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차례
1. 천도교의 발자취
수운대신사의 창도 정신
해월신사와 은도시대
의암성사와 현도시대
춘암상사와 문화운동시대
2. 천도교란 어떤 종교인가
종지를 통해서 본 천도교
종교적 목적을 통해서 본 천도교
1)포덕천하의 대업과 천도교
2)광제창생과 보국안민
3)후천개벽과 동귀일체의 사상
3. 교리를 통해서 본 천도교
신관
우주관
인간관
사후관
가치관
4. 천도교의 수행과 신앙방법
5. 천도교의 민중. 민족. 문화운동
교조신원운동
갑오동학혁명
갑진개화혁신운동
3.1독립운동
6.10만세와 천도교
신간회와 천도교
비밀결사 오심당
무인멸왜기도운동
신문화운동
1)청년운동
2)출판문화운동
3)농민운동
4)어린이운동
5)여성운동
6)신교육운동
해방공간과 청우당의 활동
천도교의 발자취
수운대신사와 창도정신
동학천도교를 창도한 수운대신사의 이름은 최제우이다. 포덕전36년(1824) 10월 28일 오늘의 경주시 현곡면 가정리에서, 산림처사로 영남일대에 그 문명이 높은 가난한 선비 최옥과 재가녀인 한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집안과 재가녀의 아들이라는 출신 성분 등으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대신사는 일찍이 어지러운 세상을 구하고자 하는 높은 뜻을 지니고, 세상의 많은 가르침을 얻고자 천하를 돌아 다녔다. 이러한 대신사의 젊은 날의 행적은 곧 구도를 위한 것이었다. 또한 대신사의 이런 행각을 천도교에서는 주유팔로라고 부른다. 주유팔로를 통하여 세상의 많은 가르침과 만나보았지만, 궁극적으로 기존의 이런 가르침들은 세상의 어지러움을 구할 수 있는 진정한 도가 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실의와 낙망 속에서 세월을 보내던 이 무렵에 대신사는 신비한 체험을 하게 된다. 대신사가 자신의 처가 동네인 울산 에 머물고 있던 어느 봄날 이었다. 세상의 어지러움을 근심하며 울산 인근의 여시바윗골에 있는 정자를 찾아 소일하던 대신사는 어느 신비한 이인을 만나 천서를 받게 되었던 것이다. 오늘날 그 천서의 내용은 전하여 지고 있지 않지만 이 안에는 '하늘에 기도를 하라'는 내용이 담겨져 있었다고 한다. 즉 세상을 구할 도를 밖에서 구할 것이 아니라 기도를 통하여 하늘로 부터, 나아가 안에서 구하라는 그러한 가르침으로 이해가 된다. 이후 대신사의 수행방법은 세상을 떠돌며 가르침을 구하던 행각을 그치고 하늘에 기도하는 수행으로 바뀌게 된다. 이와같은 일련의 사실을 천도교에서는 '을묘천서'라고 부른다. 즉 을묘년에 하늘로 부터 천서를 받았다는 의미이다. 이후 대신사는 양산 천성산 내원암, 또는 적멸굴 등지에서수행을 하였고, 마침내는 고향인 경주 현곡면 구미산에 위치한 용담정에서 한울님으로부터 무극대도를 받게되는 결정적인 종교체험을 하게 된다. 또한 이러한 결정적인 종교체험을 통하여 대신사는 한울님으로부터 세상사람을 구한다는 '영부'와 세상의 사람들을 가르칠 '주문'을 받기도 한다. 이때가 포덕원년(1860)인 경신년 4월 5일이다. 따라서 천도교에서는 이 날을 천도교 원년으로 삼아 '천일기념일'로 기리고 있다. 기존의 모든 종교들은 창도자의 탄생일을 기준삼아 그 종교의 기원으로 삼고 있는데 비하여 천도교는 대신사의 득도일을 기준으로 삼아 가장 큰 기념일로 삼고 있음이 독특하다고 하겠다. 대신사는 득도를 한 이후 거의 1년에 가까운 기간을 수행과 수련으로 시간을 보낸다. 이러한 수행기간을 거친 후 포덕 2년(1861) 신유년 6월에 이르러 비로소 세상사람들을 향하여 포덕을 시작하였다. 양반도 천민도 없이 모든 사람은 한울님을 모시고 있으므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근원적으로 모두 평등하다는 시천주의 새로운 가르침은 당시 새로운 삶의 질서를 꿈꾸는 세상의 많은 사람들로부터 적극적인 호응을 받게된다. 그래서 대신사가 머무는 경주 용담정에는 연일 도에 들기를 청허는 사람들이 찾아와 북적이게 되었다. 이와같은 포덕과 세상사람들의 많은 관심으로 인하여 대신사는 경상도 인근의 유생들의 지목과 관청의 탄압을 받게되고, 포덕 2년 11월에는 마침내 용담을 떠나 전라도 남원 교룡산성 안에 있는 작은 암자 은적암으로 피신하여 한 겨울을 보내게 되었다. 이 곳 은적암에서 대신사는 동학의 중요 경전인 ,논학문, 권학가, 도수사 등을 저술하였다. 한 겨울을 보내고 다시 경주 용담정으로 돌아왔으나, 지속되는 관의 탄압과 함께 포덕 4년(1863) 12월 10일 마침내 조선조 조정에서 파견한 선전관 정운구 일행에 체포되어 대구 감영에 수감되었다가 포덕 5년 3월 10일 대구 장대에서 좌도난정의 죄명으로 참형 순도하셨다. 대신사는 도를 지키기 위하여 순순히 체포를 당한 것이요, 천명을 지키기 위하여 참형의 형장으로 스스로 나아가 41세의 나이로 순도하였던 것이다. 이와같이 대신사는 당시 무너지고 있던 조선조의 전통 질서와 동양을 침범하던 서양의 근대적 질서를 동시에 비판하며, 이에 대응할 수 있는 새로운 신념체계로서의 동학을 창도하게 된다. 대신사에 의하여 창도된 동학은 안으로는 붕괴되고 있는 질서와 바끄오부터 조여오는 외세의 침략에 의한 억압을 매우 주체적으로 극복하고 새로운 질서 체계를 이룩하려고 했던, 우리의 역사 속에 자리하고 있는 '자생적 근대'의 한 모습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와같은 동학은 창도와 아울러 안으로 조선조의 봉건적인 질서와 충돌하게 되고, 밖으로는 서구의 침략과도 충돌하는 매우 지난한 고통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렇듯 고난의 길을 걷던 동학은 한때 조선조 사회가 사회가 지니고 있던 봉건성과 서구 열강의 침략이라는 탄압과 무력에 의하여 수많은 동학교도들이 순도를 하게 되고 한때 붕괴의 위기까지 맞이하기도 한다. 따라서 이러한 동학이 지닌 자생적 근대에의 열망을 받아들이지 못한 조선조 사회, 나아가 동양사회는 더욱 가중되는 혼란과 붕괴를 맞이하게 되었으며 나아가 서구 열강에 의하여 오랜동안 침탈을 당하는 뼈아픈 대가를 치르기도 했던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혼란과 위기는 한세기 이상의 시간이 지난 오늘에도 실은 마찬가지로 나타나고 있다. 즉 19세기 이후 새로운 모더니티로 제기되었던 양대 이념인 사회주의 체제도 무너졌고 또한 자본주의 역시 그 한계를 드러내고 있으므로 진정 살아갈 바의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음이 오늘의 현실이기도 하다. 따라서 양식있는 동서양의 많은 사상가들은 이러한 오늘의 시대적 현상에 대응할 수 있는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고자 노력을 기울이고 있음을 본다. 그러나 대신사는 이미 150여년전 이러한 '위기와 절망'을 매우 선지적으로 예감하고 이에 대안이 될 수 있는 동학을 창도하였던 것이다. 대신사는 먼저 인류의 역사를 '우주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이 인류의 역사를 '선천'과 '후천'으로 나누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나아가 우주적인 순환사의 관점에서인류는 이제 막 선천의 마지막 시대에 서 있음을 설파하였다. 그래서 인류는 선천의 마지막 징후인 혼란과 타락에 빠져 있으며 이는 곧 후천의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야 하는 필연적인 모습임을 천명하기에 이른다. 즉 당시 19세기 중엽이라는 문란한 조선조의 사회 모습을 대신사는 선천의 마지막 징후로 인식하였던 것이다. 그런가 하면, 대신사는 이와같은 징후가 비단 조선조의 문제만이 아니라, 모든 인류가 공동으로 겪고 있는 현상임을 갈파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이와같은 선천의 시대를 보내고 새로운 후천의 시대를 인류가 매우 주체적으로 맞이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당시 사회에 팽배되어 있던 '각자위심'이라는 세상사람들의 타락한 심성을 '한울님 마음'으로'개벽'할 것을 세상사람들에게 강조하였던 것이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는 어느 의미에서 대신사가 지적한 그 각자위심이 어느 때 보다도 극심하게 팽배되어 있는 시대이다. 따라서 오늘이라는 이 시대는 사회적으로, 이념적으로 또 정신적으로 지극한 혼란을 겪고 있고 그러므로 대신사가 주창한 '다시개벽'이 어느 때보다도 더욱 절실하게 요구되고 있는 시대임에 틀림이 없다. 이와 같은 관점으로 보아 대신사의 가르침은 다만 '지난 우리의 역사'속에 있었던 그러한 가르침이 아니라, 오늘을 사는 우리 모두가 귀 기울여야 할 무엇보다도 필요하고 또 절실한 가르침이 아닐 수 없다. 이렇듯 후천개벽니라는 새로운 가르침을 편 대신사를 천도교에서는 1세 교조라고 부른다.
해월신사와 은도시대
해월신사의 처음 이름은 최경상이다. 그러나 훗날 해월신사 스스로 펼친 법설인 '용시용활', 곧 살아있는 도란 그 때에 따라 생활 속에서 훌륭하게 적용되고 또 활용되어야 한다는 자신의 가르침을 강조하기 위하여 이름을 스스로 '시형'으로 고쳤다. 해월신사는 본래 매우 미천하고 빈한한 계층의 사람이었다. 조선조가 척신에 의하여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인 균형이 깨지고 그러므로 인심이 나날이 험악해 지며, 나아가 국운이 서서히 기울고 있던 19세기 초. 중엽인 포덕 전 33년(1827) 3월 21일 경주 동촌 황오리라는 작은 마을에서 아버지 최종수와 어머니 월성 배씨 사이에서 태어난다. 아버지는 가난한 농사꾼으로, 당시의 시대적인 상황으로 보아 대표적인 빈민 계층의 한 사람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와 같은 집안에서 태어난 해월신사 역시 그 출생에서 부터 빈한한 계층의 사람으로 분류되고 있음은 당연한 이야기이다. 일찍이 부모를 여읜 해월신사는 남의 집 머슴살이에서 제지소 용인, 또는 화전민 등으로 살아가다가, 포덕 2년(1861) 대신사가 경주 용담에서 세상을 건질 새로운 도를 편다는 풍문을 듣고 용담으로 찾아가 대신사를 뵙고는 동학에 입도하였다. 동학에 입도한 해월신사는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대신사의 가르침에 따라 열심히 수련에 임하여 마침내는 천어를 듣는 깊은 경지에 까지 이르게 된다. 이러한 해월신사의 정성과 마음씀을 아는 대신사는 마침내 해월신사에게 포덕4년 (1863) 8월 14일 도통을 전수하게 된다. 이로써 해월신사는 대신사를 이어 동학의 2세 교조가 된다. 그러나 대신사가 체포되어 대구장대에서 참형 당한 후 수제자인 해월신사를 잡으려는 관의 추적이 강화되자 이를 피하여 해월신사는 강원도, 경상도, 충청도의 깊고 깊은 태백산맥, 소백산맥으로 숨어들게 된다. 이 곳 깊은 태백산맥과 소백산맥 등에서 해월신사는 36년간을 숨어 지내며 관의 추적을 피해 50여 곳을 전전하며 살아가게 된다. 그러나 해월신사는 다만 숨어서만 지낸 것이 아니라 흩어진 동학의 교도들을 다시 모아들이고, 또 교단을 정비하여 그 교세를 넓혀가는 한편 스승인 대신사로 부터 받은 도에 정진하여 동학의 명실상부한 지도자로 부상하게 된다. 이와 같은 시기를 천도교에서는 '숨어서 도를 펴던 시대', 곧 은도시대라고 부른다. 깊고 깊은 산간 벽지 영양 용화동에 숨어 지내던 포덕 13년에는 이필제와 더불어 영해에서 대신사의 신원을 위한 교조신원운동을 펼쳤으나 실패하여 다시금 더 깊은 태백산 속으로 피하여 살아가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산 속에서의 생활 임에도 불구하고 해월신사는 잠시도 수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동학도들에게 바른 수련을 하도록 지도를 하는 한편, 포덕 21년(1880)과 22년(1881)에는 스승인 대신사가 남겨옿은 경전을 모아 [동경대전]과[용담유사]를 간행하였다. 이러한 해월신사의 노력은 관의 탄압과 추적이라는 악조건 속 에서도 수만명의 교도를 규합하였고, 마침내는 동학의 교세를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데 결정적으로 공헌했던 것이다. 이후 해월신사는 동학의 조직을 보다 체계적으로 공고히 하기 위하여 접제도를 부활하고 이어 포 제도를 만들어 전국의 동학 교도를 조직적으로 관장하고 운영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였다. 바로 이러한 체계적인 제도를 통하여 해월신사는 공주, 삼례, 광화문, 보은 등지에서 대대적으로 교조신원운동을 펴기도 한다. 이들 교조신원운동은 우리나라에 있어 최초로 민의를 집결시킨 대규모 시위였으며 지금까지 숨어서만 지내던 동학교단의 사회와 정부에 대한 대규모 집회이기도 한 것이다. 또한 이러한 교조신원운동은 당시 우리나라를 위협하는 외국세력에 대해 척양척왜라는 반외세 운동으로 발전하게 되었고 이는 이내 갑오동학혁명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그러므로 해월신사는 포덕 35년(1894) 갑오동학혁명은\ㄹ 주도하여, 새로운 개벽의 시대를 열어 가고자 당시 부패한 조선조, 또는 침략을 앞세운 일본과의 항쟁을 전개하기도 한다. 그러나 신식 무기를 앞세운 일본군에 패하여 도피생활을 하다가 포덕 39년(1898) 추격하는 관군에 체포되어, 스승인 대신사와 마찬가지로 형장에서 순도하였으니 향년 72세였다. 해월신사는 험난한 시대적 여건에 조금도 굴하지 않고 일관된 정성과 피나는 노력으로 도를 생활 속에서 실천 하였을 뿐만 아니라 위기의 교단을 일으켜 세워 굿굿이 천도교단을 이끌어 나가신, 실천을 몸으로 보여준 선각자였다.
