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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과 생각의 원리
마음은 무엇일까?
생각은?
우리는 마음과 생각을 정확히 구별짓지 못한다.
이 둘을 혼동하여 사용할 뿐이다.
마음이 곧 생각이요, 생각이 곧 마음인양 말이다.
아니 어쩌면 아예 이런 의문은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알고보면 마음과 생각은 전혀 다르다.
마음은 가슴에 있고 생각은 머리에 있다.
마음은 심장(心臟)에 머물고 생각은 뇌(腦)에 머문다.
마음이 하는 일과 생각이 하는 일은 전혀 다르다.
가슴이 아픈 것과 머리가 아픈 것은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마음은 하나요 생각은 둘이다.
마음은 선(善)하다.
마음이 악한 사람이 어찌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생각은 좋은 생각과 나쁜 생각 둘이 있다.
사기꾼도 자기 자식을 사랑하고, 노름꾼도 자기 자식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 곧 그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를 짓거나 나쁜 짓을 하는 것은 마음이 하는 일이 아니요, 오직 생각의 탓인 것이다. 생각이 그러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 것이다.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 그가 네게 먹고 마시라 할지라도 그의 마음은 너와 함께 하지 아니함이라
○마음에서 나오는 생각이 그러하면(도둑질을 하고 싶다), 그 위인도 그러하지만(도둑질을 한다), 그가 네게 먹고 마시자 할지라도(생각), 마음은 너와 함께 하지 않는다(마음은 선하다).
서양의학(西洋醫學)의 사망의 기준 - '뇌'
권투선수 김득구선수가 미국에서 권투시합을 하다가 링위에서 쓰러졌다.
그때 미국에서는 뇌파가 정지했기 때문에 사망(즉 뇌사판정)이라고 사망선고를 했지만 한국에서는 심장이 뛰기 때문에 사망이 아니라고해서 침술과 여러가지 동양의학으로 살려 보겠다고 한참을 노력했었다.
물론 결과는 실패로 끝났고 사망이라고 결론이 났다.
이렇듯 동양과 서양의 사망에 대한 기준이 다르다.
전통적으로 심폐의 기능상실이 죽음의 인식 척도였다. 즉 호흡이 정지하고 심장의 박동이 멎으며 동공이 커지고 빛을 잃는 등 뇌활동이 정지하면 사망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세가지 징후를 종합, 사망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의료계에서도 마찬가지로 의사들은 이때를 사망시기로 사망진단서를 발급했다. 심폐사(心肺死)를 사망의 척도로 인식하는 것은 이미 수천 년의 역사를 가진 하나의 관습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1960년대 이후 의학 및 의료기술의 발달로 인해 심폐사의 척도는 그 엄정성에서 위기를 맞게 된다. 의학의 발달로 인해 기능이 멎은 심장을 다시 소생시키는 것이 가능하게 됐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뇌 기능까지 상실된 후에도 심폐기능을 다시 소생시키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심폐사 기준에 의할 때 사망의 확정이 불안정한 상태에 놓이기 시작한 것이다.
현대의학에서는 뇌사는 절대적으로 소생 불가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뿐만 아니라 심폐사가 뇌사를 필수적으로 수반하듯이 뇌사도 필연적으로 심폐사를 수반한다고 본다.. 이처럼 심폐사에 비하여 뇌사가 갖는 더 큰 확정력에 근거해 뇌사를 사망의 척도로 하여야 한다는 뇌사설(腦死說)이 등장했다.
뇌사(社)에는 대뇌ㆍ소뇌ㆍ뇌간 모두가 기능을 상실한 상태를 뇌사로 보는 전뇌사설(全腦死說), 호흡과 순환 그리고 대사기능 및 체온조절 등 기본적인 생명유지에 필수적인 기능을 관장하는 뇌간이 기능을 상실한 상태를 뇌사로 보는 뇌간사설(腦幹死說), 의식과 감각 및 사고 등을 담당하는 대뇌의 기능이 상실된 상태를 뇌사로 보는 대뇌사설(大腦死說) 등이 있다. 영국 등 뇌간사설을 취하는 나라도 있으나 전뇌사설이 가장 널리 인정되며 우리의 장기이식법도 전뇌사를 뇌사 개념으로 채택하고 있다.
다만 심폐사와는 달리 뇌사는 단순한 감각적 지각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고도의 전문적인 의료진단을 통해서만 확인가능하기 때문에 뇌사설은 의료계에서 주장되기 시작했다.
뇌사와 혼동하기 쉬운 것이 ‘지속적 식물인간’ 상태다. 뇌사는 뇌 전체가 죽은 상태인 데 비해 식물인간은 뇌간이나 중추신경 등 뇌의 일부가 살아 있다. 따라서 의식은 없지만 호흡을 하기에 영양만 공급하면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의 ‘죽을 권리’를 강조한다는 측면에서 식물인간 상태를 사망으로 간주해야 한다는 주장도 일부에서 나온다.
국내 실정법은 현재 원칙적으로 심폐기능정지를 사망의 척도로 삼고 있다. 하지만 죽음을 언제부터로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학계에서의 논란뿐만 아니라 경제적ㆍ사회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죽음의 기준에 대한 보다 활발한 논의가 필요한 대목이다.
마음!
마음은 지각(知覺)하고 사유(思惟)하고 추론(推論)하고 판단(判斷)하며 자신을 통제하는 역할을 한다.
마음은 인간의 본질(本質)이다.
