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화
[기천의 사고가 있던 날 : 목격자]
S호텔에서 거래처와 미팅이 있던 우진은 약 한 시간가량을 그들을 위해 할애한다. 전문용어가 오고가며 두 명을 마주하고 앉은 우진 사이의 테이블 위에 음식들을 조금씩 비워나간다. 꼿꼿하게 한걸음 떨어져 서서 상대를 주시하고 있는 공비서의 아우라는 비서로써 손색없는 모습이다. 시간을 할애한 만큼 좋은 결과를 얻은 우진은 거래처 사람들을 먼저 배웅하고, 공비서가 우진의 앞에 세워둔 차의 뒷문을 열어 보인다.
그. 순. 간.
엄청난 굉음과 함께 우진의 시선을 사로잡는 도로의 모습은 할 말을 잃게 만든다. 거래처 사람들을 배웅하던 중에도 거슬렸던 차량이 기어코 사단을 낸 모양이었다. 중형승용차로 보이는 흰색 차량이 전복된 채 불길을 내뿜고 있었고, 인도를 치고 올라탄 가해차량은 뿌연 연기를 뿜고 있었다. 이를 모두 목격한 우진은 다음 스케줄이 있어 차마 현장에 가보진 못하고, 119에 전화를 건다.
“네, 119입니다.”
“지금 차량 전복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위치는 S호텔 정문 앞 도로구요, 가해차량은 인도를 들이받고 가로수에 전복된 상태구요, 피해차량은 현재 불길을 내뿜고 있습니다. 빨리 와주서야 될 것 같습니다.”
“곧 출동하겠습니다.”
“네, 빨리요!”
* * * * *
이동 중에 잠깐 잠이 들었던 우진은 또 그날의 일들을 꿈으로 마주하고 식은땀을 흘리며 손발을 휘젓다 잠에서 깬다. 운전 중이던 공비서가 룸미러로 그런 우진을 놀라 보며 묻는다.
“이사님, 괜찮으십니까?”
“어? 어…….”
“또 그 꿈 꾼 거예요?”
“어. 좀 괜찮은 것 같더니 또 꿈에 나타나네.”
“그때 그 신고를 하지 말았어야 했나 봐요. 이렇게 정신적으로 고통스러울 줄 알았으면요…….”
“아냐, 그날 그 장소에 그 상황을 본 사람은 나밖에 없었고, 나마저도 신고하지 않았다면 그 사람들은 억울한 일을 당하게 됐을지도 모르잖아.”
“제가 말씀 드리지 않았던 게 있는데요.”
“......?”
“가해 차량이 도난당한 차고, 운전자는 사고현장에서 도망을 쳐서 피해자 및 가족들은 지금 어떤 해결도 보지 못하고 범인을 기다리고만 있는 상태라는 얘길 들었습니다. 이사님께 이런 일까지 일일이 보고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서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뭐?!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거야?!”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이사님이 나선다고 해도 해결될 수 있는 건 없어요.”
우진은 공비서의 말에 뭐라도 반박을 하고 나무라고 싶었지만, 사실이었다. 이제 와서 뭘 어떻게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씁쓸한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리며 한숨을 깊게 ‘훅’ 뱉어내고, 차창 밖을 멍하니 응시하는 우진.
* * * * *
[6개월 후 피해자의 아내와의 첫 만남]
얼굴이 닿을 듯 말 듯한 거리에서 우진은 이슬을 큰 눈으로 부라리고 있다. 우진의 그런 모습에 전혀 겁을 먹지 않는 이슬의 태도에 조금 당황한 듯한 우진이 한걸음 떨어져 마주서서 이슬을 본다. 우진의 그런 행동이 이해가 가질 않는다면서 눈살을 찌푸려 우진을 보는 이슬.
“뭐야? 아줌마.”
“뭐가요?!”
“내가 그렇게 보는데 쫄지도 않아?”
“그럼, 뭐 쫄아야 되요? 내가? 당신한테?! 왜요?!”
“와 진짜. 안되겠어요. 핸드폰 좀 줘 봐요.”
의심스럽단 표정으로 우진을 보며 가방을 양팔로 감싸 쥐는 이슬의 행동에 자제하지 못하고 피식 웃음을 뱉고 마는 우진. 우진의 행동을 더더욱 이해 못하겠단 생각을 그대로 표정으로 보이고 있는 이슬. 멀뚱멀뚱 서 있는 공비서 옆구리를 팔꿈치로 ‘쿡’ 찌르며 핸드폰을 뺏어오란 신호를 주는 우진. 공비서는 왜 굳이 그래야 하냐며 당황한 표정으로 우진을 본다. 아랑곳하지 않고 우진은 공비서한테 고갯짓으로 목표물을 향해 가리킨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어머! 뭐하시는 거예요 지금? 어? 어어~?!”
