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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르단 강 가의 작은 마을, 키부츠 데가니아
제 1 장
자라서 러시아를 떠날 때까지
나는 우크라이나의 드니 에스테르 강 가에 있는 조그마한 촌락에서 태어났다. 흰 칠을 입힌 마을의 시골집들은 벚나무나 사과나무로 둘러싸여 있었고, 키 높은 풀로 덮혀 있는 초원은 점점이 흩어져 있는 농장들을 지나 지평선 끝자락까지 드넓게 펼쳐져 있었다.
나의 아버지 쩨델 바라츠는 여관을 경영하는, 다정다감하면서도 아름답고도 발랄한 목소리를 지닌, 경건한 유대아 교의 교인이었다. 내가 세 살이 되던 해에 나는 유대아 인의 학교인 「 쩨델 」에 들어갔고, 이곳에서 만 5년 여 동안 수많은 「 게모라 」의 글과 찬미가를 익혔다. 나는 결코 책벌레가 아니었다. 허나 인근에서는 꽤나 「 똘똘한 아이 」로 알려져 있었다.
가족이 불어남에 따라 여관업 만으로는 가족의 살림을 꾸려나가기가 힘겨워졌다. 게다가 시간이 가면 갈수록 우리들이 몸담아 살고 있는 우크라이나 일대에서 시행되는 법 모두가 유대아 사람들에게는 불리해져 가기만 했다.
20세기 초엽, 내가 여덟 살이 되던 해에 우리 가족은 베싸라비아의 수도인 키셰네프로 이사했다. 당시 키셰네프는 포도산업의 중심지이기도 했거니와 경공업도 왕성하게 발전해 가고 있었다. 번창 일로에 있던 포도주 시장에는 유대아 사람들도 끼어들어 한몫 단단히 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이곳에다 식료품 가게를 열었다. 가게 안은 하루 온종일 박하나 구두가죽 때로는 양초냄새로 가득했다. 얼마 안가 아버지는 가게를 걷어치우고, 본래 하시던 여관업으로 되돌아 갔다. 한번도 아버지는 떼돈을 만져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아버지를 존경했다. 키셰네프를 드나드는 상인이나 유대아 교의 랍비들은 늘 「 쩨델 바라츠의 집 」에서 묵어가곤 했다.
쩨델 바라츠의 집
우리들은 유대아 사람들이 떼지어 모여사는 거리에서 살았다. 어디로 보나 이곳은 이웃하고 있는 러시아 사람들의 삶의 모습과는 딴판인, 유대아 사람들만의 고유한 전통사회였다.
이곳에 살고 있는 유대아 남자들은 몸 아래로 길게 늘어진 상의를 입거나, 비비꼬인 수염을 길렀으며, 결혼한 여자들은 뒤로 제껴진 머릿결 위에 검고 두터운 가발을 쓰고 지냈다. 음식은 유대아 인의 전통적 방식에 따라 조리해 먹었는데, 모두가 한결같이 정갈하고 담백했다. 우리들은 주로 이디쉬 말을 썼다. 기도할 때마다 쓰려고 헤브라이 말이 보존되어 왔기 때문에, 러시아 말을 쓸 경우는 흔치 않았다. 우리들에게는 유대아 인 특유의 축제와 전통적인 노래 그리고 멋진 춤이 있었다. 학교로는 이디쉬 말로 가르치는 「 헤델 」과 헤브라이 신학교인 「 예시바 」가 있었다.
아들이 자라 랍비나 율법사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자기의 아들을 「 예시바 」로 보냈다. 하지만 나는 일 주일에 한번만 「 예시바 」로 갔고, 나머지는 「 헤델 」로 가서, 종교와는 무관한 과목들도 배웠다. 이것은 나의 아버지가 내가 신학을 배우는 것을 못마땅해 해서가 아니라, 종교에 대한 아버지의 신앙이 그만큼 편협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우리들의 세계에서는 랍비야말로 가장 명예스럽고도 존경받는 직업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가난한 신학생을 돕는다는 건 곧 신을 경배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심지어는 부인이 자신의 남편이 하는 신학공부에 방해되는 일이라도 벌어질 량이면, 이유야 어떻든 이를 두고 이혼사유로 삼더라도 부끄러운 일이 못되었다. 명리를 탐하는 장사치조차 남의 아들을 양자로 삼을 때에는 그가 지닌 재산이나 건강보다도 신학상의 신분을 더 쳐줬다.