품성(品性), 성격(性格), 천명(天命), 천기(天氣) 등을 의미한다.
마음은 좁은 의미로서 육신에 상대되는 지각능력을 중심으로 인식되기도 하고, 넓은 의미로서 우주와 마음을 일치시키는 유심론적(唯心論的 : 우주의 본체를 정신적인 것으로 보며 물질적 현상도 정신적인 것의 발현이라는 이론) 세계관의 마음 개념이 있다. 곧 원효(元曉)는 “삼계(三界 : 중생이 생사 왕래하는 세 가지 세계)가 곧 마음이다.”라 하여 우주를 하나의 마음이 일으키는 현상으로 제시하고 있다.
성선설(性善說)!
인간의 타고난 본성은 선하지만 나쁜 환경이나 그릇된 욕망 때문에 악하게 된다고 주장하는 학설. 중국의『맹자(孟子)』가 주장하였다.《시경(詩經)》·《주역(周易)》등의 경전에 성선에 관한 사상이 보이며, 이를 체계화한 것이 맹자의 성선설(性善說)이다.
맹자(孟子)는 마음을 ‘성(性)‘이라 하였고, 성(性)은 곧 본질(本質)세계이니 ’이(理)‘라 한다 하였으며 이에 ’성리학(性理學)‘이 등장하게 되었다.
《중용(中庸)》에서는 성(性)은 사람이 날 때부터 갖추고 있는 것으로 규정했는데, 맹자(孟子)는 이것을 선(善)이라고 보았다. 사람들이 모두 선(善)한 성(性)을 타고나지만 모두 선한 사람이 되지 못하고 인의예지의 4덕을 이루지 못하는 것은, 선(善)의 실마리를 힘껏 배양하고 확충하지 않은 결과라고 보고 이것을 군자(君子)와 소인(小人)을 구분하는 근거로 삼았다.
『맹자(孟子)』의 성선설(性善說)은 유학(儒學)을 철학적으로 체계화한 남송(南宋)의『주희(朱熹)』에 의해 계승되었다. 주희는 인성을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으로 나누고 본연지성을 순선한 것으로, 기질지성을 사람에 따라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았다. 맹자가 말한 성선은 본연지성에 해당한다. 우리나라에는 고려말에 유입된 주자학(朱子學)이 조선 중기 이후 지배사상으로 자리 잡았으며, 주희의 본연ㆍ기질지성론이 당시의 신분제사회를 정당화하는 이념적 기초가 되었다.
맹자는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이라고 한《중용(中庸)》의 내용을 계승해 성(性)을 만물에 내재된 하늘의 작용, 즉 천명(天命)으로 파악함으로써 만물은 성, 즉 천명을 중심으로 볼 때 모두 하나라고 하는 만물일체사상(萬物一體思想)을 확립하였다. 그리고 하늘의 작용이 천지자연의 대조화(大調和)를 연출하고 있으므로 그 하늘의 작용을 성으로 이어받은 인간도 성의 움직임을 따르면 인간 사회는 저절로 조화를 이루게 된다는 의미에서 성선설을 주장하였다.
하늘의 작용인 천명은 만물을 낳고자 하는 작용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맹자에 의하면 이 천명의 작용은 ‘여천지동류(與天地同流)’로 표현된 바와 같이 유(流) 즉 ‘흐름’의 개념으로 파악된다. 모든 존재자의 근저에서 흐르고 있는 이 ‘흐름’은 형이상학적인 개념이다.
맹자에 의하면 모든 존재자의 존재하는 현상들은 이 ‘흐름’에 편승하여 조화를 이룬 상태에서 유지되는 것으로 설명된다. 이러한 ‘흐름’을 존재의 본질로서 이어받고 있는 인간의 성은 남을 사랑하는 작용으로 나타나는데, 만물을 낳고자 하는 천명이나 남을 사랑하는 인성(人性)은 모두 인간의 의식이나 감정의 밑바닥에서 흐르는 인간 행위의 원동력이다.
인성의 내용으로서 설명되는 구체적인 예는 맹자에 의하면, ‘인의예지(仁義禮智)’로 설명된다. 인(仁)은 측은지심(惻隱之心), 의(義)는 수오지심(羞惡之心), 예(禮)는 사양지심(辭讓之心), 지(智)는 시비지심(是非之心)이 나타나는 바탕이 된다.
측은지심의 구체적인 예로 맹자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즉, 사람들은 어린아이가 우물에 들어가려 하는 것을 언뜻 보면 다 깜짝 놀라며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생기는데, 이는 그 어린아이의 부모와 교제하기 위한 것도 아니고 동네의 친구들에게 어린아이를 구해 주었다는 명예를 얻기 위함도 아니며, 어린아이를 구해 주지 않았다고 비난하는 소리가 싫어서도 아니라는 것이다.
이 측은지심과 같은 성의 작용은 인간의 생각이나 판단을 초월해 존재하는 만인 공통의 것이며 그러한 의미에서 이를 천명이라 설명하는 것인데, 이러한 성이나 천명의 작용을 맹자는 선(善)이라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맹자가 성선(性善)이라고 했을 때의 선은 인간의 의식이나 생각이 개입된 판단에 의해 이루어진 도덕적 행위를 표현한 말이 아니라, 의식을 초월해 그 밑바닥에서 흐르고 있는 성의 움직임 그 자체를 표현한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의미의 선은《주역(周易)》의 ‘계지자선 성지자성(繼之者善 成之者性)’이라 했을 때의 선의 개념처럼 악에 대립되는 상대 개념이 아니라 상대 개념의 선악을 초월한 절대 개념이다.
