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의 함성, “와! 엄마! 눈 왔다!”
쭉쭉 뻗는 불기둥을 품은 샛강 풍경이 마치 메타세콰이어 늘어선 가로 수 길 같다. 아파트 숲에서 새어나온 불빛이 샛강(안양천)에 비쳐 짓는 이른 아침 녘 풍경이다. 그 풍경 위에 선녀들이 흰 옷깃을 나풀거리며 내린다. 온 몸 한가득 함박웃음까지 머금었다.
선녀의 몸은 대지에 닿는 순간 부서지고 이내 변할 여린 몸이다. 그 조차도 모자라, 비록 찬 몸이지만, 그녀는 곧바로 사라지기까지 한다. 오늘처럼 날이 추우면, 금방 사라지는 것만은 면한다. 그녀가 변해 금방 사라지지 않는다고 하여 마냥 즐겁진 않다.
도시에 내리는 선녀는 흙먼지에 인간의 더러운 발길마저 온몸으로 받아야 한다. 그 때 일어나는, 몸이 부서지고 찢기는 고통쯤이야 참을 수 있다. 하지만 그녀조차도 참을 수 없는 것이 있다. 바로 인간들이 토해내는 도시의 검은 먼지들이다. 더군다나 짓이겨진 검은 먼지들이 선녀의 몸에 닿으면, 선녀의 몸은 순간 검게 변하거나 얼룩지고 만다.
슬프고 또 슬픈 일이다. 이 때 선녀는 고운 빛과 함께 고운자태마저 잃는다. 고운 빛과 고운 자태를 잃은, 곧 얼굴을 바꾼 선녀는 이내 악마가 되어 추하기도 하지만, 때론 악마보다도 더 심술 굳다.
악마가 된 선녀는 마치 보복을 하기라도 하듯 인간의 옷에 덧칠을 해댄다. 때론 온갖 멋을 부린 채 사뿐사뿐 걷은 아가씨 흰옷에 달라 들어 보기 좋게 한판 굿판을 벌려 놓는다. 어찌할 줄 모르며 울상을 짓는 아가씨, 동동 발 구르지만, 악마가 된 선녀(이하 악녀)는 끝내 그것을 외면한다. 악녀는 아가씨가 투덜거리며 손을 댈 때마다, 흰 옷에 더 넓게 자리를 잡는 한편 몸을 뉜다. 이를 통해 악녀는 더 깊숙이 그 곳에 몸 을 숨긴다.
그것도 잠시 악녀가 숨을 돌릴 양이면, 더 깊숙이 몸을 순긴 악녀지만, 달달 돌아가는 세탁기 속에서는 악녀조차 어쩔 도리가 없다. 몸을 숨기려 악착을 떨지만 더는 몸을 숨기지 못한다. 그 때면 비록 악녀지만 그녀 역시 한 없이 슬퍼진다. 세탁기 속의 비누 냄새도 역겹지만 그곳을 나와 썩은 내 진동하는 수채 구멍을 지날 때에는 정말 죽는 것만큼이나 싫다. 하지만 애초 의기양양 하게 펄떡 튀어 멋쟁이 아가씨 흰 옷에 숨어든 악녀다.
그 때에도 빙빙 도는, 더군다나 비누 냄새 진동하는 역겨운 세탁기 속에 자신이 들 것을 악녀가 아예 몰랐지만, 세탁기 속에서 나와 수채 구멍을 지나야 한다는 것은 더더욱 몰랐다. 하기야 악녀가 그 점을 사전에 안 듯 뭣하랴. 그 무거운 차량의 검은 바퀴가 선녀의 몸을 짓누르는 머리, 어쩔 수 없이 악녀가 되어 멋쟁이 아가씨 흰 옷에 숨어든 것을!
변명이 아니라 그녀에게 그것은 운명적 선택 같은 것이었다. 하나 그 많은 선녀 들 중 하필 왜 그녀들만이 이처럼 잔인한 악녀의 운명에 처해졌나?
“팔자라는 것이 바로 그런 것이야.”
하늘이 진노한 듯 쾅쾅쾅 알아듣지 못할 목소릴 때마침 내지른다. 악녀마저 그 소리에 놀라 주춤 한 걸음 물러선다.
도시를 피해 내린 다른 선녀들은, 자신들의 고운자태를 온전히 보전한 채, 온 산하 이 곳 저 곳에 다감하게 내려, 그 곳에 있는 모든 것들의 겨울 흰옷으로 거듭난다. 새로운 생명을 부여 받은 것이다. 앙상한 겨울나무의 흰 옷이 되거나, 산과 들에 널린 검은 바위의 흰 옷이 되기도 하고, 어느 두메산골 장독대에 놓인 독과 항아리들의 두터운 외투가 되기도 한다.
이쯤이면 대지 위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흰 옷이 된 선녀의 흰 몸뿐이다. 그 때 한 소년이 대지에 나타나 선녀 몸 다칠세라 사뿐 한 발 들어 놓으면, 그 여린 아픔마저도 참지 못해 토하는 듯 울려나는 선녀들의 합창, 뽀드득. 소년이 두 번째 발 들어 살포시 놓지만 또다시 이어지는 선녀들의 합창, 뽀드득. 그 합창소리 연신 들으려, 소년이 연신 발 들었다 놓으면, 소년의 발밑에서 연신 울려나는 선녀들의 합창소리, 뽀드득, 뽀드득, 뽀드득 …. 온 종일 선녀들의 합창을 듣다가 소년은 서산 봉우리에게 짧은 겨울 해를 빼앗기고 만다.
집을 향해 돌아서는 소년의 발걸음이 무겁다. 저녁밥을 먹는 둥 마는 둥하다 소년은 상에서 물러났다. 아직 동생들은 밥상에 대달려 있다. 소년은 저녁 밥상이 채 물러나기도 전에 냉한 마루에 등을 반쯤 댄 채 잠이 들었다. 안쓰러운 듯 바라보던 소년의 아버지가 소년을 안아 달빛 새어드는 다락방에다 누인다. 잠결이지만 소년은 차가운 듯 이불 한조금을 당기려 몸을 뒤척이더니, 이내 깊은 잠에 빠진다.
깊은 잠에 빠져든 소년의 귀에 시샘어린 달빛이 다가와 같이 더 놀자 속삭인다. 달빛과 소년의 속삭임, 그 속삭임이 마치 대 숲 앞에 놓인 장독 위에 밤새 선녀 내려앉는 소리 같다. 사락사락, 사락사락, ….
소년의 귀에 먼 듯 가까운 듯 들렸을 어두운 달빛 바람과 함께 내린 선녀들의 속삭임, 겨울 밤 풍경을 짓는 그 소리. 하지만 잠든 소년은 그 소릴 정작 듣지 못했다. 긴 겨울밤과 함께 찾아 온 흰 눈 내린 아침 대지 위에 펼쳐진 풍경을 바라보던 소년이 마치 신세계를 대한 듯 함성을 지른다.
“와! 엄마! 눈 왔다.”
2010.1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