의암성사와 현도시대
의암성사의 이름은 손병희이다. 의암성사는 포덕 2년(1861) 충청도에서 태어났다. 호방한 젊은 날을 보내던 의암성사는 동학이 보국안민과 새로운 세상인 지상천국을 건설하는 커다란 종교목적을 지닌 도라는 말을 듣고는 포덕 23년(1882)에 입도하였다. 동학에 입도한 이후 의암성사는 호방했던 일상생활을 일시에 청산하고, 전도인으로부터 받은 주문 21자를 매일 3만독씩 읽고 외우며 수련에 임하였다. 또한 이와같이 주문을 읽는 틈틈이 매일같이 짚신을 두켤레씩을 삼았으며, 이 짚신을 한달에 여섯번 5일만에 열리는 청주 장에 나가 팔았다. 이와 같은 생활을 3년간이나 시행해 왔다고 한다. 즉 주문을 통한 수련으로 일관된 생활을 해나갔던 것이다. 이후 의암성사는 해월신사를 모시고 공주 가섭사, 익산 사자암,그리고 풍천 용문사 등에 들어가 독공 수련을 하게 된다. 이와 같은 의암성사의 종교적인 수행이 훗날 그 많은 업적을 이루게 하였던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동학혁명 당시 의암성사는 동학군의 통령으로 진두지휘를 하며 활약하기도 했다. 이후 해월신사를 모시고 관의 추적을 피해 원주, 여주 등지를 전전하게 된다. 37세가 되던 포덕 38년(1897) 12월 24일 해월신사로부터 도통을 전수받고 천도교의 3세 교조가 되었다. 종통을 이어받은 의암성사는 교단을 재수습하는 한편 세계정세를 살피기 위하여 해외로 떠나던 중, 일본에 머물면서 여러 지사들과 국사를 의논하고 또 교인 수습책을 강구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의암성사는 인재양성의 중요성을 깊이 절감하고 교인 청년 중 우수한 인재를 뽑아 일본에 유학을 시키는 등 꾸준하게 재기를 위한 준비를 하였다. 포덕 45년(1904)에 노일전쟁이 발발할 기미를 보이자 국내 동지들에 지시하여 진보회를 조직, 교인들을 규합시키는 한편 이 해 8월에 전국의 회원으로 하여금 일제히 머리를 깎고 옷을 간편하게 하는 등 신문화 운동을 일으키는 동시에 기우는 국운을 혁신하고자 개혁과 신문화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이후 포덕 46년(1905) 12월 1일을 기하여 동학을 천도교라는 이름으로 온 천하에 선포하였다. 따라서 동학은 은도의 시대를 벗어나 현도의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의암성사는 포덕 47년(1906) 1월 귀국하여 천도교 중앙총ㄹ부를 서울에 설치하고, 각 군에 교구를 설치하여 근대적 종교체계를 갖추는 한편 진보회를 일진회로 규합하여 친일행각을 벌인 이용구 등 60여명의 친일간부 교인들을 출교 처분하고 새로운 출발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포덕 51년(1910) 일제의 강점으로 우리나라는 일제로 부터 치욕적인 통치를 당하게 된다. 이처럼 나라를 잃은 슬픔 속에서 의암성사는 우이동에 봉황각을 짓고 천도교의 전국 교역자들로 하여금 이곳에서 일곱번에 걸쳐 이신환성의 법설과 함께 49일 수련을 실시하여 신앙통일, 규모일치를 강조하였다. 이러한 수련은 곧 정신력의 단결과 조직의 강화를 기하기 위한 것으로서, 뒷날 일어나게 되는 3.1독립운동의 중요한 원동력이 되기도 했던 것이다. 즉 의암성사는 이미 10년 가까운 기간을 3.1독립운동을 위하여 그 준비를 해왔던 것이다. 그리하여 포덕 60년(1919) 1월 5일을 기하여 전국의 교인들에게 일제히 49일 기도를 명하여 3.1독립운동을 하기 위한 정신무장을 시킨 후 3월 1일 거족적인 3.1독립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던 것이다. 3.1독립운동의 영도자로 일제에 의하여 구금된 의암성사는 옥중에서 고문으로 병환을 얻게되어 이후 병보석으로 출감하였으나 그 병세가 악화되어 포덕 63년(1922) 상춘원에서 환원하였다. 즉 수운대신사나 해월신사와 마찬가지로 의암성사 역시 억압받는 민중과 민족을 위하여 혼신의 정성과 힘을 다하다가 부당한 힘에 의하여 장엄하게 순도하였던 것이다. 향년 62세였다.
춘암상사와 문화운동시대
춘암상사의 이름은 박인호이다. 포덕 전 5년(1855) 2월 1일 충남 덕산군 장촌면 막동리에서 태어났다. 성품이 순박하며 원만한 춘암상사는 29세가 되던 포덕 24년에 동학에 입도하였다. 동학에 입도한 이후 10년간 밤낮으로 의관을 벗지 않고 생선. 고기. 술. 담배 등을 끊고는 정성으로 수련하는 것으로 일과를 삼았다. 잠이 깊이 들까 염려하여 낫자루를 베고 잠시 눈을 부쳤다가는 깨어서 주문을 외었다는 일화가 전하고 있다. 해월신사의 지도를 받아 공주 가섭사에 들어가 49일 수련을 하는 등 장차 지도자로서의 소양을 쌓았다. 동학혁명 당시에는 덕의대접주로 충청도 일대의 동학군을 통솔하여 참가하였다. 그 후 포덕 42년에는 경도주가 되었고 교장, 중앙총부 고문, 금융관장, 경도사 등의 직책을 두루 지냈다. 포덕 48년(1907) 12월 10일 천도교의 차도주가 되었다가 포덕 49년(1908) 1월 18일 대도주의 종통을 선수받아 천도교의 4세 대도주가 되었다. 춘암상사는 대도주가 된 이후 천도교 중앙총부의 지도체제를 새롭게 갖추고 교세확장에 온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포덕 51년(1910) 우리나라는 일제로 부터 강점을 당하는 아픔을 겪게 되었고, 이러한 아픔을 이겨내기 위하여 일제의 억압과 감시 속에서도 춘암상사는 의암성사의 뜻을 받들어 출판문화와 교육활동에 주력하였다. 특히 중앙총부 부설로 당시로는 최신형 인쇄소를 설치하여 천도교가 문화운동을 주도하여 갈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또한 보성학교와 동덕여학교 등을 인수하여 경영하는가 하면 사회 성인교육의 일환으로 전국에 800여개소의 교리강습소를 설치 운영하여 민족교육에 앞장서게 된다. 춘암상사는 3.1독립운동 당시 천도교의 중책을 수행하기 위하여 민족 대표에서는 빠졌지만 48인의 한 사람으로 일경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기도 한다. 포덕 63년 의암성사가 환원하자, 교내의 모든 일을 중의에 맡기고 정신적인 지도자로 남게 되었다. 그 후 일제가 만주를 침범하는 등 군국주의 통치가 심화되던 포덕 79년(1938), 지방의 교역자를 불러 일제 패망을 기원하는 특별기도를 지시하였다. 이것이 곧 무인멸왜기도운동이다. 그 후 춘암상사는 일제의 가혹한 탄압에 굴하지 않고 천도교를 지켜오다가, 포덕 81년(1940) 4월 3일에 환원하였다. 향년 86세이다. 이후 천도교는 춘암상사의 환원과 함께 그간 논의되어 오던 중의제에의하여 교령을 선출하는 체제로 전환하여 3년마다 교령을 선출하여 천도교 교단의 행정적. 정신적 지도자로 천도교를 대표하게 되었다. 이러한 제도가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어, 지금도 매 3년마다 교단의 대의원들이 모여 전국대회를 통해 교령을 선출하고 교단의 모든 것을 위임하여 교단을 이끌어 나가고 있다.
천도교란 어떤 종교인가
종지를 통해서 본 천도교
천도교의 종지는 인내천이다. 곧 '사람이 이에 한울님'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천도교의 종지는 천도교의 3세 교조인 의암성사 때에 부각된 것으로 오늘까지 천도교 종단의 종지가 되고 있다. 이 '인내천'은 의암성사 시대에 정해진 종단의 종지이지만, 대신사가 천명한 '시천주'에 그 근원을 둔 것으로 천도교의 종교적 핵심을 나타내는 말이기도 하다. 대신사는 포덕 1년(1860) 4월 5일 결정적인 종교체험을 통하여 한울님이라는 절대의 신이 다른 어느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사람들 몸에 주체적으로 모셔져 잇음을 깨닫게 된다. 바로 이와 같은 깨달음과 함께 '내 몸에 한울님을 모셨다'는 의미의 '시천주'를 가장 중요한 가르침의 요체로 삼게 된다. 따라서 선천의 기성종교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현세와 천당, 지옥이 별도의 세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극락과 연옥. 지옥이 별도의 세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바로 우리 몸에 모셔져 있으며 동시에 이 우주에 편만되어 있다는 것이 대신사의 가르침이다. 이와 같이 대신사의 가르침이 집약되어 나타난 낱말이 곧 '시천주'라는 말이다. 따라서 이 '시천주'라는 말씀은 천도교의 종교적 가르침을 나타내는 핵심 어휘가 되는 것이다. 그런가하면 이 시천주의 가르침은 종교적 차원을 뛰어 넘어 대사회적인 면에서 모든 사람들이 본원적으로 한울님을 모시고 있으니 그 본원적인 면에서 평등하다는 근원적 평등주의를 내포하고 있다. 양반과 천민이 사회적 신분제도에 의하여 차별되고 있던 당시 조선조의 사회제도로 볼 때 이러한 대신사의 가르침은 가히 혁명적인 것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러한 근원적 평등주의는 법 앞에서 평등을 강요하는 서구적 평등주의를 뛰어넘는 것으로, 새로운 개벽의 지평을 여는 매우 자생적이며 근원적인 평등주의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대신사에 의하면 천명된 '시천주 사상'은 해월신사에 이르러'사람이 곧 한울' 이라는 '인시천'으로 표명된다. 그러므로 사람이 곧 한울이니 '사람 섬기기를 한울님 같이 하라'는 '사인여천'의 사회적 윤리로 발전, 실천되게 된다. 따라서 천도교는 인내천의 종지와 함께 바로 이 사인여천을 사회적 실천윤리로 삼고 있기도 하다. '시천주'에서 '인시천'으로 나아가 '사인여천'의 윤리로 거듭 뻗어나간 천도교의 가르침은 의암성사 때에 이르러 '사람이 이에 한울'이라는 '인내천'을 내놓게 되었고, 이 인내천을 천도교의 종지로 삼게 되었다. 그러나 '사람이 이에 한울' 이라는 '인내천'을 종지로 삼았다고 하여 천도교가 인간지상주의를 지향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 한울이듯이, 우주의 모든 만유 역시 한울 아님이 없다는 것이 곧 천도교의 가르침이기도 하다. 해월신사의 말씀과 같이'저 나무 사이에서 울고 있는 새소리 역시 시천주'라는 가르침처럼 이 우주에 가득한 만유 역시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가르침을 체득하게 되면, '한울님을 공경하듯이, 사람도 공경해야 하며, 나아가 만유도 이와같이 공경해야 한다'는 해월신사의 삼경사상과 만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삼경사상 역시 시천주의 또 다른 표현이며, 인내천의 또 다른 표현이 된다. 따라서 이러한 천도교의 사상은 서구의 근대화 이후 대두된 인간중심의 사상을 가지고 있는 폐해를 뛰어넘어 진정한 우주공동체의 삶을 열어갈 수 있는 사상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바로 천도교의 종지가 되는 '인내천'은 대신사의 '시천주'에 그 연원을 둔 것으로, 인류가 지향하는 우주공동체의 삶을 이루기 위한 중요한 지표가 된다고 하겠다. 곧 천도교는 후천개벽의 새로운 차원의 시대를 맞아, 인류의 가장 큰 숙원인 진정한 평등과 자유가 넘쳐나는, 오직 인간들 만이 아닌 인간과 자연, 인간과 자연과 신이 모두 함께 어우러져 살 수 있는 '우주 공동체의 삶'을 지향하는 종교라고 할 수가 있다. 이것이 곧 천도교가 궁극적인 종교적 목적으로 삼고 있는 '지상천국의 건설'이기도 한 것이다.
종교적 목적을 통해서 본 천도교
천도교는 그 종교적 목적이 매우 뚜렷한 종교이다. 천도교의 종교적 목적은 '포덕천하, 광제창생, 보국안민, 지상천국 건설'이다. 매우 현실적으로 보이는 이 천도교의 종교적인 목적은, 실은 선천의 기성종교들이 지향하는 종교적인 목적인 천당이나 극락이라는 차원의 변화, 또한 공간의 변화를 통한 영생과는 다른 것이라고 하겠다. 즉 '천당과 지옥', 차안과 피안', '삶과 죽음', '현실과 초월', '신과 인간' 등의 이원적 구도를 벗어나고 있는 데에 천도교의 진정한 모습이 있다고 하겟다. 따라서 천도교의 종교적 목적인 '지상천국 건설'은 단순히 현세적인 것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우주적 차원에서의 질적인 변화와 대전환을 의미하는 것으로, '삶과 죽음', '현실과 초월', 차안과 피안' 모두를 포괄하는 궁극적인 장생의 길이기도 한 것이다. 이러한 천도교가 표방하는 종교적인 목적을 중심으로 천도교는 어떠한 종교인가를 알아보기로 하자.
1)포덕천하의 대업과 천도교
천도교는 1860년(경신년) 4월 5일 천도교의 제1세 교조인 수운대신사에 의하여 창도된 종교이다. 수운대신사는 오랜 구도의 생활을 통하여 어지러운 세상을 올바르게 구할 수 있는 도를 찾던 중, 경신년(1860) 4월 5일에 이르러 한울님을 만나고 또 한울님으로부터 영부와 주문을 받는 결정적인 종교체험을 하게 된다. 이렇듯 대신사가 한울님으로 부터 도를 받은 경신년(1860)을 천도교에서는 포덕 원년으로 삼고 있다. 이러한 면이 창시자의 탄신일을 그 종교가 시작된 날로 삼았던 선천의 다른 종교들과는 다른 점이라고 하겠다. 결정적인 종교체험 이후 대신사는 한울님으로 부터 세상을 올바르게 가르칠 수 있는 무극대도를 받게 되고, 세상에 이를 동학이라는 이름으로 가르침을 펴게 괸다. 당시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양에서는 서양의 'religion' 이라는 말의 번역어인 '종교'라는 말이 없었고, 다만 '도', '학', '교' 등의 이름으로 오늘의 '종교'라는 말을 대신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와같은 시대에 '도는 비록 천도이나 학은 동학이다'라는 대신사의 명명과 함께 동학이라고 불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 포덕 46년(1905) 12월 1일에 이르러 당시 천도교 3세 교조인 의암성사에 의하여 동학을 천도교라는 이름으로 온 천하에 선포함으로써, 동학은 오늘날 불리고 있는 천도교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수운대신사가 펼쳤던 동학의 요체는 곧 각자위심이라는 타락한 이기주의에 물든 세상사람들에게 모든 만물의 근본이 되는 한울님의 존재를 깨닫게 하고, 한울님이 이 세상에 펼친 덕화에 따라 살기를 강조하는 가르침이었다. 즉 세상이 어지럽고 또 서로 다투고 헐뜯는 혼란을 거듭하는 것은 다름 아니라 세상사람들이 자신의 생명의 본질이 되는 한울님의 존재를 알지 못하고 타락한 이기주의 성향만을 강조하는 각자위심의 삶을 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세상사람들의 모습을 대신사는 [동경대전] [포덕문]중에서 "근년에 이르러 온 세상사람들이 각기 자신만을 위하는 마음으로 천명을 돌아보지 않고 천리를 따르지 않게 되었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와같은 면으로 보아, 결국 동학 천도교의 가르침은 타락한 이기주의적인 각자위심의 삶에서 벗어나 천명과 천리를 따르는 삶을 펼쳐 나가는 데에 있는 것이라고 하겠다. 또한 그러기 위해서는 '한울님을 각자의 몸에 모시고 있다.는 시천주에의 자각과 함께 한울님의 존재를 깨닫고, 나아가 한울님이 모든 만물에게 편 덕화의 고마움을 깨달아야 할 뿐만 아니라, 천도교인 역시 이 한울님의 덕을 온 세상에 폄으로써 한울님의 덕을 세상사람 들에게 전해야 하는 곧 포덕천하를 행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같은 면에서 천도교는 곧 포덕천하의 대업을 지니고 있는 종교라고 하겠다. 즉 포덕천하를 통하여 천명과 천리에 따라 사는 올바른 세상을 이룩하고, 이에 한 걸음 더 나아가 모든 인류, 나아가 모든 만유가 본원적으로 같은 생명의 근원을 지닌 동포라는 자각 속에서 평등과 평화를 구가하는 세상을 이룩하는 데에 천도교 가르침의 본의가 있는 것이다.
