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信心銘(신심명)-제1강 2006년 2월 1일
반갑습니다. 염화실 인터넷 방송법문이 중단 된지가 상당이 여러 달이 되었습니다.
5개월 남짓 되었는데, 그 동안 뭐 저 개인적으로 물론 치료 관계이긴 합니다마는 일이 많았고, 또 약간 지난여름하고 가을 사이에 법화경 강의 하느라고 좀 힘이 들었든가 봅니다. 그래서 푹 쉰 그런 기간이라고 생각을 하겠습니다.
지금 오늘 마침 2006년 2월1일입니다.
여기 대화창에 그 동안 반가운 염화실 법우님들 이름이 쭉 이렇게 오르는 걸 보니까, 아주 너무 반갑고 또 감회가 새롭고, 법화경 강의할 때가 바로 엊그제 같은 그런 생각이 듭니다.
시간을 초월하는 듯한 그런 느낌입니다. 또 음력설도 이제 지났지요? 모두 병술 년 새해에 건강 하시고, 복 많이 받으시고, 우리가 부처님의 소중한 가르침을 배우는 그런 인연이 되었으니까, 이 인연은 참으로 일생에 있어서 그 어떤 인연보다도, 값지고 소중한 인연이라는 것을 가슴 깊이 느끼고, 이런 좋은 인연이 되었을 때, 이 인연을 헛되지 않게 참으로 유익하고, 보람 되게 잘 우리가 활용해서 各者(각자)의 인생에 큰 보탬이 되어야 되지 않겠나 하는 그런 생각을 해 봅니다.
이제 내일 모레 글피가 또 입춘이고요. 모든 것이 새로 이렇게 어떤 용기를 가지고, 출발할 수밖에 없는 그런 시점에 온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해서 시절인연이 도래 했다고, 불교적으로 이야기하면 그렇게 말씀드릴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가을 방송보다 들어오는 길이 조금 바뀌어서, 인터넷 문제라든지 이런 것 들이 날로날로 발전하고 변하기 때문에, 조금 헷갈렸을 줄 믿습니다.
또 이제 그동안 우리 회원이 그 때, 가을만 하더라도 1000명이 막 넘어섰나요? 그랬는데 지금은 3000명이 넘었습니다.
그래서 새로 오신 분들이 훨씬 더 많을 줄 믿습니다. 또 여기에 법문 방청석에 입장하신 분들도, 새로운 이름들이 아주 많아서 더욱더 반갑습니다.
오늘부터 信心銘(신심명) 을 가지고 공부하기로 그렇게 결정을 했습니다. 이 신심명은 염화실 카페 안에 몇 가지 강의가 있고, 법문도 올려져 있고, 뭐 영상 강의도 있고요. 그렇긴 합니다마는, 뭐 거기에서 설사 강의가 몇 번 되어있다 하더라도, 이 신심명은 아주 정말 깨달음이 높으신 분의 최상 법문이기 때문에, 그 때 제대로 이해했을까 하는 것도 문제이고, 또 얼마나 설명을 할 수 있었을까 하는 것이 늘 佛祖(불조)의 말씀을 대 할 때는, 그런 의문으로 남고 또 미진한 그런 생각이 늘 듭니다.
깨달으신 분들의 가르침을 우리가 100% 이해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고, 또 이해를 100% 못 하다 보니까 설명을 제대로 한다는 것도, 더욱 어려운 일이지요.
그래서 공부를 하면 할수록 이해가 달라지고 설명이 달라집니다. 어제 설사 어느 구절을 이해하고 설명했다 하더라도, 역시 오늘 그 설명이 똑 같으리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는 거지요.
우리가 어릴 때 한참 독서할 때 그런 말을 듣지요? 뭐 10대에 독서를 하는 것은 똑같은 책이라 하더라도, 방안에 앉아서 달을 보는 것 과 같고, 뭐 20대에 독서를 하는 것은 마루에 앉아서 달을 보는 것 과 같고, 30대 40대 50대 이렇게 중년에 이르러서 독서를 하면, 넓은 마당에 나와서 달을 한껏 보면서 감상할 수 있는 그런 입장과 같다는 말을 어려서 많이 들었습니다.
