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河東 都先山 전경 ~
◈ 파조(派祖)
◈ 1세조(世祖) 정석숭 (鄭碩崇) 고려 때 정2품 문화시중.
◈ 2세조(世祖) 정탁신 (鄭卓申) 고려 때 정3품 지추밀원부사.
◈ 3세조(世祖) 정의균 (鄭義均) 고려 때 정2품 예문관 대제학.
◈ 4세조(世祖) 정연서 (鄭延敍) 고려 때 하동 호장.
◈ 시조 및 사위설단도 ◈
◈ 시조(始祖) ~ 1세조(世祖) ~ 2세조(世祖) ~ 3세조(世祖) ~ 4세조(世祖)
깊고 깊은 마음속에 숨은 덕(德)을 쌓는 것이 자손을 위하는 계책이 된다고 하였다. 후손들에게 끼친 공의 음덕이 이와 같으나 후삼국 이후 많은 난리[亂離]들로 인하여 각 집안에 전해오던 문헌이 모두 없어져 버린 허물 때문에 시조(始祖) 휘 도정(諱 道正)공으로부터 그 아래 휘 석숭, 휘 탁신, 휘 의균, 휘 연서, 사대[四代]의 생졸[生卒]과 배 위가 전해지지 않을뿐더러 무덤 또한 모두 돌봄을 잃어서 자손들의 한스러움을 낳고 있다.
하동은 우리 시조께서 득관 한 고장으로 그 영혼[靈魂] 또한 하동에 있을 것이 당연 할 뿐더러 밀직공의 무덤이 하동에 있어 온 즉 조상의 영혼이 여기에 의존하여 오갈 것으로 알고. 이에 하곡재라고 일컫는 밀직공의 재실 뒤편에 땅을 가려서 시조단을 쌓아 주벽과 같게 하고 또 네 분의 단을 그 아래에 쌓아서 매년 제례를 지내고있다, 사당의 소목제례와 흡사하여 조손과 부자가 한 곳에 계시는 형국이다.
◈ 5세조(世祖) 정국용 (鄭國龍) 고려 때 상장군.고종 때 정3품 밀직부사 증직.
공의 휘(諱)는 국룡(國龍)이시고, 문과에 급제하시어 좌승(左丞)을 지내신 후, 상장군(上將軍)에 오르셨으며 고종조(高宗朝)에 봉익대부(奉翊大夫) 밀직부사(密直副使)에 증직 되셨다. 『동계(桐溪) 정온(鄭蘊)선생이 찬 하신 문헌공(汝昌) 증손 현감공(大民-대민)의 묘 비문에 공의 위계가 종2품 上인 광정대부(匡靖大夫)로 되어 있음은, 공이 아들 문충공의 공적으로 증직 되신 것 같은데, 문충공이 1309년(충선왕1년)에 종 2품 동지 밀직사사에 오르셨기 때문에, 공은 그 다음해에 증직 되셨을 것이니 1310년에는 밀직사(密直司)의 관질(官秩)을 높여, 첨의부와 함께 양부(兩府)라 하였으므로, 거기에 부사(副使)는 따라서 종 2품 上 품계인 광정대부로 되었을 것이라 한다.』
공의 묘소(墓所)는 하동군 적량면 하곡(河東郡 赤良面 鰕谷) 갑좌(甲坐)에 석장(石葬)으로 모셨으며, 아들은 문충공(文忠公) 지연(芝衍)과, 좌윤공(左尹公) 난연(蘭衍) 두분이시다.
서기 1818년(순조 18년-戊寅)에 공의 18세손인 지우재공(遂榮-수영)이 신도비문(神道碑文)을 찬하고, 금학당(琴學堂) 이학서(李學書) 공이 글씨를 썼으며, 또 1899년(고종 36년. 己亥)에 공의 8세손 문헌공(汝昌-여창)후 죽헌공(泰鉉-태현)이 제각기(祭閣記)를 찬하였다.
묘소 : 경남 하동군 적량면 동리 산 1~15번지 경상남도 기념물 263호 <2006년 1월 12일 지정>
◈ 6세조(世祖) 정지연 (鄭芝衍) 고려 충렬왕 때 중랑장 역임.
공의 휘(諱)는 지연(芝衍)이시며, 밀직공(國龍-국룡)의 장자(長子)로, 중국어에 능하셔서 통역관으로, 누차 원(元)나라에 왕래하셨는데, 충렬왕(忠烈王) 2년에 원나라에 사신(使臣-譯官)으로 가셔서, 원나라로부터 “제주도의 진수군(鎭戍軍)은 너희 나라에서 관리를 보내 다스리도록 하라”는, 황제의 교지(敎旨)를 받아 가지고 오셨으며, 충렬왕 3년에는 산원(散員)으로 계시면서, 원나라에 가셔서 황제로부터 기미년(己未年)이래로 중조(中朝)에 도입(逃入)한 인구(人口)를 모두 본국에 쇄환(刷還)토록 하라는 명을 받고 많은 유랑민을 데리고 돌아 왔으며, 이때 문과에 올라, 1277년(충렬왕 3년. 丁丑)에 또 낭장(郎將)으로, 원나라에 파견되어 쌍성(雙性)의 첩자(牒者)를 체포하였음을 알리고 이듬해에 금, 은패(金, 銀牌)를 받아 가지고 귀국하시고, 그 해에 중랑장(中郞將)으로 승차하셨으며, 1279년(충렬왕 5년. 己卯)에 좌상시 권수 동지 밀직사사(左常侍 權授 同知 密直司事)에 제수되셨다.
