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
한 그루의 나무도 없이
서러운 길 위에서
무엇으로 내가 서 있는가
새로운 길도 아닌
먼 길
이 길은 가도가도 황토길인데
노을과 같이
내일과 같이
필연코 내가 무엇을 기다리고 있다.
갈대
환한 달빛 속에서
갈대와 나는
나란히 소리없이 서 있었다.
불어오는 바람 속에서
안타까움을 달래며
서로 애터지게 바라보았다.
환한 달빛 속에서
갈대와 나는
눈물에 젖어 있었다.
무명
뭐라고
말할 수 없이
저녁놀이 져가는 것이었다.
그 시간과 밤을 보면서
나는 그 때
내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봄도 가고
어제도 오늘 이 순간도
빨가니 타서 아, 스러지는 놀빛.
저기 저 하늘을 깍아서
하루 빨리 내가
나의 무명을 적어야 할 까닭을.
나는 알려고 한다.
나는 알려고 한다.
강물
강물이 모두 바다로 흐르는 까닭은
언덕에 서서
내가
온종일 울었다는 그 까닭만은 아니다.
밤새
언덕에 서서
해바라기처럼 그리움에 피던
그 까닭만은 아니다.
언덕에 서서
내가
짐승처럼 서러움에 울고 있는 그 까닭은
강물이 모두 바다로만 흐르는 그 까닭만은 아니다.
다음
멀잖아 북악(北岳)에서 바람이 불고
눈을 날리며, 겨울이 온다.
그날, 눈오는 날에
하얗게 덮인 서울의 거리를
나는 봄이 그리워서 걸어가고 있을 것이다.
아무것도 없어도
나에게는 언제나
이러한 '다음'이 있었다.
이 새벽, 이'다음'
이 절대(絶對)한 불가항력(不可抗力)을
나는 내 것이라 생각한다.
이윽고, 내일
나의 느린 걸음은
불보다도 더 뜨거운 것으로 변하여
나의 희망은
노도(怒濤)보다도 바다의 전부보다도
더 무거운 무게를 이 세계에 줄 것이다.
그러므로, 이 '다음'은
눈오는 날의 서울 거리는
나의 세계의 바다로 가는 길이다.
어두운 밤에
수만년 전부터
전해 내려온 하늘에,
하나, 둘, 셋, 별이 흐른다.
할아버지도
아이도
다 지나갔으나
한 청년이 있어, 시를 쓰다가 잠든 밤에 ......
새
외롭게 살다 외롭게 죽을
내 영혼의 빈터에
새날이 와, 새가 울고 꽃잎 필 때는,
내가 죽는 날
그 다음날
산다는 것과
아름다운 것과
사랑한다는 것과의 노래가
한창인 때에
나는 도랑과 나뭇가지에 앉은
한 마리 새
정감에 그득찬 계절
슬픔과 기쁨의 주일(週日),
알고 모르고 잊고 하는 사이에
새여 너는
낡은 목청을 뽑아라
살아서
좋은 일도 있었다고
나쁜 일도 있었다고
그렇게 우는 한 마리 새.
주막에서
(도끼가 내 목을 찍은 그 훨씬 전에 내 안에서 죽어간 즐거운 아기를 ---장쥬네)
골목에서 골목으로
거기 조그만 주막집.
할머니 한 잔 더 주세요.
저녁 어스름은 가난한 시인의 보람인 것을 ......
흐리멍텅한 눈에 이 세상은 다만
순하디 순하기 마련인가,
할머니 한 잔 더 주세요.
몽롱하다는 것은 장엄하다.
골목 어귀에서 서툰 걸음인 양
밤은 깊어 가는데,
할머니 등 뒤에
고향의 뒷산이 솟고
그 산에는
철도 아닌 한겨울의 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는 것이다.
그 산 너머
쓸쓸한 성황당 꼭대기,
그 꼭대기 위에서
함빡 눈을 맞으며, 아기들이 놀고 있다.
아기들은 매우 즐거운 모양이다.
한없이 즐거운 모양이다.
삼청공원에서
---어머니 가시다
1
서을에서 제일 외로운 공원으로 서울에서 제일 외로운 사나이가 왔다. 외롭다는 게 뭐 나쁠 것고 없다고 되뇌이면서...... 이맘 때쯤이 그곳 벗나무를 만발하게 하는 까닭을 사나이는 어렴풋이 알 것만 같았다. 벗꽃 밑 벤치에서 만산을 보듯이 겨우 의젓해지는 것이다. 쓸쓸함이여, 아니라면 외로움이여, 너에게도 가끔은 이와 같은 빛 비치는 마음의 계절은 있다고, 그렇게 노래할 때도 있다고, 말 전해다오.
2
저 벗꽃잎 속에는 십여년 전 작고하신 아버지가 생전의 가장 인자했던 모습을 하고 포오즈를 취하고 있고, 여섯에 요절한 조카가, 갓핀 어린 꽃잎 가에서 파릇파릇 웃고 있는 것이다. 어머니, 어머니는 어디 계세요......
주일-2
1
그는 걷고 있었습니다.
골목에서 거리로,
옆길에서 큰길로,
즐비하게 늘어선
상점과 건물이 있었습니다.
