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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선국사
도선국사[道詵國師]
도선국사 연 도
827년 1세 신랑흥덕왕 2년 전남 영암 출생
841년 15세 문성왕 3년 월유산(月遊山) 화엄사(華儼寺)에 출가.
846년 20세 문성왕 8년 동리산문 개산조사 혜철의 제자가 됨.
849년 23세 문성왕 11년 천도사(穿道寺)에서 구족계를 받은 뒤 운봉산. 태백산 등에서 15년간 수행
872년 29세 문성왕 17년 지리산 구령(毆嶺)암자에서 있을대 사도촌(沙道村)에서 풍수리지법을 전수받음
856년 30세 문성왕 18년 지리산 구령(毆嶺)에 미호사(米岵寺)창건
858년 32세 문성왕 20년 구례에 도선사(도선사),구례 사도촌(沙道村)에 삼국사(三國寺)를 창건
864년 37세 경문왕 3년 광양 백계산에 옥룡사를 중창하고 옥룡산문을 개설하여 제자 수백명 양성
864년38세 경문왕 5년 운암사(雲岩寺)창건
875년 49세 헌강왕 1년 신라 헌강왕의7요청으로 궁중에 나가 나라를 다스리는 이치를 말씀드리고
곧 옥룡사에 돌아옴
898년 72세 효공왕 6년 광양 옥룡사에서3월 10일 입적. 시호 요공선사(了空禪師), 탑명중성혜등(證聖慧橙)을
추증, 왕명으로 서서원 학사(瑞書院 學士) 박인범이 비문을 지었으나 돌에 새기지 못함.
1022년 고려현종 13년 대선사(大禪師)추증,(입적 후 124년)
1101년 숙종 6년 왕사(王師)를 가증(加贈)(입적 후 203년)
1126년 인종 4년 선각국사(先覺國師)로 추봉되고, 옥룡사 영당에서 구사로 추대하는 고례의식(告禮儀式)을
거행 (입적 후 228년)
1150년 의종 4년 왕명으로 최유정(崔惟淸)이 선각국사 비문지음.
도갑사도선국사진영
도선국사 관련 역사
신라말의 승려이며 풍수설의 대사. 성은 김씨. 영암출신. 왕가의 후예라는 설도 있다.
15세에 출가하여 월유산 화엄사(華嚴寺)에서 스님이 되었다. 그뒤 유명한 사찰을 다니면서 수행하다가, 846년(문성왕 8)에 곡성 동리산(桐裏山)의 혜철(惠徹)을 찾아가서 무설설(無說說) 무법법(無法法)의 법문을 듣고 오묘한 이치를 깨달았다.
850년에는 천도사(穿道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은 뒤, 운봉산(雲峯山)에 굴을 파고 수도하기도 하였으며, 태백산에 움막을 치고 여름 한철을 보내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전라남도 광양 백계산 옥룡사(玉龍寺)에 자리를 잡고 후학들을 지도하였는데, 언제나 수백명의 제자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일설에 의하면 도선은 당나라로 유학가서 밀교승려 일행(一行)으로부터 풍수설을 배워왔다고 한다. 그러나 일행은 당나라 초기의 승려이고 도선의 생몰년은 당나라 말기에 해당하기 때문에 연대에 모순이 있고, 도선이 당나라에 유학하였다는 것도 신빙성이 없다. 도선은 승려로서보다는 음양풍수설의 대가로서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 풍수지리학의 역사가 신라 말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도 도선의 생존연대가 그때였기 때문이다.
그뒤부터 도선 하면 비기(秘記), 비기 하면 풍수지리설을 연상할 만큼 도선과 풍수지리설 사이에는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관계가 맺어졌다. 그리고 언제나 도선이 풍수지리설 같은 주술적 언어와 함께 있기 때문에, 그는 역사적 실재의 인물이라기보다는 신화적 존재로 파악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도선이 역사적으로 유명해진 것을 고려 태조에 의해서였다. 875년(헌강왕 1)에
도선은 "지금부터 2년 뒤에 반드시 고귀한 사람이 태어날 것이다."고 하였는데, 그 예언대로 송악에서 태조가 태어났다고 한다.