일찌기 나의 어머니가 첫번째 남자와 서둘러 결혼한 것도 이러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의 관습에 따라 할아버지는 어머니가 어린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일찍부터 신학을 공부하는 남자와 혼약을 맺어 놓았다가, 어머니가 열 여덟 살이 되던 해에 결혼을 시켜버렸다.
하지만 원래부터 심약하던 신랑은 결혼한지 불과 두 세 달이 못되어 죽어버렸다. 이 무렵 나의 아버지는 일찍부터 상처한 홀아비로서 이미 아들 하나를 거느리고 있었다. 어머니의 첫번째 결혼식 날, 나의 아버지는 축하객으로 결혼식에 참석하여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었더랬는데, 결혼식이 끝난지 일 년도 안되어 어머니는 지금의 아버지와 재혼하였다.
러시아에 사는 유대아 사람들의 상태
나의 이복형 이자야는 일찍부터 농민이 되기를 바랬다. 다른 어느 지방에서보다도 베싸라비아에서는 유대아 사람들에 대한 토지소유 금지법령이 느슨하여, 형도 교외에다 토지를 마련할 수가 있었다. 대다수의 유대아 사람들은 자기의 생업으로서 상업에 종사하거나, 여관을 경영하거나, 아니면 직인이나 공장의 노동자 생활을 했지만, 키셰네프 사람들 중에는 나의 형 이자야처럼 유대아 사람이면서도 자기네의 토지를 경작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바로 이러한 점들이 우리들이 살고 있는 키셰네프 사회를 다른 어느 지역의 유대아 사람들의 사회보다도 모나지 않으면서도 더욱 생동감 넘치게 했다. 어쨌거나 키셰네프는 농촌냄새가 풍기는 살맛나는 도시이기도 했다.
이것 말고도 키셰네프는 다른 지역의 사회와 확실하게 구분되는 측면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들은 키셰네프 나름대로의 독특한 역사와 전통에서도 영향받은 게 많았다. 오래 전부터 러시아 정부는 정치적으로 축출해야 할 사람들이 생길 때마다, 이들을 도시의 공업지대로 쫓아내려고 하기보다는 러시아의 남쪽 농촌지역으로 몰아내려는 경향이 강했다. 그들 나름대로는 그렇게 하는 편이 덜 위험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추방당한 사람들은 어느 곳에 가더라도 러시아에 대하여 위험한 존재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코우커사스의 독립전쟁을 북돋아 준 사람은 이 지방으로 추방되어 온 시인 레르몬도프였다. 키셰네프만 하더라도 러시아 정부에 대해서는 용감한 비판자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박해받는 소수민족과 어울려, 이들에 대한 다함없는 동정심으로 끝없이 용기를 북돋우어 준 푸시킨과 같은 사람들이 있었다. 자이오니즘 운동이 그처럼 힘차고 빠른 속도로 우리들 속으로 파고들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우리들 유대아 사람들의 상태는 늘 불안하고 곤궁했다. 돈푼께나 있는 몇몇 유대아 사람들을 뻬놓고는, 우리들은 전혀 할당받은 거주지를 벗어날 도리가 없었다 ( 우리들의 거주범위는 러시아 남 ‧ 서부 일대로 제한되어 있었던 바, 베싸라비아나 우크라이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키셰네프와 같은 대도시에서는 정착하는 것마져 금지되어 있었다 ).