2)광제창생과 보국안민
천도교의 중요한 가르침인 포덕천하를 이루기 위해서는 먼저 도탄에 빠져 힘들게 살고 있는 세상 사람들을 그 도탄 중에서 구해야 할 것이다. 다라서 천도교는 광제창생을 그 중요한 목적으로 하고 있다. 즉 잘못된 관념과 타락한 이기주의인 각자위심으로 인하여 서러가 서로를 흘뜯는 삶 속에 빠져 살아가고 있는 세상의 사람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것이 곧 이들 세상사람들을 도탄에서 구하는 광제창생의 길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가 하면, 이러한 광제창생과 함께 보국안민, 곧 국가와 민족을 보전하고 모든 백성이 편안하게 살 수 있는 길을 열어가는 '보국안민' 또한 천도교의 중요한 목적이 되고 있다. 특히 대신사가 도를 펼치던 조선조 말기, 곧 19세기 중엽은 서양의 열강들에 의하여 위협적인 통상이 요구되고 있던 시기이기도 하다. 그런가 하면, 당시 새로운 세력으로 들어오는 서학에 의하여 우리의 민생은 정치적. 사회적, 나아가 문화적인 혼란까지도 겪고 있었다. 이러한 서양의 서세동점에 의한 세력홪장과 서학의 전래는 당시 조선 사회를 비롯한 동양 사회 전반을 불안과 위기로 몰아가고 있었다. 이와 같은 시기에 대신사는 국가적. 민족적 위기를 극복하고 보국안민의 기치를 세우기 위해서는 당시 집권층인 양반들 만이 아니라 일반 민증들 역시 이와 같은 현실을 깊이 자각하여,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힘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즉 당시 특정한 집권층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일반 민중들에게도 있음을 강조 함으로써, 민중들 스스로 국가적. 민족적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주체'임을 일깨워 주었다. 곧 민중들에게 스스로 자신의 삶과 이 세상을 이끌어 갈 수 잇는 좆재, 그 주체임을 눈뜨게 했던 가르침이라고 하겠다. 이와같이 천도교가 지향하는 보국안민의 정신은 역사적으로는 민중들 스스로, 민중들의 힘에 의하여 역사의 주체가 되어 그 역사를 매우 주체적으로 열어가는 근대적 양상을 보여 주었다는 점에 그 중요한 의의가 있다. 따라서 이와같은 면에서 천도교는 매우 자생적으로 한국의 근대화를 우리의 역사 속에서 열어간 그러한 종교. 사상이며, 19세기 중엽이라는 봉건의 시대에 서구의 충격이 아닌 자생적인 근대의식을 펼쳐나간 가르침을 그 핵심으로 하고 있는 종교라 하겠다. 수운대신사 이후 이 보국안민의 정신은 해월신사에게로 이어져, 서구의 열강을 비롯한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고 있던 19세기 말엽, 척양척왜의 깃발을 높이들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동학혁명을 주도함 으로써 민의를 집결시켜 외세라는 부당한 침략에 항거하게 되었다. 또한 의암성사에 이르러 보국암민의 정신은 국가와 민족의 독립정신으로 승화되어 3.1독립운동으로 이어지기도 하였으며, 춘암상사에 이르러 일제의 식민정책이 극에 달했던 1930년대 후반, 구국을 위한 무인멸왜기도로 이어지기도 했던 것이다. 또한 이러한 정신은 8.15 광복 후에는 민족통일운동으로 이어졌다. 즉 천도교는 그 종교적인 목적인 광제창생과 보국안민의 정신으로 부당한 침략 침탈과 싸우며, 협의에서는 민족의 독립운동을 펼쳐나갓고, 광의에서는 인류가 새로운 차원의 삶을 열어갈 수 있는 '후천개벽'의 운동을 전개시켜 나간 종교라고 하겠다.
3)후천개벽과 동귀일체의 사상
대신사는 각자위심에 의하여 혼란과 다툼이 그치지 않는 이 시대를 선천의 마지막 시대라고 말하고 있다. 즉 선천의 마지막 시대에 이르러 세상은 그 운이 혼란의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양상을 대신사는 [동경대전] [포덕문]에서 "나쁜 질병이 온 세상에 퍼져서 백성 모두가 한 시도 편할 때가 없으니, 이것 역시 상해의 운수이다'라고 술회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혼란과 혼돈은 결국 새로운 후천개벽을 맞이할 그러한 운수의 조짐이라고 대신사는 말하고 있다. 즉 선천의 운이 다하여 후천이라는 새로운 세상이 도래할 것이니, 세상의 사람들은 모두 이를 맞이하기 위하여 그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이 대신사의 가르침인 것이다. 즉 대신사에 의하면 선천은 낡고 부패한 세상이 된다. 불순천리의 무너진 도덕으로 인하여 상해지수에 허덕이는 당시의 시대적 위기를 대신사는 선천의 괴질운수로 보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세상을 지양하고 새로운 후천의 세상을 열고자 하는 것이 곧 대신사의 동학이라는 가르침을 세상에 내놓은 궁극적인 계기이기도 한 것이다. 다라서 대신사는 이와 같은 전혀 다른 차원의 세계를 열어 가고자 새로운 벽, 곧 후천개벽을 그 중요한 사상으로 내놓게 되었다.후천개벽이란 물질의 개벽만이 아니라 정신의 개벽을 아울러 의미한다. 즉 '시천주'를 통하여 각자위심에 물들어 있는 세상 사람들의 마음과 기운을 모두 한울님의 마음과 기운으로 바꾸는 그런 정신의 개벽을 뜻하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이는 곧 '내 몸에 모신 한울님을 깨달음으로 해서 한울님의 덕과 일치하는' 그러한 '여천지합기덕'하는 경지를 뜻하기도 한다. 이와 같이 정신의 개벽을 한 사람을 동학에서는 '군자', 또는 '지상신선'이라고 이름하고 있다. 군자나 지상신선은 궁극적으로 '무궁한 나'로서의 존재를 깨달은 사람으로, 곧 한울님의 덕을 체득한 사람이며, 나아가 당시의 타락한 시대적 위기 속에서 가장 요구되고 있는 이상적인 인간형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군자'나 '지상신선'은 선천의 기성종교나 가르침과 같이, 어느 특정한 사람만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 곧 반상의 구분이나 귀천의 신분적인 구별 없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군자도 되고 또 지상신선도 될 수 있다는 것이 대신사의 지론이 된다. 그러므로 "입도한 그 날부터 군자가 된다"고 하여 일반적인 군자의 개념을 세속화 시켜 개개인의 내면에 주체화시키고 있으며, 신선을 지상신선으로 현실화시켜 부르고 있음을 볼 수가 있다. 따라서 이러한 지상신선들에 의하여 이룩된 세상, 즉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지상신선의 경지를 이루는 세상이 곧 후천개벽의 세계이며, 동시에 동귀일체의 세상이기도 한 것이다. 이와같은 면으로 보아 동귀일체란 이기적인 개체만을 내세우는 각자위심의 반대가 되는 개념으로 한울님의 뜻을 자신의 뜻으로 삼아 한울님과 한마음으로 돌아간다는 의미가 되며,동시에 지공무사한 한울님의 마음을 지닌 지상신선들의 공동체를 지칭하는 말이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이는 사람들로 하여금 '나'라는 개체를 뛰어넘어 '우리'라는 공동의 장으로 사회를 바라보게 하고 또 인식하게 하는, 그러한 계기를 마련했던 중요한 개념이 되기도 한다. 이 동귀일체의 세상이 곧 동학 천도교에서 지향하고 있는 지상천국이기도 한 것이다. 즉 천도교의 종교적 목적의 궁극적인 모습은 지공무사한 한울님 마음을 체득한 지상신선들의 공동체인 동귀일체의 사회, 동귀일체의 세상을 이룩하여 이 지상에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고 자유롭게 살 수 있는 그러한 천국을 이루는 데에 있는 것이다. 곧 이것이 바로 천도교가 지향하는 후천개벽이기도 한 것이다. 따라서 천도교는 후천개벽의 운이 함께 이 세상에 창도되어, 후천개벽이라는 전혀 새로운 차원의 질서, 새로운 차원의 삶, 새로운 차원의 세상을 이 지상에 이룩하고자 하는 종교라고 하겠다.
교리를 통해서 본 천도교
신관
우주관
인간관
사후관
가치관
천도교의 1세 교조인 수운대신사는 포덕 원년(1860) 4월 5일 결정적인 종교체험을 통해, 가장 먼저 한울님이라는 절대의 신에게서 '내 마음이 곧 네 마음' 이라는 '오심 즉 여심' 심법을 받았다. 즉 '나의 마음이 곧 너의 마음'이라는 오심즉여심'의 심법을 통해 대신사는 한울님이라는 절대의 신이 다른 어느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안에 모셔져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나아가 이 '내 몸에 모셔져 있다'는 '시천주'를 가장 핵심적인 종교사상으로 삼게 된다. 시천주란 이를 바꾸어 말하면 천인여일관을 의미하기도 한다. 즉 한울님이란 절대의 신은 다른 어느 곳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안에서 우리에게 계시를 주고 있다는 말이 된다. 그러므로 시천주란 다름 아니라 곧 내 안에 자라한 참 주체인 한울님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한 치도 그 뜻에 어긋남이 없이 행동하며 살아감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아울러 이러한 '시천주의 삶'을 통해서 자신의 진아이며 또한 우주의 본체인 한울님을 자신의 몸에 모셨음을 깨닫게 되고 나아가 잃어버린 진아를 다시금 회복할 수 있는 것이라 하겠다. 따라서 대신사는 이러한 '시천주'로 천도교의 가장 핵심적인 사상을 삼았다. 또한 훗날 대신사와 해월신사의 뒤를 이은 의암성사에 의해 천명되는 '이신환성', 곧 '육신을 성령으로 바꾸라'는 설법 역시 이러한 시천주에 그 근원을 둔 가르침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대신사의 가르침인 시천주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신인합일의 경지이며, 인간이 이 우주에 화생될 때 한울님으로부터 품부받은 바로 그 천심을 다시 회복하는 것을 말하며, 동시에 이를 자신의 삶 속에서 한 치도 어김없이 실천하는 삶을 말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므로 '시천주'는 곧 인간이 태어날 때의 가장 순수한 마음, 즉 인간 마음의 본질을 회복하는 것이며, 나아가 실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신사는 결정적인 종교체험을 통해서 깨닫게 된'내 몸에 한울님을 모셨다'는 시천주를 동학의 가장 중요한 가르침으로 이 세상에 천명하게 되고 이러한 시천주를 근간으로 하여 무궁한 존재인 한울님을 내 몸에 모셨음으로 궁극적으로 무한한 우주와 더불어 '무궁한 나'가 될 수 있다는 그러한 '천도교의 인간관', 또는 이 우주는 곧 모든 생명체와 유기적인 연관을 맺고 있는 커다란 하나의 생명체라는 '천도교의 우주관', 나아가 이 우주의 근원적인 섭리가 곧 신의 작용이며, 동시에 신의 면모라는 '천도교의 신관', 이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천도교의 사후관, 천도교의 가치관 등을 확립하게 된다. 이와 같이 시천주를 근간으로 하는 천도교의 '신관', '우주관', '인간관', '사후관', '가치관' 등을 알아보기로 한다.
신관
각 종교에 있어 경배의 대상이 되고 있는 신에 대한 명칭은 서로 같지 않다. 이러한 모습은 기성의 많은 종교들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즉 '하느님', '하나님', '한얼님' 등의 이름으로 부르고 있음을 볼 수가 있다. 이렇듯 기성의 많은 종교들이 표방하고 있는, '하느님', '하나님', '한얼님'등의 신에 대한 명칭은 궁극적으로 인간이 살고 있는 이 '땅'의 상대개념인 '하늘'을 염두에 두고, 신은 곧 이 지상이 아닌 저 먼 하늘에 계시다는 관념 속에서 부쳐진 이름들이라고 하겠다. 천도교 역시 그 믿음의 대상인 신에 대한 명칭이 다른 종교들과는 다소 다르게 '한울님'이란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천도교의 '한울님'이라는 신에 대한 명칭은 '땅'의 상대 개념인 '하늘'을 염두에 두고 붙인 이름은 아니다. 이 '한울님'이라는 명칭은 천과 지가 모두 포함되는 '천지', 곧 우주적 개념을 지닌 명칭이 된다. 일찍이 대신사 스스로 "무궁한 이 울 속에 무궁한 내 아닌가"라고, [용담유사] <흥비가>에서 노래한 바와 같이, 이 '무궁한 이 울'은 곧 '무궁한 우주'를 말하고 있는 것이며, 이 '무궁한 이 울'에서부터 '한울님'이라는 신의 명칭이 나오게 된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므로 '한울님'이라는 신은 다만 인간이 두 발을 딛고 서 있는 이 땅의 상대가 되는 저 먼 하늘에만 계신 것이 아니라, 이 하늘과 땅, 즉 우주 어디에나 편만되어 있으며 동시에 '내 몸에 주체적으로 모셔져 있다'고 보는 것이 천도교의 신관이기도 하다. 이렇듯 '내 몸에 한울님을 모시고 있는 것'을 일컬어 '시천주'라고 말하며, 이것이 천도교 신관의 핵심이 된다. 따라서 사람들 모두가 한울님을 모시고 있으므로, 이한울님을 모시고 있는 사람들 역시 무궁한 한울님의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 섬기기를 한울님 같이 하라'는 사인여천의 천도교의 윤리가 나오게 된 것이고, '사람이 이에 한울님'이라는 인내천의 종지가 생겨나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은 천도교의 신관은 종래의, 신이 어느 초월적 공간에 존재한다고 믿어왔던 초월적 유일신의 신관과 만물 속에 내재한다고 생각하고 있던 내재적 범신의 신관을 동시에 극복한 것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천도교의 신인 '한울님'은 초월적이면서 동시에 내재적이고, 인격적이면서 모든 존재의 근원이라는 반대일치의 묘합을 보이고 있다. 나아가 한울님은 무궁한 절대자로서 만물을 화생하는 조화의 주재자이면서 아직 인간의 역사창조에 뜻을 다 이루지 못하고 계속 인간을 통하여 새로운 창조와 진화를 거듭하고 있는 신이기도 하다. 따라서 한울님은 우주만물을 낳으신 초월적인 존재이면서 동시에 만물속에 내재해 계시면서 무궁한 생성, 변화와 그 조화를 주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한울님의 조화는 자연계와 모든 생명, 그리고 우주 만유의 끊임없는 생성변화와 그 질서를 주재하는 지공무사하며 전지전능한 힘이기도 한 것이다. 또한 이 조화는 무위이화로서 어떤 다른 힘의 직위에 의하여 되는 것이 아니라 한울님의 섭리에 의하여 저절로 되는, 말하자면 타율적이 아닌 자율적 창조. 진화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와같은 천도교의 종교적 경배의 대상이 되는 '한울님'은 어떠한 표현으로도 개념화 될 수 없는, 인간 인식긔 한계를 초월한 것이다. 그러므로 대신사는[동경대전] [논학문]에 있는 주문 21자를 해의하면서 오직 '한울님'에 해당되는 '천'에 대해서만 그 해의를 유보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인간 지식의 한계를 넘어서는 신앙의 깊은 경지에 들어가게 되면 사람은 누구나 한울님의 감응을 받을 수 있게 되고 거룩한 한울님의 뜻을 거느릴 수 있게 된다. 즉 우주 만유는 한울님의 무궁한 조화에 의하여 그 자취를 나타내는 것이며, 사람은 한울님 몸에 모시고 한울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한울님과 사람과의 관계를 설파한 천도교의 신관은 곧 단순한 초월적 신관이나 내재적 변신이 아닌 '초월과 내재'를 모두 포함하는 또는 '인격성과 자연성'을 모두 포함하는 신관이며, 동시에 '사람이 한울님을 모시고 있으니 사람이 이에 한울님'이라는 시천주를 근간으로 하는 '인내천의 새로운 신관'인 것이다.