공비서는 이슬의 빈곳을 노려 가방을 떨어트리게 한 뒤, 그 안에서 휴대폰을 집어 들고 우진에게 건넨다. 공비서에게 받아든 휴대폰으로 번호를 ‘꾹꾹’ 터치해 전화를 걸고, 이내 자신의 재킷 안주머니에서 울리는 휴대폰을 꺼내들고 입매를 슥 올려 미소를 띤다.
“아줌마가 아직 내가 누군지 모르나본데, 내가 아주 유명하거든 이 바닥에서. 앞으로 좀 고달프더라도 감내해 아줌마.”
홀연히 공비서를 옆에 달고 휘적휘적 레스토랑을 빠져나가는 우진. 그런 우진의 뒷모습을 황당하게 바라보고 서 있는 이슬. 이슬 옆에 가만히 서서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하준이 그제야 입을 연다.
“엄마, 저 아저씨 왜 그래? 웅? 왜 엄마 핸드폰 막 뺏어갔다가 다시 주고 그래?”
“그러게, 참 이상한 아저씨다 그치?”
“응응!”
“갔으니까 신경 쓰지 말자. 우리 하준이가 먹고 싶다던 파스타랑 스테이크 먹으러 이제 진짜 가볼까?”
“우와우와우와!”
* * * * *
입가에 잔뜩 묻히고 먹으며 한껏 신나있던 하준이 갑자기 쥐고 있던 포크를 내려놓고 시무룩한 표정을 짓는다. 이슬은 괜스레 기천이 생각나서 그러나 싶어 지레 겁을 집어먹고 말없이 하준이 왜 그러는지 말할 때까지 기다려준다.
“엄마, 이주 이모두 왔으면 좋았겠다.”
“아이구, 우리 하준이 이모 보고 싶어?”
“응. 맛있는 거 같이 먹구 싶어.”
“그래, 그럼 우리 먹고 포장두 해가자. 이주이모 오늘 우리 집에서 자구 가라하지 뭐.”
“우왕 죠아, 죠아!”
“이온이 삼촌두 오라할까?”
“시러!”
“응? 왜?”
“이온이 삼촌은 날 너무 힘들게 해.”
“뭐어?!”
3 살배기 어린 하준이 자신의 남동생이자 하준에게 외삼촌인 10 살배기 이온을 생각하는 행동에 웃음 ‘픽’하고 나온 이슬. 하준이 입을 삐죽 내밀고, 짧은 팔을 모아 팔짱을 나름 낀다고 끼고는 ‘휴’하고 한숨을 쉬는 모양이 너무 귀여워 죽겠는 이슬이다.
* * * * *
오늘따라 일이 일찍 끝난 우진은 공비서를 퇴근시키고, 개인차량으로 혼자 살고 있는 집으로 이동을 한다. 지하주차장에 자신이 몰고 왔던 차를 주차해두고 엘리베이터에 몸을 담는 우진. 7층 버튼을 누르고 서서 문득 레스토랑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는 우진. 엘리베이터가 1층에서 멈추고 문이 열린다. 생각하고 있던 사람이 눈앞에 서 있는 것을 보자 흠칫 놀라 뒤로 넘어질 듯 뒷걸음질 친 우진.
“당신 뭐야?”
“네? 제가 묻고 싶은 말이네요.”
“아줌마 여기 살아?”
“왜요? 그것도 안 돼요?”
“아 놔, 됐고. 몇 층?”
“칠! 층! 이요!!!”
가만히 듣고 있던 하준이 큰 목소리로 우진을 향해 외친 한마디. 자신도 모르게 귀여움으로 중무장한 하준을 보고 얼굴 가득 지어지는 미소를 정작 자신조차 알아채지 못한다. 하준은 엄마를 대신해서 자신이 싸워주고 싶어 뱉은 한마디에 좀 전에 레스토랑에서 봤던 차디 찬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온화한 얼굴을 하고 있는 우진이 낯설다는 듯 동그랗게 뜬 눈으로 본다.
하준을 보고 잠시 이성이 마비되는 듯하던 우진은 정신을 차리고 엘리베이터 문을 향해 자세를 바로잡고 서서 이슬에게 시선도 주지 않은 채 묻는다.
“본의 아니게 이웃사촌인 겁니까?”
“그런가 보네요.”
“그런가 보네요오?”
“네.”
엘리베이터는 어느새 7층에 도착했고, ‘딩동’ 소리와 함께 냉큼 집안으로 들어가 버리는 우진의 행동에 어처구니가 없단 듯 허공에 헛웃음을 ‘툭’ 뱉어내고 현관문 도어락 번호를 꾹꾹 누르고 안으로 들어서려던 순간이었다. 마치 도둑이라도 들었나 싶을 정도로 집안이 난장판이었다. 조금씩 안으로 들어서자 익숙하지만 듣고 싶지 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온 거야? 어린애를 데리고 어딜 그렇게 쏘다니다 오는 거야?”