그와 같이, 특히 깨달은 분의 가르침이라고 하는 것은, 정말 이 보통 사람들이 제대로 이해하고 또 설명한다는 것이,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뭐 아무리 공부했다 하더라도 또 해야 되고, 공부하고 또 하고 그런 과정에서 조금씩 조금씩 뜻이 더욱 더 가슴에 와 닿고, 그 깨달은 聖人(성인)들의 그 마음에 한 걸음 한걸음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 그런 길이 열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설사, 신심명에 대한 책들도 많지요? 강의들도 곳곳에서 많이 합니다. 그렇더라도 이것은 정말 진리에 대한 가르침이고, 또 우리가 금생뿐만 아니라 세세생생 공부의 과제로 삼아도 조금도 손해 갈 것이 없고 손색이 없는, 그런 아주 훌륭한 가르침인 까닭에, 우리가 공부를 조금 알뜰히 하고, 또 아무리 했다하더라도 또 하고 해야 할 그런 내용이라고 평소에 생각합니다.
공부 들어가기 전에, 이 신심명은 번역으로 말씀드리지 않고, 原文(원문). 원문을 가지고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글자도 짚어 드리고 새기는 법도 짚어 드리고, 거기에 담겨있는 뜻도 제가 아는 만치만 짚어 드리겠습니다.
이 원문은 염화실 신심명난에 가면 신심명 원문이 있습니다. 그것을 한글 문서에 올려 가지고, 큼직 하게 출력을 해서 보시면 아주 편리하실 줄 그렇게 믿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이 신심명은 글이 얼마 되지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量(량)을 그렇게 많이 못합니다. 그 대신에 이것을 육필로 한 100번쯤 쓰시기를 바랍니다
이 寫經(사경)이라고 하는 것이 참 중요한 것이고, 뭐 사경 문제에 대해서는 또 다른 시간에 말씀드릴 기회가 있으면 말씀드리겠습니다마는, 이 신심명은 100번 아니라 1000번을 써도 결코 시간손해가 아니고, 정말 평생에 있어서 아주 보람 있는 일을 했다 할 정도로, 정말 큰 불사를 했다 할 정도로 그런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일이 됩니다.
그래서 정말 한 100번쯤 육필로 사경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되면 외우실테고, 글자 한 획 한 획도 다 소상하게 알게 될 것이고, 그러면 이 신심명 하나만 우리가 제대로 쓸 줄 알고 외울 줄 알고, 뭐 그 나름대로 뜻을 이해하고, 또 설명할 줄 안다면, 어디 가서든지 불교 강의를 하고 법문을 하실 수 있습니다. 뭐 僧俗(승속)을 떠나서요.
분필 하나만 가지고 칠판 앞에 서서 몇 시간이고 불교 이야기를 할 수가 있고, 정말 아주 근사하게 문자를 아주 마음대로 구사해 가면서 그 불교 강의, 부처님의 그 어떤 사상의 진수를 전할 수 있는 그런 아주 큰 재산을 마련하는 그런 계기가 됩니다.
그래서 뭐 컴퓨터로 쓰시는 것 보다는, 이런 것을 육필로 따박따박, 요즘 한자 쓰는 그 노트. 아주 좋은 노트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 노트 사 가지고 육필로 한 100번쯤, 예를 들어서 하루에 뭐 두 구절이나 네 구절 아니면 여섯 구절 여덟 구절 정도 배웠다 하더라도, 쉬는 날도 있고 그러면 뭐 충분히 쓰실 수 있고, 설사 강의 중에 다 못쓴다 하더라도 그 다음에라도 이어서 한 100번만 이 사경을 하신다면, 정말 일생에 있어서 그 어떤 재산보다도 훌륭한 재산을 마련하는 것이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합니다.
불교에서 재산이라고 하는 것은, 그렇습니다. 뭐 죽어서 가져가지 못하는 그런 것을 재산이라고 보질 않지요.
정말 죽어도 따라갈 수 있는 그런 아주 좋은 玉(옥)! 좋은 수행력! 이런 것들은 죽어도 따라가고 다음 생과 연결이 되니까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재산입니다.
그 외에 뭐 어떤 물질도, 어떤 명예도 어떤 富(부)도 많이 쌓여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가져가지지 못하는 거지요.