우주관
천도교의 경전에서 우주를 나타내는 말로는 [용담유사] [흥비가] 중에 나오는 '무궁한 이 울'이라는 것이 있다. 즉 우주란 '무궁한', 곧 '그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것'이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이 우주는 한울님의 기운인 '지기'로 가득차 있어, 이 지기가 간섭하지 않고 또 명하지 않는 것이 없다고 한다. 즉 이 우주는 곧 한울님의 지기가 그 본체를 이루며, 나아가 한울님의 지기로 이룩된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므로 이 우주에 수많은 만상, 곧 삼라만상이 편재되어 있어도, 궁극적으로 이들 모두는 이우주에 가득차 잇는 한울님의 지기와 함께 서로 유기적인 연관을 맺고 있고, 나아가 이 모두는 궁극적으로 무궁한 우주와 함께 '하나의 커더란 생명' 으로 되어 있다는 것이 곧 천도교의 우주관이다. 즉 이 우주를 한울님의 지기에 의한 하나의 커다란 영성의 생명체로 보고 있는 것이 천도교의 우주관이다. 따라서 이 무궁한 우주, 곧 한울님의 지기에 의하여 명하여진 만유는 궁극적으로 같은 뿌리를 지닌 모두 같은 존재가 된다. 그러므로 천도교에서는 다만 이 우주에서 인간만이 홀로 가장 존귀하다는 인간중심의 인간존엄주의에 머물지 않고 경천. 경인. 경물이라는 삼경사상을 그 중요한 근간으로 삼게 된다. 즉 우주를 하나의 커다란 생명체로 보고 있기 때문에 이 우주에 근원을 둔 모든 존재는 모두 같이 존중받아야 하며, 또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천도교의 우주관은 오늘이라는 현대에 인간중심주의의 팽배로 인하여 위협받고 있는 자연환경의 파괴나 나아가 지나친 개발과 파괴로 인하여 파생되는 우주적 질서의 위협이라는 현대적 난제를 가장 슬기롭게 헤쳐 나갈 수 있는 사상적 근간이 될 것으로 기대되기도 한다. 즉 천도교의 우주관은 한마디로 '우주' 자체를 '하나의 커다란 생명체'로 보고 있으며, 이와 같은 하나의 생명체와의 유기적인 연관을 맺고 있는 우주만상은 궁극적으로 같은 뿌리를 둔 같은 동포라는 데에 그 핵심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우주 속에서 삼라만상과 더불어 '우주적 공동체'를 이루고, 나아가 우주적인 질서에 의하여 살아가고자 하는 데에 천도교가 지향하는 궁극적인 종교적 이상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 즉 이 우주는 모든 만유의 삶의 터전이며, 동시에 모든 만유의 삶의 질서이며, 그 삶의 근원적 생명이라는 것에 천도교의 우주관, 그 본의가 있는 것이라고 하겠다.
인간관
어느 종교나 사상을 불문하고 인간을 만물의 가장 존귀한 존재로 보고 있는 것은 매우 일반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천도교에서는 인간을 다만 존귀한 존재로만 보는 것이아니라, '무궁한 한울님과 더불어 '무궁한 존재'로 보고 있음이 그 특징이 된다. 이와 같이 유한적 존재인 인간을 신고 같은 '무한적 존재'로 보는 것은 다름 아닌 '시천주', 곧 사람들 모두 그 내면에 매우 주체적으로 무궁한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천도교의 이러한 인간관을 보다 분명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한울님을 모신다'는 '시천주', 더 나아가 '시에 대한 이해가 무엇보다도 필요하다 하겠다. 대신사는 이'시'라는 글자에 대하여 [동경대전] 가운데 주문을 해석하는 대목에서 "시라는 것은 안에 신령이 있고, 밖으로는 기화가 있어서 온 세상 사람이 각각 깨달아 한울님과 내 몸은 서로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불이의 관계에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즉 '한울님을 모셨다'는 '시'의 상태란 다름 아니라, 안으로는 신령스러운 영이 있음을 느끼며, 밖으로는 신비한 기운과 동화를 이루는 느낌을 갖게 되면서 나(인간)와 한울님이 떨어질 수 없는 존재임을 스스로 깨달아 실천하는 것이라는 설명이다. 그러면 이렇듯 대신사가 설명을 하고 있는, 안으로 느껴지는 '신령스러운 영'이란 과연 무엇일까? 이는 다름 아니라 '나'의 주체이며 동시에 한울님의 마음이 된다. 그러면 밖으로 느껴지는 '신비한 기운의 동화'란 무었인가? 이는 곧 나의 기운이 한울님의 기운과 일치함으로써 일어나는 작용이라고 하겠다. 따라서 이는 안팎으로 느껴지는 신령스러운 영인 신령이 작용이 되는 것이다. 즉 안으로는 신령이 자리하게 되고 밖으로는 이 신령과의 동화작용이 일어나고 있다는 말이 된다. 따라서 안고 밖이 둘로 나뉘어 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 일치를 이루고 있는 것이라고 하겠다. 즉 '신령'은 '기화'를 통하여 활동을 하게 되고, 이러한 '기화'로 이룩되는 '신령의 활동을 각기 깨우쳐서 한울님과 내가 불가분의 있다는 것을 알고 이를 삶 속에서 실천하는 것을 대신사는 '각지불이'라고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시천주의 '시'란 신령스러운 한울님 마음과, 기화라는 한울님의 실천적 삶이 하나가 되어 각지불이를 통하여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이와 같은 면에서 본다면, 시천주란 곧 내 안에 자리한 한울님, 곧 나의 '참주체'가 되는 영의 목소리에 귀기울여 한치도 그 뜻에 어긋남이 없이 행동하며 살아감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아울러 이러한 '시'를 통해서만이 자신의 진아이면 또한 우주의 본체인 한울님을 자신의 안에서 회복할 수 있으므로, 대신사는 이 '시천주'로 천도교의 가장 핵심적인 사상을 삼은 것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시천주'의 상태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신인합일의 경지이며, 인간이 이 우주에 화생할 때 한울님으로 부터 품부받은 바로 그 천심을 다사 회복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그런가 하면, 곧 자신의 삶 속에서 '한울님 마음'을 한치도 어김없이 실천하는, 그러한 삶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므로 '시천주'는 곧 인간이 태어날 때의 가장 순수한 마음, 즉 인간의 마음의 본질을 회복하는 것이며, 나아가 이를 삶 속에서 실천하는 것이 된다. 즉 시천주란 무궁한 존재인 한울님을 내 몸에 모시고 그 무궁한 한울님의 삶을 나의 삶 속에서 실천함으로써 궁극적으로 '나' 역시 무한한 우주와 더불어 '무궁한 나'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천도교의 인간관은 바로 이러함을 통하여 '무궁한 나'를 깨달아 가는데에 있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렇듯 '무궁한 나'로서의 존재를 깨달아 가는 , 천도교의 인간관은 궁극적으로 올바른 세상을 열어가는 데에 있어 가장 필요한 이상적인 인간형이기도 하다. 즉 이는 각자위심에 물들어 자신의 이기주의적 탐욕만을 찾아 서로 다투고 싸우는 세태 속에서, 한울님의 덕을 회복하고 또 한울님의 덕과 일치하는 삶을 영위함으로써 동귀일체의 세상을 지향하는 지상신선의 모습이기도 한 것이다. 이렇듯 사람을 한울님과 더불어 '무궁한 존재'로 본 천도교의 인간관은 전대의 어느 성인도 천명하지 못한 대신사의 매우 독특한 인간관이다. 그런가 하면, 바로 이러한 점에서 대신사가 천명한 가장 탁월한 인간관, 나아가 천도교의 인간관의 한 특징적 모습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천도교의 인간관은 대사회적인 면에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띄고 있다고 하겠다. 이는 다만 어느 특정한 신분의 사람만이 '무궁한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내 안에 한울님을 모시고 있기 때문에 빈부나 귀천의 구분없이 세상사람이면 누구나 무궁한 존재로서 평등하다는 본질적인 평등주의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천도교의 인간관은 신분과 제도로, 또 존비의 차별이 분명했던 봉건사회를 뛰어넘을 뿐만 아니라, 오늘이라는 현대에 있어서도 가장 중요하게 요구되고 있는 인간관이라 하겠다. 즉 천도교의 인간관은 인류의 역사 속에서 전근대와 근대를 지나며, '모든 인간은 무궁한 존재로써 평등하며, 또 평등해야 한다'는 그러한 자각을 억압된 민중들에게 불어넣었을 뿐만 아니라, 차원을 달리해서 인간 스스로 무궁한 신과 더불어 무궁할 수 있다는 새로운 자각을 불러주기에 충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본원적 만인 평등의 사상과 아울러 질적 차원의 변화를 통하여 무궁한 존재로서의 자신을 깨달을 수 있는 천도교의 인간관은 불균형의 삶을 영위함으로써 불안한 현실과 비전 없는 내일을 살고 있는 현대의 많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미래를 열어갈 수 있는 희망이 될 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천도교의 인간관은 진정한 인간의 가치가 무너져 내리면서 '물화와 소외'라는 전도된 가치만이 강조되고 있는 현대적 모순을 극복하고, 인류에게 미래에의 새로운 대안을 제시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바로 이와 같은 의미에서 '무궁한 우주'와 더불어 '무궁한 나'를 자각함으로써 체득하게 되는 천도교의 인간관은 새로운 미래와 세상을 이룩할 수 있는 오늘이라는 현대에 있어 가장 절실하게 요구되고 있는 그러한 인간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후관
앞서 천도교의 우주관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이 광대한 우주는 하나의 커다란 영성의 생명체로 되어 있다. 따라서 우주의 모든 만유 역시 그 생명의 근원을 이 우주라는 커다란 하나의 생명, 즉 한울님에 그 근원을 두고 있다고 보는 것이 곧 천도교의 생명에 관한 관점이기도 하다. 즉 모든 생명은 바로 한울님, 곧 이 우주라는 커다란 생명에서 온 것이며, 동시에 죽게되면 이 우주의 커다란 생명으로 다시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죽는다는 것을 천도교에서는 '본래의 자라로 돌아간다'라는 의미인 환원이라는 용어로 부르고 있다. 우리의 조상들이 '죽음'을 '돌아가셨다' 라고 말한 것과 같은 의미이다. 즉 인간의 생명을 비롯한 모든 생명은 궁극적으로는 우주, 곧 한울님으로부터 와서 살아가다가 다시 우주라는 커다란 생명, 곧 한울님의 무궁한 생명으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그러니 '나'라는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에도 나의 생명은 이 우주에 있었던 것이오, '나'라는 사람이 죽은 후에도 그 생명은 우주라는 커다란 생명체에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결국 이러함을 깨닫게 된다면 죽고 사는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생명은 무궁한 한울님, 그 무궁한 성령과 함께 영원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천도교의 사후관은 바로 이와 같은 깨달음 속에 있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므로 다른 종교와 같이 죽은 후에 성령이 가는 세상, 곧 천당이나 극락, 지옥 등이 별도로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죽음 이후에 성령은 무궁한 한울님의 성령, 곧 우주라는 근원적 생명으로 돌아가는 것이며, 동시에 자손과 후학의 심령 속에 살아남아 있다고 보는 것이다. 나아가 천당과 지옥은 이러함을 깨닫느냐 못 깨닫느냐 하는 그 사람의 마음에 담겨져 있다고 보는 것이 곧 천도교의 사후관이기도 한 것이다. 따라서 천도교인은 제사를 모실 때에 조상의 성령이 모셔진 신위를 저쪽 '벽'에다 세워 놓고 제를 지내는 '향벽설위'의 방법으로 하지 않고, 조상의 성령이 나에게 모셔져 있으므로 이 신위를 '나'를 향하게 하는'향아설위'의 방법에 의하여 제를 지낸다. 즉 이러한 제사의 방법은 다름 아니라 , 죽은 조상의 성령이 다른 차원의 공간인 천당이나 저승으로 간 것이 아니라 바로 나에게 모셔져 있다는 천도교의 사후관을 잘 나타낸 모습이라고 하겠다. 나아가 현세인 이 지상과는 별도로 천당과 지옥이라는 또 다른 차원의 공간인 천상을 천도교는 인정하지 않는다. 이러한 천도교의 인식 방법은 흔히 유한적인 존재라고 하는 사람이 한울님 모심을 깨닫게 되면 이내 그 무궁한 한울님과 더불어 무한적인 존재임을 깨닫게 된다는 시천주, 나아가 '사람이 이에 한울님'이라는 인내천에서부터 비롯된 내세관이며 사후관이라고 하겠다. 모든 생명체가 육체적으로 소멸하게 되면, 다시 말해서 죽게되면 이 세상에서 공간적 차원을 달리해서 천당이나 지옥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본래 내 생명의 근원인 우주라는 커다란 생명으로 다시 돌아가서 자손과 후학의 설령과 융합일치되어, 이 현세에 성령으로 다시 출세한다는 것이 곧 천도교의 내세관이며 사후관이다. 이와 같은 면에서 보면, 천도교에서 말하고 있는 '장생'이란 곧 육체적인 장생이 아니라, 무궁한 우주적인 생명을 깨달음으로써 누리게 되는 '성령의 장생'을 뜻하는 것이라고 하겟다.
