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순대부(正順大夫) 예의판서(禮儀判書) 諱 虔(初諱自齡) 墓碑銘-
廣州는 기전(畿甸)의 中心으로 예로부터 名門巨儒가 世居하던 地域이다.
이와 같은 廣州를 本鄕으로한 廣州李氏 또한 赫赫한 人物이 많이 나온 名門이다.
名門이란 단순히 관작(官爵) 높은 人物의 배출(輩出)만을 意味하지않는다.
義를 根本으로 삼아 안으로는 孝를 행하고 밖으로는 忠節을 드높였기 때문이다.
公은 이러한 名門의 一派인 十韻科公派 派祖로 그 根本을 이루어 놓으신 분이시다.
公의 휘(諱)는 자령(自齡)이요, 號는 퇴촌(退村)이시다.
廣州李氏 비조(鼻祖)의 諱는 自成이시니, 新羅 奈勿王朝에 內史令이시었다.
황고(皇考)의 諱는 당(唐)이시니 곧 廣州李氏의 始祖이시다.
本州의 俗吏라는 높지 않은 신분으로, 그 學問과 賢行이 높아 高麗朝 儒學의 最高敎育機關인 國子監의 生員에 오르셨다.
朝鮮朝에서는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지의금부사(資憲大夫吏曹判書兼知義禁府事)에 贈職되셨다.
황비(皇妣) 인화이씨(仁華李氏)는 本州太守의 따님이시다.
두 분 사이에 아들 다섯을 두셨는데 모두 科擧에 及第를 하는 快事를 맞으셨다.
이 다섯 아들 중 公은 넷째로, 高麗 忠肅王 十七年 庚午年에 태어나셨다.
향공문과(鄕貢文科)에 及第하신 후 뒤이어 高麗 禑王 三年에 십운과(十韻科)에 登科하시었다.
官은 정순대부 예의판서(正順大夫禮儀判書)이시다. 廣州李氏 十韻科公派를 이룬 분이시다.
둘째 伯氏 諱 元齡께서 恭愍王 戊申年에 逆僧 신돈(辛旽)을 거슬러 禍가 곧 닥치게 되자, 禍를 피하여 永川에 있는
同年인 司諫 崔元道의 집에서 숨어 지내시다가, 辛旽이 주륙(誅戮)을 당하자 비로소 돌아오셔서 諱는 集으로
字는 浩然으로 고치고 遁村이라 自號하시니, 이 때에 公께서도 諱를 건(虔)으로 改名하시었다.
公께서는 문장(文章)과 행의(行誼)로 세상에 이름이 높이 알려져 있었으나, 麗亡의 恨을 품고 落鄕하시어 世居地인
廣州德豊洞 인근 미호(渼湖)에서 강호지인(江湖之人)으로 지내시다가 이내 검단산(黔丹山)으로 잠적은둔(潛跡隱遁)하여
不事二君의 忠節을 지키셨다.
늘 子 연동(蓮仝)에게 이르기를, "내 後와 내 生去를 알리지 말고 알려고도 하지 말라, 아비가 麗朝를 따르는 것은
臣下된 道理다" 하셨다. 그 후 後人들은 그 곳을 이르러 麗士退居之村이라 하였으며, 公을 퇴촌지사(退村之士)라 하였다.
退村이라는 地名 또한 예에서 연유(緣由)하였다.
配位는 一善郡夫人 善山金氏이신데, 지극한 품성과 순수한 행실로 규문(閨門)의 미덕이 世族의 모범이 되셨다.
公의 子 연동(蓮仝)은 高麗朝 봉순대부 판전의시사(奉順大夫判典儀寺事)이며, 孫인 봉로(蓬老)는 朝鮮朝 贈領議政이다.
公의 曾孫 두신(斗信)은 高麗朝末에 文科及第하여 봉익대부 행 전공판서(奉翊大夫行典工判書)에 이르렀으나, 端宗元年
계유정난(癸酉靖難)에 連累되어 長興으로 流配되었다. 肅宗十七年 辛未年에 신원복관(伸寃復官)되었으며 시호(諡號)는
충민(忠愍)이다.
玄孫으로 맏이인 비(毖)는 豐海道察訪이며, 둘째인 수(遂)는 觀察使를 지냈다.
來孫 鏡城都護府使 경유(耕㽥)는 文宗의 顧命大臣으로 단종(端宗)의 보위(保衛)를 위해 진력(盡力)하다가 癸酉靖難에
禍를 당한 단종조 순절신(端宗朝殉節臣)이다.
장릉(莊陵) 충신배식단사 十二충신조사위(忠臣配食壇祠 十二忠臣朝士位)에 配享되었다.
또 다른 來孫으로 毖의 長子인 穩城都護府使 숙경(叔耕)은 癸酉靖難 渦中에 任地인 穩城에서 殉節하였으며,
第二子 숙강(叔剛) 역시 文科에 及第하여 程驛察訪 등 여러 벼슬을 歷任하고, 通政大夫行成川都護府使에 이르렀으나
癸酉靖難에 連累되어 국문(鞠問)을 당한 후 물고(物故)되어 殉節하였고, 第三子 숙정(叔貞)은 甲山都護府使를 歷하였는데
成宗朝 묘당 공론(廟堂公論)에 參與하여 北方領土守護를 위한 進言을 올리는 등 수 많은 貢獻을하였다.