우리들에게도 시민권은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명색일 뿐, 우리들은 수없이 많은 법률적 굴레에 속박되어 있었다. 일반학교나 대학에서는 쫒기어 나는 게 다반사였다. 우리들은 부패할대로 부패해진 관리들의 탐욕 앞에 발가벗겨져 있는, 힘없고 나약한 러시아 인일 뿐이었다. 그리하여 설사 굴욕적인 불이익을 당하더라도 우리들은 가급적 법으로 해결하려 들기를 꺼려 했다. 법류적 판단의 결과는 어떠한 경우에나 유대아 사람들에게 불리할 것임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불쑥하니 좋지 않은 사건이라도 일어날 량이면, 그 이유가 어디에 있든 간에, 으레히 ⌜포그램⌟에 이어, 종교상의 범죄라는 이름을 덧씌워 대낮에도 버젓이 유대아 인을 학살하는 소동이 벌어졌기 때문에, 우리들은 항상 가슴 조리며 지내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 종교적으로 굳건한 믿음을 지닌 사람들은 이러한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그다지 괴로워 하지 않았다.
유대아 사람들 중에서도 러시아의 남 ‧ 서부의 거주 제한구역을 벗어나 모스크바나 페테르부르그에 정착해 있는 유대아 사람들은 뇌물을 쓸 수 있을 만큼의 돈푼께나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자기의 자식을 러시아 밖으로 유학을 보냈다가, 자식이 귀국하여 일약 러시아의 법률가나 의사 혹은 상인이나 은행가로 명성을 떨치게 되는 날이 되면, 언제라도 단 한 순간에 유대아 사람으로서의 긍지와 자부심을 내팽개치고, 러시아에 흡수 ‧ 동화되어 버릴 것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사람은 없었다.
그들은 언제라도 유대아 사람들과의 인연을 끊어버릴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실제로 그들은 유대아 사람 나름의 종교의식을 치루고 있는 유대아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뜨일 때마다 서둘러대며 행사를 치루지 말도록 말리려 들었다. 독실한 유대아 교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러한 짓거리는 「 비극 그 자체 」라고 하는 말 말고는 달리 표현해 낼 도리가 없었다. 이유야 어떻든 간에 이로 인하여 유대아 교의 신자들은 러시아 사람이나 러시아 문화에 가까이 다가서는 일 조차에도 극도의 불신감과 경계심을 나타냈다.
신앙이 깊고 돈독한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 지금도 우리들은 유랑하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주께서 약속하신 때가 되면, 주님은 우리들을 구원하여 약속하신 땅으로 인도
하여 주시리니, 우리들이 유랑하는 도중에 우리들의 전통마져 잃어버리게 된다면, 우리들에게는 빈 껍데기 말고는 그 무엇이
남으랴. 결국 에 가서는 우리들은 구원의 약속마져 잃어버리게 될 것이 아니겠는가 ? 』
이들은 흔히 일상생활을 통해 일어날 수 있는 극히 사소한 일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자신의 운명과는 물론 민족의 운명과도 직결되어 있는 일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러한 사람들 중 더러는 문제를 너무나도 추상적이고도 복잡하게 보거나, 때로는 오로지 한가지만을 생각함으로써, 결국에 가서는 자신이 왜 존재하는지 조차 잃어버리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다른 대다수의 사람들은 깊은 신앙심과 훌륭한 성품을 바탕으로 하여 언제나 올바르게 생활해 나가려고 힘썼다.
이 사람들이 「 예시바 」에서 벌이는 토론의 내용을 유심히 들여다 보노라면, 개중에는 대단히 심각한 도덕적 문제들도 있기는 하지만, 때로는 성찬식 때에 써야 할 물고기로는 원래대로 싱싱한 채로가 좋은가, 아니면 소금에 절인 것이 좋은가 하는 일처럼, 종교와는 직접적으로 아무러한 관계도 없는 일조차 곧잘 토론의 도마 위에 올랐다.
