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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고 1 조ㅇㅇ 목사에게 보내신 경고의 말씀
지금부터 17년 전 어느 날 성영님께서 "이 세상에는 나의 말을 바르게 알고 믿는 자가 적어서 내가
일을 할 수가 없단다"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니 교회마다 전도가 많이 돼서 사람들로
넘쳐나고 있는데,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인 줄 알고 있는데,(또 그것을 교회 부흥이라, 성
장이라고 듣고 있었기에) 그리고 목사들은 얼마나 설교 들을 잘하여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교회
부흥을 위해서 자기 몸도 돌볼 틈도 없이 열심히 기도하며 열정을 쏟아붓고 애쓰고 있는데, 무슨 말
씀을 그렇게 하시나?'하는 생각을 하면서 믿는다고 하면서도 믿음의 본이 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
아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인가? 했었습니다.
그러나 이후 모세의 율법을 연구하라, 성전을 연구하라, 아브라함을 연구하라, 하나님의 창조를 연
구하라는 성영님의 명이 있었는데, 그것을 몇 년에 걸쳐오며 하나하나 명하시더니, 또 그것을 하나
하나 깨닫도록 도우셨습니다. 하여 성경 보는 눈이 열리게 되니, 왜 그렇게 말씀하셨는지를 잘 알
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시는데 인간들은 자꾸 인간 말을 하고 있고, 하나
님은 하나님의 뜻이 되시는 예수님을 알고 하늘을 알게 하려고 말씀하셨는데, 인간은 자꾸 인간을
알게 하는 데 힘쓰고 땅의 것을 말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목사님이 성공한 목회인 것처럼 칭찬하고 높이는데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런데 영적 안목
이 없는 인간의 눈으로 보는 것은 분명히 큰 성공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많이 몰려든다고 해서 그
목사의 목회가 성공한 것인 줄 아는 인간의 계산이, 앞에서도 말했듯이 하나님의 계산은 절대 아닙
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목사님이 70만 80만의 교인 수를 이루었다고 자랑하듯 하는 말을 다 들
으셨다고 하셨습니다. 들으셨다는 것은, 그에 대하여 받아내시겠다는 뜻입니다. 70만 80만의 수를
달라 하신다는 말입니다. 물론 목사님 당신은 분명히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한 것이지만, 지금까지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의 일이 아닌 불법을 행하였다고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인간을 위하고 인간을
맞춘 것이 되어, 사단의 나라에 기여한 일이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을 목사님에게 구체적으로 말하라 하셔서, 말씀을 증거로 하여 전해드리는 것에 당신의 잘못을
알고자 원치 않고 외면하신다면, 목사님의 자랑인 그 70만, 80만이라고 하는 자들이 예수님께서 온
갖 병을 고치시는 그 능력을 보고 따라다니다, 벳세다 광야에서 떡을 먹은 까닭에 따라다니다, 어려
운 이 말씀을 누가 듣겠느냐고 돌아서 다 떠나버렸던 속 빈 강정 같은 그 무리들인지 지금은 묵인하
시지만(마13:29,30) 그러나 이후에 하나님의 심판 앞에 설 때, 온전히 드러나 보게 될 것이니 그때
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당신의 자랑이 된 그 수만큼 목사님에게 묻고 찾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인간은 자기를 위해서 무엇을 의지하려 하는 신심이 있습니다. 그 신심은 자기의 맞는 말, 자기에
게 맞춰주는 말을 듣기를 원하는 것이기에, 신심에 맞는 곳을 찾게 되어 있습니다. 또한, 어둠에 처
한 인간은 군중심리가 작용하고 분위기에 약합니다. 그래서 믿음이 무엇인지 성영님으로 배우고 깨
닫지 못하면, 신심에서 벗어나기는 어렵습니다. 그 신심으로 믿는다 하는 사람들은 많은 군중과 분
위기에 압도되고, 많다는 것을 그만큼 믿을 수 있다는 것의 인상으로 받아들여, 자기 자신도 그 무
리와 함께한다는 것에 만족하고, 긍지를 갖습니다. 그것이 빈껍데기인 인간의 심리이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믿음은 영적인 것이요, 보이지 않는 영의 세계에 대하여서입니다. 그 믿음은 말씀 몰라도
되니 무조건 믿으라고 하는 것도 아니요, 그런 위험한 말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절대로 말씀이 말
하는 것, 말씀을 받아들여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깨닫기를 원하는
소원이 있어야 합니다. 말씀을 바로 알고, 바로 믿기를 원해야 하는 것이 믿는 자의 기본자세입니
다. 삼위의 인격이신 아버지와 아들 예수님과 성영님을 아는 경험의 관계가 되어 예수님으로 자라
야 합니다.