이 예언 때문에 태조 이후의 고려 왕들은 그를 극진히 존경하였다. 태조는 도선으로부터 직접 설법을 들은 일은 없으나 사상적인
영향을 많이 받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도선의 나이 37세 되던 해, 그는 옥룡사에 머물면서 입적할 때까지 제자들을 양성하였는데, 당시 제자의 수가 수백 명이라는 점에서 옥룡산문의 규모가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도선은 옥룡사에 머문 지 35년이 되는 때인
898년(효공왕 2)에 세수 72세로 입적하였다.도선의 저서라고 전해지고 있는 것으로는 <도선비기>, <송악명당기(松岳明堂記)>, <도선답산가(道詵踏山歌)>, <삼각산명당기(三角山明堂記)> 등이 있다.
그의 법명(法名) 이 도선(道詵)이며 시호(諡號, 입적한 뒤 내린 법호)가 요공선사(了空禪師)이다. 나중에 광양군(光陽郡)의 백계산(白鷄山) 옥룡사(玉龍寺)에 오래 머물렀기 때문에 그를 옥룡자(玉龍子)라고 별호하였다.
그가 고려 태조의 건국과 후삼국 통일을 예견하여 미리부터 크게 도움을 주었다고 해서 고려 제8대 현종(顯宗)은 대선사(大禪師)의 법계(法階)를 바쳤고, 제15대 숙종(肅宗)은 왕사(王師)의 칭호를 더 보태었으며, 제17대 인종(仁宗)은 선각국사(先覺國師)라고 추봉(追封)하였다
918년 ~ 943년 음력 5월 29일
고려의 국왕
고려 태조(太祖, 877년 음력 1월 14일(양력 1월 31일)) - 943년 음력 5월 29일(양력 7월 4일))는 고려 왕조의 초대 국왕(재위기간 : 918년 6월 - 943년 5월)이다. 성은 왕(王), 휘는 건(建), 자는 약천(若天), 시호는 신성(神聖)이다. 연호는 천수(天授)이다.
출생
전설에 따르면, 왕건은 서해 용왕의 외손자라고 한다. 그래서 고려의 역대 임금들은 용의 피가 흐르고 있는 용의 후예라고 믿어 왔다.
그의 출생에 대해선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다. 송악의 호족 왕륭이 송악의 남쪽에 집을 새로 짓고 있었다. 그때 마침 그곳을 지나던 도선대사란 고승이 문 밖에서 이것을 보고 “북쪽으로 옮겨 지으면 이곳에서 세상을 구할 성인이 태어날 것”이라고 중얼거리며 탄식하였다. 그러면서 왕륭에게 새 집터를 잡아주고 이 일을 비밀로 할 것을 당부한 뒤 길을 떠났다. 그로부터 얼마 후 왕륭의 부인 한씨에게 태기가 있더니 그 이듬해 음력 1월 14일 아들이 태어났다. 아기가 태어날 때 신비한 광채와 자줏빛 기운이 방 안 가득 빛나고 하루종일 뜰에 서려 있었다. 왕륭은 도선대사의 예언대로 아들이 태어나자 이름을 건이라 지었다.
877(헌강왕 3)~943(태조 26).
고려의 제1대 왕(918~943 재위).
뛰어난 정치력과 덕망으로 고려왕조 창건과 후삼국 통일의 위업을 이루었다. 이름은 왕건(王建). 자는 약천(若天). 송악(松嶽:개성) 출신이다. 아버지는 금성태수(金城太守) 융(隆)이고, 어머니는 한씨(韓氏)이다.