불교에서 근본적으로 가져가지 못하는 것은 진정한 재산이 아니고, 가져갈 수 있는 것은 진짜 재산이다 그래요. 악업도 물론 가져갈 수가 있습니다. 그것도 재산이라면 재산일 수가 있겠지요.
그렇지만 불교에서 그런 것을 가지고, 염두에 두고 이야기 하는 것은 아니지요. 정말 좋은 업. 정말 우리가 지혜를 갈고 닦는 일. 그리고 정말 지혜를 갈고 닦는 일중에서도, 부처님이 자주 書寫(서사) 受持(수지) 讀誦(독송). 이런 말을 했듯이 사경을 하는 것이 그만치 값진 일이고,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염두에 새기시고 이거 한번 100번 쯤 쓰셔서 평생에 어디 가서든지 분필 하나 가지고, 불교를 마음껏 이야기 할 수 있도록 그렇게 해 주시면 아주 고맙겠습니다.
마침 미륵골님은 우리 염화실의 큰 일꾼이신데, 信心銘(신심명) 三祖(삼조) 僧璨大師(승찬대사) 한자로 그렇게 잘 올리셨습니다. 다음에 또 원문에 들어가거든 그 원문을 제가 이야기 할 때, 거듭거듭 좀 조금 글자를 키워 가지고 보기 좋도록 그렇게 올려 주시면 그것을 보면서 들으면, 글자를 미쳐 모르시는 분들은 아주 쉽게 글자를 파악하기가 좋을 테니까 미륵골님 께서 수고스럽더라도 글자를 약간 키워서 올려 주시기를 바랍니다.
三祖(삼조) 僧璨大師(승찬대사) 信心銘(신심명) 한번 더 올려주세요. 그 한자요.
여기서 지금 말씀은 일방적으로 합니다마는, 동참하신 분들의 이름이 다 여기에 창에 떠 있어서, 여러분들의 얼굴을 대하고 이야기하는 것 못지않게 그렇게 그런 마음으로 합니다.
어쨌든 새로 이렇게 시작해서 여러분들을 만나 뵙게 돼서, 아주 반갑습니다.
그러면 이 신심명을 저술하게 된 그 승찬대사 라는 분에 대해서 조금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분을 흔히 우리가 3조 승찬대사!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데, 3조라고 하는 것은 우리 불법의 正脈(정맥)을 이은 그 代數(대수)를 전부. 부처님께서 법을 가섭존자에게 전했습니다. 그러면 가섭존자가 第 一祖(제일조)가 되고, 그 다음에 그 다음 법을 아난존자가 이었으니까 아난존자가 2조가 되고, 그 다음에 상낭화수가 3조가 되고, 이렇게 해서 아시는 대로 달마스님까지 28조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달마스님께서는 인도에서 28조이면서, 그 법을 중국에 오셔서 전하게 됐습니다. 그러면 중국에서 계산하면 중국 입장에서는 달마대사가 1조가 되는 거지요. 그래서 6조 혜능 하는 것도, 달마스님을 1조로 그 다음에 혜가를 2조로, 3조 승찬대사. 우리가 공부하려는 신심명의 주인공 승찬대사를 3조로, 이렇게 치지요.
그 다음에 4조를 도신! 그 다음에 5조는 홍인대사! 6조 혜능대사! 이렇게 우리가 익히 아는 그런 분들로 이어집니다.
그 대수의 3조가 승찬대사다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승찬대사는 이 참 불후의 명작을 남겼는데, 한 마디로 말씀 드리면 이 신심명이 그렇게 많은 내용이 아니지요. 많은 내용이 아닌데 이속에 사실은 부처님의 사상이 소롯이 다 들어 있고, 팔만대장경이 함축 되어있다는 이런 표현을 과거의 조사스님들이 아주 서슴없이 하십니다.
그와 같이 이 신심명은, 가장 짧은 한편의 글을 선택한다면, 바로 이 신심명을 선택할 정도로 그렇게 내용이 아주 훌륭하고, 또 글도 빼어나고 그렇습니다.
그래서 아주 높이 치는데, 뭐 승찬대사와 육조스님의 제자인 영가스님의 證道歌(증도가)! 그걸 근래에 와서는 신심명과증도가를 같이 공부를 하지요. 책을 내도 같이 내는 그런 경우도 있고 합니다.