맹자의 성선설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을《맹자(孟子)》〈고자장(告子章)〉에서 펼쳐진 고자와의 논쟁에서 살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① 성은 기류(杞柳) 즉 버드나무와 같고 의는 배권(桮棬 : 나무를 구부려 만든 술잔)과 같으니, 인성을 가지고 인의라 하면 버드나무를 가지고 그릇이라 하는 것과 같이 되어버리기 때문에 옳지 않다고 한 고자의 말에 대해, 맹자는 답했다.
“자네는 능히 버드나무의 성질을 이용해 그 그릇을 만드는가 아니면 버드나무의 성질을 없애어 그릇을 만드는가, 만약 버드나무의 성질을 없애서 그릇을 만든다면 사람의 본성을 없애서 인의를 만드는가”라고 되물으며, 버드나무로 만든 그릇은 버드나무의 성질을 이용해 만드는 것처럼 성과 인의도 일직선상에서 파악되어야 함을 설명하였다.
② 성은 고여 있는 물과 같아 동쪽으로 터놓으면 동쪽으로 흐르고 서쪽으로 터놓으면 서쪽으로 흐르게 되어 물의 흐름이 동서로 정해져 있지 않은 것처럼, 인성에도 선과 악으로 나누어져 있지 않다고 하여 성선설에 반대한 고자에 답했다, 맹자는 물의 흐름은 동서로 나누어져 있지 않지만 상하로는 나누어져 있는 것이니, 인성이 선한 것은 물이 아래로 흐르는 것과 같다고 함으로써 성선의 선이 절대 개념임을 강조하였다.
③ ‘생지위성(生之謂性)’이라 하여 성을 생(生)으로 해석함으로써 성을 육체적인 생명 현상으로 파악한 고자에 대해, 맹자는 개의 성과 소의 성, 사람의 성은 천명으로서의 근원은 같지만 현상 속에서 구체화되어 나타날 때는 다른 양상으로 나타난다고 함으로써 성은 육체적인 생명 현상이 아니라 선천적인 것임을 설명하였다.
④ 식(食)이나 색(色)을 좋아하는 것과 같은 육체적인 생명 현상이 성이며 또 맹자가 성의 내용으로 설명한 인의예지 가운데 인은 심(心)의 안에 있지만 의는 저 사람이 연장자이기 때문에 내가 연장자 대접을 해주는 것과 같이 심의 바깥에 있는 것이므로 인의예지의 성을 인간의 심 내부에 있는 선험적(先驗的)인 것이라고 한 맹자의 성설(性說)을 옳지 않다고 고자가 비판하였다.
고자의 비판 대해, 맹자는 연장자를 보고 연장자로 대접하는 심의 작용이 의(義)이기 때문에 연장자로 대접하는 작용은 심(心) 속에 있는 것이며, 따라서 성(性)의 내용이 된다고 답변해 성의 내면적 선천성을 설명하였다.
성선설(性善說)에 반해, ‘인간의 육체가 가지는 기본적인 욕구를 성(性)으로 파악’한 순자(荀子)는 투쟁으로 나아가는 육체적인 욕구의 방향성에 주목하여 성악설(性惡說)을 주장하였다.
그 밖에 중국 철학 사상에서 전개된 성설을 보면, 성에는 선이나 악이 결정되어 있지 않다는 고자의 성무선무악설(性無善無惡說), 모든 사람의 성에는 선과 악이 동시에 내재해 있다는 양웅(揚雄)의 성선악혼효설(性善惡混殽說), 사람 중에는 선한 성을 가진 자, 악한 성을 가진 자, 그리고 선으로 인도하면 선하게 되고 악으로 인도하면 악하게 되는 중간자의 삼품(三品)으로 구분된다는 한유(韓愈)의 성삼품설(性三品說) 등이 있다.
송대에 완성된 성리학에서는 특히 맹자의 성을 본연지성(本然之性), 순자의 성을 기질지성(氣質之性)으로 파악해 맹자의 성선설과 순자의 성악설을 통합하였다.
한편, 인성론(人性論) 중심으로 발달한 한국 유학에 있어서는 성론이 철학의 중심 과제가 되어온 것은 사실이나, 맹자의 성설이 주로 수용되고, 다른 성설은 수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성설이 다양하게 전개되지 않고 맹자의 성설을 전제한 상태에서 주로 성을 실천하기 위한 수양 철학(修養哲學)이 발달하였다.
퇴계 철학에 있어서의 경사상(敬思想)이나 율곡 철학에 있어서의 경사상이 바로 성의 실천을 위한 수양 철학인 것이다. 그리고 기질지성의 문제는 한원진(韓元震)의 인물성상이설(人物性相異說)을 중심으로 전개된 호학(湖學)과 실학(實學)에서 취급되었으나 한국 유학의 주류를 형성하는 데까지 발전하지는 못하였다.
