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충로 210번지
송 성 옥
유월의 태양이 강렬하게 쏟아지는 국립서울현충원은 호국 영령들이 푸르른 나무들과 함께 우뚝 서 있습니다. 그 아래로 붉은 장미꽃이 무더기로 흐드러지게 피었네요.
아버님, 어머님!
모처럼 삼 대가 함께 현충원을 찾았습니다. 늘 바쁘게 살다보니 마음 같지 않게 자주 찾아뵙지를 못했는데 오늘은 온 가족이 함께 왔습니다. 아범은 정성껏 준비한 하얀 국화 두 다발 가슴에 안고 아들 둘과 함께 앞서 걸어가네요. 현충원에는 참배객이 많이 와 있군요.
다리가 아픈지 일곱 살 손자 녀석이 제게 업어 달라고 조릅니다. 안쓰러워 얼른 등에 업었지요. 손자를 등에 업고 몇 걸음을 걷는데 문득 아버지께서 첫 휴가 나오셨을 때가 생각났어요. 저를 등에 업고 철둑 너머 동네를 쉬엄쉬엄 돌기도 하셨지요. 코 흘리게 동네 아이들은 따라 오며 저를 부러워했답니다. 어린 제 눈에도 군복을 입은 아버지 모습이 너무 멋있고 자랑스러웠지요. 친구들한테 제 어깨가 으쓱했으니까요. 집으로 돌아 올 때는 목마를 태워 높고 파란하늘을 보여 주셨던 그때가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이나요.
집 앞에 다다르니 어머니는 치마폭을 펼쳐 참새를 잡아주셨습니다. 작은 참새는 털이 잿빛과 갈색이 섞인듯했는데 너무나 보들보들하고 몸이 따뜻했어요. 참새를 두 손으로 가만히 잡고 동네 아이들에게 자랑하러 나갔습니다. 아이들에게 한 번씩 만져 보게 해 주고 있었는데 골목에서 키 큰 오빠가 나오더니 다짜고짜 참새를 뺏어 가지고 막 달려갔어요. 소리 내어 울면서 계속 돌려달라고 했더니 뒤를 돌아보며 참새를 그만 홱 내던지고 가버렸어요. 조심스레 손바닥에 참새를 올려놓았지요. 하지만 이미 늦었어요. 참새가 축 늘어진 채 점점 온기가 사라졌어요. 작은 놈이 얼마나 놀랐는지 눈도 다 감지 못하고 죽었어요. 울면서 집으로 돌아왔더니 아버지께서 참새를 울타리 밑에 묻어 주셨지요? “또, 잡아주마” 하시며 울던 저를 업어 달래 주시던 그 순간을 한 장의 흑백사진처럼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리운 아버님!
오십 여 년 전 휴전 협정으로 종전이 가까워질 때쯤. 강원도 인제의 깊고 깊은 이름 모를 골짜기에서 빼앗기고 빼앗는 전투가 치열하게 계속되던 어느 날 아버님이 전사하셨다는 이야기를 어머님께 항상 듣고 자랐습니다.
적에게 밀리면 죽음으로 임무를 완수하라는 명령에 군인 정신으로 마지막 순간까지 이 나라 이 강산을 지키셨을 아버지! 산야를 온통 핏빛으로 물들였을 그날, 어머니와 제 이름을 애타게 부르셨지요?
전사통지서를 받던 날, 저를 끌어안은 어머니는 “전사가 무슨 말이다요?”하시며 한줌의 재가 되어 오신 아버지를 받아드릴 수가 없어 몇 번이나 까무러쳤지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졌을 겁니다.
“저 어린 것은 어쩌라고.......” 젊은 어머니는 철퍼덕 주저앉아 땅을 치며 통곡하다 의식을 놓고 말았죠. 철없는 저도 덩달아 어머니 곁에 앉아 같이 울고 있었어요. 그때 비바람을 몰고 온 시커먼 하늘에서 세차게 비가 쏟아졌습니다.
아버지가 떠나신 뒤 형편은 더 어려워져서 목구멍에 풀칠조차도 힘겨운 생활이 계속되었습니다. 어머니는 고픈 배를 물로 채우시기도 하고 저를 등에 업고 밭에 가서 일도 해 주고 시래기를 얻어다 죽을 끓여 연명하다시피 했습니다.