키셰네프에 거주하는 유대아 사람들의 사회는 다른 유대아 사람들의 사회에 비해 유대아적 전통과 정신의 지배력이 약했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들의 사회는 바깥세계와는 철저히 차단되어 있었다. 우리들은 유대아 사람들만의 유별한 전통으로 말미암아서라도 외부세계와 단절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 사람들이 갖고 있는 반 유대아주의에 대한 공포감으로 말미암아서도, 자기가 거주하고 있는 작으마한 울타리 안에서 조차 숨을 죽여가며 죽은 듯이 움츠리고 지냈다.
자이오니즘에 대한 자각
이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당장이라도 숨이 막혀버릴 것만 같은 고통에 시달리며 지내야 했다. 당시 수천 명에 달하는 유대아 사람들이 제가끔 자유를 찾아 서유럽이나 미국 등지의 나라로 이주해 갔지만, 이와는 달리 나라 밖으로 나가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던 젊은이들은 차츰 제정 러시아의 압제에 대하여 정면으로 항거하기 시작했다. 그들 중에는 사회조직을 바꾸어 놓기만 하면, 사람들 모두가 함께, 한 핏줄처럼 잘 살 수 있는 행복한 사회를 이루어 낼 수 있으리라고 믿고, 우후죽순처럼 러시아 곳곳에서 솟아나고 있던 신생정당으로 파고 들어간 젊은이들도 꽤나 있었다.
그러나 1905년에 일어난 「 자유혁명 」이 실패로 돌아가자, 유대아 사람들에게는 일찌기 겪어본 일이 없었던, 잔인무도하고도 무차별적인 대규모의 유대인 학살운동이 전개됐고, 이러한 반혁명의 피의 파고가 러시아 구석구석을 이잡듯이 할퀴며 돌아 다녔다.
이들 말고 다른 젊은이들은 자이오니즘 청년운동에 가담하였다.
예나 지금이나 유대아 사람이라면 일생 중의 한번쯤은 예루살렘을 순례하기 위하여, 또는 남은 생의 마지막 한 순간을 예루살렘에서 장식하기 위하여 팔레스타인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늦추지 않고 있지만, 1881년, 자이오니즘 촌락을 건설하겠다는 원대한 이상을 품고 하루코프의 학생들이 팔레스타인으로 건너갔다. 그들은 빌루 ( BILU )라는 조직의 멤버들이기도 했다.
이 빌루라는 조직의 이름은 『 가자, 그리하여 그곳에다 야곱의 집을 짓자 ! 』라는 헤브라이 말의 머릿글자였다.
이들의 뒤를 이어 바다를 건너간 사람은 드물었다. 그렇지만 비록 늦었다고 하더라도 지금부터라도 유대아 사람들이 가야 할 길은 이제까지처럼 언제나 수세적인 방어벽만 구축하려 들 것이 아니라, 그 누구의 구속도 받음이 없이 자신만의 땅을 개간할 수 있고, 유랑하는 동안 어느 곳에서도 맛보지 못했던, 압제로부터의 해방과 독립된 생활, 그리고 생활의 안전을 성취하고 이를 보장받아야만 하겠다는 일루의 염원이 유대아 사람들 사이에 폭넓게 확산되어 감에 따라, 빌루의 조직도 꾸준하게 불어나기 시작했고, 느리기는 했지만 이와 유사한 조직들이 하나씩 고개를 내밀기 시작했다.
상황이 이렇게 전개되어 나가자 유대아 젊은이들은 유대아 사람들이 거주하는 전지역에서 - 그것이 가정이든, 비밀 아지트가 되든 가리지 않고 - 밤마다 한데 함께 모여, 이루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의 찾잔들을 비워가면서, 토론과 실행계획을 세우기 위해 밤을 지새웠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첫 단계의 작업으로서 헤브라이 말을 익히고자 서둘러댔다.