맹자의 본성론은 인간의 본성은 본디 선하다는 이른바 성선설(性善說)로 이어진다. 이것은 잘 알려진 대로 순자(荀子)의 성악설(性惡說)과 대비되는 개념이다. 사실상 맹자나 순자나 천하에 왕도 정치를 구현하겠다는 뜻을 가졌다는 측면에서는 동공이곡(同工異曲)이라 할 수 있는데, 양자의 차이는 그 길로 나아가는 방법에 있었다. 곧 ‘순자는 인간 사회의 갈등에 주목하였으며, 인간 본성을 방치하면 사회적으로 큰 혼란을 불러온다고 생각’해, ‘예의를 통해 인간의 악한 성향을 철저히 규제함으로써 왕도에 도달할 수 있다’라고 보았다. 이에 반해 맹자는 ‘동물과 다른 인간 고유의 심성에 주의를 기울여’ ‘원초적으로 선한 본성을 지닌 인간의 도덕적 능력을 신뢰하였다. 그래서 사람의 어진 마음을 가족으로부터 천하로 확충함으로써 왕도를 구현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황(李滉)과 이이(李珥)
조선 초기에 억불숭유의 기치 아래 성리학이라는 새로운 유학이 등단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마음의 해석도 불교의 해석과는 다른 해석이 시작되었다. 정도전(鄭道傳)은『심기리편(心氣理篇)』에서 이(理)개념으로 불교의 심개념을 극복하고자 하였고, 권근(權近)은『입학도설(入學圖說)』에서 이(理)와 기(氣), 심과 성, 정과 의(意), 사단과 칠정 등의 개념체계로 마음을 설명하였다. 그러나 마음에 대해 본격적으로 주목한 것은 이황(李滉) 이후라고 할 수 있다.
이황(李滉)은 마음을 '일신(一身)의 주재자(主宰者)’라고 밝혔다. 이것은 일신을 다스려서 주관한다는 뜻이다. 이황에 의하면 “정(情)의 발현은 마음이 하는 것이다.”, “의(義)는 마음의 발현이다.”, “지(智)는 마음이 가는 바다이다.”라고 언급하면서 마음이 일신을 주재함은 정(情)·지(志)·의(意)와 관련된 통솔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황은 “정(情)은 배나 수레(舟車)에 비유할 수 있고, 의(意)는 그 배나 수레를 부리는 사람에 비유할 수 있다.”라 하여 마음의 발현은 정에서 이루어지지만 그 방향 감각을 잡아주고 그 방향으로 가게 하는 것은 의(意)의 소관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마음이란 욕구대로 발현될 수도 있고 방향을 설정해서 나아갈 수도 있다는 이른바 감성과 이성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이(李珥)는 마음을 성·정·의로 나누었다. 이것들은 모두 일로(一路)이면서 각각 경계가 있다고 하였다. 마음의 미발(未發 : 아직 발하지 않음.)을 ‘성(性)’이라고 하고, 이발(已發 : 이미 발했음.)을 ‘정(情)’이라 했으며, 발한 뒤에 유석상량(주석상량 : 밝게 풀어서 생각함.)하는 것이 ‘의(義)’라고 하였다. 역시 마음은 근원이 있고 감성이 있으며, 이성이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여기까지는 이황과 이이 사이에는 별반 다른 점이 없다. 그러나 마음을 이(理)와 기(氣)에 관련지음으로써 서로 다른 의견이 생기게 되었다.
주리파(主理波)와 주기파(主氣波)
이황의 기본체계는 이기호발론(理氣互發論)에서 출발한다. 이에 따라 인성론(人性論)도 본연지성(本然之性)과 기질지성(氣質之性)으로 나누며, 사단(四端)은 이(理)의 발현이요, 칠정(七情)은 기(氣)의 발현이라 한다. 또 마음도 도심(道心)과 인심(人心)으로 나누어, 전자를 이의 발로 후자를 기의 발로 보았다.
이이는 “이는 지극히 높아 상대가 없다(極尊無對ː극존무대)”, “이는 귀한 것이고 기는 천한 것이다.”라 함으로써 본연지성과 도심과 사단을 높이고, 기질지성과 인심과 칠정을 낮추었다. 여기서 이이의 사상적 골격은 이황과는 달리 이의 발현을 부인하고 기발이이승(氣發而理乘)만을 인정한 데서 발단하였다. 기질지성 외에 본연지성이 따로 있을 수 없고, 칠정 외에 사단이 따로 있을 수 없으며, 인심 외에 도심이 따로 있을 수 없다는 주장이다.
이이는 이와 기를 모두 내 마음의 발현으로 보았다. 즉, “천지조화(天地之化)는 곧 내 마음(吾心ː오심)의 발현이다. 만약 천지의 조화에 이화자(理化者)와 기화자(氣化者)가 있다면, 내 마음도 또한 마땅히 이발자(理發者)와 기발자(氣發者)가 있어야 한다. 천지에 이미 이화(理化)와 기화(氣化)의 다름이 없다면, 내 마음에도 이발과 기발이 따로 있을 수 없다. 만약 내 마음이 천지의 조화와 다르다면 나의 알 바가 아니다.”(票谷全書 卷16)라고 단언하였다. 이것은 이황과는 달리, 인간의 기질적인 면을 중시하는 데서 온 소치라고 생각한다.
이이는 인간이란 높은 지성과 지각을 가지고 선을 행할 수도 있지만, 악과 식욕과 색욕에도 빠져들 수 있다고도 했다. 그것이 모두 천성이라 본 것이다. “인간은 대체로 지(志)가 움직이고 기가 움직일 때는 선과 악을 겸하게 된다.”, “식욕과 색욕과 냄새와 맛에 대한 욕심도 천성이다.”라 한 것이 그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천지자연과는 달리 혈기와 지각심(知覺心)을 가졌다고 했던 것이다.