가치관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어떠한 가치의 기준을 세우고 이에 따라 선과 악으로 그 가치를 나누고 있다. 즉 이 선악이라는 가치를 나눌 때에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작용이 되는 것은 다름 아니라 그 가치의 기준이 되는 것이다. 가치의 기준을 잘못 세우게 되면 나뉘어진 선악이 잘못 개념화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가치의 바른 기준을 세우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라고 하겠다. 그러면 천도교의 가치 기준은 어디에 있는가? 천도교의 가치 기준은 한 마디로 이야기해서 사람의 '마음'과 '기운'에 있다고 하겠다. 일찍이 대신사는 이 '마음'과 '기운'을 늘 말씀하시며, 이를 기준으로 '올바른 삶과 올바르지 못한 삶', 또는 '선'과 '악', 나아가 '군자와 소인'을 이야기하고 있음을 볼 수가 있다. 그러므로 [용담유사]를 통하여 "선하고 악한 마음을 쓰는 것은 역시 기운에 의한 것"이라고 노래하고 있으며, {동경대전] [탄도유심급]을 통하여 "흐린 기운을 씻어내고 맑은 기운을 어린아이 기르듯 잘
키우게"되면, 그 마음이 이내 본래의 마음바탕을 회복할 수가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즉 기운을 바르게 하여 본래의 바탕을 회복한 마음을 잘 지키는 것이 바로 올바른 삶이요, 선한 삶이요, 나아가 군자의 삶이라는 것이 곧 대신사의 가치관의 기준이기도 한 것이다. 즉 천도교의 가치관의 기준은 '마음'과 '기운'에 있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천도교의 가치관이 보다 잘 나타나고 있는 바로는 [동경대전] [논학문]의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이다. "군자의 덕은 기운에 바름이 있고 마음이 옮기지 않으므로 천지와 더불어 그 덕이 합해지는 것이요, 소인의 품성은 기운이 바르지 못하고 마음이 옮기므로 천지와 더불어 그 뜻이 어긋나는 것이다." 가장 이상적인 선의 기준이 될 수 있는 군자의 품성은 곧 기운이 매우 바르고 또 마음이 이리저리 옮겨다니지 않는, 곧 본래 품부받은 그 마음을 바꾸지 않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소위 소인이라는 사람들의 품성은 그 기운이 바르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 마음 역시 이리저리 잘 바뀌어 본래 품부받은 마음을 지니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이와 같은 대신사의 가르침으로 볼 때에 천도교의 가치관은 '기운을 바르게 하고', 이 바른 기운을 통하여 '본래 마음 바탕을 회복'하며, 이 '회복된 본래의 마음을 바꾸지 않고 살아감'에 있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므로 이러한 기운과 마음을 지니기 위한 방법으로 대신사는 '수심정기'라는 새로운 수행법을 내놓았다. 즉 '회복된 본래의 마음을 지키고, 나아가 기운을 바르게'하여 이를 올바르게 삶 속에서 실천하도록 가르치는 수행법인 것이다. 그러나 천도교의 가치관은 이러한 '기운을 바르게 하고', '마음을 옮기지 않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이러한 삶을 통하여 '천지' 곧 이 '우주의 덕'과 더불어 혼연일체가 될 수 있는 삶을 영위할 때에 비로소 최고의 가치를 이루게 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즉 이 우주라는 커다란 하나의 생명체와 더불어 조금도 어긋나지 않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최고의 가치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즉 천도교의 가치관은 그 기준이 사람의 '마음'과 '기운'에 있으며, 나아가 이 마음과 기운을 바르게 또 변하지 않게 하여 이 우주와 더불어 혼연일체가 되는 삶에 최고의 가치를 두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와 같은 면으로 볼 때 천도교는 바로 이와 같은 우주적 삶과 그 가치를 추구하는 종교. 사상이며, 또한 이러함을 최고의 덕목으로 삼고 또 가르치는 종교임을 알 수가 있다.
천도교의 수행과 신앙방법
일반적으로 종교적인 행위는 두가지가 있다. 즉 경배하는 신의 은총을 바라며, 신을 믿고 신에게 의지함으로써 '신앙'에 치중하는 종교적인 행위가 있는가 하면, 다른 하나로는 어떠한 종교적 경지에 도달하여 그 의미를 밝혀내고자 '수행'에 치중하는 종교적인 행위가 있다고 하겠다. 대체로 모든 종교가 이러한 종교행위를 모두 병행하고 있으나, 서양의 종교는 보다 '신앙'에 치중하고 있다면, 동양의 종교는 보다 '수행'에 치중하고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천도교의 종교적 행위는 어느 한 가지에 치중하지 않고 '수행과 신앙' 두 가지를 모두 겸하고 있다. 천도교는 대신사의 심법이 해월신사에게 이어졌고, 또 의암성사. 춘암상사에게 이어지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런가 하면, 오늘과 같은 보다 구체적인 수행과 신앙의 방법들이 확립된 것은 의암성사 때에 이르러서라고 하겠다. 먼저 의암성사는 대신사와 해월신사의 가르침을 이어 천도교인들이 행해야 할 '수행과 신앙'의 방법으로 '오관'을 제정하였다. '오관'은 '주문', '청수', '시일', '성미', '기도'의 다섯가지로, 천도교인이 행해야 할 종교적 의식과 수행의 방법들이다. '주문'은 곧 천도교의 주문을 읽으며 수련에 임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요, '청수'는 매일 하오 9시에 모시는 '기도식'을 뜻하는 것이다. 그런가하면, '기도'란 일정한 날과 기간을 정하여 놓고 드리는 특별기도와 같은 것을 말하고, '시일'은 일요일 오전 11시에 봉행하는 종교적인 집회를 말한다. 끝으로 '성미'는 매일 밥을 지을 때에 한 식구당 한 숟갈씩 정성으로 떠놓은 쌀을 모았다가 한 달에 한 번씩 교회에 헌납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다섯가지 종교적인 행위인 '오관'에는 궁극적으로 '수행과 신앙'이 모두 담겨져 있다고 하겠다. 이러한 오관을 통하여 천도교의 수행과 신앙의 방법에 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먼저 천도교의 수행방법은 바르게 앉아서 눈을 감고 '오관'의 하나인 천도교의 주문을 반복적으로 읽는 것을 그 방법으로 하고 맀다. 따라서 천도교의 수행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주문'이 된다. [동경대전] [논학문]에 의하면 천도교의 주문은 '한울님을 지극히 위하는 글'이라고 되어 있다. '한울님을 지극히 위하는 글', 이는 다른 말로 하면 한울님의 뜻에 따라 살아간다는 말이 된다. 이 주문을 통하여 한울님의 섭리에 따라 살아감으로써 하나의 커다란 생명체인 이 우주, 곧 한울님과 합일을 이루고자 하는 수행이 곧 천도교의 수련이 된다. 즉 천인합일을 이루어 한울님의 덕을 체득하고, 그러므로 바른 마음과 기운을 몸소 체험하고 실천하고자 하는 것이 곧 천도교의 종교적 수행인 것이다. 천도교의 주문에는 강령주문으로 '지기금지원이대강'의 8자와 본주문으로 '시천주조화정영세불망만사지'의 13자가 있다. 강령주문이란 한울님의 기운과 내 기운이 서로 융화일체가 되고자 하는 주문이고, 본주문은 천인합일의 경지에 이르러 한울님의 무궁한 가르침을 받고, 나아가 한울님의 덕에 이르고자 하는 주문이다. 이와 같은 강령주문과 본주문을 합하여 천도교에서는 통상적으로 '주문'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천도교의 주문은 모두 '스물 한 자'가 된다. 이 21자 주분에 대해서는 [동경대전] [논학문] 중에 대신사 스스로 해의한 것이 있다. 그런가 하면, 이 21자의 주문 속에는 대신사의 가르침, 곧 천도교의 모든 교의가 함축적으로 담겨져 있다. 즉 주문 21자는 곧 천도교 교리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 되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와 같은 주문에 담긴 깊은 뜻을 생각하고 한울님을 생각하며 주문을 반복적으로 읽는 것으로써 천도교는 종교적 수행의 방법으로 삼고 있다. 즉 강령주문을 통하여 한울님의 지극한 기운과 나의 기운이 서로 융화일체를 이루도록 하고 나아가 본주문을 통하여 한울님의 덕과 마음을 체득하여 천인합일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 종교적 경지의 극치를 향해 정진하는 것이 곧 천도교의 수행방법이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주문을 반복적으로 읽으며 종교적인 수행을 하는 것을 천도교에서는 '수련', 곧 '수도연성'이라고 한다. 이러한 수행방법과 함께 천도교에서는 그 종교적인 행위로 '심고'라는 것이 있다. 이 심고는 다름아닌 한울님에게 기원하고 서원하는 '신앙의 방법'이 된다. 해월신사의 법설인 [내수도문]에 의하면 천도교인은 모든행동 하나하나에 심고를 드리도록 되어 있다. 즉 잘 때 '잡니다'하고 마음으로 고하고, 일어날 때 '일어납니다' 하고 마음으로 고하고, 물 길러 간다거나 방아찧으로 간다거나 하는 모든 일상적인 행동을 시작할 때와 끝마쳤을 때에 이같이 고해야 한다고 되어 있다. 그런가 하면 모든 종교적 의식이나 행사 때에도 이 심고로써 그 시작을 하고 또 끝을 맺는다. 또한 앞서 오관을 설명할 때 말한 바와 같이, 모든 천도교인은 오후 9시에 청수를 받들어 놓고 기도식을 봉행하는 종교의식을 갖는다. 이 기도식 역시 경배의 대상인 한울님께 기원과 서원을 드리는 의식이 된다. 또한 매일 드리는 하오 9시 매일기도 이외에, 특별한 목적과 서원을 정해 놓고 일정기간 특별기도를 행하는 의식이 있는데 이를 '특별기도'라고 부른다. 이와 같은 기도와 심고는 주문과 함께 천도교의 중요한 종교적 행위라고 하겠다. 즉 주문이 종교적인 수행을 행하기 위한 방법이 된다면, 기도와 심고는 기원과 서원을 담은 신앙체계라고 하겠다. 즉 천도교는 바로 이와 같이 주문고 심고, 기도라는 방법 등을 통하여 '수행과 신앙'이라는 두가지의 종교적 행위를 모두 겸하고 있는 종교이다. 이러한 주문과 심고.기도를 통한 종교적인 행위를 수행하는 한편, 천도교에서는 그 실천 방법으로 성. 경. 신을 강조하고 있다. 성경신에 관해서는 대신사가 경전 곳곳에 말씀을 해 놓았지만, 특히 [동경대전],좌잠.에 명기하고 있다.
우리 도는 넓고도 간략하나, 많은 말로 그 뜻을 말할 필요가 없다. 다른 도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신 세글자에 있다.
즉 한울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과 이 믿음을 통하여 끊이지 않고 '정성'을 드리고, 그러므로 우러나게 되는 '공경'을 생활 속 에서 늘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삶이 곧 천도교의 종교적 수행이며 또 신앙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가 하면 일상적인 삶 속에서 성. 경. 신을 통하여 생활을 하며, 주문을 통한 수련과 신앙생활을 해나감으로써 천도교인은 한울님으로부터 품부받은 그 마음을 회복하고, 그 회복한 마음을 지키는 '수심의 경지'와 한울님의 지극한 기운과 유화일체를 이룬 기운을 올바르게 실천하는 '정기'를 행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함을 천도교에서는 곧 '수심정기'라고 부른다. 이와같이 주문과 심고. 기도를 통하여 생활 속에서 성. 경. 신을 실천하고, 나아가 수심정기를 통하여 잃어버린 본성을 회복하므로써 종교적으로 깊은 경지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나아가 종교적 깊은 경지 속에서 잃어버린 본성을 다시 회복하고, 이 본성에의 회복을 통하여 우주적 섭리에 합일할 수 있는 올바른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데에 바로 천도교 '수행과 신앙'의 궁극적인 목적이 있는 것이다.
천도교의 민중. 민족. 문화운동
교조신원운동
갑오동학혁명
갑진개화혁신운동
3.1독립운동
6.10만세와 천도교
신간회와 천도교
비밀결사 오심당
무인멸왜기도운동
신문화운동
해방공간과 청우당
천도교의 민중. 민족. 문화운동은 단순한 민족주의적인 입장에서 전개된 운동이 아니다. 천도교가 한국 근대사 속에서 펼친 민중. 민족. 문화운동은 천도교의 사상적 배경과 종교적인 교리에 의한 것이라고 하겠다. 천도교는 그 창도에서부터 시천주사상에 의한 본원적인 평등주의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부당한 힘에 의하여 억압을 당하고 있는 민중을 위한 민중운동 내지 민족운동은 천도교의 종교 사상적인 면으로 보아 당연히 대사회적인 면에서 전개되었던 운동인 것이다. 또한 천도교는 보국안민을 중요한 종교적인 목적으로 삼고 있다. 따라서 우리나라 주변에서 우리나라를 위협하던 열강들에 대하여 반침략적인 운동을 벌여야 했음은 천도교가 지닌 사상적인 측면으로 보아 마땅한 일이었다고 할 수가 있다. 나아가 천도교는 다만 보국안민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종교적인 이상으로 새로운 개벽을 통한 후천의 이상사회를 이룩하는 데에 중요한 종교적인 목적을 두고 있는 종교이다. 따라서 이러한 후천의 새로운 사회를 이룩하고자 천도교의 이상은 곧 부당한 힘에 의하여 고통받고 있는 민중을 위한 민중운동, 나아가 우리나라를 위협하고 있는 열강들에 저헝하는 민족운동을 벌여나가는 한편, 민중적 삶을 보다 합리적이고 또 높은 차원으로 이끌기 위한 문화운동을 전개시키는 데에 있어 매우 중요한 사상적인 배경이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렇듯 우리의 근세사 속에서 천도교의 민중. 민족. 문호운동은 다만 한국이라는 자국만을 지키기 위한 그러한 차원의 운동이었다기 보다는 모든 인류에게 새로운 차원의 후천사회를 제시하고 또 이룩하기 위한, 인류사적으로 보아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 운동들이었다고 하겠다.