후삼국시대에 궁예(弓裔)가 크게 세력을 떨치자 왕륭은 송악군 사찬(沙粲)으로서 자신의 군(郡)을 들어 궁예에게 귀부(歸附)하여 금성태수로 임명되었다. 아버지를 따라 궁예의 휘하에 들어간 왕건은 발어참성(勃禦塹城) 성주(城主)가 되었으며, 898년에는 정기대감(精騎大監)이 되었다. 그뒤 왕건은 여러 전선에서 공을 세워 승진을 거듭하면서 차츰 자신의 세력을 쌓아나갔다. 900년에 광주(廣州)·충주(忠州)·청주(靑州:지금의 淸州) 및 당성(唐城:지금의 화성)·괴양(槐壤:지금의 괴산) 등 여러 군현을 경략하여 그 공으로 아찬(阿粲)의 위계를 받았다. 903년 수군을 거느리고 전라도지방으로 진출하여 금성(錦城:지금의 나주) 등 10여 군현을 빼앗아 궁예의 영토를 확장하여 알찬(閼粲)으로 승진했다. 906년 상주(尙州)의 사화진(沙火鎭)에서 견훤(甄萱)의 군대를 격파했으며, 909년 해군대장군(海軍大將軍)이 되어 나주와 광주(光州) 일대에서 활약했다. 913년 변방에서의 공으로 파진찬(波珍粲)에 오르고 시중(侍中)이 되었다. 궁예가 세력이 강대해짐에 따라 난폭한 행동을 자행하여 민심을 잃자 918년 6월 홍유(洪儒)·배현경(裵玄慶)·신숭겸(申崇謙)·복지겸(卜智謙) 등과 함께 정변을 일으켜 궁예를 몰아내고 철원의 포정전(布政殿)에서 즉위하여 국호를 고려(高麗), 연호를 천수(天授)라고 했다. 이듬해에는 개성으로 도읍을 옮기고 관제를 개혁하여 국가의 토대를 닦았다. 태조는 일부 무인 중간세력, 일반 병졸, 민중의 지지와 호응을 받아 왕위에 올랐으나 궁예의 옛 영역 내의 호족세력이나 집권층 내부의 정치세력 중에는 태조에게 불만을 품거나 반발한 세력도 적지 않았다. 따라서 고려 건국 초기 태조의 당면 과제는 정치적 안정과 민심수습을 이루는 것이었다.
태조는 온건한 방법으로 정치적 안정을 꾀했다. 새 왕조의 정치체제는 기존 체제의 골격을 그대로 유지하는 선에서 마련했고, 다만 행정관서에 대한 인사이동과 궁예 때의 탐관오리에 대한 숙청만 단행했다. 이와 함께 지방 각처에서 독자적인 무력과 경제기반을 가지고 독립적 상태를 유지하던 호족들을 극진히 회유하여 포섭했다. 즉위 직후 호족들에게 사절을 보내어 '중폐비사'(重幣卑辭)라는 저자세 외교로써 화친의 뜻을 보였고, 귀부해오는 호족들에게는 특별한 대우를 해주었다. 나아가 각 지방의 유력한 호족 및 호족출신 관료의 딸들과 혼인하고, 유력자에게 왕씨(王氏) 성을 하사했으며 그밖에 기인제도(其人制度)·사심관제도(事審官制度) 등 여러 정책을 시행했다. 한편 고려 왕실의 독자적인 세력기반을 위해 서경(西京:지금의 평양)의 경영에도 힘을 기울였고, 민심수습을 위해 궁예 때의 가혹한 수취를 비판하면서 '취민유도'(取民有度)를 표방했다. 또한 평민으로 몸을 팔아 남의 종이 된 자 1,000여 명을 찾아내 내고(內庫)의 포백(布帛)으로 몸값을 갚아주었으며, 백성에게 3년 동안의 조세와 부역을 면제하고 유민(流民)은 전리(田里)로 돌아가게 했다.