그래서 저도 신심명 다음에는 영가 증도가를 하려고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두 개를 근래에는 禪詩(선시)의 최고봉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그만치 뜻이 잘 드러나 있다. 부처님의 사상이 정말 짧은글 속에 잘 드러나 있다. 이런 내용입니다.
이 승찬대사는 상당이 오랬지요. 육조스님 보다도 그 먼저 분이니까 참으로 오래적 분입니다.
수나라 양제 대업 2년 10월 5일. 서기606년에 입적 하셨는데, 태어나시기는 언제 태어나셨는지 모르지요. 그래서 세수가 얼마인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世數(세수). 나이가 얼마인지 모른다. 그랬어요. 그래 이제 승찬대사가 돌아가신지 한 150년쯤 뒤에 당나라 현종 황제가 감지선사라고 시호를 내렸고, 탑호를 각절 이다. 이렇게 내려서 아주 널리 알려지게 됐습니다.
이 승찬대사 에게 저는 개인적으로 특별히 마음이 가는 이유가 하나 있습니다.
이분은 거사로서 법을 받았는데, 평소에 대풍질 이라고 하는 기록상에 대풍질 이라고 하는 아주 무서운 병에 걸렸었어요. 지금으로 말하자면 나병입니다. 문둥병 인데 이 병에 걸리면 낫기가 어렵지요.
옛날에, 지금도 그것은 참 무서운 병 입니다마는, 우리 어릴 때는 나병환자는 참으로 무섭게 생각했고, 정말 걸려선 안될 그런 큰 병으로 생각했습니다.
바로 이분이 그 병에 걸려 가지고 여러 해를 고생을 했고. 불교가 뭔지 출가가 뭔지, 부처님이 뭔지 아무것도 모르는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근데 마침 혜가, 대사2조 혜가 대사의 소문을 듣고, 큰 道師(도사)있다니까 그 도사에게 가서 뭔가 물으면 자기의 병을 고칠 수 있는 길이 열릴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해서 혜가 대사를 찾아갔습니다.
찾아가서 불쑥 묻는다는 것이, “저는 문둥병을 앓고 있는데, 이것이 아마도, 생각 컨 데는 저의 과거에 죄가 많아서 이런 병을 앓고 있는 것 같습니다.” 대개 이런 생각을 하지요. 그래서 “제 죄를 어떻게 하더라도 참회를 시켜주시면 병도 낫고 죄도 참회하는 그런 길이 있을 듯한데 스님께서 좀 참회 시켜주십시오.” 이렇게 부탁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혜가 스님이 가만히 듣고 계시다가, 당신이 처음에 아주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달마대사를 찾아갔다가, 그 불안한 마음을 어떻게 하더라도 치유 하고자 하는 그런 대화를 달마스님과 하게 되었지요. 그래서 결국은 달마스님으로부터 좋은 가르침을 받고 그 불안한 마음이 씻은 듯이 가시게 되었는데 그와 같은, 아주 뭐 거의 똑 같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그런 대화가 이 두 분 관계에서도 오고 갑니다.
그래서 이제 “그대는 죄가 많아서 그런 문둥병을 앓고 있다고 하니까, 그 죄를 가져오면, 가져와서 나에게 보인다면 그 죄를 내가 참회시켜 주겠다.” 이랬어요.
그러니까 그 소리를 들으니까 이건 세상에 상상치도 못하던 그런 상황이지요.
그래서 아무리 생각해봐도 죄를 찾을 수가 없고, 그 정말 죄가 많아서 이런 큰 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는데, 그 죄를 찾아봐도 도저히 찾을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혼자 끙끙대고 있다가,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라고 그렇게 고백을 하니까, “그렇다면 그대의 죄는 모두 참회 되었다.” 그랬어요.
“죄를 찾을 수 없는 거라면 그거 다 空(공)한 것 아니냐? 없는 것 아니냐?” 하는 그런 뜻이지요. “없는 줄 알고 공한 줄 알았다면 그대의 죄는 벌써 참회되었다.”
불교는 이치를 깨닫는 것입니다. 뭐 難行苦行(난행고행) 하는 것 아닙니다.
