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하기란 지구의 기온이 오랜 시간 동안 하강하여 북반구와 남반구의 얼음판이 확장한 시기이다. 빙하기는 세계적으로 기후가 한랭하게 되어 고위도 지방이나 높은 산악지대에 빙하가 발달하였던 시기로 빙하가 발달함에 따라 설선雪線이 내려와 거주할 수 없는 곳이 속출하고 자연에 대한 자위 능력이 미약하고 미개한 생활수단에 의존하던 당시 인간들은 종래의 생활터전을 버리고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시기이다.
칼바람 에고 가는 광야를 가로질러
살점, 도리는 아픔 호곡하는 바람 소리
푸른빛 수척한 웃음
빛을 잃은 반쪽 낮달.
끝없이 펼쳐진 설원雪原
이것은 삶의 현장
강자만 살아남는 역사는 끝이 없고
한 무리 삼포 세대가 빙판길에 넘어진다.
일용직 일을 찾아 남자가 나간 적막
아내는 병든 몸에 하루해를 건너는데
엄동의 강에 누운 듯 얼음장의 반 지하방.
고용 절벽
삶의 빙벽氷壁
앞을 막은 낭떠러지
이마에 손차양해 앞날을 내다보면
매몰찬 아픈 세월만 빙하처럼 흘러간다.
만년설 툰드라에 꽃은 언제 피는 건가?
원초적 본능으로 몸부림을 쳐보는데
한 줌의 희망마저도 얼어붙은 빙하기.
-빙하기- 전문
이 작품 <빙하기>는 지금 우리가 사는 사회를 빙하기에 비유하고 있으며, 아득한 옛날 빙하시대 인간들이 생활의 터전을 버리고 중위도 이하로 탈출하던 시대를 연상하게끔 한다.
우리나라의 자살률과 노인빈곤율이 세계 1위다. 65세 이상 노인의 절반에 가까운 수가 빈곤상태라고 한다. 따라서 노인들은 굶어 죽지 않기 위해 쓰레기를 주우면서 길거리를 누빈다. 이들이 온종일 종이를 주워서 벌어들이는 돈은 몇천 원에 불과하다. 실제로 종이를 줍는 일조차 하지 못하는 노인들은 자살할 수 밖에 없다.
또 회자하는 말은 삼포세대다. 삼포세대三抛世代란 연애, 결혼, 출산 세 가지를 포기한 세대를 말한다. 젊은이들이 치솟는 물가, 등록금, 취업난, 집값 등 경제적, 사회적 압박 때문에 스스로 돌볼 여유가 없으므로 연애와 결혼을 포기하고, 출산을 포기하고 있다. 이러한 사람들을 삼포세대라 일컫는다. 요즘은 오포세대, 칠포세대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암울한 시대다. 칠포세대란 연애, 결혼, 출산, 집 마련, 인간관계, 꿈, 희망 등 총 일곱 가지를 포기한 2030세대를 일컫는 말이다.
헬조선이라는 말도 유행하고 있다. 한국의 옛 명칭인 조선에 지옥이란 뜻의 접두어 헬(Hell)을 붙인 합성어로 취업난ㆍ전세난 등 지옥 같은 한국 사회를 가리켜 청년들이 냉소하며 부르면서 생겨난 신조어다.
비정규직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이는 삼포세대의 원인이기도 하다. 비정규직이란 일정한 기간의 노무 급부를 목적으로 사용자와 근로자가 한시적으로 근로관계를 맺는 조직화하지 않은 모든 고용형태로 기간제 근로, 파트타임, 파견근로 등을 말한다.
비정규직이 전혀 없을 수는 없다. 그러나 그 비율이 문제다. 한국노동연구원이 최근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8월 기준 신규 채용된 청년층 비정규직 비율은 전체 임금근로자 중 64%로 2007년 54.1%에 비해 9.9%포인트 급증했다고 한다.
이것은 결국 소득 격차로 나타난다. 소득 상위 10%가 전체소득의 45%를 가져간다고 한다. 이와 같은 불평등구조는 임금소득의 불평등에서 기인하고 있으며 고소득층의 임금 증가분이 저소득 및 중간층의 소득증가분을 계속 앞서기 때문에 그 격차는 점점 더 벌어지고 있다.
소득 상 계층의 가진 자들은 소득 불평등 문제를 개인의 노력 차이라고 주장하나 이는 사회 구조적 문제다. 이러한 비정규직 문제와 소득 격차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는 흙수저, 금수저 같은 수저 계급론이 나오게 되며 하위소득계층은 빚으로 생계를 꾸려가고 있으며 가계부채가 1,100조를 넘는 상황에 이르렀다. 무한정 빚으로 살 수는 없다. 언젠가 이 구조는 무너진다. 그러면 이 사회도 같이 무너진다. 이것을 예방하기 위하여 이 시대의 시인은 탄광의 카나리아(Canary in Coal Mine) 역할을 해야 한다.