第四子인 숙명(叔明) 또한 通政大夫行順天都護府使에 이르렀으나, 癸酉靖難에 連累되어 鞠問 후 物故되어 殉節하였다.
이렇듯 한 世代一族이 거의 殉節하는 아픔을 당하였다.
곤손(昆孫) 유한(維翰)은 成宗十年 別試文科에 及第하여 成均館博士와 典籍을 歷하였으며, 침(琛)은 成宗 十四年에
뛰어난 재주와 높은 德이 있는 어진 선비로서 世子師傅에 薦擧되어 세자 시강원(世子侍講院) 文學에 除授되었고
그 후 함열현(咸悅縣)을 다스렸다.
발동(發東)은 文科及第 奉正大夫行茂昌郡守이고, 척(惕)은 通訓大夫行京畿左道水運判官이다.
잉손(仍孫) 맹균(孟均)은 司馬兩試로서 宗簿寺主簿이며, 중균(仲均)은 昭威將軍行司僕寺判官이다.
찬종(纘宗)은 嘉善大夫行五衛將이며, 정수(精秀)는 贈兵曹參議이다.
운손(雲孫) 지분(之蕡)은 中宗 十四年 己卯式年試 文科及第 後 戶曹正郞을 거쳐 朝奉大夫泰安郡守이며,
지번(之蕃)은 折衝將軍行訓鍊院副正이고, 지운(之芸) 역시 中宗 十四年 己卯賢良科에 及第하여 朝奉大夫行主簿이다.
원성(元成)은 成宗朝 丙午式年試 文科及第하여 嘉善大夫行光州牧使이며, 원화(元和) 또한 中宗朝 丁卯增廣試 文科로서
嘉善大夫行黃州牧使이다.
九世孫인 경춘(景春)은 迎日縣監이며, 十世孫인 홍정(弘廷)은 禮賓寺主簿이고, 봉정(鳳禎)은 弘文館博士이며,
철(哲)은 尤庵의 門人으로 贈左承旨이다.
이밖에도 科擧及第 및 南行으로 벼슬에 오르고, 文章과 節義로서 이름을 떨친 後孫들이 많고 많아 다 記載조차
할 수 없으나, 三一獨立運動民族代表 三十三人 중 一員인 愛國志士 종훈(鍾勳) 또한 公의 二十一世 後孫이다.
端宗朝에 來孫인 鏡城府使 耕㽥가 癸酉靖難에 連累되어 온 집안이 禍를 당하면서, 公의 後孫들은 至難하고 孤單한
試鍊의 時期를 맞이하였으나, 不斷한 勞力과 精誠으로 차차 家勢를 回復하여 諸 여느 門中과도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名望과 世德을 갖출 수 있게 되었으니, 이 모두는 至誠하신 公의 음덕(蔭德)이 아닐 수 없다.
公의 墓는 廣州古邑 驛村後麓乾坐였으나, 連이은 三代獨子와 曾孫 斗信과 來孫 耕㽥의 癸酉靖難 連累 등의 苦難과
逆境을 겪으면서 哀痛하게 그만 失其處하였다. 己亥年에 廣州柳寺里寺洞 吉地에 招魂으로 封瑩을 助成하고 墓碣石儀를
具備하여 모시니, 六百餘年間의 宿願을 成就하게 되었다.
그 後 公의 墓域인 廣州 柳寺里一帶가 第二嶺東高速道路로 編入됨으로 因하여 西紀 二O一四年閏九月初四日에
廣州市 초월읍 선동리 仙掌洞, 멀리 白馬山 굽어보이는 武甲山麓 陽地에 마련한 墓域 艮坐坤向으로 移葬해 모셨다.
공경히 銘하여 가로되,
淮安李氏는 우리 동방의 명망 높은 문벌,
公은 그 후예로서 中興祖의 넷째 아들이라네.
아름다운 家風이어받아 每事에 恭敬 다하였고,
타고난 자품(資稟) 청렴하여 곧고 방정하였지.
이윽고 떨쳐 일어나니 향공진사(鄕貢進士)요,
십운과(十韻科)로 또한 그 이름 높았네.
義理 더할 나위 없이 엄정하여 물러날 때를 아니,
黑白 분명히 가리어 진퇴에 허물없었어라.
이에 스스로 退村이라 自號하고,
고향땅 깊은 山間 은거(隱居)하였네.
진퇴(進退)에 처해 외로운 소나무 매만지며 뜨락 거닐었고,
순수한 이들과 매화 바라보며 처마 밑 서성였다오.
이내 미강(渼江) 한 굽이에 한가로이 노닐 것을 다짐했으니,
그 세운 뜻 확고하여 마침내 검산(黔山)에 은둔하였네.
위태로운 사직(社稷) 물러나서도 애오라지 근심하니,
머리칼은 희어지고 마음은 마냥 붉었다오.
그 高貴한 節義 열수(冽水)에 어리어 萬年을 흐르고,
붉은 정기 우뚝한 黔山에 서리어 누대(累代)를 지키는구나.
내 명(銘)을 지어 그 아름다운 자취 기록하나니,
이로써 千秋萬歲에 남기리.
檀紀四三五O年(西紀二O一七年) 丁酉 月 日
文學博士 坡平后人 賢菴 尹錫山 謹撰
美術學博士 安東后人 近園 金洋東 謹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