1887년에 「 세계 자이오니스트 연맹 」이 설립된 지 채 5년이 지나지 않은 1901년, 개척과 정착자금을 모으기 위해 ⌜ 유대아 국민재단 ⌟이 발족되어 고고의 첫소리를 냈다. 이들은 팔레스타인을 사들이기 위해 터어키 정부를 줄기차게 타진했지만, 결과는 모두가 공념불로 끝나곤 했다.
뒤이어 영국이 앞장서서 압제에 고통받고 있는 동유럽 유대아 사람들을 돕기 위한 긴급 피난처로서 아프리카의 우간다를 제안하자, 비엔나 출신으로서 자이오니스트 연맹의 창설자인 헤르츨이 연맹 대표자 회의를 통해 영국의 제안을 제창했다. 그러나 서유럽 사람들보다는 보수적이라 그런지는 몰라도, 당사자인 우리들에게는 성지인 팔레스타인 말고는 가야할 땅이 없다는 점에서는 우리들 사이에는 전혀 이론의 여지가 없었다.
바로 이때 불현듯이 나타나 우리들의 입장에 서서 우리들을 옹호하는 발언을 하여 준 사람이 차임 와이츠만 ( 뒤에 이스라엘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이었다. 그는 이때의 발언으로 인하여 일약 유명인사의 반열에 올라섰다.
팔레스타인은 모든 사람들에게 이사향으로 비추어졌다. 하지만 널리 알려진 바와는 달리, 현지의 실제적인 상황은 비참할 정도로 고통과 고난이 겹쳐져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동유럽 유대아 사람들에게는 러시아의 압제가 기승을 더해 갈수록 팔레스타인에 대한 꿈은 유대아 인으로서의 삶을 질기고 완강하게 지탱시켜 주는 힘이었다.
키셰네프에서 사는 유대아 인들 가운데는 구세주가 나타나 자신들을 조국으로 인도해 줄 때까지 참고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았다. 이러한 사람들 중에는 종교적인 전통에 연유하여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꽤나 있었다.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정세를 관망하는 쪽에 속했다. 한편으로는 키셰네프에는 나의 부모님처럼 자이오니스트 운동에 깊이 공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 가운데에는 신앙심이 엄격한 사람들도 많았다.
나는 열 세 살이 될 때까지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심각하게 고민해 본 적이 없었다. 우리 집은 부유하고 넉넉하지는 못했지만, 단란하고 다복한 가정이었다.
그러다가 우리들이 살고 있는 거리의 일각이 러시아 사람들에 의하여 무자비하게 약탈 당했다. 다행스럽게도 우리 집은 약탈을 면했지만, 나는 이때 약탈로 인한 사상자들을 수없이 많이 목격하였으며, 이 때에 이들 가운데 살육당한 사람들의 장례식에도 참가할 수 있었다. 내가 열렬한 자이오니스트가 된 것은 이 때 이 사건이 계기가 됐슴에 틀림이 없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린베르그씨와의 만남
나에게는 나와 같은 또래의 벗이 있었다. 늘 붙어 다녔기 때문에 사람들은 우리를 쌍둥이라고도 했다. 우리들은 함께 자이오니스트 운동에 참가했다. 우리들은 글을 쓰거나 독서를 하기 보다는 몸으로 움직이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학교가 끝나면 곧장 자이오니스트 도서관으로 가서 흩어져 있는 책들을 모아 가지런히 서가에 꽂아놓거나 손때 묻은 책상을 닦았다.
얼마 후 나는 자이오니스트 운동의 지도자의 한 사람인 그린 베르그씨를 만났다. 그는 소탈하고 교양이 있는 데다가 헌신적이고도 예의가 발랐다. 나는 그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거나, 그를 위하여 심부름하기를 좋아하였다. 그는 학자로서 일 년 내내 자이오니스트 운동에 관련하여 글을 쓰거나 강연하는 일에 몰두했다. 그는 하루 종일 우유가게 앞에 앉아 신문이나 책 속에 파묻혀 지냈는데, 끼니를 거르는 경우가 많아, 저녁녘이 되면 나는 내가 모아 두었던 몇 팬스의 돈을 갖고 나가, 그의 식사대금을 대신 치루곤 했다.