難行苦行 하는 것도 이치를 깨닫기 위한 것이지, 한마디 말을 듣고 이치를 깨닫거나, 고행을 해서 이치를 깨닫거나, 기도를 해서 이치를 깨닫거나, 참선을 해서 이치를 깨닫거나, 경전을 봐서 깨닫거나, 이치를 깨닫는 일이 불교지, 佛敎(불교)아닙니까? 깨달음의 가르침!
아주 정확하게 이야기 하면 깨달음의 가르침인데, 바로 그 깨달음! 그것을 통해서 이해하면 그뿐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그렇게 이해하고 나니까 정말 아무 문제가 없어져 버린 것입니다.
정말 죄의 성품이 본래 空(공)하다는 것을 이해하게 됐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어서 하신 말씀이, “그대는 그저 불법승 삼보에 의지해서 안주 하라.”
그러니까 문둥병을 앓고 여러 해를 나그네 생활 거지 생활, 거지 생활로 살았으니 그 골몰이 오죽했겠습니까?
그러니까, 그냥 상식적으로라도 “그대는 불법승 삼보에 의지해서 살도록 하라.” 라고 이렇게 일러줬습니다.
그러니까 처음 듣는 말 이예요. 거사로서 처음 듣는 말입니다. 도대체 뭐 불교. 불자도 모르는 사람이니까요.
그래서 하는 말이, “지금 화상을 뵙고 승보라고 하는 것은 알았는데, 어떤 것을 佛寶(불보) 라하고, 法寶(법보)라고 합니까?” 그렇게 물었어요.
이것은 사실 지금 이 방송을 듣는 불자님들도, 佛寶(불보). 法寶(법보). 僧寶(승보). 다 잘 알고 계시지요?
그런데 이 3조 승찬 대사는 물론 거사의 신분으로 불교와 처음 인연 되었을 때, 도대체 알 까닭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제 2조 혜가 스님이 일러주는 말이, “마음이 부처다. 또 마음이 법이다. 법과 부처는 둘이 아니다. 승보도 또한 결국은 마음이다.” 그랬어요. “불보도 마음이요. 법보도 마음이요. 승보도 또한 마음이다. 마음 밖에 다른 것이 없다.’불법승 삼보만 마음이 아니라, 온 우주 법계가 다 마음이다.”
말하고 듣고 우리가 이렇게 컴퓨터 앞에 앉아서, 이런 시간을 함께 하는 것. 이것이 전부 뭡니까? 마음이 들어서 하는 거지요. 아니 마음이 들어서 한다는 표현보다 바로 마음이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그 말씀을 듣고는, “오늘에야 비로소 죄의 성품은 마음에도 없고 마음 안에도 없고 마음 밖에도 없고, 또 중간에도 없다고 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마음이 그러하듯이, 불보와 법보도 둘이 아닌 줄 알았습니다.”
결국은 ‘불. 법. 승 삼보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다 마음이라고 하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면 뭐 따로, [건강한 몸이다, 병든 몸이다.] 그렇게 분별을 나눌 까닭이 없는 겁니다.
금으로서 뭐 불상을 만들었든, 아니면 칼을 만들었든, 무슨 고기 형상을 만들었든, 아니면 무슨 다른 어떤 그 코끼리 형상을 만들었든, 그저 오직 금일뿐 이라는 사실입니다. 불상을 만들었다고 그 금값이 더 나가는 것도 아니고, 무슨 뭐 코끼리 형상을 만들었다고 해서 그 금값이 더 나가는 것도 아니지요.
그러한 이치를 바로 이 분이 깨닫게 됐습니다. 무슨 삼보가 뭐고 사홍서원이 뭐고, 삼귀의가 뭐고 사제팔정도가 뭐고, 십이 인연이 뭐고, 이런 것 한번 들어본 적이 없어요.
이분은 바로 이렇게 불교를 지름길로, 뭐 지름길이라고 할 것도 없습니다. 바로 정법을 만나게 되어서 이렇게 아주 뭐 한순간에 불법의 근본을 확 다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혜가 대사는 법의 그릇이 아주 훌륭하다는 생각을 하고 그때야 비로소 머리를 깍아 주고 하는 말이 “그대는 나의 보배다” 구슬 璨(찬)자를 써서 승찬. 중으로서 보배다 이런 뜻에서 중 僧(승)자, 구슬 璨(찬)자를 써서 승찬이라 이렇게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해 3월 18일 광복사 에서 구족계 비구계를 받았지요. 그러니까 저절로 그로부터 병이 나아져서 2년동안 혜가 스님을 시봉했다는 그런 기록이 있습니다.