상관 않고 그는 걷고 있었습니다.
어디까지 가겠느냐구요?
숲으로, 바다로,
별을 향하여
그는 쉬지 않고 걷고 있습니다.
2
낮에는 찻집, 술집으로
밤에는 여인숙,
나의 길은
언제나 꼭 같았는데......
그러나
오늘은 딴 길을 간다.
회상-1
아름다워라, 젊은날 사랑의 대꾸는
어딜 가 ?
어딜 가긴 어딜 가요 ?
아름다워라, 젊은 날 사랑의 대꾸는
널 사랑해 !
그래도 난 죽어도 싫어요 !
눈오는 날 시랑은 쌓인다.
비오는 날 세월은 흐른다.
편지
점심을 얻어 먹고 배부른 내가
배고팠던 나에게 편지를 쓴다.
옛날에도 더러 있었던 일,
그다지 섭섭하진 않겠지 ?
때론 호사로운 적도 없지 않았다.
그걸 잊지 말아 주길 바란다.
내일을 믿다가
이십년 !
배부른 내가
그걸 잊을까 걱정이 되어서
나는
자네한테 편지를 쓴다네.
진혼가
(저쪽 죽음의 섬에는 내 청춘의 무덤도 있다 ---니이체)
태고적 고요가
바다를 덮고 있는
그 곳.
안개 자욱히
석유불처럼 흐르는
그 곳.
인적 없고
후미진
그 곳.
새 무덤.
물결에 씻긴다.
국화꽃
오늘만의 밤은 없었어도
달은 떴고
별은 반짝였다.
괴로움만의 날의 없어도
해는 다시 떠오르고
아침은 열렸다.
무심만이 내가 아니라도
탁자 위 컵에 꽃힌
한 송이 국화꽃으로
나는 빛난다 !
회상 - 2
그 길을 다시 가면
봄이 오고,
고개를 넘으면
여름빛 쬐인다.
돌아오는 길에는
가을이 낙엽 흩날리게 하고,
겨울은 별수없이
함박눈 쏟아진다.
내가 네게 쓴
사랑의 편지.
그 사랑의 글자에는
그러한 뜻이, 큰 강물되어 도도히 흐른다.
아가야
해뜨기 전 새벽 중간쯤 희부연 어스름을 타고 낙심을 이리처럼 깨물며, 사직공원 길을 간다. 행인도 드문 이 거리 어느 집 문 밖에서 서너살 됨 직한 잠옷 바람의 애띤 계집애가 울고 있다. 지겹도록 슬피 운다. 지겹도록 슬피 운다. 왠일일까 ? 개와 큰집 대문 밖에서 유리 같은 손으로 문을 두드리며 이 애기는 왜 울고 있을까 ? 오줌이나 싼 그런 벌을 받고 있는 걸까 ? 자주 뒤돌아 보면서 나는 무심할 수가 없었다.
아가야, 왜 우니 ? 이 인생의 무엇을 안다고 우니 ? 무슨 슬픔 당했다고, 괴로움이 얼마나 아픈가를 깨쳤다고 우니 ? 이 새벽 정처없는 산길로 헤매어 가는 이 아저씨도 울지 않는데......
아가야, 너에게는 그 문을 곧 열어줄 엄마 손이 있겠지. 이 아저씨에게는 그런 사랑이 열릴 문도 없단다. 아가야 울지 마 ! 이런 아저씨도 울지 않은데 .......
귀천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며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들국화
산등성 외따른 데,
애기 들국화.
바람도 없는데
괜히 몸을 뒤뉘인다.
가을은
다시 올 테지.
다시 올까 ?
나와 네 외로운 마음이,
지금처럼
순하게 겹친 이 순간이 --------
한낮의 별빛
----- 새
돌담 가까이
창가에 흰 빨래들
지붕 가까이
애기처럼 고이 잠든
한낮의 별빛을 너는 보느냐......
슬픔 옆에서
지겨운 기다림
사랑의 몸짓 옆에서
맴도는 저 세상 같은
한낮의 별빛을 너는 보느냐......
물결 위에서
바윗덩이 위에서
사막 위에서
극으로 달리는
한낮의 별빛을 너는 보느냐.......
새는
온갖 한낮의 별빛 계곡을 횡단하면서
울고 있다.
첫댓글 오늘이 보름이네요.
애터지는 일 있다면
흔들리는 갈대와 함께 환한 달빛으로 위로 받으셔요 ㅎㅎ
덕분에 시도 읽네요...
시 없는 삭막한 삶을 살고 있음도 깨닫게 되고...
꽤 괜찮은,
아니 굉장히 의미심장한 책방이 되겠는 걸요!
막걸리 한 잔에 서툰 걸음으로 시인은 산다는 것과 아름다운 것과 사랑한다는 것을 노래합니다.
마침내 시인은
불가항력의 절대한 내일을 맞아
이른 새벽 불보다 뜨거운 걸음으로 바다로 향합니다.
선배님
저도 오랜만에 시를 만납니다. ㅎㅎ
오랜만에 좋은글봅니다
샘물처럼 맑은 시선,
어지러진 마음에 찬물샤워를 한 느낌이에요.
한낮의 별빛은 어떤 빛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