교조신원운동
천도교의 1세 교조인 수운대신사가 대구 장대에서 참형당한 이후, 당시 동학교도들은 관의 지목과 탄압 속에서 매우 힘든 삶을 살아가야만 하였다. 이렇듯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대신사로부터 도통을 이어받은 해월신사는 지속적으로 교단을 정비하고 교도들을 모아들여 포덕 30년대에는 그 교세가 전국적으로 화대되어 갔다. 이러한 시기를 맞아 해월신사는 공주, 삼례, 광화문, 보은 등지에서 대신사의 억울한 죽음을 신원하고, 동학을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하도록 촉구하는 대집회를 영었다. 즉 교조신원운동을 대대적으로 펼치게 되었던 것이다. 이때에 펼쳐졌던 집회는 매우 평화적이고 또 합리적인 것으로써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민의를 집결시킨 집회로 평가되고 있다. 즉 매우 평화적이고 대중적인 방법으로 당시의 팽배된 민의를 결집시켜 중앙정부에 건의하였던 최초의 민주적인 집회이며 시위였던 것이다. 그러나 가장 규모가 컸던 마지막 보은취회를 전후에서는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함께, 당시 부패한 정치에 대한개혁의 요구와 반왜양, 곧 당시 침략의 마수를 뻗치고 있던 일본과 서양에 대한 반외세 운동으로 전환되고 있음을 볼 수가 있다. 따라서 교조신원운동은 단순히 동학교조인 대신사의 억울한 죽음을 신원하기 위한 운동이었다기보다는, 당시의 팽배된 민의를 또 결집시켜 부패한 당시 정권에 대하여 개혁을 촉구했던 매우 의미있는 민중운동이었으며, 나아가 열강의 침략 속에서 위기를 겪고 있던 우리나라와 민족을 위해 반외세의 기치를 높이 세웠던 매우 의미있는 민족운동이었다고 하겠다. 바로 이와 같은 면에서 교조신원운동이 지닌 민중. 민족운동의 의의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갑오동학혁명
포덕 35년(1894, 갑오년) 1월 10일 전라도 고부에서 동학의 접주인 전봉준이 고부군수 조병갑의 수탈과 학정을 견디지 못하고 수천명의 군중을 지휘하여 고부관아를 습격하는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바로 이 사건이 갑오동학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이렇듯 동학도를 중심으로 민중봉기가 일어나자, 이를 평정하기 위해 조정에서 보낸 안핵사 이용태는 무고한 백성을 동학도로 몰아 잡아 매질하고, 재물을 약탈하며 불지르고 부녀를 겁탈하는 등 만행을 저질렀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마침내 전라도 일원의 동학도들은 혁명의 기치를 올리게 된다. 고부의 전봉준을 비롯하여 무장의 손화중, 태인의 김개남, 금구의 김덕명 등 각지의 접주들이 무장에서 봉기하여 3월 21일 동학군을 고부 백산으로 이동 집결시켜 드디어 혁명의 일전을 결의하게 된다. 동학군은 격무, 창의문, 행동강령 등을 내세우고 전봉준을 동도대장으로 추대하여 오색의 각 포별 군기를 휘날리며 제폭구민, 척양척왜를 표방하고 일제히 궐기했던 것이다. 동학군이 고부로 진격하자 안핵사 이용태는 혼비백산하여 도망하였다. 동학군은 이어서 태인과 부안을 점거한 후 도교산으로 이동하였다가 4월 7일에 황토현에서 대승을 올리고 10여일 만에 정읍. 홍덕. 고창을 점거하게 된다. 동학군은 무고한 백성에게 피해가 없도록 12개조 군율을 세워 군기를 엄하게 하였으므로 가는 곳마다 민중의 호응을 받았고 그 세력이 날로 증가하여 연이어 무장. 영광. 함평을 점거하고 4월 23일에는 장성의 황룡촌 접전에서 홍계훈의 경군을 대파하였다. 드디어 동학군은 4월 27일 전주를 무혈점령함으로써 호남일대를 장악하여 서울로의 진입을 눈앞에 두게 된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관군은 병력지원을 조정에 호소하게 되었고, 나약한 조정 대신들은 청국에 원병을 청하는 민족반역을 범하게 된다. 이리하여 청국군 2천여명이 5월5일과 7일에 아산에 상륙하게 되고, 이를 빌미로 일본은 천진조약을 내세워 일본군 7천명을 5월 6일 인천에 상륙시켜 서울로 진주하였다. 전주에 입성한 동학군은 호남 일대를 제압하고 서울로 북상하려다가 청.일 양국군이 조선에 개입할 구실을 주지 않기 위해 북상을 중단하는 동시 관군과 협상을 개시한 끝에 폐정개혁안 실행과 동학집강소 설치를 내용으로 하는 전주화약을 성립시키고 5월 8일에 전주성을 관군에게 양도하였다. 당시 동학군은 "탐관오리는 그 죄목을 조사하여 일일이 엄중하게 징계할 것". "횡포한 부호들을 엄징할 것", "노비문서는 불태워 버릴 것", "7종의 천인차별을 개선하고 백정 머리에 쓰는 평량갓은 벗겨 버릴 것", "청춘과부의 재가를 허용할 것", 등의 개혁적인 폐정개혁안 12개 항목을 제시, 집강소를 통해 이를 실시하였는데 이것은 우리나라의 주체적 근대화의 시발로, 그 의미가 매우 높이 평가되고 있다. 또한 동학군이 전라도 53개 군현에 집강소를 설치하여 자체적으로 민정을 실시한 것은 우리 역사상 최초의 지방자치제가 되기도 한다. 이와같이 매우 주체적이고 자랍적으로 평화적인 방법에 의하여 개혁을 진행시키고 있는 동안 동학군을 진압한다는 명목으로 상륙한 일본과 청나라는 서로가 패권을 잡기 위하여 한반도를 무대로 청.일전쟁을 일으키게 된다. 전세는 일본군의 우세로 기울여 졌고, 일본군은 재빨리 왕궁을 점거하고 고종을 사실상 포로로 하여 일본의 괴뢰 내각을 출범시켜 소위 갑오경장을 실시하였다. 이러한 일본군의 침략 사실이 동학군에 전해지자 동학군은 대열을 다시 가다듬어 전주를 재점령하고 북상을 기도하게 된다. 마침내 9월 18일에 해월신사의 천명으로 전국의 동학 접주를 충청도 청산으로 모이게 하여 대일항전의 총동원령을 내리게 된다. 이리하여 동학군은 전국에 걸쳐 339 지방의 포가 동원되었고, 수십만의 대군을 형성하여 삼남일대와 충청도 동남부를 이미 장악하고 10월에 이르러 논산에 동학군 주력부대가 집결하여 공주를 향해 북상하였다. 동학군은 목천 세성산 싸움에서 천여명의 사상자를 냈으나 주력부대는 공주 이인역 옥녀봉에서 관군을 대파하고 봉황산에 이르러 10월 22일부터 공주 우금치에서 일본군과 대 혈전을 전개하게 되었다. 공주 우금치 전투는 무려 사오십 차례나 우금치 고개를 뺏고 뺏기는 시산혈해의 대혈전이었다. 그러나 동학군은 일본의 막강한 신무기와 화력을 당할수 없어 11월 11일 우금치 고개를 시체로 메우고 천추의 한을 남긴 채 처참하게 패퇴하였다. 그 후 일본군은 동학을 뿌리채 없애려는 의도로 악착같이 추격하여 무차별 토벌을 감행하였다. 이리하여 동학군은 충주. 홍천. 하동 그리고 황해도와 평안도 상원 등 도처에서 줄기차게 일어나 싸웠으나 처절한 전투 끝에 무려 30여만명이 무참히 희생 당한 채 좌절되고 말았다. 그 후 포덕 39년(1898)에 해월신사가 관군의 추적 속에 체포 당하여 처형을 당하였으니, 햐년 72세였다. 동학혁명은 반봉건 반침략주의의 기치 아래 일어난 혁명이며, 동시에 새로운 차원의 후천 세상을 열어가려는 동학도의 또 다른 열망이기도 했던 것이다.
갑진개화혁신운동
갑오동학혁명 이후 한국은 청.일 전쟁으로 청나라의 예속을 벗어 나면서 일본과 러시아의 세력이 한반도 안에서 각축전을 벌이는 위기에 처하게 된다. 당시 일본에 망명 중이던 의암성사는 노일전쟁이 일어난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동학의 조직을 동원하여 먼저 정부를 개혁하는 동시에 개화혁신운동을 일으켜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리하여 의암성사는 이인숙으로 하여금 먼저 정부에 건의하여 정치를 개혁할 것을 호소하였다. 그러나 부패 무능한 정부당국은 이 나라의 운명이 이에 달린줄은 생각지도 않고 오히려 이 글을 올린 이인숙을 체포하려 했다. 포덕 47년(1904) 2월에 드디어 노.일 전쟁은 터졌다. 의암성사는 사태가 급박함을 알고 동학의 간부들을 일본으로 불러 민회를 조직하도록 지시하였다. 우리나라로 돌아 온 간부들은 민회의 이름을 대동회라 하고 비밀리에 각 지방에 조직을 펴나갔다. 이어 4월에 박인호. 홍병기 등이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의암성사에게 그 동안의 국내사정을 보고하자, 의암성사는 이르기를 "그대들은 본국에 돌아가 도인으로 하여금 일제히 상투머리를 잘라 단발하게 하라. 단발의 목적은 첫째, 세계문명에 참여하는 표준이요, 단결을 굳게하여 마음과 뜻을 일치하게 하는 것이니......우리가 단발을 한 후에라야 기대하는 일이 성공하리라"고 지시하였다. 이 지령에 따라 7월부터 대동회를 중립회로 명칭을 바꾸고 각 지방에 조직을 강화하려고 하였는데, 이때 관헌의 탄압이 극심하여 뜻대로 안되었다. 일이 여의치 못하자 의암성사는 권동진. 오세창 등과 상의하여 회의 명칭을 다시 진보회로 바꾸고 강령을 바꾸게 한다. 또한 강령의 발표와 함께 종래의 산발적인 모임을 지양하고, 백만도중이 8월 30일 일시에 개회 궐기하도록 지령을 내렸다. 이리하여 전국 각지에서 일제히 단발흑의로써 죽음을 무릅쓰고 정부개혁과 국정 쇄신을 부르짖었으니, 당시 상투를 자른 사람이 하루 사이에 만명을 넘고 며칠 사이에 근 20만ㅕㅇ이나 참가하여 전국 방방곡곡에 진보회의 깃발이 휘날리게 되었다. 당시 진보회는 전국 360여 군에 지방조직을 설치하고, 정계에 큰 바람을 일으키며 민폐제거와 무명잡세혁파, 나아가 부패한 정부를 탄핵하며 교육과 산업의 부흥 등을 주창하였다. 그러나 진보회의 정체가 과거 동학혁명을 주도했던 동학의 후신이라는 것을 알게된 정부는 당황한 나며지 군대를 동원시켜 진압하는 한편 일본군과 교섭하여 지난날 갑오동학혁명 때와 같은 동학 토벌의 움직임을 보이게 되었다. 그리하여 각 지방에서는 충돌사건이 빈발하고 발포, 구타, 살상 등의 공포분위기가 조성되었다. 특히 평안도 태천에서는 수백명의 교인이 관군에 쫓기어 고치강에 빠져 익사 당하는 비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한편 이때 친일단체인 일진회는 일본의 보호 밑에 겨우 간판만 유지하고 있었는데 진보회가 전국적으로 크게 일어남을 보고 진보회 회장인 이용구에게 "정부에서 갑오년 동학당 토벌 때와 같이 일본군과 합세해서 진보회를 소탕할 방침인 듯하니 진보회가 살아남는 방법은 오직 일진회와 합동하는 길 뿐"이라고 유혹하였다. 이에 이용구는 정부의 진보회 탄압을 빌미로 동학을 배신하고 일진회 요구대로 이 해 10월 13일 진보회를 일진회와 합병, 친일단체 일진회로 둔갑시켰다. 이용구의 배신을 뒤늦게 알게된 의암성사는 포덕 46년(1905)12월 1일ㄹ을 기해 동학을 천도교라 선포하는 동시 천도교와 일진회간의 일체 관계를 끊게하고 이용구 등 친일파 일당을 천도교에서 출교 처분하였다. 갑진년의 이 개화혁신운동은 이용구의 배신으로 비록 좌절되었으나 우리나라의 근세사에 있어서 놀라운 민권의 신장과 문화혁명의 개혁의지를 보인 대서특필할 큰 의의를 지닌 개화혁신운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 . 1 독립운동
경술국치 이후 천도교는 의암성사의 지도아래 10년 가까운 기간을 여러 방면에서 독립운동을 위한 준비를 해왔었다. 일제로부터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하여 한편으로는 힘을 기르고 다른 한편으로는 독립운동을 거사할 준비를 했던 것이다. 이를 위해 우이동에 봉황각을 건립하여 지방 간부 약 500명을 뽑아 7차에 걸쳐 수련을 실시하여 강한 종교적인 정신력과 함께 독립정신을 기르게 하였고 훗날 이들로 하여금 각 지방에서 독립운동 거사를 주동하게 하였다. 또한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위한 기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중앙대교당 신축기금의 명목으로 자금을 마련토록 하였다. 그런가 하면, 전국의 교도로 하여금 기미년 1월 5일부터 2월 22일까지 49일간 광복특별기도를 행하게 하였다. 이러한 준비와 함께 전국 교구에 등사기를 마련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갖추면서 전민족의 이름으로 독립운동을 거사할 방침을 세워 나갔다. 이리하여 포덕 60(1919)1월에 의암성사 자택에서 권동진. 오세창. 최린 등이 여러차례 모여서 회합한 끝에 거족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합의한다. 이에 따라 독립운동에 임하는 ①대중화 ②일원화 ③비폭력의 세가지 운동원칙을 확정하였다. 이후 최린은 2월 초 자택에서 송진우. 현상윤. 최남선 등과 회합을 갖고, 앞서 세운 독립운동계획에 합의하였다. 그리고 나흘 후 다시 계동 중앙학교에서 네 사람이 재차 회합하여 숙의한 결과, 구 한국시대 요로 인물을 설득하고, 기독교와 함께 민족대표 수십인의 명의로 독립을 선언하기로 하며 독립선언서 및 의견서 등 서면 기초는 최남선이 담당하도록 합의하였다. 이어 최남선과 송진우는 구 한국시대 요인을 찾아 각각 교섭하였으나 여의치 못하였다. 한편 최남선은 기독교와 교섭하기 위하여 정주의 이승훈을 만나고자 현상윤으로 하여금 상경하도록 전언을 의뢰하였다. 현상윤은 다시 김도태 등에게 부탁, 이의 연락을 받은 이승훈이 2월 11일에 급거 상경하게 된다. 한편 이 무렵 재일 동경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으로 국내에서 일본 관헌의 경계가 자못 심하여졌다. 이때 최남선은 지목을 피하기 위하여 이승훈과 직접 만나지 못하고 송진우로 하여금 만나 상의하게 하였다. 송진우는 이승훈에게 천도교측의 독립운동 계획을 말하고 기독교에서 같이 합류하기를 권하자 쾌히 찬동하였다. 이승훈은 다음날 선천으로 내려가 기독교의 이명룡 등 여러 인사들과 회합하여 찬동을 얻고, 재차 상경하여 기독교청년회에 있는 박희도와 상면하여 기독교측의 독자적인 독립운동 모의에 참석하였다. 모의한 결과는①일본정부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하기로 하되 ②경성 및 지방에서 청원서에 서명할 동지를 구하자는 것이었다. 그 후 2월 21일에 최남선은 이승훈을 만나 그와 함께 최린을 방문하여 의견을 교환하게 되었는데, 최린은 기독교측의 독립청원서 제출 계획을 듣고 독립청원보다 독립선언이어야 한다고 역설하면서 교파가 다르다 하여 서로 다르게 하여서는 안된다고 간곡하게 합류할 것을 권유하였다. 이에 이승훈은 다른 동지와 협의하여 회답하기로 약속하는 한편 독립운동비조로 자금을 마련해 주도록 요구하고 헤어졌다. 이에 최린은 의암성사의 승인을 얻어 운동자금 5천원을 22일 이승훈에게 넘겨 주었다. 그 후 이승훈은 함태영과 함께 기독교측 대표로서 천도교측 섭외대표인 최린과 여러차례 협의 끝에, "독립선언은 3월 1일 오후 2시 낙원동의 탑골공원에서 행한다", "독립선언문을 민중에게 살포하는 동시 학생단과 민중으로 하여금 만세시위 행진을 감행토록한다"는 등의 7개 항목의 구체적인 방법을 합의하였다. 이리하여 민족대표 33인이 정해지고, 2월 28일 저녁 의암성사 댁에서 민족대표가 회동하여 다음날 3월1일의 거사에 대하여 마지막으로 합의한 결과 독립선언서 낭독을 태화관에서 변경한 것 외에는 모두 당초 계획대로 재확인하였다. 이때 민족대표 33인은 천도교 15명, 감리교 9명, 장로교 7명, 불교 2명이었다. 드디어 3월 1일을 맞아 민족대표들은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소리 높이 불렀다. 때를 맞추어 탑골공원에서는 남녀 학생들이 모여 일반 민중과 더불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드높게 외치면서 시가로 쏟아져 나와 시위행진을 감행하였다. 같은 날 평양과 해주, 의주, 길주, 원주, 서산, 전주, 진주 등지에서 거사하고, 연이어 삼천리 방방곡곡에서 성난 파도와 같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우리 민족 모두가 일어나 일본군경의 총칼 앞에 맨주먹으로 독립만세를 부르며 쓰러지고 또 쓰러지면서도 연이어 일어났다. 이 운동으로 민족대표를 비롯하여 수많은 독립투사들이 투옥당하고 이름없는 많은 애국지사가 학살 당하였다. 특히 천도교는 3.1독립운동으로 인하여 의암성사를 비롯한 중요 간부 대부분이 투옥되었다. 뿐만 아니라 일본군에 의해 중앙총부가 포위 점거되어 기능이 마비되고 여러 지방교구가 폐쇄되는 등 극심한 타격을 받게 되었다. 3.1운동은 청사에 빛나는 거족적 독립항쟁이었다. 천도교라는 한 종단이 그 주축이 되었지만, 민족의 이름으로 교파와 종교를 초월하여 모두 한 마음 한 뜻으로 모여 독립운동을 하였다는 것은 인류 역사에 그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일이라고 할 것이다. 이와 같이 국내에서 독립운동이 가열되자 해외에서도 망명지사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게 되었고, 이러한 독립열기가 한데 모아져 그 후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게 되었다. 또한 이렇듯 숭고한 3.1독립정신은 훗날 대한민국을 수립할 때, 건국정신의 기초가 되었던 것이다.