그리고 승찬 스님은 그 당시 滅佛(멸불). 중국의 어떤 왕이 불교를 좀, 말하자면 배척하는 그런 왕이 등극을 해서 불교가 탄압을 많이 받게 돼서, 그러한 상황으로 은거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아주 40년 이라는 세월을 은거하다가 나중에 아주 어린 도신 스님을 만났는데, 아주 어린아이를 만났지요. 그래서 글을 깨우쳐주고 늦게야 법을 전하게 되어서, 그래서 부처님의 법이, 정말 깨달음의 법이 면면히 오늘날 까지 이렇게 이어오게 되는 그런 스님입니다.
정말 병든 몸으로, 그 병도 정말 고치기 어려운 나병에 걸려 가지고 오랫동안 고생하다가, 불교가 뭔지, 불법승 삼보가 뭔지 아무것도 모르고, 뭐 이름 있는 도사가 있다기에 도사를 찾아가서 한 두 마디의 대화를 통해서, 모든 것이 다 마음의 이치다라고 하는 그런 것을 확연히 깨닫게 된 그런 분입니다.
거사로서 깨달았지요. 그 나병 환자로서 그렇게 깨달았지요. 그러니까 이것이 보통 인연이 아니고, 그래서 정말 뭐 특히 이 승찬 스님의 그 어떤 인간적인 삶에 관심이 깊고 애착도 가고요. 특히 신심명 이라고 하는 불후의 명작을 탄생 시켜서, 이렇게 오랜 세월 동안 많은 사람의 소견을 열어주고 눈을 뜨게 해준 그런 내용에 언제나 감동하는 그런 마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불자로서, 또 부처님과 인연을 맺은 이 인연으로 신심명 공부 한번 못한다면, 불자 된 보람이 뭐가 있겠습니까?
사실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아, 부처님하고 인연 맺었다면, 불교 안에 뛰어난 가르침들! 그 뛰어난 가르침들을 공부 하는 그런 행복! 그런 다행함을 얻자고 하는 것이 말하자면 불자 된 보람이고, 또 거기에서 어떤 그 소득을 얻는다면 얻는 것이지, 그 외에 뭐 달리 무슨 소득이 또 있겠나 하는 그런 생각을 해 봅니다.
그리고 이 신심명 할 때, 믿을 信(신)자, 마음 心(심)자, 새길 銘(명)자 인데, 명이라고 하는 것은 비석에 새기다. 아니면 좌우명 이라고 해서 또 이제 마음속에 깊이 새기다. 뭐 또 나무판에 새기다. 하는 그래서 아주 마음깊이 새겨두는, 또는 새겨 둬야할 그런 내용으로, 이런 뜻으로 명자를 씁니다.
신심이라는 말 우리가 잘 쓰는 말인데, 이것은 우리가 잘 쓰는 그런 의미의 신심이 아니예요. 이것은 정말 근본적인 그런 신심입니다.
믿는 마음! 저 뒤에 가면 信心不二(신심불이)요. 不二信心(불이신심)이라. 하는 그런 말이 나오는데 보통, 그 사람이 신심이 있다 없다. 뭐 부처님 앞에 오래 절을 많이 한다든지, 공양을 많이 올린다든지, 뭐 불사를 잘한다든지, 그렇게 하면 “아, 그 사람 신심이 있다.” 하는 그런 차원의 신심이 결코 아닙니다. 그걸 아셔야 돼요. 그래 이제 그런 신심을 염두에 두고 이것을 들으면 얼른 이해가 안 되지요.
이것은 그런 신심을 다 던져버리고 마음의 도리. 그야말로 우리가 신심명! 했지만 믿는 마음. 그 믿는다는 것과 마음이라고 하는 것. 도대체 이것이 뭐냐? 또 믿는 마음이라고 하는게 이것이 도대체 근본적으로 어떻게 된 것이냐? 실체가 무엇이냐? 그 실상이 뭐냐? 하는 그런 뜻입니다.