그후 1309년 충선왕 1년에는 동지 밀직사사(密直司事)를 배명(拜命)받으셨으며, 1313년 충숙왕1년에는 중대광 도첨의찬성사(重大匡 都僉議贊成事)와 판선부사(判選部事)를 배명 받으시고 치사(致仕)하셨다. 『이 기록은 고려사에 실려 있는데 단 충숙왕 1년에 첨의 찬성사(僉議 贊成事)를 삼아 인(因)하여 치사(致仕)케 하였다고 되어 있음』
그리고, 세기(世紀)의 요항(要項)을 살펴보니, 공은 글을 잘 짖고 그림도 잘 그리셔서, 충렬왕이 원나라에 가실 때면 같이 수행하시고, 또 원나라에 가셔서는 객관(客館)에 계시면서 날마다 원나라의 대학자 조맹부(趙孟俯)등과 같이, 시를 읊으시며 잘 사귀시고 화목하게 하여 왕이 볼일 보시는 동안 공이 뒤에서 모든 일을 주선하니, 원나라 학자들도 의심나는 것은 모두 공에게 물어 보았으며, 다 공을 추앙하고 공에게 경복하였다.
공은 원나라에 가서 문재(文才)를 발휘하여 나라의 위신을 세우셨으므로, 나라에서 시호(諡號)를 문충(文忠)이라 내리셨다.
◈ 7세조(世祖) 정익 (鄭翊) 고려 충선왕 과 충숙왕 때 대장군. 정헌대부(正憲大夫) 병조판서(兵曺判書) 역임.
공의 휘(諱)는 익(翼)이시고 고려 충선왕조에서 대광도첨의 찬성사 판서부사를 지내신 찬성공 지연(芝衍)의 장남이다.
고려 충선왕(忠宣王)과 충숙왕조(忠肅王朝)의 대장군에 이르셨고 증직으로 정헌대부(正憲大夫) 병조판서(兵曹判書)를 추증 받으시다.
기일은 정월 10일이고 수(壽)는 88세이시다.묘는 경기도 남양주군 진건면 사능 뒤 성조동이고 비갈과 상석이 있음.
◈ 8세조(世祖) 정을부 (鄭乙富) 고려 때 정4품 개성부의 소윤공 역임.
(소윤공파 파조) 공은 병판공(丙判公) 익(翊)의 자(子) 개성소윤 을부(乙富)이시고,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면 배양리에 있고 상석이 있음.
◈ 9세조(世祖) 정난 (鄭難) 고려 때 정8품 무관(武官) 직인 산원 역임.
산원공(散員公)의 파조인 난(難)공은 산원벼슬을 하셨고 묘소는 실전이다.소윤공의 자(子) 산원공 사우(전북 여산)
◈ 10세조(世祖)는 휘 인지(諱 : 麟趾)이며 공의 호(號)는 학역재(學易齋)이고 자(字)는 백휴(伯睢) 시호(諡號)는 문성(文成)이시다.
공께서는 1396년(태조 5년 丙子) 12월 28일 乙卯時에 태어나시었다.
조선조 3代 임금 태종(太宗)에서 성종(成宗)까지 무려 7代 왕조(王朝)를 섬기며 예문관 대제학(藝文館 大提學)과 집현전 대제학(集賢殿 大提學)을 지냈고 刑, 禮, 吏, 工, 兵曹의 5判書를 두루 거쳐 좌의정(左議政)과 영의정(領議政)에 까지 올랐으며 이는 효행을 대본(大本)으로 삼고 온고지신(溫故知新)과 실사구시(實事求是)로 대의(大義)에 충실했던 공(公)의 강직한 성품이 있었기에 가능하다고 생각된다.
1414년(태종 14년 甲午) 문과에 장원급제(壯元及第)하여 1475년(성종 6년 乙未)에 원상(院相)의 자리에서 물러나기까지 60여년간 조선조 국기확립(國紀確立)과 문화창달(文化暢達)에 초석을 다졌고 30여 년 동안 과거시험 시관(試官)이 되어 문과(文科)와 중시(重試) 등을 통해 신숙주(申叔舟),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이개(李塏), 하위지(河緯地), 김담(金淡), 최항(崔恒)등 많은 인재를 선발하여 배출했다.
집현전 대제학(集賢殿 大提學)으로서 후학의 명망을 받아 훈민정음(訓民正音),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고려사(高麗史), 치평요람(治平要覽)등을 편찬하여 우리나라 문풍발전에 지평을 열어준 것이다.
묘(墓)는 충청북도 괴산군 불정면 외령리 外陵(밭능) 인좌(寅坐)이고 1980년11월 13일 충청북도 지방문화재 기념물 제33호로 지정되였다.
배위는 정경부인한양조씨(貞敬夫人漢陽趙氏)로 지돈영(知敦寧) 안정공(安靖公) 후(侯)의 여이며 1435년(세종 17년 乙卯)7월5일에 졸하시고 묘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음 진관리앵도동이다 자(子)는 광조(光祖)
배위는 정경부인경주이씨(貞敬夫人慶州李氏)로 판한성윤(判漢城尹) 휴(携)의 여이며 1486년(성종 丙午)에 졸하시고 묘는 공묘소 뒤10여보이다. 자(子)는 현조(顯祖), 숭조(崇祖), 경조(敬祖), 상조(尙祖) 편집/松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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