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군 산하의 3개 사단 병력을 맞아 10여 차례에 걸쳐 고지를 뺏고 뺏기는 혈전을 치른 뒤 끝내 고지를
탈환했다. 사진은 승리를 거둔 국군 9사단 장병이 고지 위에서 환호하는 모습이다.
수도고지와 지형능선에서의 싸움은 아군의 승리로 끝을 맺었다. 그러나 전투는 역시 더 벌어지고 있었다. 이번에는 백마(白馬)고지였다. 6·25전쟁 중에 벌어진 고지전 가운데 가장 치열했던 싸움이 백마고지 전투다. 고지 자체가 백마의 형상은 아니었다. 그러나 모두 30만 발의 포탄이 떨어진 고지는 전투 뒤에 흙이 모두 뒤집히고, 그 위에 다시 포탄이 떨어진 하얀 자국이 산을 모두 뒤덮어 멀리서 볼 때 하얀 말 한 마리가 누워 있는 모습과 같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던 것이다.
백마고지는 한반도 중부의 광활한 평야지대인 철원과 수도 서울로 길이 나 있는 전략적 요충이다. 이 고지를 선점하는 쪽이 넓고 비옥한 철원평야를 차지할 수 있었고, 아울러 서울로 통하는 후방의 주요 보급로를 넘볼 수 있었다. 군사지정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고지였던 셈이다. 이곳의 방어를 맡고 있던 국군은 김종오 소장이 이끄는 9사단이었다.
개전 초기 춘천지역을 성공적으로 막아냈던 김 장군은 9사단을 이끌며 ‘철의 삼각지대’를 이루는 철원에 병력을 전개해 모두 11㎞에 이르는 전투 정면을 담당하고 있었다. 아군은 1개 사단이었지만 적은 3개 사단의 병력이었다. 역시 중공군이었다. 저들은 압도적인 병력을 늘 내세웠다. 백마고지 전투에서도 중공군은 수적인 우세를 이용해 거센 공격을 펼치면서 고지를 올라왔다.
이 고지의 중요성이 적에게도 깊이 각인됐었던 모양이다. 중공군은 사전에 예행연습까지 펼쳤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백마고지와 비슷한 지형에서 미리 공격전술을 익혔다는 것이다. 적이 몰려 온 시점은 10월 6일이었고, 전투는 9일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계속 이어졌다. 역시 어두운 밤을 타고 중공군이 몰려왔다. 특이한 점은 중공군이 사전에 주변 봉래호의 제방을 폭파한 뒤 역곡천을 범람시키는 작전을 구사했다는 점이다. 김종오 9사단장은 전선 좌우에 연대를 배치하면서 예비로 1개 연대를 대대로 나눠 분산 배치하는 등 치밀한 방어전략을 짰다.
그러나 중공군의 역곡천 범람 작전으로 1개 대대가 증원 병력으로 전선을 지원하는 데 차질을 빚기도 했다. 그렇지만 9사단은 역전의 지휘관이었던 김종오 장군의 지휘로 일사불란하게 적의 도발에 대응했다. 모두 12차례에 달하는 공방전(攻防戰)이 벌어졌다. 9사단의 29연대 2대대장 김경진 소령은 전투 과정에서 적의 박격포탄을 맞아 전사했다. 10월 15일 새벽 마침내 9사단 28연대가 마지막 기습을 감행해 고지를 완전히 장악하고, 29연대가 고지 북방의 전초진지를 탈환함으로써 백마고지 전투는 종결됐다.
중공군은 38군 소속 3개 사단이 교체로 전선에 투입됐다. 양쪽의 피해는 매우 컸다. 아군은 3500명의 사상자를 냈다. 중공군은 약 세 배에 달하는 1만여 명이 죽거나 부상을 당했다. 국군이 적의 공격을 물리치기 위해 퍼부은 포탄은 약 22만 발, 중공군 또한 5만5000여 발을 고지에 쏟아부었다.
적은 많았지만 아군의 거센 포격, 미 공군의 폭격으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던 것이다. 미 공군은 낮에만 669회, 야간 76회 폭격을 함으로써 아군의 효율적인 방어를 도왔다. 중공군이 이 백마고지 전투에 투입한 군대는 정예군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병력 손실과 무기 및 장비 손실이 워낙 커 중공군 38군은 결국 23군과 교대해 후방으로 물러나고 말았다.
나는 매일 아침 대구의 육군본부에서 전선 상황을 자세히 보고받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피 냄새가 물씬 풍겨났다. 내가 겪은 낙동강 교두보 방어전의 다부동 전투 때의 장면이 머릿속으로 떠오르고는 했다. 모두 격렬한 전투였다. 적을 제압하기 위해 먼저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 위한 싸움, 때로는 육탄전을 감행하면서 적의 눈을 바라보며 장검으로 찔러야 하는 처절한 전투였다.
전쟁 국면을 총괄하는 육군참모총장으로서 나는 고지전을 열심히 뒷받침해야 했다. 부지런히 보급물자를 전선으로 실어 보내고, 죽거나 부상당한 장병을 빼고 새 병력을 조직해 전투 현장에 내보냈다. 그러면서도 나는 국군의 전과 보고가 올라올 때마다 늘 기뻤다. 그저 승리해서가 아니었다. 중공군의 거센 도발을 국군이 침착하게 물리치고 있었다는 점 때문이었다. 국군 2군단 재창설 뒤 현대전의 핵심인 포병을 양성하기 시작하면서 국군의 전투력이 눈에 띄게 성장하고 있다는 사실이 52년 9월에 시작한 고지전에서 증명이 되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