6.10 만세와 천도교
조선조의 마지막 임금인 순종이 승하하자 포덕 67년(1926) 순종의 인산일인 6월 10일을 기하여 3.1독립운동과 같은 전민족적인 시위운동을 계획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곧 6.10만세 운동이다. 이 운동은 조선공산당의 발의로 학생들이 중심이 된 독립운동이었다. 그러나 좌파의 힘만으로는 어렵다고 판단한 사회주의 진영이 당시 천도교 내의 민족주의 세력인 천도교청년동맹의 박래원. 손재기 등과 연합하여 그 계획을 구체화시켰다. 천도교측에서는 전국의 개벽사 지사와 농민단체, 노동단체, 천년단체, 천도교 지방교구 등을 중심으로 6월 10일레 일제히 봉기할 수 있도록 계획을 수립하는 한편, 10만장의 인쇄물을 준비하여 손재기의 집에 숨겨두었다. 그러나 거사 직전에 일본경찰에 탐지되어 박래원을 비롯한 천도교측의 주동자는 물론 천도교의 간부 대부분이 연행되었고, 지방의 요시찰 대상자들도 예비 검속을 당함으로써 이 계획은 좌절되고 말았다. 이때 전국 각지를 통하여 검속된 사람은 2천여명이나 된다. 그 중 형을 받은 사람은 50여 명이었고, 고문. 치사된 사람이 1명, 옥사한 사람이 1명 등 희생자가 발생했다. 거사 강일에 사용된 인쇄물은 「대한독립만세」 등 다섯 종류로, 대한민국의 독립과 이를 위한 민족의 단결을 그 내용으로 담은 것들이었다. 6.10만세 운동은 비록 실패로 끝이 났지만 당시 사회주의 세력과 비타협을 주장하던 천도교 민족주의 노선이 최초로 연합을 시도한 운동이며, 3.1독립운동 이후 독립운동사에 있어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운동의 하나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고 하겠다.
신간회와 천도교
6.10만세 운동을 계획하며 연합을 맺게 된 사회주의 세력과 비타협을 주장하는 천도교 구파측의 민족주의 노선은 비록 6.10만세 운동은 성사시키지 못하였지만 새로운 독립운동을 위한 '민족단일당' 결성을 위한 계기가 된다. 따라서 춘암상사의 분부에 의하여 천도교의 권동진, 이종린, 박래홍, 박완, 이병헌 등이 민족단일당인 신간회 운동에 적극 참여하게 된다. 이에 따른 몇번의 준비 단계를 거쳐, 포덕 68년(1927) 2월 15일 민족단일당인 민족협동전선으로서 민족주의를 표방하는 신간회를 창립하게 된다. 즉 민족주의와 사회주의가 제휴하여 비타협운동을 감행하는 민족운동의 대표단체라고 할 수 있는 신간회가 발족된 것이다. 이때 신간회에 참여한 각 파는 조선일보계의 신석우파, 천도교 구파계열, 민흥회 및 종교계 인사 등이다. 신간회는 민족협동전선으로서 우리 민족의 정치적. 경제적 각성과 민족의 단결을 굳게 단결시켜, 포덕 72년(1931) 해산하기 까지 비타협주의의 기치를 버리지 않고 우리 민족을 억압하는 일제의 행위에 대해 정면으로 항거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조직적인 탄압과 방해공작으로 운동방향을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고 마침내 '신간회 해소론'을 불러 일으켜 창립 4년만에 민족주의와 사회주의가 민족독립 쟁취를 위하여 공동전선을 이루었던 신간회는 그 막을 내리게 된다. 이러한 신간회 운동에는 천도교측에서 약 120여명이 참여하여, 비타협 민족주의 노선을 견지하며 많은 활동을 하였다. 즉 신간회는 천도교 내에 비타협 민족주의 노선을 견지하던 이사들이 공동의 전선을 이루면서 적극 참여했던 민족독립 쟁취를 위한 욷동이었다고 하겠다.
비밀결사 오심당
3.1독립운동 이후, 천도교는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그 가장 대표적인 비밀결사가 곧 오심당 비밀결사와 춘암상사의 무인멸왜기도운동이었다. 3.1운동 이후 천도교의 주요 간부들이 투옥되고 모든 활동들이 답보상태에 있을 때에 청년들은 천도교청년교리강연부를 조직하여 그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해 나가게 되었다. 그 후 청년교리강연부가 천도교청년당으로 발전하면서 포덕 64년(1923) 6월경 일부 당원들이 중심이 되어 불불당을 결서하게 된다. 이후 불불당은 포덕 70년(1929) 평양을 중심으로 결성된 오심당과 연합을 하여 열성당원들이 중심이 되어 오심당으로 재편된다. 이렇듯 결속된 오심당은 각 간부들을 소련. 중국, 일본 등에 파견하여 국제정세의 추이를 광범위하게 검토 분석하였고, 당내 중견간부들을 중심으로 경제, 사회, 또는 공산당, 국민당 등 전공분야를 맡겨 검토 분석하게 하였다. 그 결과 포덕 76년(1935)과 77년(1936)에 걸쳐 일본이 국제적. 정치적으로 위기를 맞게 되리라 내다보고, 이때를 기하여 대대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할 것을 계획하게 된다. 특히 오심당 당원들은 전국의 독실 교인들로 결성되었으며, 이들이 지켜야 할 의무 역시 엄격하여, '비밀엄수', 또는 '운동기금 부담', 나아가 '엄격한 신앙생활' 등이 강조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포덕 75년(1934) 8월 정확히 배경은 알 수가 없으나 안주에서 우연히 탄로되어, 이를 비밀리에 내사한 일경이 9월 19일부터 대대적인 검거를 단행, 사흘만에 230명의 오심당원이 체포되었는데, 당시 신문지상에 이 사실이 크게 보도되었다. 이후 일제는 국제 여론 등을 의식하여 대부분 석방하고 71명만을 추려 조사하였다. 그러나 3개월간에 걸쳐 취조를 한 이후 12월 20일에 일제는 디시금 조선독립에 대한 국제 여론을 의식하여 71명 모두에 대해 불구속이라는 특별 조치를 내리게 된다. 오심당은 천도교의 비밀결사로, 그 조직을 11년이나 유지하는 단단한 결속력을 보인 단체다. 따라서 이러한 빈틈없는 결속으로 천도교 청년당을 이끌어 갔으며, 당시 청년당이 펼친 다양한 활동에 배후에서 크게 이바지하였다. 사전에 발각이 되어독립만세운동을 실현하지는 못하였으나, 「오심당」의 일제에 대한 저항정신, 나아가 조직력과 그 활동을 위한 치밀한 준비는 갑오동학혁명, 3.1운동 등의 정신을 계승한 것으로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무인멸왜기도운동
일제가 만주를 유린하고 중국본토를 침략하기 위하여 우리 민족에게 더욱 가혹한 식민통치를 심화시켜 나가던 1930년대에 이르러 3.1운동을 주도한 천도교는 일제의 패망과 우리나라의 독립을 기원하는 기도운동과 동시에 독립자금을 모금하는 무인멸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때 송죽과 같은 정절로 일관하여 온 천도교 4세 대도주 춘암상사는 포덕 77년(1936) 8월 14일 교내의 주요 간부들을 불러 민족정신의 회복과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일제의 패망을 기원하는 기도운동을 전개하도록 지령을 내렸다. 춘암상사는 간부들에게 일제의 패망이 가까워 온다는 것을 말씀하면서 경전의 가르침을 인용하여 "무궁한 내 조화로 개같은 왜적놈을 일야간에 멸하고서 한의 원수 갚겠습니다'라는 내용으로 아침. 저녁 정성껏 기도하라고 밀령을 내렸던 것이다. 이리하여 전국 각지에서 일제의 패망을 기원함과 아울러 유사시에 대비한 독립운동자금으로 특별성금 모금이 비밀리에 진행되었다. 이 특성금은 중일전쟁이 일어난 후 이 전쟁으로 인하여 주권을 회복할 기회가 포착될 것으로 믿고, 그 경우 필요한 자금을 미리 마련하기 위하여 전국을 네개 구역으로 나누어 비밀리에 모금운동을 전개해왔던 것이다. 그러던 중 포덕 79년(1938) 무인년 2월17일에 이 사실이 황해도 신천경찰서에 적발되어 전국적으로 교역자의 검거 선풍이 일어났다. 황해도 연원대표 홍순의에 이어 장로 최준모를 비롯하여 간부급 교역자들 수백명이 체포 투옥 당하였다. 춘암상사는 노환으로 병상 심문에 그쳤으나 투옥된 많은 교역자들은 혹독한 고문을 당하였다. 이때 심한 고문으로 인하여 감옥에서 나온 후 사망한 교인들은 장흥의 김재계, 논산의 손필규, 해남의 이강우, 신천의 김정삼 등 4명이나 되고, 그 밖의 여러 교인들이 악형으로 인하여 고질병을 얻게 되었다. 당시 왜경은 수백명의 검거된 교역자들에게 일제의 패망을 기원하는 기도문을 여러번 쓰게하고, 수십 번 혹은 수백 번씩 밤새도록 고성으로 낭독하게 하였다고 한다. 경찰서 안에서 일제패망의 기도문 소리가 계속 울려 퍼지자 오히려 왜경들 스스로 놀라서 안색이 초췌해디고 검어졌다고 전한다. 이것은 그들의 정신적 패망을 의미한 것이었다. 당시 일본신문들은 '사변하에 지하활동', '극비의 불온계획', '조선독립을 몽상', '천도교의 대음모', '특별회사금도 모금' 등의 제목으로 보도하였다. 그런데 당시 일제는 이 사건이 크게 확대될 경우 중일전쟁에 불리하다고 판단하여 일반교역자들은 모두 석방시키고 최준모, 김재계, 한순희, 김경함, 홍순의 등 5인만 구속 송치하였다가 이들 5인마저 70여일 만에 석방하였다. 왜경은 이 사건의 성격과 죄질이 3.1운동 때보다 더한 대음모라고 하면서도 전원 석방으로 매듭짓게 된 것은 전시하에 미치는 중대한 영향의 충격파를 미연에 막으려는 고등책략에서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무인독립운동은 널리 알려지지 않고 역사의 그늘에 가리어 있었으나, 우리나라 독립운동 역사상 가장 혹독했던 민족수난기에 우리의 민족혼을 되살리고 불굴의 독립의지를 보였다는 점에서 그 의의는 매우 큰 것이라고 할수 있다.
신문화운동
3.1독립운동 이후 민족의 문명의식 고취와 새로운 문명, 문화를 통한 민족정신 함양을 위하여 천도교는 거국적인 신문화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이들 문화운동은 주로 3.1독립운동 이후에 전개한 것으로 청년운동, 출판문화운동, 농민운도, 어린이운동, 여성운동 등 각 계층을 망라한 전방위적인 문화운동이라고 하겠다. 이들 문화운동의 개요를 살피면 다음과 같다.
1)청년운동
천도교는 3.1운동 후 교역자들이 대부분 체포.투옥 당하여 한때 그 공백을 면치 못하는 어려움을 겪었다. 이러한 때에 젊은 청년교인들 중심으로 선열의 정신을 이어 받아 새로운 진로를 모색하고자 하는 운동이 전개된다. 이것이 곧 포덕60년(1919) 9월 2일 발족된, 민족의 신문화창조. 계발과 새로운 사상. 교리의 연구 보급을 목적으로 청년교인들이 중심이 된 천도교청년교리강연부이다. 이 청년조직은 전국 각지에 지부를 설치 확대하면서, 다음해 4월에는 천도교청년회로 이름을 바꾸고, 편집부사업으로 개벽사를 설치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종합잡지인 월간 「개벽」을 발간하는 한편, 순회강연을 실시하고, 또 체육부 사업으로 야구단을 조직하여 활동하였으며, 신체조를 보급하는 등 문화운동을 주도해 나갔다. 그리고 포덕 63년에는 청년회 소년부 사업으로 천도교소년회를 조직하여 어린이 운동에 앞장서기도 한다. 그후 포덕 64년(1923) 9월에는 청년회를 발전적으로 해체하여 천도교청년당을 창립하였다. 청년당은 급속도로 발전되어 포덕66년(1925)에 지방당부 120여개에 당원수 3만여명을 확보하였고, 7개 부문운동을 전개하여 농민운동, 노동운동, 소년운동, 여성운동, 학생운도, 청년운동, 상민운동 등 각 계층 부문에 걸쳐 눈부신 활동을 전개하면서, 매년 11월 1일을 '포덕의 날'로 정하여 계몽에 앞장섰다. 또한 청년당은 포덕 67년(1926) 2월 16일에 그동안 별도로 활동해오던 천도교청년동맹과 합동하여 천도교청우당으로 개칭하여 더욱 활발한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리하여 포덕 73년에는 당학제도를 창설했는데, 다음해에는 이를 발전시켜 우리나라 최초의 통신대학강좌로서 「자수대학강의」를 간행 실시하고, 포덕 75년에는 기관지 「당성」을 통한 계몽교육에 힘썼다. 그러던 중 청년당 안에 비밀리에 항일핵심조직으로 오심당을 조직하여 독립운동 거사를 모의하여 오다가, 이것이 포덕 75년에 왜경에 탄로되어 230여 명의 간부당원들이 투옥 당하게 되었다. 이어 포덕 78년(1937) 중일전쟁과 함께 일제의 강압으로 그 후 천도교의 청년조직은 지하로 잠적하게 되었다.