1905년의 혁명이 일어나자 그 혁명의 불길은 급속히 우크라이나의 남부 일원으로도 번져나가, 몇날 며칠 동안은 마치 제정 러시아가 통째로 무너져 내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제정 러시아의 압제를 받을대로 받아온 우리들은 러시아의 민주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이제부턴 새로운 입헌정부가 출현하여, 우리들도 시민으로서의 자유와 평등을 마음껏 누릴 수 있게 되었다고 동동뛰며 좋아 하였다.
키셰네프에서도 전 지역에 걸쳐 정당이나 단체들이 우후죽순처럼 나타나 저마다 대표를 뽑아 집회를 열었다. 청년 자이오니스트는 그린베르그씨를 대표로 뽑았다. 우리들은 시장 한 모퉁이에서 가지런히 늘어놓은 통나무 위에다 널빤지를 깔아 연단을 마련했다. 하임 그린베르그씨는 이러한 말로 말문을 열었다.
『 나는 유대아 사람입니다 ! 』
당시 러시아에서는 ⌜ 유대아 사람 ⌟이라는 말은 곧 수치와 모욕의 대명사였다. 그러나 그때 그가 자이오니스트로서 행한 연설은 너무나도 감동적이었다. 바로 이 날이야말로 우리들에게는 지극히 대견스럽고도 자랑스러운 날이었다.
하임은 1953년 뉴욕에서 죽었다. 죽기 전까지 그는이스라엘의 주요한 인물의 한 사람으로서, 저술가요 편집가였으며, 또한 세계 자이오니스트 연맹 집행부의 핵심 활동가였다. 그러나 지금 나는 그를 떠올릴 때면, 그가 키셰네프이 우유가게 앞에 앉아 책 속에 코를 쳐박고 독서하던 때의 모습을 가장 인상깊게 기억한다.
혁명이 꺽이자 다른 모든 결사체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들의 청년 그룹도 즉각적으로 불법화되었다. 우리들의 주변에서는 조만간 유대아 사람들에 대해 광범위하고도 무자비한 학살이 전개될 것이라는 소문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왔고, 이에 따라 자유에 대한 유대아 인들의열망도 급속도로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이와같은 현상과는 대조적으로 우리들 만큼은 그룹 활동에 더 한층이 박차를 가했다. 때마침 자이오니즘 운동의 위대한 지도자의 한 사람인 스프린차크가 우리를 도우러 키셰네프로 왔다 ( 그는 지금 이스라엘의 국회의장이다 ). 그 당시 우리들은 그의 나이가 얼마인지는 몰랐지만, 그가 우리들에게 풍겨준 인상은 굉장했다. 그의 몸에서는 항상 정열과 유모어가 넘쳐나왔다. 또한 그는 우리들이 품고 있는 자이오니스트에 대한 궁금증을 속 시원히 풀어 주었으며, 더구나 그는 지니고 있는 교양도 상당했다.
그의 도움으로 우리들은 기력이 넘쳐났지만, 회합만큼은 은밀해야 했다. 양복점을 경영하면서도 성격이 소박한 한 노인이 우리들에게 자기집 한칸을 빌려 주었다. 우리들은 이곳에서 비밀모임을 갖거나, 비합법적인 선언문을 작성하였다. 토론을 통해 우리들은 언제가 되든 우리들의 곁에서 유대아 사람들에 대한 학살이 자행될 경우, 우리들은 우리들 자신의 힘으로 우리들의 삶과 생활을 지켜낼 것이라고 굳게굳게 다짐했고, 다른 한편으로 우리들은 우리들 잣니이 팔레스타인으로 건너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일들을 이루어내기 위해서는 우리들이 헤치고 나아가야 할 어려움이 산적해 있었다. 간단한 전단을 작성하는 데에도 우리들은 이러한 점들을 염두에 두고 주도면밀하게 행동했다.
