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한다면 투쟁하라
안셀름 그륀 - 신부님 著 - 1945년 1월 14일 생
마성일 옮김
분도출판사 2008. 2
남자가 정체성을 찾는 데 중요한 요소가 투쟁과 사랑이라는 양극이다.
남자의 본질을 호도하는 두가지 남성상은 ‘마초’와 ‘소프티’이다.
아담 -남자와 여자-
아담이란 말은 아다마(Adama:흙,땅)에서 왔으며 아담은 본디 남자가 아니라 인간 자체였다.
아담의 갈비뼈로 여자를 지으셨으니 남자와 여자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남자는 여자를 갈구하며 서로 보완한다.
남자는 흔히 자신의 진실을 외면하고 그것을 하느님께 보이기 힘들어한다.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일 때 그 때 비로소 나는 남자로 성장할 수 있다.
아브라함 -순례자, 신앙의 아버지-
부모없이 성장할 수 없지만, 부모에게서 벗어나지 못해도 인간으로 성장할 수 없다.
아브라함은 실패와 실수를 통해 배우는 순례자로써 이스라엘 민족의 원조가 될 수 있었다.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바치라고 명령한 것은 하느님이 아니라 그의 잘못된 하느님 상이다.
순례자는 자신의 이면도 함께 의식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가 맡은 사람들에 대한 책임을 거부하는 것이다.
이사악 -아버지 없는 자-
위대한 아버지를 둔 아들은 늘 힘들다.
순례자의 원형으로 살아가는 아버지는 아들에게 기둥이 되어 주지 못한다.
에사우는 아버지의 아들이었고, 야곱은 어머니의 아들이었다.
아버지 없는 남자들은 회사나 집단을 위해 자신을 기꺼이 희생하려는 경향이 짙다.
야곱 -아버지, 어머니의 아들-
자신의 그림자와 싸우지 않고는 누구도 아버지가 되지 못한다.
그 그림자를 만나는 두 가지 방식으로 첫째 싸우는 것, 둘째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을 빛에서만 아니라 어둠에서도 만난다. 하느님은 다감할 뿐만 아니라 우리를 다그치고 상처 입히기도 한다.
하지만 상처 입을 위험을 감수하고도 싸움에 나서는 사람이 비로소 진정한 남자가 된다.
요셉 -마술사, 아버지의 아들-
야곱이 어머니 레베카가 아끼던 아들이라면 요셉은 아버지 야곱이 아끼던 아들이다.
요셉은 버림받음, 무력감, 외로움과 어둠을 겪었기에 이런 지혜에 도달할 수 있었다.
남자는 위험을 통과해야 한다. 절망에 빠졌을 때 자신과 계획을 포기하고 오로지 하느님 손에 자신을 맡겨야 한다.
모세 -지도자-
모세는 태어날 때부터 은총받은 아이다.
삶이 아무리 위협받는다 해도 신의 손에 의해 보호받는 훼손되지 않는 진정한 자아에 대한 은유다.
한 번쯤은 실패를 경험한 사람, 이방에서 고독과 지도자로서의 부족한 재능을 고통스럽게 경험해 본 사람만이 다른 사람을 이끌 수 있으리라.
모세라는 사람은 매우 겸손하였다. 땅 위에 사는 어떤 사람보다도 겸손하였다.
겸손함은 자신의 어두운 이면을 마주 볼 수 있는 용기다.
자유를 얻기 위해 우리는 기존의 안정, 즉 어머니의 보살핌 혹은 어머니 같은 역할을 하는교회나 회사에서 벗어나야 한다.
남자는 책임을 져야 한다.
진정한 남자가 되느냐 또는 현실에 순응하기만 하는 남자로 머무느냐는 공격성을 어떻게 잘 소화해 내느냐에 달려있다.
공격성이 파괴적으로 변하지 않으려면 페어플레이가 필요하다.
삼손 -전사-
남자가 된다는 것은 악을 이기고 적들에게 삶을 지배당하지 않는 것이다.