“아, 형님 오셨어요? 연락이라도 해주시죠…….”
“연락? 연락하면 왜? 뭐 숨길 거라도 있니?”
“아니, 무슨 말씀을 그렇게…….”
“우리 기천이 하늘..!”
이슬은 직감했다. 오늘 들을 말 못들을 말 다 듣게 될지도 모르겠다고. 그래서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염치 불구하고 옆집에 사는 우진에게 일단 하준을 부탁해야겠다고 생각한다. 다급하게 문을 열고 나가 우진의 집 현관문을 두드린다.
“누구세요?”
“문 좀 열어봐요!”
“아줌마?”
“얼른요!”
‘스윽’ 현관문이 열리고, 다짜고짜 그 안으로 하준을 들여 넣는 이슬. 영문을 모르는 우진은 이슬의 행동에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우진의 현관문 앞에서 하준의 양 어깨를 감싸 쥐고 차분한 말투로 상황설명을 해주는 이슬.
“하준아, 이 아저씨가 나쁜 사람은 아닌 거 같거든?!”
“뭐, 뭐요?!”
“조용히 해봐요.”
“상황설명은 나한테도 해야 되는 거 아니에요?!”
“엄마가 어른들이랑 얘기 끝나면 데리러 올게. 이 아저씨랑 그동안 같이 놀면서 있어. 알았지? 우리 하준이 엄마 말 잘 듣는 착한아이지?”
“응응. 알았어 이 못된 아저씨랑 놀고 있을게.”
“아이구 예쁘다. 우리 아들. 이따 보자.”
하준의 입술과 볼에 골고루 뽀뽀를 해주고는 잠시 우진을 보는 이슬. 우진은 알 수 없었지만 이슬의 눈빛에서 왠지 지금 상황에서는 맞춰줘야만 될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서서히 현관문이 닫히고, 뻘쭘하게 우진은 하준과 눈이 마주친다. 멀뚱멀뚱 서 있던 둘 사이로 먼저 손을 내민 건 의외로 우진 이었다.
“이름이 하준 이라고?”
“네. 민하준이에요. 아저씨는 이름이 모에요?”
“뭐? 그래, 내가 인심 썼다. 내 이름은 설우진이야. 멋지지?”
“우와. 떨우진 아저씨네요.”
“그래, 떨우진 아저씨다.”
하준의 발음을 따라하며 자신도 모르게 개구진 어린아이처럼 웃어 보인다. 그런 우진의 모습이 조금은 낯선 듯 거리를 두는 것 같던 하준도 우진에게 살갑게 다가들기 시작한다. 뭐라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감정에 이끌려 우진은 그렇게 하준과 시간을 보낸다.
* * * * *
자초지종 설명 없이 덥석 하준을 부탁했는데 사양하지 않았던 우진에게 못내 고마움을 느끼는 이슬. 집 현관문을 사이에 두고 이슬은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기분을 느낀다.
“어디 갔다 오는 거야?!”
“잠깐 하준이 좀…….”
작은 시누이는 이슬의 설명을 듣고 싶어서 질문을 했던 것이 아니란 걸 알 수 있었다. 그냥 트집거리 하나 더 생겨 날름 뱉은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됐고, 그래서. 하준이 핑계로 지금 뭘 더 기대하고 있는 건데?”
“기대하다뇨, 무슨..?”
“와 너 연기 진짜 천연덕스럽게 잘한다. 왜 이참에 배우나 해봐. 대단하다 진짜.”
“얘, 며늘아.”
“네, 어머니.”
“하준이 때문에 새살림 시작 못하는 거면 걱정마라. 하준이는 우리가 키울 거니까.”
“네?! 어머니 무슨 말씀이세요, 지금?!”
“어머, 어머. 언니 쟤 좀 봐. 너 예상하고 기다렸던 말 아냐?”
“작은 형님!”
“어머, 어머. 봤지 엄마? 쟤가 저런 애야. 지금껏 신랑을 방패막이 삼아서 연기하고 사느라 얼마나 힘들었겠어. 이제야 본색을 드러내내. 네가 내 동생 기천이 보험금 노리고 죽음으로 내몬 거 모를 줄 알아?”
“네?!!”
자신들의 생각대로 몰아세우고, 면박을 주는 말들에 가슴이 답답해진 이슬은 끝내 참고 있던 눈물을 쏟아낸다. 남편을 잃고 경황없는 사람에게 도대체 이들은 왜 이러는 건지 이해를 하려야 할 수가 없는 이슬이 그 자리에 주저앉아 펑펑 울기 시작한다. 당황한 시어머니와 시누이 둘은 물끄러미 바라보고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