양복점 주인에게는 여러 명의 딸이 있었는데, 한결같이 우리를 도와주려고 애를 썼다.
그러한 일이 있은 후 나는 오랜 세월 그녀들과의 연락이 끊어진채로 지내다가, 무려 30년이란 긴 세월이 흐른 후 내가 공무상의 일로 뉴욕에 있을 때, 그녀들 중의 하나인 하야가 보내준 편지를 받았다. 그 무렵 하야는 카나다의 철도 기사와 결혼하여, 여러 명의 자녀를 둔 어엿한 어머니가 되어 있었다. 그녀는 그가 사는 집에서 신문을 뒤적이다가 우연히 내가 어느 집회에 나가 연설을 한다는 기사를 보고나서야 비로서 나의 소식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나는 몬트리올에 들린 기회에 그녀를 만났다.
팔레스타인으로 가기로 결심
열 네 살이 되던 해에 나는 토론을 잘한다는 것 하나만으로는 곧 훌륭한 자이오니스트라고 자부할 일이 못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동시에 내가 팔레스타인으로 가게 된다면, 기필코 나는 농민이 되리라고 다짐했다. 이것은 나만이 아니라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들 사이에서 서서히 움터 나오기 시작한 통념이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이러한 생각이 어떠한 경로를 거쳐서 움터 나오기 시작했는지는 딱 불거지게 잘라서 설명해낼 도리가 없다.
우리들이 창조해 내고자 하는 새로운 국가와 문화에 대한 글들은 굉장히 많았지만, 초창기의 것들을 보면, 팔레스타인이라는 곳은 마치 유대아 사람들의 피난처가 되기라도 하는 듯이 묘사되어 있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들은 어떻든 우리들이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는 그 어떤 무엇을 행동으로 나타내기에 앞서 우리들 자신의 머리부터 개조해 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들은 너무나도 오랜 동안 지식인이나 중간 지식인 또는 중산계급으로 살아 왔다. 이제부터 우리들은 남의 손을 빌려서가 아니라. 우리들 자신의 손으로 노동해야 하며, 그 가운데에서도 우리들에게 특히 중요한 것은 우리들 스스로가 모든 인간생활의 기초가 되는 농업농민이 되는 일이었다.
이 도도한 흐름은 일반 유대아 사람들의 가슴에는 가닿지 못했지만, ⌜ 우리들 ⌟ 스스로의 느낌은 참으로 처절하고 절박했다.
우리들의 종교적인 전통 속 곳곳에도 노동에 관한 사상이 스며 있었지만, 그동안 우리들은 이러한 사상을 너무나도 소홀하게 취급하여 왔기 때문에, 우리들이 기필코 농민이 되고야 말겠다고 작심했던 이유를 어디에서 찾아야 할지, 이를테면 우리들이 유대아식 교육을 반대해서 행동한 점에서 찾아야 할지, 아니면 초창기의 사회주의자들이나 톨스토이의 저서에서 영향을 받아 그러한지는 한마디로 잘라 말하기가 어렵다.
이후 줄잡아 2년 동안 나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다. 이러하든 끝에 내린 결론은 지금이라도 곧 팔레스타인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내린 결론을 막상 부모님께 말씀드려야 할 때가 되니, 나의 마음은 두려움과 초조함으로 몹시도 두근거렸다.
나에게는 어린 누이동생과 친형제보다 더 나를 아껴주는 이복형이 있었지만, 어머니 입장에서 볼 때, 나라는 존재는 이 세상 오직 하나뿐인 아들이 아니겠는가 ? 나의 결심을 말씀드린다는 게 어머니에게 어떠한 결과를 안겨드리게 될런지를 뻔히 아는 내가, 어떻게 일일이 모든 것을 드러내 보여드릴 수가 있단 말인가 ? 하지만 나는 마음을 다잡아 먹고 모든 것을 낱낱이 털어내 놓고야 말았다.
아버지도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되자말자 부리나케 랍비를 찾아 달려갔다.