이황은 이에 입각해서 본연지성과 도심과 사단을 높이 평가했던 반면에, 이이는 기에 입각해서 기질지성과 인심과 칠정을 중시했다. 그래서 후대 사람들은 이황을 주리론자(主理論者)로, 이이를 주기론자(主氣論者)로 부르게 되었다. 그 뒤에는 이황을 지지했던 주리파와 이이를 지지했던 주기파와 그리고 양자를 절충한 절충파가 나타나게 되었다. 이들 세 유파 사이에도 마음의 해석은 물론 다르다. 세 유파의 주장을 몇 사람만 들어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주리파(主理波)는 이이가 이발을 부정하고 기발만을 인정했던 사실을 공박하여 이발을 주장한 것이 골자로 되었다. 그 극단으로 마음을 심즉리(心則理)로 제시한 이진상(李震相)의 주장을 보면, “성은 미발(未發)의 ‘이’요, 정은 이발의 ‘이’이다. 성이 발하여 정이 되니, 다만 일리(一理)뿐이다. 비유컨데, 주인이 나가면 객이 되는 것과 같으니, 다만 일인(一人)뿐이다. 진실로 성정의 실상을 탐구하면 이발은 있어도 기발은 없다.”(寒洲集 卷37 한주집)라고 하여, 성도 정도 철저하게 이의 발현임을 밝혔다.
주기파(主氣波)들은 율곡설을 지지하여 심즉기(心則氣), 또는 칠정포사단(七情包四端)을 주장하였다. “대개 칠정(七情)은 인심과 도심, 선과 악의 총체적 명칭이다.”, “칠정이 형기(形氣)에서 발한 것은 인심이요, 칠정이 의리에서 발한 것은 도심이다.”(鹿門集 卷12 녹문집) 이것은 임성주(任聖周)의 주장이다. 그는 주기적 측면에서 칠정포사단을 주장한 것이다. 인심과 도심과 선과 악도 칠정의 총체적 명칭으로 보고, 형기(形氣)도 의리도 칠정 속에 포괄시키는 것이다.
절충파들은 심즉리설(心則理說)과 심즉기설(心則氣說)을 절충하였다. “이 마음은 비록 묘용(妙用)을 헤아릴 수 없으며 순환(循環)에 만가지 단서가 있지만, 그 까닭을 추구하면 실은 이와 기가 합하여 기발이승함에 불과하다. 그러나 기발이승의 가운데에서 세분하여 말하면 또 이승기(理乘氣)로 동하는 것과 기우리(氣寓理)로 발하는 것이 있다.”(拙修齊集 卷11)
조성기(趙聖期)는 위와 같이 이승기(理乘氣)로 마음이 동하면 도심(道心)이 되고, 기우리(氣寓理)로 마음이 발하면 인심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인심과 도심이 모두 일심의 발이나, 인욕과 천리는 즉 형기의 사사로움(形氣之私ː형기지사)과 성명의 정대함(性命之正ː성명지정)의 차이에 달렸다고 보았다. 또 칠정을 사단을 포섭하는 것으로서 인심과 도심의 합으로 보았다. 이것은 이이의 기발이승에 이황의 주리·주기의 사상을 절충한 것이다.
유학에서 마음의 문제는 이와 기에 바탕 하여 본연지성과 기질지성, 도심과 인심, 사단과 칠정의 문제를 놓고 논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실학자들의 마음에 대한 시각은 일반적으로 성리학파의 학문태도와 차이를 보여준다. 박세당(朴世堂)은『중용장구대전(中庸章句大全)』중에서 “도는 각자의 도를 따름으로써 생기는 것이지, 태어날 때부터 마음속에 갖추어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
이 말은 주자(朱子)의 이론을 뒤집어놓은 것이다. 주자는 도를 선천적으로 인간이나 사물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박세당은 도란 각자가 가질 수 있는 개성에 따라 다르다고 한 것이다. 도는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는 보편성이 아니라 후천적이며 경험적인 것이라고 믿었다.
박세당의 주장에서 종래의 획일적으로 봉쇄된 마음이 개성적이고 개방적이며 경험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열려갈 수 있게 되었다.
마음과 문학(文學)
정약용(丁若鏞)은 “성(性)이란 기호(嗜好)다. 육체의 기호가 있는가 하면 심지(心知)의 기호가 있다. 이것을 성(性)이라 한다.”(與猶堂全書 卷16)라고 언급하였다. 이것은 주리론이나 주기론으로도 해석할 수 없는 특이한 시각이다. 굳이 말하면 인간 개체가 가지고 있는 한정적인 특성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러한 마음에 대한 새로운 해석도 실학파 학문의 한 특징이다.
문학은 마음의 표현이다. 그것도 작품마다에 마음의 표현은 다르게 나타나 있다. 그러므로 문학에서 마음을 찾아보려면 작품마다의 마음을 찾아내야 한다. 역대 선비들의 문학론에는 마음에 대한 언급이 많다.
거기에 나타난 마음을 살펴보면, 문학과 마음의 관계도 어느 정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시대에 따르는 문학사상도 찾아질 수 있다. 문학론에 나타난 마음은 심(心)·정(情)·성정(性情)·의(意)·지(志) 등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이것들이 시대별로 조금씩 다른 양상을 띠고 나타난다.