태조는 신라와는 우호관계를 유지하면서 후백제와는 무력으로 맞섰다. 처음에는 군사적인 열세로 후백제에게 계속 패했으나 930년 고창(古昌:지금의 안동)싸움에서 큰 승리를 거두면서 주도권을 장악했다. 그뒤 935년에 투항해온 경순왕을 맞아 평화적으로 신라를 병합했으며, 936년에는 후백제를 멸망시켜 마침내 후삼국을 통일했다. 통일 직후 태조는 직접 〈정계 政誡〉 1권과 〈계백료서 誡百寮書〉 8편을 저술하여 반포했다. 이것들은 새 통일왕조의 정치도의와 신하들이 준수해야 될 절의를 훈계하는 내용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고려가 고구려의 계승자임을 자처하며 북방을 개척하여 만년에는 서북으로 청천강 하류 안주(安州) 지방에서 동북으로 영흥(永興)지방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또한 거란에 의해 멸망한 발해의 유민들이 망명해오자 이들을 따뜻하게 맞이하여 민족융합의 전기를 마련했으며 거란과는 국교를 단절했다.
943년 죽기 얼마 전에 대광(大匡) 박술희(朴述熙)에게 훈요10조(訓要十條)를 남기면서 후세 왕들이 대대로 귀감으로 삼도록 했다. 훈요10조를 통해서 볼 때, 태조의 정치이념을 뒷받침하고 있는 사상은 불교와 지리도참설, 유학이었다. 불교와 지리도참설은 새 왕조의 정신적 기반이 되었으며, 유학은 정치의 실제적인 실천윤리로서 존중되었다. 특히 태조는 불교를 적극 장려하고 육성시켜 건국 초기부터 많은 사찰을 지었고, 국내외의 고승을 극진히 예우했다. 943년 재위 26년 만에 죽었다. 시호는 신성(神聖)이며 능은 현릉(顯陵)이다.
비보사찰
비보사탑사상(裨補寺塔思想)에 의해 건립된 사찰.
비보사탑사상은 신라말·고려초의 승려 도선(道詵)에 의해 체계화되었다. 이 비보사탑사상은 밀교(密敎)의 택지법(擇地法)과 음양오행설에 근거한 풍수지리사상이 결합된 것이다. 도선의 비보사상이 최초로 적용된 사례는 고려 태조 왕건의 탄생을 도운 택지(宅地) 선정과 제택건립(第宅建立)이었다. 도선은 왕건의 부친이 송악(松嶽)에서 집을 지을 때 곡령(鵠嶺)에 올라가 산수의 맥을 살핀 다음 그 맥에 따라 집을 지으면 성자(聖子)가 태어날 것이라고 예언했다고 한다. 그에 따라 왕건이 태어났고, 도선은 왕건이 17세 되던 해에 다시 나타나 왕건의 창업을 예언하고 출사치진(出師置陣)의 법과 천시지리(天時地理)의 이치를 일러주었다고 한다. 이에 왕건은 도선을 국사(國師)로 삼고 통일을 이룩했다. 한편 도선은 밀교의 택지법이나 풍수도참설에 의거하여 전국 산천의 역처(逆處)나 배처(背處)에 사찰을 건립하여 지기(地氣)를 보완해야 한다고 했다. 왕건은 훈요십조(訓要十條)에서 "여러 사원은 모두 도선이 산수(山水)의 순역(順逆)을 추점(推占)해서 창건한 것이다. 도선이 이르기를 '내가 점쳐서 정한 것 이외에 마구 새로 지으면 지덕(地德)을 손모(損耗)해서 국조(國祚)가 영속하지 않게 될 것'이라고 했다"라고 언급하기까지 했다. 〈도선밀기 道詵密記〉에서 지정된 비보소(裨補所)는 3,800개소에 달한다. 비보사탑설을 태조가 신봉하자 이후 고려의 전 시기에 걸쳐 이 설은 크게 성행했고, 이에 따라 건립된 비보사찰은 국가에서 토지를 분급(分給)받을 정도로 신봉되었다. 그러나 비보사탑설의 지나친 유행과 국가의 혜택은 모든 사원의 비보사찰화를 빚으며 국가적인 폐해를 낳기에 이르렀고, 마침내 고려말 신흥사대부들의 세찬 비난의 대상이 되면서 고려의 패망을 낳는 요인이 되었다.
명봉사
명봉사(鳴鳳寺)는 경상북도 영천시의 소백산 자락에 위치한 대한불교조계종 소속의 사찰이다.