2)출판문화운동
천도교는 3.1독립운동 이후 「개벽」지 발간을 비롯한 출판. 문화 활동에 치중하여 당시 우리나라의 출판문화운동을 단연 주도해 나갔다. 「개벽」지는 포덕 61년(1920) 6월에 창간, 포덕 67년(1926) 8월까지 통권 72호를 내고 일제의 강압으로 폐간 당한 잡지다. 우리나라 최초의 종합잡지로서 「개벽」은 1920년대의 문화. 사상계를 대표하는 잡지로 그 위치를 점하고 있다. 개벽지의 발간정신은 그 제호가 말하듯 천도교의 개벽사상을 의미한 것이며, 천도교의 이념 구현에 뜻을 두면서도 종교적 색체를 나타내지 않고 사회 대중계몽에 주력하였다. 또한 개벽지는 민중지로서의 특징을 보이면서, 민중을 위한 민중의 잡지임을 자처하였다. 또 한편 개벽지는 항일 민족저항잡지로서 수 없이 많은 고난을 겪었다. 따라서 창간호가 압수 당하여 임시호를 낸 것을 비롯하여 발매금지 34회, 삭제, 벌금, 정간 등의 탄압이 잇다랐고, 초기 4년 동안 발행권구 43만 4천여 권 중 무려 4분의 1에 해당되는 11만 2천여 권이 압수를 당하였다. 한편 개벽지의 성격은 종합교양지이면서 문학지적 특성을 보이고 있어, 우리 나라 근대문학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기도 했다. 개벽지가 포덕 67년(1926) 발행금지를 당한 후, 천도교는 「별건곤」(포덕 67년 창간, 통권 103호), 「혜성」(포덕 72년 창간, 통권 13호), 「제1선」(포덕 73년 창간, 통권 11호) 등을 연이어 발간하고, 이밖에 「학생」(포덕 70년 창간, 통권 18호), 「중성」(포덕 70년 창간), 「새벗」(포덕 70년 창간) 등 수많은 정기간행물을 발행하였다. 또한 계층별 독자를 위한 「어린이」지와 여성지,농민지 등이 별도로 간행되기도 하였다.
3) 농민운동
천도교의 농민운동은 주로 포덕 66년(1925) 10월 29일 설립한 조선농민사를 통하여 전개되었다. 조선농민사는 처음에 사우제로 조직하였다가 포덕 69년(1928) 2월 14일 조직을 개편하여 중앙에 농민사 본부를 두고 각 군에 군농민사와 스 밑에 리농민사를 두는 계통조직을 가지게 되었다. 그 후 각 지방 농민사는 포덕 69년 현재 23개였던 것이 포덕 74년(1933)에는 150여개로 증가하였고, 사원 또한 20만명에 달하였다. 조선농민사는 우리나라 최초의 농민 잡지로서 「조선농민」(포덕66-71년, 통권30호), 「농민」(포덕 71-74년, 통권42호) 등의 월간잡지를 보급하는 한편 「대중독본」「대중산술」「비료제조법」「양잠법」 등 농촌 계몽문고본을 보급하여 농업의 근대화에 주력하혔다. 이와 같이 농민을 대상으로 한 잡지와 계몽문고본의 보급은 당시 문화의 불모지였던 한국농촌사회에 농민문화 보급의 선구적 계몽역활을 하게 된다. 특히 사회적으로 등한시되고 있던 농민의 지위 향상과 농촌의 경제적 파탄을 구제하는 등 농민의 의식적 각성을 촉구하는 한편, 농민의 자주. 근면과 협동의식을 고취하고 나아가 민족적 자각을 일깨우는 운동 등을 전개한다. 동시에 과학영농과 기술을 계도하고 일상생활에서 비과학적 전근대적 타성에서 탈피하도록 합리적 사고방식을 심어주었으며, 농촌의 문맹퇴치와 한글 보급 등 크나큰 기여를 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강연회 개최와 농민학교 및 야학 운영에 앞장서서 전국에 3천여개소에 달하는 「농민야학」을 실시하고 또 '농민의 날"을 제창하여 농민의 권익옹호와 계몽에 이바지하였다. 그리고 포덕 72년(1931)에 농민공생조합을 별도로 조직하여, 포덕 74년에는 지방공생조합의 수가 180여개 소에 조합원수 5만여명, 조합 총자본 30여만원에 달하게 되었다. 특기할 것은 농민공생조합 평양지부에서는 포덕 72년에 농민고무공장을 설립, 매일 1500켜레의 '농'자표 고무신을 염가로 생산 공급하고 그밖에 공동경작운동을 전개하는 등 우리나라 농민주도의 민주적 농협운동의 원조가 되는 활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4)어린이운동
천도교 어린이 운동을 위하여 포덕 62년(1921) 5월 1일 청년회 내에 천도교소년회를 창립하고 전국 순회강연을 전개함으로써 우리 나라 최초로 소년운동을 제창하였다. 즉 소년운동의 선구자인 김기전, 방정환 두 분에 의하여 '어린이 정서 함양', '청소년의 윤리적 대우와 사회적 지위'를 위한 운동을 천도교의 인내천 정신에 맞추어 전개시켜 나갔던 것이다. 아울러 방정환 선생이 '어린이'라는 호칭을 처음으로 만들어 어린이운동을 통해서 이를 사회적으로 보편화시켰다. 그리고 다음해인 포덕 63년(1922) 5월 1일, 천도교소년회 창립 1주년을 맞아 이날을 '어린이의 날'로 선포하도 역사적인 첫 '어린이날' 행사를 대대적으로 시행하였다. 즉 오늘 우리 나라에서 행해지고 있는 '어린이 날'은 바로 이렇듯 천도교 어린이 운동에 의하여 비롯된 것이다. 이후 이를 범사회적 운동으로 확산하기 위하여 포덕 64년(1923) 4월 17일 다른 종교의 소년단체와 연합하여 조선소년운동협회를 조직, 협회본부를 천도교당 안에 설치하여 매해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선포하는 동시 세계 최초의 '어린이 헌장'이라 할 수 있는 '소년운동의 기초조항'을 선포하게 되었다. 한편 이 운동의 일환으로 「어린이」지를 월간으로 발간 보급하였는데, 「어린이」지는 포덕 64년(1923) 3월 20일에 창간하여, 포덕 75년(1934) 7월 까지 통권 122호까지 내고 정간되었다가 해방후 통권 137호를 끝으로 폐간되었다. 이 「어린이」지는 천도교의 인내천사상을 바탕으로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 자유를 이념으로 하여 어린이를 민족 장래의 주인공으로 인식하고, 어린이에 대한 재래의 비인간적 폐습을 혁신시키는 동시에, 어린이 운동 및 이를 보다 정서적으로 융화 발전시키는 아동문학 창달에 크게 기여하게 된다.
5)여성운동
천도교의 인내천 종지는 시천주 사상을 근간으로 한 것으로, 반상, 노소, 남녀의 평등주의를 내포하고 있는 사상이다. 그러니 만큼 남녀 평등이라는 여성운동이 천도교에서 비롯됨은 당연한 귀결이 된다. 특히 해월신사의 「내수도문」 등의 법설은 일찍이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매우 중요하게 나타낸 천도교의 가르침들이라고 하겠다. 천도교는 바로 이와같은 스승님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포덕 65년(1924)에 천도교내수단이라는 이름으로여성단체를 조직하여 대대적인 여성운동을 펼쳐나갔다. 그 후 천도교의 여성운동 단체는 그 명칭이 내성단, 부인회, 여성회 등의 이름으로 바뀌면서 일제 강점화 민족의 암흑기에 여성의 지위향상과 사회 참여 등 여성의 적극적인 활동을 강조하며 오늘까지 80년의 역사를 이어오고 있다. 그동안 천도교의 여성단체는 전국에 지방조직을 두고 주로 생활혁신과 신여셩상의 정립을 위해 많은 활동을 하는한편, 「부인」과 「신여성」이라는 월간 여성잡지를 통하여 우리 나라 여성운동의 선구적 역활을 담당해 왔다. 「부인」잡지는 내수단이 조직되기 앞서 포덕 63년(1922) 6월 부터 천도교청년회 여성부문운동의 일환으로 발간되기 시작하여, 포덕 64년 9월까지 통권 16호를 발행하다가, 그해 9월부터 「신여성」으로 이름을 바꾸어 포덕 75년(1934) 8월까지 통권 38호를 발간하였다. (포덕 67년-포덕 71년까지는 「별건곤」에 통합), 「부인」지 또는「신여성」지는 ①생활개선②가정의 낙원화③도덕과 미풍의 조성④자녀의 교양⑤고상한 취미 고조 등에 힘쓰면서 낙후한 한국여성의 교양을 높히고 여성의 사회진출과 여권신장 및 의식계발에 선도적 역활을 하였다.
6)신교육운동
보수적 민족주의가 한학위주의 구학문에 집착하면서 선진문물을 수용하는 신교육을 외세에 추종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고루한 태도를 보인데 반하여, 천도교의 진보적 민족주의는 신교육운동에 누구보다도 앞장을 서는 열의를 보였다. 천도교 3세교조인 의암성사는 일본 망명시 64명의 국내 유수한 젊은이를 일본에 유학시킨자 있다. 이러한 천도교의 교육에 대한 열의는 「황성신문」(광무 10년 2월 14일자)에 '사손병희씨 열의교육'이란 논설이 실린 것만 보아도 천도교가 신교육에 얼마나 많은 심혈을 기울였는지 알 수가 있을 것이다. 천도교는 보성전문학교와 동덕여학교를 비옷하여 용산에 양영학교와 신덕여학교, 마포에 보창학교와 삼호보성소학교, 청파동에 문창보통학교, 청주에 종합학교, 안동에 봉양의숙, 선천에 보명학교, 전주에 창동학교, 대구 교남학교와 명신여학교 등 31개 학교를 운영하는 한편 전국적으로 야학강습소를 개설하여 문맹퇴치 등 민중교육 내지 민족교육에 크게 공헌하였다. 이렇듯 민족교육을 위한 천도교의 신교육 운동은 민족의 암흑기에 민족의 의식개혁과 새로운 세계문명을 깨우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상과 같이 소략하게 기술한 천도교의 신문화운동의 특성과 그 의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간추릴 수 있다.
첫째, 개벽사상을 배경으로 낡은 문화의 청산과 새로운 민족문화의 창조를 추구하여 낡은 사상과 제도의 인습에서 벗어나 새로운 가치관과 인간관의 정립으로 문화혁신을 도모하였다.
둘째, 인내천 사상을 배경으로 한 인간주체의 신문화창조를 추구하여 인간이 물질이나 정신의 속박에서 벗어나도록 인간회복 내지 인격해방에 앞장을 섰다. 따라서 전근대적인 봉건사상을 배격하고 배금주의에 빠지는 자본주의 내지는 유물사관의 사회주의를 다같이 부정하는 입장을 나타냈다.
셋째, 보국안민을 배경으로 민족주의 성향을 지니고 민족 전통문화를 살리는 민족주체성에 투철하면서 동시에 서구의 문물을 진취적으로 수용하는 입장을 나타냈다.
넷째, 민중을 대상으로 민중을 위하고 민중을 바탕으로 하는 민중문화운동으로 서의 특성을 나타냈다.
해방공간과 청우당의 활동
8.15해방 후 우리나라는 일제치하에서 벗어났으나 전승국인 미. 소 두 나라에 의하여 국토가 남북으로 분단이 되고, 외세를 추종하는 세력들이 득세를 하면서 민족주의 세력이 다시 밀려나게 되는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이때 근대적 한국민족주의의 주류인 천도교는 천도교청우당을 부활시켜 천도교의 보국안민 이념을 추구하는 한편 3.1운동의 정신을 계승하여 외세에 의한 남북분열을 저지하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포덕 86년(1945) 후 소위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우리나라의 신탁통치를 결의하자 이에대한 찬반여론이 들끓는 가운데 포덕 87년(1946)부터 다음해 까지 한국의 통일임시정부 수립문제를 놓고 미. 소 공동위원회가 두 차례에 걸쳐 열렸으나 끝내 결렬되고 말았다. 이에 포덕 88년(1947)에 유엔총회에서 '남북자유총선거에 의한 통일정부 수립'을 가결하자 북한은 이를 반대하여 김일성 중심의 공산정권 수립을 단독으로 진행하였고, 남한에서는 북한이 자유총선거를 거부함에 따라 이승만이 중심이 되어 단독정부 수립을 추진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남북이 각기 정부를 따로 세우게 될 경우 한국은 완전히 남북으로 분열되어 동족상잔의 비운을 면치 못할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긴박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천도교는 남북통일을 위한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것이 곧 '남북분열저지운동'과 '청우당운동'이다.
일제의 패망과 함께 해방 공간을 맞은 우리 나라는 각종 이념과 주의에 의한 정당과 정치단체가 우후죽순처럼 난립하였다. 이러한 시기에 천도교에서는 포덕 86년(1945) 8. 15해방 다음달에 천도교청우당을 부활하게 된다. 이때 부활된 청우당은 단지 종교적 활동만이 아니라 천도교의 이념에 따라 '신국가 건설'을 위한 정치적 활동에 목적을 두고 있었다. 이후 청우당은 당의 정책 설정을 위하여 천도교의 교리와 역사 및 현실인식에 기초하여 정치이념을 수립한다. 이러한 정책의 수립에 따라 천도교청우당은 포덕 86년(1945) 10월 31일 제 1차 전당대회를 통하여 '민족통일기관 결성 촉진'을 렬의하였고, 이어서 12월 15일에는 천도교, 기독교, 불교, 유교,천주교의 각각 대표 100명씩을 연합하여 조선독립촉성을 위한 연합발기대회를 열고, 20일에는 조선독립의 완성을 촉진하자는 의미로 6개 종단을 모아조선독립촉성종교단체연합회를 조직하였다.
도한 포덕 86년 말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신탁통치가 결정되자 이에 반대하여 성명서를 발표하고, 이를 저지하기 위하여 최후까지 항전할 것을 결의한다. 이후 조선공산당이 시탁통치를 찬성하자, 포덕 87년(1946) 1월 16일 조선공산당을 비판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즉 청우당은 대한민국임시정부와 함께 행동할 것을 천명하고, 포덕 86년 12월과 87년 1월 반탁운동을 전개해 나감으로써 민족 독립과 해방에 의거한 정치 활동을 펴나갔던 것이다. 이후 좌. 우 분열이 일어나게 되자, 포덕 87년(1946) 2월 9일 천도교청우당은 민족적 위기를 극복하고 독립국가 건설을 위하여 정치적 기본노선을 이탈한 편좌, 편우의 모든경향을 배격하고 민족적 대동단결을 촉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또한 포덕 87년 3월 중순,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되는 때에 즈음하여, 미. 소 양국의 군대 철수와 내정 간섭의 배제를 미군정 당국에 요구하기도 한다. 즉 천도교청우당은 '남북통일, 좌우합작을 통한 임시정부 수립과 신탁통치 반대'라는 기본 노선을 견지하며, 이를 추진하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그 활동을 펼쳤던 것이다. 또한 포덕 88년(1947) 1월 미소공동위원회의 재개에 즈음하여 이승만과 한민당 계열의 인사들이 반탁운동을 전개하며 단독정부의 수립을 기도하자, 청우당은 이를 강력하게 반대하는 등 남북통일정부 수립을 촉구하게 된다. 그러나 북조선청우당의 정책이 미군정과 한민당 등의 우익계로부터 공격을 받게 되는 요인이 되기도 하여 청우당의 주요 간부들이 검거되기도 한다. 이후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고 통일정부의 수립을 이룩하고자 했던 천도교청우당의 염원은 미군정이 단독정부 수립을 희망하고 있던 상황에서 이를 실현시키지 못하고, 도리어 단독정부가 수립된 후인 포덕 90년(1949) 8월 10일 "북로당과 북조선천도교청우당의 지령을 받아 천도교 내에서 남조선 천도교의 중심세력을 분리시키고 북한 청우당 세력을 부각시키며, 파괴, 암상을 위한 지하 당원"이라는 이유를 내세워 당원 30여 명이 검거되기도 한다. 그리고 초지일관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했던 남조선 천도교 청우당은 포덕 90년(1949) 12월 26일 이승만 정권에 의하여 '정당에 관한 규칙'에 의거하여 강제로 정리. 해체되고 말았다.
*본 천도교 안내 내용은 윤석산저, 천도교중앙총부 가 발행한 내용을 인용한 것임을 밝혀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