이 작품 <빙하기>는 시집의 표제작이다. 첫째 수에서 시적 화자는 ‘광야’에 서 있다. 여기서 ‘광야’는 축자적으로 해석한 ‘텅 비고 아득한 넓은 들’만을 말하지 않는다. 시적 화자가 사는 세상을 내포하고 함축하고 있다. ‘칼바람’은 외부에서 가해져 오는 역경이고 시련이다. ‘에다’는 ‘칼 따위로 도려내듯 베다’라는 뜻이다. 한번 상상해보라. 손톱 밑에 가시 하나만 박혀도 아프다. ‘살점’을 도려내듯 베어내면 그 아픔은 어떻겠는가? 시적 화자는 그만큼 아픈 삶을 살고 있다. 소리를 내어 슬피 우는 시적 화자는 ‘바람 소리’와 공감하고 있다. ‘푸른빛 수척한 웃음’은 어떤 웃음일까? 핏기가 하나도 없는 창백하고 몹시 야위고 마른 사람이 웃는 웃음 그것은 시적 화자가 억지로 흘리는 웃음이다. 종장의 마지막 구절 ‘빛을 잃은 반쪽 낮달’에서 ‘낮달’의 이미지는 태양의 밝기에 눌려 보이지 않는 초라하고 나약해 보이는 존재, 존재하면서도 인식되지 않는 시적 화자의 존재를 나타내고 있다.
둘째 수에서는 화자가 사는 세상은 끝없이 펼쳐진 눈밭으로 혹독한 추위만 있으며 온기는 없다. 그리고 약육강식의 법칙만이 존재한다. 셋째 수는 그 세상의 삶의 한 현상을 나타내고 있다.
넷째 수의 절벽은 자전적으로는 바위를 깎아 세운 것처럼 아주 높이 솟아 있는 험한 낭떠러지를 이르는 말이다. 여기서 ‘고용’과 결합하므로 청년들의 취업이 단층운동에서 생긴 단층절벽처럼 뚝 끊어진 것을 나타내고 있다. 이 절벽은 얼음이나 눈에 덮인 낭떠러지인 빙벽과 다시 결합하고 여기서는 화자의 상실된 미래만이 있을 뿐이다.
마지막 다섯째 수 초장의 ‘툰드라에 꽃’은 구원이고 희망이다. 하지만 화자는 확신하지 못한다. 그래서 살아남으려 몸부림을 치지만 현실은 그 희망마저 얼어붙어 버린다. 그것은 절망이다. 이것이 시적 화자가 사는 세상이다.
<빙하기(2)>에서는 절망의 시대를 사는 시적 화자는 현실에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으므로 따뜻한 체온을 추억하고 그리워한다. 그것은 사랑이다. 요즘 젊은이들의 사랑은 쾌락적이고, 순간적이고 찰라적이다. 우리의 젊은 시절에는 사랑을 고백하기 위해 몇 년을 기다려야 했고 사랑을 고백할 장소도 정취 있고 맘속에 길이 남을 만한 장소를 택했다. 그러나 요즘은 며칠이면 충분한 것 같고 ‘프러포즈’라는 것을 일방적으로 하여 받아들여지면 사랑이 이루어지는 것 같다. 순애보적 사랑은 사라진 지 오래고 언제 헤어질지 모른 채 100일 기념, 요즘은 그것도 길다고 생각하는지 50일 기념도 생긴 모양이다.
황야에 세찬 바람 진눈깨비 흩날린다.
짐승처럼 포효하며 그 이름을 불러보면
수만 년 지나버린 듯 화석 같은 그리움.
심장의 고동 소리는 이미 멈춰버리고
추억마저 결빙하는 차가운 빙점에서
세월도 얼어붙어 버린 강물을 바라본다.
아련한 옛사랑은 동토에 묻혀있어
어느 날 매머드로 부활하는 꿈꾸는데
그 상처 아물지 않고 선지피가 선명하다.
살갗을 맞비비면 전해지던 그 체온이
북두성 별빛처럼 기억 속에 영롱한데
불면의 밤을 뒤채며 혼자 우는 빙하기.
-빙하기(2) 전문-
이 작품에서 시적 화자는 현실이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과거가 더욱 그립다. 그 간극이 크면 클수록 더 절절하다. 그래서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부활할 수 없는 사랑을 아파하며 회귀할 수 없는 현실에서 불면의 밤을 보내며 빙하기를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