명봉사는 신라말875년(헌강왕1년) 두운(杜雲)이 창건하였으며,그뒤 화재로 소실된 절을
신익(信益)행선(幸善)등의 승려들이 중수하였고 고려태조 때 자적선사(慈寂禪師)지은 내원암(來院庵)이있다
내원암도 6.25전쟁때 소실되었으나 1988년 명봉사주지 성면(性面)이 재건하였다.
명봉사(鳴鳳寺)는 예천군 상리면 명봉리에 위치하며, 신라 헌강왕 원년(875) 두운대사가 창건하였다.
문화재로는 고려 태조 24년 세운 경청선원자적선사능운탑비(鏡淸禪 院慈寂禪師凌雲塔碑-유형문화재 제3호)는 이두문으로 된 비석으로 국문학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며 최언위(崔彦僞)가 지은 것으로 판독 되었으며, 문종대왕태실비(유형문화재 제197호)도 있다. 대웅전 안에는 6.25 때에 유일하게 소실되지 않은 대세지보살상이 봉안되어 있다.
명봉사경청선원자적선사릉운탑비(鳴鳳僿境淸禪院慈寂禪師凌雲塔碑)는 명봉사에 서 있는 비로, 자적선사의 인격과 공적을 기리고 있다. 선사는 통일신라 헌강왕 8년(882)에 태어나 효공왕 3년(899)에 승려가 지켜야 할 계율을 받았으며, 고려 태조 22년(939)에 입적하였다. 태조는 시호를 ‘자적선사’라 하고, 탑이름은 ‘릉운’이라 내리어 탑과 비를 세우도록 하였다.
비는 거북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우고, 용이 새겨진 머릿돌을 얹은 구조로 비교적 규모가 크다. 규모에 비해 작아보이는 거북받침은 아쉽게도 머리부분이 떨어져 나갔는데, 용의 머리를 하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비문은 『조선금석총람』에 전체가 실려 있으며, 1976년에야 비로소 판독이 되었다. 당시 중앙관서였던 도평성(都評省)에서 승려들에게 내린 글로서, 행적적인 양식을 갖춘 문서의 성격을 띠고 있다.
고려 태조 24년(941)에 세운 비로, 통일신라에서 고려로 접어들던 과도기적인 이두문자를 사용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통일신라시대의 이두문자에서는 볼 수 없었던 다양성이 갖추어진 본격적인 문서양식으로서, 당시의 사회 및 문자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울창한 숲과 깊은 산 속에 자리잡아 고요한 느낌을 준다. 명봉사는 예전에는 큰 건물에 승려도 다수 기거하는 대형 사찰이었다고 하나, 한국 전쟁 때 소실된 것을 다시 지은 지금은 작고 아담한 규모이다. 조계종 제8교구 본사 직지사의 말사로 편성되어 있다.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유물이 두 점 있다. 예천군 지정 시도유형문화재 제3호인 명봉사경청선원자적선사릉운탑비(鳴鳳僿境淸禪院慈寂禪師凌雲塔碑)와 제187호인 명봉사문종대왕태실비(鳴鳳寺文宗大王胎室碑)이다. 자적은 나말여초의 승려로 고려 태조 22년인 939년에 사망했다. 이에 태조가 '자적선사'라는 시호를 내리면서 탑과 비를 세우도록 한 것이 자적선사릉운탑비이다. 비문은 과도기적 이두로 쓰여진 행정 문서 양식이라 당시의 사회상을 연구하는데 도움을 준다.
문종대왕태실비는 조선 문종의 태를 보관하기 위한 방인 태실을 기념하는 비이다. 본래 절 뒤편 산봉우리에 있었으나 일제 강점기에 태실 발굴 후 승려들이 태실비를 경내로 옮겨왔다. 이때 명봉사 주지가 사도세자의 태실비 비면을 깎고 새로 글씨를 새겨서 명봉사 사적비로 삼은 것이 문제가 되기도 했다. 문종대왕태실비는 용머리의 거북받침돌이 여의주를 물고 있으며, 그 위에 머릿돌을 올려놓았다. 조선 영조 11년의 작품이다.
소백산 용문사와는 산길을 통해 연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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