신라 말까지는 문학론이 없어서 어떻다고 말할 형편은 못 된다. 고려 때에는 대체로 심·정·의·지로 나타난다. “시(詩)는 심(心)에서 근원한다.”(破閑集), “시는 의(意)가 위주가 된다.”(白雲小說), “글은 정(情)을 펴내는 것이다.”(東國李相國集), “시는 지(志)가 가는 바다.”(益齋集 史贊) 이렇게 문학의 정의에 심·정·의·지가 나타나 있다. 이것들이 모두 마음임은 물론이다.
고려 때에는 마음을 구속하는 틀이나 규범이 없었기 때문에 심·정·의·지는 특별한 뜻으로 써진 것은 아니다. 그저 마음일 뿐이다. 그리고 이 마음을 특별히 구속한 것이 없으니, 마음에 와 닿는 것이 있으면 그대로 표현하면 되는 것이었다.
이규보(李奎報)는 다음과 같이 문학론을 말하였다.
“글이란 정(情)에 따라 발동되는 것이므로, 마음속에 격(激)함이 있으면 모름지기 밖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어, 그것을 막으려 해도 막을 수 없는 것이다(驅詩魔文退之送窮文ː구시마문퇴지송궁문).”
이와 같이 문학이란 정이 발동해서 나타나는 것이다.
마음에 격한 것이 있으면 격한 대로 나타내면 글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정과 의와 지의 속성이요, 그것의 표현이 문학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을 보면 그러한 마음을 천태만상으로 담아놓았다. 이것은 이규보뿐만 아니라 고려 문인들의 문학관이기도 하다.
고려시대를 겪고 조선 전기에 오면 사정이 달라진다. 그들도 문학의 발생으로 심·정·의·지를 드는 경우는 있다. 그러나 고려시대에는 없는 특별한 문학 용어가 하나 생겼다. 정(情) 위에다 성(性)을 하나 더 덮어씌운 것이다. 이것은 성리학과 무관한 것은 아니다. 조선을 건국하자 국가 이념으로 성리학을 도입했다. 그것은 천리(天理)를 바탕하여 규범적인 틀을 만든 것이다.
천리(天理)는 천지자연에서는 ‘이(理)’이지만 사람에 있어서는 ‘성(性)’이 되었던 것이다. 사람은 감성대로 생각하고 행동을 하면 불선(不善)에 떨어지기 쉬우므로, 정을 닦고 걸러서 순선(純善)한 성을 회복한다는 원리이다.
이것이 문학의 경우라고 다를 것은 없다. 문학이란 이규보의 말대로 일차적으로는 정을 표출하는 것이지만 치닫게 되면 넘어지기가 쉽다는 것이다. 따라서 본원미(本源美)에 이를 수 있는 기준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성(性)이다. 그래서 정 앞에다 성을 놓음으로써 ‘정’의 문학은 규범론에 얽매이게 된 것이다.
최초로 성정(性情)을 문학론에 도입한 이첨(李詹)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문사(文辭)라는 것은 덕(德)이 밖으로 나타난 것이다. 대체로 문사는 정치와 교화로 더불어 유통되는 것이어서 그 시대의 치란(治亂)으로 인해서 그 소리가 슬프고 즐거움의 다름이 있다. 이것은 모두 성정(性情)에 있는 것을 시로 읊어서 그 속에 쌓인 것을 나타내기 때문이다.……그러나 진실로 삼광오악(三光五嶽 : 해와 달과 별과 이름난 다섯 산)이 신령한 기운을 타고서 음양의 합산(合散)하는 이치를 통찰하고, 사물의 무궁한 변화를 환하게 아는 것이 있으면, 그 문장이 응심하고 아담하며 강건(雅健ː아건)하고, 오묘하고 정화(精華)한 것이 천지의 원기를 짝하고, 우주의 조화와 짝할 수 있다면 세대의 오르고 내리는 것과 풍속의 변천하는 것에 무슨 근심할 것이 있겠는가.”(牧隱先生文集ː목은선생문집)
이첨은 문학이란 정치와 교화와 시대의 치란으로 인해서 시적 정서는 바뀐다고 했다. 이렇게 바뀌어 가는 정서를 가지고 시를 쓰는 일은 바람직한 일이다. 시대를 반영하는 시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 전기 규범론자들은 그러한 문학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것은 규범을 중시한 성정의 문학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첨의 말대로 정감의 세계를 한 단계 뛰어 넘어서 우주의 조화적 차원에서 시의 좌표를 구하게 되었던 것이다.
조선 전기 규범론자들은 삼광오악의 신령한 기운을 타고, 음양의 합산하는 이치를 관찰하고, 천지의 원기와 짝하는 우주의 원리와 나란히 하는 것이 문학이 가는 목적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성현(成俔)의 말을 살펴보아도 마찬가지다.
“시는 이(理)를 중시해야 한다. 만일 근본을 잃게 되면 아무리 호탕하고 아름다우며 여러 가지 수식을 하였다고 해도 이것을 시라고 할 수 없다.”라 한 것이 그것이다. 결국 이러한 말들은 인간의 감성에서 문학을 구하지 말고 높은 이성에서 구하라는 것이다.
조선 전기 규범론자들의 문학관을 도식화하면 성←정이 된다. 이른바, 거정현성(去情顯性)이나 존심양성(存心養性)의 경지에서 시를 쓰라는 것이다. 실제로 서경덕(徐敬德)이나 이황 같은 이들의 시를 보면 그러한 세계가 구축되어 있다.