랍비도 역시 한마디로 잘라 말했다.
『 도대체가 말도 안되는 소리요 ! 허참 당치도 않은 소리란 말이요 ! 』
이제 겨우 열 여섯 살 밖에 안되는 조무래기 아이가 어떻게 그렇게 엄청난 여행을 할 수 있겠느냐는 말이기도 했다. 더군다나 어쩌다가 내가 팔레스타인으로 건너 갔다고 치자. 그렇다고 하더라도, 금새 나는 그곳에 있는 자유사상가들에게 물들어, 결국에 가서는 반종교적인 무리들과 어울려 다니게 될런지도 모를 일이 아니겠느냐는 말이기도 했다.
부모님과 나 사이에 노골적이고도 원시적인 싸움이 벌어졌다. 부모님은 나에게 압력이 될만한 수단은 무엇이고 간에 동원하려고 들었다. 이제까지 단 한 차례도 나를 몰아세운 적이 없던 아버지도 나를 달래기 위해 억세게 노력했고, 어머니의 눈에도 눈물이 그칠 날이 없었다.
마침 그 무렵 팔레스타인에서 지내다가 두어 달 동안 고향에 와서 머무르고 있던 친척이 있었는데, 그가 우리의 사정을 알고서는, 그로부터 자신이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와 동행해서, 나로 인해 집에서 근심하는 일이 없도록 잘 돌봐 주겠노라는 약속을 받고 나서야 비로서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려나가기 시작했다. 아버지 어머니는 이제까지의 나에 대한 온갖 희망을 체념 속에 깊숙이 묻으려 했다. 아버지는 여행에 필요한 경비를 마련하려고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모여진 돈이 많지는 않았지만, 나로서는 그 정도만으로도 부족함이 없었다.
고향을 떠나기 바로 전날 밤, 벗들이 나를 위해 파아티를 열어 주었다. 우리들은 밤이 깊도록 함께 노래하고, 함께 춤을 추었다. 그렇지만 아버지의 몸놀림에서만은 한없는 서글픔이 베어나오고 있었다. 밤이 깊어지자 아버지는 평범한 유대아인 노인으로 돌아가, 카프란 ( 띠를 두른 긴 소매가 달린 옷 )을 입고, 볼수염을 기른 그대로의 모습으로 무리 중의 한 가운데로 나가 노래도 하고 춤도 추었다. 그는 헤브라이 말로 노래를 했는데, 노랫말 중에서도 유별나게 되풀이 되는 말은 가나 ( 유대아인 자경단 )의 노랫말로서 그 구절의 내용은 이러했다.
『 돌아오는 다음 해는 예루살렘에서 ! 』
그는 거듭거듭 노래했고, 연속해서 두어 시간이나 춤을 추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나는 파아티의 장소를 떠나 곧바로 역으로 갔다. 나는 나와 함께 동행할 친지와 함께 막 떠나려는 열차에 올라탔다. 아버지, 어머니, 친척 그리고 벗들이 플렛홈 안으로 몰려 들었다. 어머니의 눈에서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기차가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하자, 어머니는 기차를 뒤따라 오며 목메인 소리로 외쳐댔다.
『 죠셉, 내 아들아 ! 아무쪼록 훌륭한 유대아인이 되어다고 ! 』
나 역시 헤어지는 서글픔으로 울음이 북받쳐 올라왔다. 한 세상 살아가는 동안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살 수만 있다면 오죽이나 좋을까 하는 생각에 미치니, 가슴은 미어져 터져나갈 것만 같았다.
< 주 > 자이오니즘 운동 : 이스라엘의 독립운동이 성공을 거두게 된 요소인 자이오니즘 운동 가운데에서도 협동조합 운동이 바로 그것으로써,키부츠나 모샤브의 형태가 바로 그렇다. 1967년 당시 이스라엘 인구는 일백 오십 만 명, 그 가운데에서도 키부츠나 모샤브의 인구는 각각 15만 명으로 추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