어머니는 희붐히 동이 터 오르면 눈비비고 시장바닥에 나가 저녁 늦게야 들어오시곤 하셨죠. 점포도 아닌 노점에서 눈이 오면 눈을 맞으며 비가 오면 비를 맞으며 온 몸으로 막아서며 살았습니다. 아버지가 나라를 위해 전투하시듯 어머니의 삶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학교에 다닐 때 저는 아버지가 안 계신다는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수업시간에 발표를 할 때도 큰소리로 대답하며 기죽지 않으려 했습니다. 학기 초에 학부형들이 오시는 날에 친구 엄마들은 예쁘게 화장하고 오셨어요. 그러나 어머니는 장사하던 허름한 차림으로 빨간 입술은커녕 얼굴마저 까마게 그을린 모습으로 오시는 것이 창피했어요. 장사하다 말고 와야 하니 어쩔 수 없었겠지만 그때는 어린마음에 정말 어머니가 싫었습니다. 버스를 함께 타고 갈 때도 멀찌감치 떨어져 다른 곳을 바라보며 눈도 맞추려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집은 왜 가난하게만 살아야 하나. 단지 아버지가 계시지 않은 것뿐인데......’그렇게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냈습니다. 그때는 아버지의 존재가 그리워하는 대상이 아니라 원망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대학을 졸업한 어느 해 현충일이었습니다. 어머니와 함께 검은 리본을 가슴에 달고 구청에서 내어 주는 버스를 타고 현충원에 도착했습니다. 추모식이 끝나면 모두들 묘비가 있는 곳으로 가기도 하고 미리 가 있기도 했습니다. 전쟁고아가 다시 된 것처럼 막막하게 우리는 갈 곳이 없었지요. 아니 꽃 한 다발 가져다 놓을 곳도 없었습니다.
어머니를 모시고 현충원 안에 있는 사무실부터 들러 찾기 시작 했습니다. 생명과도 바꿀 수 없는 전사 통지서와 유족 증명서를 가슴에 품고 떨리는 손끝으로 내미셨지요. 한참 후에야 그런 분이 너무 많다는 퉁명스런 소리만 들었지요. “우리만 없는 것이 아니란다.”하시며 어머니는 한숨을 길게 토해내셨습니다.
어디에도 아버님은 계시지 않았습니다. 나라를 위해 온 몸을 바치셨건만 이름 석 자 새겨진 비석하나 없었습니다. 백방으로 뛰어 다녀봤지만 다 허사였습니다. 그만 맥이 풀려 몇 년간은 찾지 않았습니다.
제 방에 걸려있던 사진 속에 아버지는 늘 계셨습니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나 좋은 일이 있을 때도 어머니는 사진을 보며 아버님께 먼저 상의 드리곤 하셨습니다. 저도 다른 아이들처럼 학교에 갈 때는 갔다 오겠다 인사드리고, 돌아와서도 잘 다녀 왔다고 말씀드렸지요. 아버님은 제 옆에 항상 함께하셨습니다. 힘들 때는 속마음을 털어 놓기도 하며 자랐습니다. 그렇게 저는 사진 속 아버지를 의지하며 살았습니다. 이제는 두 아들도 손자도 따라 합니다. 아버지, 다 알고 계시죠?
한강 철교를 지날 때는 부서진 철교를 복구하시던 아버지 모습이 어른거리곤 했습니다. 아버지를 닮아서인지 큰 아이는 조종사가 되었고 작은 아이는 건축가로 자신의 분야에서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어느 날 이었습니다. “우리 할아버지 어디에 있어?” 유치원에서 현충원에 견학을 다녀 온 아들이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할아버지는 무명용사라서 현충탑에서 기도하면 돼." "왜 무명용사야?” 왜 그러냐며 어린 아들의 질문이 집요했습니다. 그때 적잖이 당황했습니다. 아버님의 흔적을 찾아 아들에게 알려주어야 한다는 책임감이 가슴 짙게 요동 쳤습니다. 온통 그 생각 때문에 잠을 이룰 수 가 없었어요.
전사 통지서를 들고 이곳 저곳을 다녀보았지만 길이 보이질 않았어요. 어디서부터 풀어 나가야 할지 답답했습니다. 그 날도 밤이슬은 담벼락을 타는 호박잎 위를 서성이는데 컴컴한 어둠속을 밝히고 있는 눈썹 같은 초승달이 아스라이 다가왔습니다.