조선 후기에는 관념적인 성리학이 비판되고 실질적인 학문이 숭상되기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문학에 부각되는 마음도 변할 수 밖에 없었다. ‘성←정’의 구조가 ‘성→정’의 구조로 바뀌었던 것이다.
조선 후기에 오면 성은 물(物)의 본질이나 만유의 원인 또는 천명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한갓 생(生) 이후의 형기(形氣) 또는 혈기심지(血氣心知) 정도로 보는 입장이 나타나고 있다. 성(性)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정을 말하면 성도 이미 말한 것이 된다는 것이다.
조선 후기의 성은 관형사적 허사에 불과하다. 성은 있어도 그만이고 없어도 그만이다. 말하자면 성정을 정(情)과 같은 뜻으로 쓴 것이다. 그러기에 아예 성을 빼버리고 정만을 쓰기도 하였다. “노래는 정(情)을 나타낸 것이다.”(大東鳳雜章ː대동봉잡장), “노래는 정(情)에서 발한다.”(靑丘永言 後章ː청구영언 후장), “노래는 정지(情志)에서 펴낸 것인데 천기(天機)에서 발한다.”(鶴岡散筆 卷4 학강산필) 이렇게 정이 나타나고 정지(情志)가 나타나는 것이다.
조선 후기에 두드러지게 나타난 용어는 천기(天機)이다. 천기라는 용어는 ‘사람이 원래 타고 난 진성(眞性)’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천리(天理)가 어떻고 만유의 원인이 어떻고를 따지는 일이 아니다. 그저 인간이 타고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진솔한 마음인 것이다. 이러한 마음을 담아놓은 것이 국풍이요 항요(巷謠)였다. 그리고 조선 후기 시인들은 바로 이러한 노래를 좋아했던 것이다.
홍석주(洪奭周)는 “시의 쓰임은 사람을 감동시키는 데 있다. 삼백편(시경) 이후로 천여 년 동안에 비록 고하(高下)가 있고, 문체가 다르고, 사정(邪正)이 있어 느낌이 다르지만, 시는 성정에 근본해서 천기에서 발현되는 것은 한가지다. ……그 발현이 성정에서 근본하지 않고 천(天)에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면 사람을 감동시킬 수 없다. 나는 성인이 지은 것이라 하더라도 마땅히 여항필부(閭巷匹婦)의 노래에서 구할망정 율시에서는 구하지 않겠다.”(鶴岡散筆 卷3)고 말한다. 이렇게 성정→천기→여항필부의 구조에서 문학을 확인하고 있다.
홍석주는 시를 어떤 기교나 규범적인 틀에서 구하는 것을 꺼렸다. 시란 어디까지나 천품으로 타고난 진솔한 감정을 나타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천기에서 우러난 시였다. 이러한 시는 17세기의 고비를 넘으면서 허균(許筠)ㆍ김만중(金萬重)을 거쳐서 18, 19세기에 이르러서는 홍대용(洪大容)ㆍ홍양호(洪良浩)ㆍ박지원(朴趾源)ㆍ이덕무(李德懋)ㆍ박제가(朴齊家)ㆍ홍석주 등에 의해서 고양되었다. 그리고 가집을 낸 김천택(金天澤)ㆍ김수장(金壽長) 등에도 여파가 이어졌다.
조선 후기에는 틀과 규범과 수사가 배제되고 타고난 천품대로의 마음을 가지고 문학을 표출하였다. 그래서 문학은 저절로 개성을 찾을 수가 있게 되었고, 개성을 찾다보니 언어도 우리 것으로 구사하면 맛이 더 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조선 후기에는 국문시가도 많이 나오고 국문시가집도 많이 엮어 내게 되었던 것이다.
이상과 같이 마음을 일상어에 나타난 마음, 유교와 마음, 그리고 문학과 마음으로 한정하여 살펴보았지만, 마음을 설명한다는 것이 지극히 어려운 이유는 불교와 유교에 나타난 마음은 물론이지만 문학의 경우도 모든 작품이 다 마음의 표현이 아닌 것이 없기 때문이다.
골간이 되는 것만을 간추려 보면, 일상어에 나타난 마음은 산발적인 것 같지만 마음자리→마음결→마음씀→마음씨의 구조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음의 바탕·움직임·발현·모양을 이룬 것으로서, 마음에 대한 일체의 단어는 이에서 생성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유교와 마음에서는 특히 성리학에서 마음의 문제가 크게 다루어졌다. 이황은 이기호발(理氣互發)을 주장함으로써 마음을 본연지성(本然之性)과 기질지성(氣質之性), 도심(道心)과 인심(人心), 사단과 칠정으로 나누게 되었다. 그리고 본연지성과 도심과 사단은 이의 발현임으로 순수하게 선하나, 기질지성과 인심과 칠정은 기의 발현이므로 천한 것이라 여기게 되었다. 여기서 과연 마음을 이원적으로 나눌 수 있느냐, 또는 기질지성과 인심과 칠정은 천한 것이냐 하는 의문을 남기게 되었다.
이이는 이황의 이발기수지(理發氣隨之)와 기발이승지(氣發理乘之) 가운데서 후자만을 인정함으로써 본연지성과 도심과 사단의 독자적 근거를 부정하고 기질지성과 인심과 칠정에 포섭시킴으로써 인심을 크게 부각시키게 되었다.
