 2,000만명에 이르고 있다.
순수한 사적지로서의 오두산성의 전모가 소상하게 밝혀지는 통일한국 시대가 하루빨리 다가 오기를 바랄뿐이다.
-통일전망대- (월간 '문화재 사랑'에 실린 것을 촬영한 것임)
![](https://t1.daumcdn.net/cfile/cafe/9996343F5D4D13DE2B)
-오두산성 정상에서 바라본 북측 산하 - (월간 '문화재 사랑'에 실린 것을 촬영한 것임)
![](https://t1.daumcdn.net/cfile/cafe/99F5BE3F5D4D13E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