아무연고도 없이 어린 것 하나 보듬고 신산하게 살아오신 어머니의 애달픈 삶과 우리 집 상황을 긴 편지로 썼지요. 다 쓰고 나니 장지문살이 훤해지더군요. ‘마지막이다’ 생각하고 다시 육군본부로 보냈습니다. 이십 여일이 지난 후 포기하려할 때 쯤 소식이 왔습니다. 황병장님은 편지 사연을 가슴 깊이 공감해서 읽고, 또 읽고, 집에 가지고 가서 홀 어머님과 함께 여러 번 읽었다며 도와주겠다는 희망적인 소식이었습니다. 너무 감사해서 어떻게 말로 다 표현이 안 되었습니다.
황병장님과 약속한 날 어머니를 모시고 유족 증명서와 전사통지서를 들고 찾아 갔습니다. 서류를 확인해서 연락을 주겠다는 소식만 받았는데도 너무 기뻤지요. 한 달 쯤 후에 연락이 왔습니다. 현충원에는 자리가 없으니 대전국립묘지에 모실 수 있다는 것과 서울 현충원 현충탑 안에 이름을 새겨 주실 수 있다는 것 중 택하라고 했습니다. 우리가족들은 의논 끝에 사십 여년 만에 현충원에 일등중사이신 아버님 함자를 새길 수 있었습니다.
현충탑 앞에서 향을 피우고, 묵념을 한 뒤, 계단을 내려가니 군데군데 불빛이 내부공간을 밝히고 있었어요. 뭔지 모르게 어떤 불가항력적인 강한 기백이 감돌았습니다. 고층 아파트처럼 층별로 수많은 호국 영령들의 함자가 작은 글씨로 빼곡하게 사열하듯 모셔져 있었습니다. 제단 앞에는 시간을 멈춘 사진들과 조화와 생화가 놓여있었습니다. 제가 손가락 끝으로 "일등중사 ㅇㅇㅇ"아버님 함자를 알려드렸어요. 어머니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말을 잊지 못하셨어요. 벅찬 가슴을 누르시며 부여잡은 제 손마저 전율이 느껴졌습니다. 눈시울이 붉어지며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난 골 깊은 주름 사이로 메말랐던 눈물이 흘렀습니다.
아버님!
몇 십 년의 세월을 돌아 ‘현충로 210번지’ 당신의 유택으로 오시기까지 참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불효막심한 이 자식을 용서 하십시오. 이제 아무 걱정 마시고 편히 쉬십시오. 당신은 제 가슴속에 씩씩한 군인의 모습으로 멋지고 자랑스럽게 살아계십니다. 이제는 어머니를 초대 하셔서 부부위패를 모실 수 있는 이곳으로 다시 이사를 했습니다.
현충탑 안에 계실 때보다 밖으로 나오시니 공기도 좋고 가슴도 탁 트이시죠. 너무 오랜만에 어머니를 만나시니 어떠신가요. 스물세 살 복사꽃 같은 어머니 모습만 생각하시다가 혹여 못 알아보신 건 아닌지요. 함께 계시니 이제 외롭지 않으실 겁니다. 그동안 못 다한 회포 다 푸십시오. 어머니 생전에 어디 꿈이나 꾸신 일이겠습니까.
국화꽃을 손자 녀석이 들고, 세 살인 손녀딸이 “나도” 하며 제비꽃 같은 작은 손으로 안고 가서 대리석 단에 올리네요. 펜트하우스처럼 사방이 확 트이고 전망 좋은 아버님 유택을 손주들 앞세워 자주 찾아오겠습니다. 한강이 유유히 흐르고 밤이 되면 강 건너에 은하수 같은 불빛이 아름답게 펼쳐지는 장면을 두 분은 나란히 앉아 즐기시겠지요. 아침이면 옆에 있는 정자에서 다정한 담소도 나누시고 두 분 손 꼭 잡으시고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저 붉은 노을 진 언덕을 거닐어 보십시오. 저희가 울타리가 되어 이렇게 서 있으니 아무 걱정 마십시오. 저희 온 가족들은 아버님, 어머님이 평안 하시기를 두 손 모아 기도드립니다.
현충원에 저 푸르른 나무들을 보십시오. 청청한 젊음을 조국에 바치고도 저리 푸르지 않습니까. 현충로 210번지, 새로운 유택에서 시작하는 두 분의 사랑도 강물이 유유히 흐르듯 영원하시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