이후로는 이황을 정점으로 하여 주리론자가 이어지게 되고, 이이를 정점으로 한 주기론자가 이어지는가 하면, 양쪽을 절충한 절충파도 생기게 되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주리론자는 마음을 지극히 형이상학적으로 해석하게 되었고, 주기론자는 형이하학적으로 해석했으며, 절충파는 양자를 절충적으로 해석하게 되었던 것이다.
문학론에서는 마음을 심·정·의·지·성정으로 나누었다. 고려까지는 주로 문학론에 심·정·의·지가 나타났다. 이 경지는 마음을 어떤 규범을 따르지 않고 자유스럽게 표현되는 마음의 상태를 뜻하였다.
그러므로 문학의 경우도 마음 내키는 대로 표현해 낼 수가 있었다. 그러나 조선 전기에 이르게 되면 성리학의 영향을 입어 문학에도 성정이란 용어가 등장하였다. 발현한 정이 천리 차원의 성의 규제를 받게 되어, ‘성←정’의 구조가 된 것이다. 그래서 규범론적 문학관이 되고 말았다.
조선 후기에 오면 성리학이 비판을 받게 되면서, 문학의 경우에도 그 규범에서 벗어나게 되어 ‘성→정’의 구조가 된다. 성은 한갓 관형사적 허사에 불과하여 정을 말하면 성도 말하게 된다고 보았다.
문학이란 규범이 아니라 인간이 타고난 발랄한 마음을 가지고 쓰는 것이다. 이렇게 쓰여진 작품을 귀하게 여기게 되었다. 예컨대 국풍이나 항요 같은 문학 형태가 그것이다. 이 경지를 천기에서 발현된 문학이라 하게 되었다. 천기는 “원래 타고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진성(眞性)”이라는 뜻이다. 이렇게 진솔한 마음을 나타내다 보니 개성이 존중되고 우리 나라 문자인 한글이 중시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조선 후기에는 우리말 시가가 많이 나타나게 되고 우리말 시가집도 많이 나오게 되었던 것이다.
생각(生角)
생각이란 우리가 어떤 경험이나 기억, 혹은 사고나 판단, 이해 등을 글이나 언어로 표현하기 전 마음속에 추상적으로 남아있는 것을 말한다.
성리학(性理學)에서는 생각(生角)을 감정(感情), 의식(意識), 사고(思考), 느낌, 의사(意思) 등을 의미하며 정(情), 또는 기(氣)라 보고 있다.
우리는 삶 전체를 생각에 의존하며 생각이 행동(意志)을 명령하고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한다. 언어도 생각을 나타낸 것에 불과하다. 또한 살아가면서 배우는 지식은 모두 생각의 작용을 통해 쌓이며 그것을 다시 삶에 적용하고 기억해 내는 것도 생각으로 이루어진다.
생각은 사용할수록 깊고 넓게 작용하기 때문에 수시로 많이 해야 한다.
한 가지 문제에 집중하여 사고력을 넓히거나 생각의 유연성을 위하여 여러 각도에서 생각하고 생각한 것을 다시 기억하여 생각하는 등의 반복적 태도를 취하는 것이 중요하다.
생각은 결론을 얻으려는 관념의 과정이다.
목표에 이르는 방법을 찾으려고 하는 정신 활동을 말한다.
사상(思想), 사유(思惟)라고도 한다.
지각이나 기억의 활동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경우에, 어떻게 이해하고 또 행동해야 할 것인가를 헤아리는 활동을 생각이라고 말한다.
생각은 언어에 의해서 행해진다고 하지만, 도형적(圖形的)으로 헤아리는 경우와 같이 언어에 의하지 않는 생각도 살펴볼 수 있다. 또 귀납적 사고, 연역적사고와 같이 추론의 종류에 의해서 분류하는 경우도 있다.
생각하는 작용으로서의 ‘사고’(思考)에 대해 생각된 내용을 ‘사상(思想)’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그때그때의 사고 내용이 아니라 어떤 정리된 통일적 내용을 뜻한다. 따라서 판단 이전의 단순한 직관의 입장에 그치지 않고 이러한 직관 내용에 논리적 반성을 곁들여 이룩된 사고의 결과, 즉 사고 내용을 가리킨다. 예컨대 어떠한 행위를 선(善)이라든가 악(惡)이라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선’, ‘악’이라는 것이 사상이다.
다시 말하자면 많건 적건 원리적 통일을 지니는 판단 체계가 사상이다. 그것은 사회·인간에 대한 일정한 견해의 뜻이 된다. 그러한 견해로써 사상을 발표하고, 또한 사회적 행동을 하는 사람을 두고 ‘사상가’라고 부른다.
그러나 과거 일제 강점기에 흔히 불리던 ‘사상가’란 대개의 경우 ‘민족 운동가’· ‘좌파 계열의 지식인’ 또는 진취적인 지식인을 말했으며, 이 경우 사상이란 특수한 뜻으로 사용되어, 일종의 민족주의 사상과 같은 뜻으로 해석되기도 했었다. 또한 ‘사상’과 ‘철학’을 비교하면 사상은 철학을 포함하여 정치, 경제, 윤리, 문학, 역사, 종교, 과학, 예술사상 등과 같이, 아주 폭넓은 뜻으로 쓰인다.
생각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면 큰 범위에서 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포유류에서 구체화되기 시작한 1차 의식과 인간에 와서 가능해진 언어로 촉발된 고차의식으로 인간은 생각을 할 수 있게 되었고 자아를 인식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
정암 정병채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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