삼손은 전형적인 전사다.
예수도 물러서지 않고 끝까지 싸우는 전사였다.
예수는 갈등을 피하지 않고 십자가에서 비통한 최후를 맞기까지 견뎌 냈다.
"기사는 여인을 소유하려 들지 않았다. 그는 여인을 사랑했고 사랑을 아름다운 노래로 표현 했다. 숭배하는 여인에게 존경의 뜻으로 항상 거리를 두었다."
: Minnedienst(미네, 중세 때 사랑을 위한 기사들의 의무)
다윗 -왕-
다윗은 이스라엘 역사상 최고의 전사이자 최고의 왕이다.
가수이자 사인이었다. 또한 연인이었다.
본질적으로 남자 그리스도인에게는 왕의 원형이 있다.
다른 이들에게 내가 처한 상황에 대한 책임을 전가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주도하는 자가 왕이다.
솔로몬 -연인, 지혜로운 통치자-
솔로몬은 지혜로움 말고도 많은 여인을 사랑한 것으로 유명하다.
솔로몬은 왕의 지위를 이용해 여자를 얻었다.
자신 안의 전사를 실현하지 않고서는 여자를 쟁취할 수 없다.
전사 없이는 사랑의 정열 또한 없다. 그러면 사랑은 금세 지겨워진다.
여자를 진짜 사랑할 줄 모르는 남자는 계속해서 새로운 여자를 찾는다.
다윗은 조그맣게 시작해 지혜로운 군주로 죽었다.
솔로몬은 지혜롭고 부유한 왕으로 시작했지만 분열을 초래한 사람으로 끝났다.
“사랑하지 않으면서 어떤 실수도 하지 않는 것보다 차라리 한껏 사랑하면서 실수를 하는 편 이 낫다” -솔로몬, Arnold 229-
예레미야 -순교자-
예레미야는 고통받는 예언자다.
남자가 되려면 고통을 일부러 찾아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피해서도 안 된다.
자신을 왜곡하지 않고 진정으로 자신의 길을 간다면 고통은 십자가의 길이며, 항상 되풀이해 십자가형을 당하리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거기에 ‘예’라고 답하며 도망치지 않는 것이 오늘날 우리가 배워야 할 순교자 상이다.
엘리야 -예언자-
예레미아가 자신의 소명을 의심하고 고통받는 예언자라면 엘리아는 강하고 자신감 넘치는 예언자다.
옐리야의 승천 장면의 옐리야와 옐리사처럼 오늘날 남자에게도 남자가 되는 법을 가르쳐 줄 아버지와 스승이 필요하다.
진정한 예술가는 항상 자기 안의 내적 예언자에 이르는 통로를 가지고 있다.
엘리아는 예언자의 권력을 즐겼다. 그러나 예언자의 힘이 그에게서 사라지는 것을 고통스럽게 겪어야 했다.
예언자가 자신의 마음을 하느님에게 열 때만 하느님의 이름으로 말할 수 있다.
욥 -고통받는 의인-
욥은 실제 존재했던 역사적 인물이 아니라 현명하고 의로운 남자의 원형이다.
욥은 ‘모든 사람의 적이 된 사람’을 뜻한다.
욥은 인간을 경멸하는 이 신학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준다.
고통은 고통받아 마땅한 사람들에게만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올바르게 사는 사람들에게도 닥친다. 이유는 알 수 없다. 고통은 무엇을 변화시키는 하나의 도전이다.
고통은 그들을 현명하고 온화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또 고통은 깊은 신비를 알게 해주었다.
요나 -악동-
요나 이야기는 사람들에게 하느님도 유머를 알고 계시다는 인상을 남겼다.
남자들이 삶의 계획을 너무 심각하게 여기고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해내기 위해 악착같이 애쓴다면 그들의 삶은 지겨워진다. 삶의 여유와 생동감은 사라진다.