부처님 앞에 잘 하고, 뭐 이렇게 신앙심이 아주 돈독해서 일상생활을 뭐 예불을 많이 하고, 염불을 많이 하고, 또 절을 많이 하고, 뭐 공양물을 잘 올리고, 어떤 뭐 삼천위와 팔만 수행을 잘 갖추어서, 행동거지가 아주 모범이고 하는 것. 물론 좋은 신심이지요.
그렇지만 이 신심명 에서는 그런 이야기는 한마디도 없지요. 그야말로 모든 것의 근본이고, 우리들 자신의 근본이고, 또 근본을 제대로 우리가 이해함으로 해서 우리의 삶이 바르게 되고,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누릴 수 있는 최상의 행복. 또 최상의 의미와 보람을 바로 이 신심이라고 하는 이 한마디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심이라고 하는 이 말은 우리 인생을 극대화 시키는 말이고, 우리 인생을 가장 의미 있고 보람 있게 만드는 말이고, 또 이것은 우리들에게 정말 멋진 삶을 약속하는 말이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가 있어요.
그래서 첫 구절이 至道無難(지도무난) 그랬습니다.
지극한 도는 어려움이 없다. 至道無難(지도무난) 지극할 至(지)자. 길 道(도)자. 없을 無(무)자. 어려울 難(난)자. 至道 지극한 도. 이것은 뭐가 至道냐? 그냥 道라고 해도 좋아요. 그런데 그 중에서도 또 지극할 至 자를 넣어서, 지극한 도. 이렇게 말한 것은 정말 가장 멋진 인생! 가장 멋진 삶! 가장 이상적인 삶이 도대체 뭐냐?
뭐 도 라고 하는 것을 너무 자꾸 道敎的(도교적)으로 그렇게 설명을 하면 그 거리가 멀어집니다.
道 라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뭐 지극한 도는 그만 두고 그냥 道라 하더라도...
사람이 살아가는 길이예요. 사람이 살아가는 그 인생의 가장 바람직한 길을 도라고 합니다.
그 중에서 지극한 도라면 가장 멋진 삶이라고도 할 수가 있고, 우리가 마음에 그리는 가장 이상적인 그런 어떤 삶이다. 이렇게 말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럼 하나의 바람직한 생활 태도예요. 지극한 도라고 하는 것은. 정말 가장 바람직한 하나의 생활 태도다. 이렇게 볼 수가 있습니다.
정말 가장 바람직한 생활태도란 무엇일까? 그것은 또 다른 말로 하면 가장 바람직한 인생은 무엇일까? 이렇게 풀어야 돼요. 그렇게 이해해야 됩니다.
신심 이라는 말도 그렇고, 지극한 도라고 하는 말도 그렇습니다. 그럼 가장 바람직한 그런 인생의 길은 결코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랬어요.
無難! 어려움이 없다. 어려움이 없는데 조건이 많습니다. 조건이 크게 많지는 않지만 상당이 힘든 조건을 제시하고 있어요.
維嫌揀擇(유혐간택) 이라고 그랬어요. 오직 唯(유)자. 싫어할 嫌(혐)자. 혐의 한다 그러지요? 가릴 揀(간)자. 가릴 擇(택)자. 간택을 오직 싫어할 뿐이다. 꺼릴 뿐이다. 간 하고 택하는 이것이 문제가 된다.
그것만 아니면 가장 멋진 인생! 가장 바람직한 인생! 아주 이상적인 그런 인생에는 결코 어려움이 없다. 그랬습니다.
뭐 명예를 많이 높이 가져야 되는 것도 아니고, 돈을 많이 가져야 되는 것도 아니고, 학식이 많아야 되는 것도 아니고, 뭐 그런 조건이라면 사실 어렵겠지요. 멋진 인생은 참 어려울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唯嫌揀擇(유혐간택) 이라고 그랬어요. 가장 멋진 인생은 어렵지 않다. 그런데 오직 간하고 택하는 간 자는 가릴 揀 자입니다. 가려낸다는 뜻이고, 우리말로는 가릴 간. 가릴 택. 이렇게 되어 있는데, 간 자는 가려 낸다는 간자이고, 택 은 선택한다는 택 자입니다.
예를 들어서 쌀하고 뉘하고 같이 섞였을 때, 쌀을 취 하는 것은 택 이고요. 擇米(택미)라고 그러지요.
