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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문장 part 1. 플롯과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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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문장(문단)을 죽음으로 시작하는 소설들
잭 M. 빅햄은 <소설창작에서 가장 흔한 38가지 실수>에서
"첫 문장부터 이야기로 직접 들어가라"라고 얘기한다.
따라서 죽음으로 시작하는 소설들은 독자들에게 명백한 사건이 일어났다는
느낌을 즉시 부여한다.
* <7년의 밤>, 정유정, 은행나무, 2011
"나는 내 아버지의 사형집행인이었다.
2004년 9월 12일 새벽은 내가 아버지 편에 서 있었던 마지막 시간이었다. 그땐
아무것도 몰랐다. 아버지가 체포됐다는 사실도, 어머니의 죽음도, 밤사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막연하고도 어렴풋한 불안을 느꼈을 뿐이다. 아저씨의 손을 잡고
두 시간여 숨어 있던 세령목장 축사를 나선 후에야, 뭔가 잘못됐다는 확신이
왔다."
* <카라마조프 집안의 형제들>,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서상범 역, 푸른숲주니어, 2010
"알렉세이 표도르비치 카라마조프는 지주 표도르 파블로비치 카라마조프의 셋째 아들이다.
표도르 파블로비치는 십삼 년 전 갑자기 의문스런 죽음을 맞이하는 바람에 한동안
많은 이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표도르 파블로비치의 죽음에 대해선 때가
되면 자세히 얘기하겠다."
* <내 이름은 빨강>, 오르한 파묵, 이난아 역, 민음사, 2009
"나는 지금 우물 바닥에 시체로 누워 있다. 마지막 숨을 쉰 지도 오래되었고
심장은 벌써 멈춰 버렸다. 그러나 나를 죽인 그 비열한 살인자 말고는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자는 내가 정말로 죽었는지 확인하려고 숨소리를 들어 보고
맥박까지 확인했다. 그러고는 옆구리를 힘껏 걷어차더니 우물로 끌고 와 바닥으로
내동댕이쳤다. 이미 돌에 맞아 깨져 있던 내 머리는 우물 바닥에 부딪히면서 산산조각이
났고, 얼굴과 이마, 볼도 뭉개져 형태를 분간할 수 없다. 뼈들도 부서졌고 입안엔
피가 가득하다."
* <소설 대장정>, 웨이웨이, 송춘남 역, 보리, 2011
"1934년 12월 1일. 넓고 푸른 샹 강이 피로 물들었다.
지난 11월 말, 장시 소비에트 구역에서 온 중앙 홍군은 구이린 북쪽에 있는
샹 강 기슭에서 국민당군에게 가로막혔다. 홍군은 방어선 세 겹을 헤치고 이천삼백
리를 싸우면서 여기까지 걸어왔다. 높은 산과 가파른 고개를 넘고, 숲과 가시덤불을 걷고
싸웠다. 짚신은 닳아 떨어진 지 오래고 군복은 진작 너덜너덜해졌다. 적군은 끈질기게
뒤쫓아 왔다. 싸움과 행군이 끝없이 이어지자 사람들은 지쳐 갔다. 장제스는 또 한 번
홍군을 무찌를 수 있는 기회가 왔다면서 병력 사십만을 끌어모아 팔만에 이르는 홍군을
샹 강 기슭에서 모조리 쓸어 없애려고 했다."
* <내가 아버지를 죽였다>, 마리오 사비누, 임두빈 역, 문학수첩, 2011
"내가 아버지를 죽인 날은 그늘 한 점, 음영 하나 드리워지지 않은 어느 밝은 날이었다.
아니, 잿빛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좀처럼 우울함에 빠지지 않는 영혼마저 물들일 만한
잿빛. 이상하게도 나머지 부분은 생생하게 기억이 나는데 유독 이 부분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게 뭐 대수인가? 틀, 그것은 단지 일어났던 그 사건의 틀이었을
뿐이다-틀. 우리 인간들에게 무관심한 자연을 왜 자꾸 들먹이려고 드는가? 자, 이제 그만
본론으로 들어가 보자. 나는 아버지를 죽였다. 그것도 마치 일상생활에서 벌레를 죽이듯이
간단하게. 아니다, 이 이미지는 잘못 전달된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지극히 일상적인
행동에서는 대부분의 경우, 공포심이 아닌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기 때문이다. 미안. 그만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져 버렸다. 하여간 분명한 것은 마치 숨 쉬듯이 아무렇지도 않게
아버지를 죽였다고 말한 부분이다. 숨을 쉰다는 것, 즉 산소를 폐로 옮기는 행위는 그다지
큰 노력이 필요 없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