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泰安郡守李公墓誌銘>
公諱之蕡 字子實 廣州人 奉翊大夫 典工判書 /
斗信之五世孫也 斗信生毖 毖生叔剛 叔剛生 /
發東 發東生宗簿主簿孟均 乃公之考 而妣金 /
氏 卽監察炳文之女也 丁未冬生公 公性踈儉 /
不治産業 篤於文學 登己卯文第 由博士 歷典籍 /
佐刑部 而獄訟息 令樂安而民生遂 勤恪奉公 病 /
纏于身 以戶曺正郞 求爲泰安郡守 欲保其身 /
後數月 終于官 年五十六歲 客死異地 無親 /
族 只有東床一郞 扶轝南▣▣▣▣▣▣公娶僉 /
知朴樤之女 生二女 長適安艇 次幼▣▣▣女 /
並幼 朴氏先公沒 又娶生員朴益㥳▣▣未數 /
年而逝 ▣(尤)可慟也 歲壬寅月十一日十四▣▣府 /
東十里許億佛山下先塋之側經營▣▣▣ /
獨▣當公 位不稱賢 壽不滿德 鳴呼惜也 /
嘉靖二十二年 月 日 謹誌
공의 휘는 지분(之蕡)이며 자는 자실(子實)이니 본관은 광주(廣州)이다.
봉익대부 전공판서 두신(斗信)의 5세손이다.
두신이 비(毖)를 낳고 비가 숙강(叔剛)을 낳고 숙강이 발동(發東)을 낳고
발동이 종부시 주부(宗簿主簿) 맹균(孟均)을 낳았는데 이 분이 바로 공의 아버지이다.
비(妣)는 감찰(監察) 김병문(金炳文)의 따님으로 정미년 겨울에 공을 낳았다.
공은 성품이 소검(踈儉)하여 집안 살림을 다스리지 않고 문학만 독실히 공부하였다.
기묘년 문과에 급제하여 박사(博士)를 거쳐 전적(典籍)을 지냈다.
형부(刑部)를 보좌하자 송사가 없어졌고 낙안을 다스릴 때는 백성들의 생업이 이루어졌다.
워낙 공무를 부지런하고 조심스럽게 수행하는 바람에 몸에 병이 들었는데,
호조정랑으로 있으면서 태안군수가 되어 몸을 보전하려고 하였으나 몇 달 뒤에 관사에서 돌아가셨다.
이 때 나이가 56세였다.
타지에서 생을 마감하였으므로 친족이 없이 그저 사위 한 사람이 상여를 붙들고 -결락-
공은 첨지중추부사 박조(朴樤)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두 명의 딸을 낳았는데
장녀는 안정(安艇)에게 시집가고 차녀는 어직 어리다. -결락- 모두 어리다.
박씨가 공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기에 또 생원 박익원(朴益㥳)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는데
몇 년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나니 더욱 통탄스럽다.
壬寅년 11月 14日 장흥부 동쪽 10리쯤에 있는 억불산 선영 옆에 -결락-
직위는 그의 어진 인품에 걸맞지 않았고,
수명은 그의 덕만큼 채워지지 않았으니 오호라 그저 아깝다.
가정 22년 월 일 삼가 지음.
- 고전번역원 역주 -
註) 奉翊大夫典工判書
봉익대부(奉翊大夫)는 고려 조 이품 문관 품계.
전공판서(典工判書)는 고려 말에서 조선 초기의 관직으로, 조선 조 공조판서와 동일한 관직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