또 그 돌이나 뉘를 말하자면 가려서 내버릴 때, 그때는 揀자를 씁니다. 그래 간과 택이 우리말로는 가릴 간. 가릴 택. 이렇게 하지만 간 자는 가려내 버리는 것이고, 택 자는 선택해서 내가 갖는 것입니다. 쌀 입장에선 선택 이고, 뉘 입장에선 택자를 간 자를 써요. 이 뉘라는 말 알아듣는지 모르겠네요.
그러니까 그 벼가 껍질이 벗겨지지 아니한 것을 뉘 라고 그러지 않습니까? 요즘은 뭐 쌀에서 그런 걸 볼 수가 없으니까, 이름마저 들어 본지도 오래가 되었습니다.
어쨌든 간과 택 의 다른 뜻을 그렇게 말씀드리느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또 자세한 뜻은 다음 시간에 두고두고 이야기하기로 그렇게 하겠습니다.
다시 해석을 하며는, 신심명 할 때 신심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신앙심. 부처님한테 신심이 있다. 하는 것이 전혀 아니 라는 것. 그것을 제발 우리가 잊어버리고, 떠올린다면 마음의 근본 문제. 또 그 마음의 문제를 통해서 우리가 가장 이상적인 삶을 어떻게 엮어 갈 것인가 하는, 그런 문제가 신심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그것을 다른 말로 하면 지극한 도다. 아주 멋진 道! 멋진 인생! 이상적인 인생! 그리고 가장 인생의 이상적인 삶의 태도! 이것이 至道(지도)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결코 어렵지 않다는 겁니다. 어렵지 않으나 오직 가려내는 것과 내가 선택해서 내 것으로 만드는 것. 이것만, 꺼릴 뿐이다. 이것만 우리가 유의하면 된다.
유의 한다는 말이 바로 그것을 하지 않아야 된다. 그런 뜻입니다.
이제 그런 이야기가 꾸준히 이어지는데, 오늘은 서론과 또 승찬 대사의 이야기. 그리고 신심명 에 대한 이야기.
특히 나병을 오랫동안 앓다가, 2조 혜가 스님을 만나서 정말 그 병고의 몸으로, 그 한 두 마디의 대화를 통해서 마음이 후련하게 이렇게, 깨달아져서 따라서 병고도 다 낫게 되는 그런 참, 그런 인물이 드물지요.
아주 그 흔치 않습니다. 정말 그 대단히 어려운 그런 경운데, 그래서 결국은 부처님의 법맥을 잇는, 그 당시 뭐 얼마나 사람들이 많았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처님의 적자로서 법을 이어가는 그런 인물이 되었다고 하는 사실!
이것은 뭐 정말 아주 대서 특필감이지요.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 승찬 대사의 인생이, 그 삶이 정말 애착이 가고 특히 관심이 가고, 마음이 가고, 또 나아가서 신심명이 또 워낙 아주 함축된 그런 뛰어난 내용이라고 하는, 그런 내용들을 말씀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오늘 신심명 공부는 여기까지 하고, 내일은 강의가 있겠는데, 모레 금요일은 청림회 법회가 있어서, 금요일은 시간이 중복이 돼서 못합니다.
그리고 토요일 일요일은 또 그 전에도 쉬기로 했고, 그 날은 또 강의가 있으면, 듣는 분들이 마음에 부담을 느끼고 해서 토요일 일요일 쉬고, 월 화 수 목 금 평일에는 월 화 수 목 금까지 5일간 하고, 토 일은 쉬도록 그렇게 그전에도 그렇게 해 왔고, 지금 앞으로도 그렇게 할 것입니다.
우선 오늘 내일 하고 그 다음에, 또 금요일 토요일 일요일 연달아 3일을 쉬게 돼서, 조금 마음에 섭섭한 것은 있는데, 그렇지만 장기간 또 한 번 시작하면 한참 해야 되니까, 그런 틀에 맞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
오늘강의는 이렇게 해서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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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維嫌揀擇(유혐간택) 이라고 그랬어요.
오직 唯(유)자. 싫어할 嫌(혐)자. 혐의 한다 그러지요?
가릴 揀(간)자. 가릴 擇(택)자. 간택을 오직 싫어할 뿐이다.
꺼릴 뿐이다. 간 하고 택하는 이것이 문제가 된다.
감사합니다
일체중생 이 행복하시길 기원합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