이 세상에서 가장 느긋하게 살려면 자신 안의 악동이 필요하다.
베드로 -바위-
베드로의 이야기는 비겁함과 약점에도 불구하고 베드로처럼 변화의 길을 걸어간다면 우리도 다른 이들을 위한 바위가 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베드로는 교회의 기반인 바위다. 그런데 그 바위는 쉬이 깨질 것 같다.
이 메시지는 우리에게 위로를 준다.
우리가 약함과 비겁함과 배반속에서도 다른 이들을 위한 바위가 될 수 있다.
베드로와의 만남에서 중요한 것은 완벽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베드로는 저항을 통해 배운다
그는 숨는 대신 자신을 드러내 보이는 것, 손을 빼기보다 차리리 손가락을 데는 것, 다치지 않으려고 마음을 닫기보다 마음을 여는 것, 이것이 내게 남자가 되기 위한 본질중 하나다.
바오로 -선교사-
바오로는 율법을 열렬히 신봉하는 사람이었다.
심리학적으로 바오로는 강박관념에 시달렸다.
바오로는 ‘조그만 사람’을 뜻한다. 바오로는 작은 체구에 곱사등이었다.
게다가 특이한 병(하인리히 슐리어는 간질병을 앓았다고 한다)을 앓았다.
어떤 외적 투쟁보다 내면의 투쟁은 남자가 자기 자신이 되는 길에 대한 훌륭한 비유다.
바오로는 커다란 소명 의식에 이끌려 전 세계를 여행하고 그러면서 수많은 위험을 무릅쓰는 선교사의 전형이다.
바오로는 육체적인 면에서 그보다 훨씬 남자다웠을 그 어떤 사도보다 더 많은 것을 이룩했다. 바오로는 육체의 약점을 정신의 힘으로 변화시켰다.
바오로는 독신이면서도 투쟁과 사랑이라는 양극을 체험하며 살았다.
그는 사람들을 사랑했고 예수를 사랑했다.
세례자 요한 -야성의 남자-
요한은 올곧고 솔직하며 다른 사람 앞에서 두려움이 없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마태11,7-11)
요한은 적절하든 그렇지 않든 본질을 위해 싸운다.
요한은 메시아 출현을 알리는 선구자로 남는다.
요한 -친구요 현자-
요한복음은 우정의 신비에 대한 가장 아름다운 증언 중의 하나다.
진정한 친구는 친구에게 헌신하며 필요하다면 목숨까지 내놓는다.
여자에게만 놀라움을 자아내고 남자들과는 우정을 맺을 줄 모르는 남자에게는 본질이 빠져 있다.
요한은 늙은 현자의 상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삶을 맛본 사람, 삶의 맛을 아는 사람이다. 삶이 쓰다 하더라도 지혜로운 노인에게 삶은 새로운 맛과 부드러운 맛을 낸다.
예수 -치유자-
예수는 앞의 모든 원형을 통합한 남자다. 그는 하느님의 뜻을 인간에게 전하는 메시아다.
필리포스 앞에서도. 그 누구에게도 지배받지 않는 진정한 왕이다. 수난 속에서 고통받는 의인이고 소명을 지키는 순교자다. 바리사이들의 편협함에 분노하며 힘차게 싸우는 투사다.
제주들에게는 친구이고 연인이다. 요한에게도, 마리아 막달레나에게도 친구이자 연인이다.
네 복음서가 묘사하는 예수라는 남자의 세가지 측면
첫째, 예수는 완전히 현존한다.
둘째, 예수는 내적으로 자유롭다.
셋째, 예수는 조금도 훼손되지 않은 순수하고 깨끗한 완전한 남자다.
남자는 투쟁과 사랑 사이에서 자신만의 균형을 찾아야 한다.
투쟁과 사랑 사이의 무게 균형은 삶의 단계마다 새롭게 맞춰야 한다.
어떻게 사랑과 투쟁을 결합할 것인지 자신만의 길을 찾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