그런데 바른 믿음을 위해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해 말씀을 대하는 자, 말씀을 중히 여겨 말씀으로
삼위 하나님을 만나는 자가 그리 없다고 하셨습니다. 바리새인 서기관 율법사 같은 사람은 넘쳐나
는데, 하나님의 뜻대로 된 믿음이 그리 없다고 하셨습니다. 목말라 하는 것은 오로지 육의 것이요
세상인데, 그것을 해결 받으려고 교회 나오고, 그것을 위해 예수 믿겠다고 나온 사람들에게 목사님
자신은 그것을 채워주려고 마음을 위로해주고 다독여주고 힘을 얻게 하는 설교하느라 열심히 하고,
예수님의 이름 앞에 치료가 나타나니 사람들이 목사님을 우러러보며 신과 같은 존재로 여긴다는 것
입니다. 말씀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알 턱도 없고, 또 알 필요도 없는 것이고 자기 듣기에 맞으면 되
는 것이니 그래서 그 은혜를 받는다고 하나님이 세우신 큰 종이라고 무조건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같이 세계 최대 교회로 성장한 것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세우신 종이기 때문이라는 것, 그것은 누
구도 부정할 수 없는 증거라고, 그렇게 능력 있는 엄청난 목사님이 자기 목사님이라는 자긍심에 도
취하고 '우리 목사님 우리 목사님'하며 흥분된 기분에 들떠, 존경과 찬사를 아끼지 않으며, 팔이
안으로 굽는다는 속담처럼 목사님에 대하여 맹목적인 애정을 가지고 옹호하며, 신과 같이 여겨 우
상 하며 따르는 무리가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외적인 수만 보고 군중심리에 끌려 나온 자
들, 예수님 믿는다고 나와서 목사님과 교회를 예수님보다 높이고 자랑이 되어 있는 자들, 목사님이
우상이 되어 무조건 맹목적으로 믿고 전하는 그 설교가 자기에게 은혜 된다는 이유로 의존하고 있
는 무리들, 다 타락한 종교인이니 망하지 않겠느냐고 하셨습니다.
교회에 나오는 이유를 자기 사정과 형편에 맞춘 것이었으니 목표도 자기가 세우고, 믿는 것도 자기
가 계산하고 결정하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 믿었으니 구원도 받고 내가 예수 믿었으니 세상 것으로
도 복 받는다고 계산한다는 말입니다. 그렇기에 예수 믿고 구원받아 천국 가는 것도 당연히 믿는 것
이고, 또 한편 예수 믿어 땅의 것이 잘되고 성공하기를 사모하는데 더 큰 비중을 두기 때문에, 두
마음을 품은 것이요, 두 주인 섬기겠다는 것이므로 이후 그렇게 열심히 믿음 생활했다는 그 공력을
시험하실 때, 다 불에 타버릴 것들로 넘쳐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 생활 열심인 교인만 넘쳐났지,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께로 들어가 함께 앉히신 바 된 성도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는 목사님 당신 자신이, 얼마나 말씀이 말씀되지 못하게 하고 있는지, 이것을 당신 자
신에게 속는 줄도 모르고 교회가 성장하는 것에 취하여, 깨닫지 못하는 엄청난 불법을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목사님의 영은 알고 있으니, 때로는 자기도 알 수 없는 두려움에 잡힐 때가 있습니
다. 당신 안에 평안함이 있다가도 어느 순간 또 공허함과 암울함이 엄습하고 가슴이 빈 것 같은 느
낌을 받습니다. 또한, 희뿌연 안개가 낀 것 같은 느낌도 있습니다. 이 같은 증상으로 평안의 기복
이 있음을 목사님 당신이 아십니다. 그렇기에 당신 의지로 평안 해보려는 애씀이 있습니다. 좋은
일을 함으로써 기쁨을 얻으려 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여 행복감을 느끼고 평안 해보려고 하는 것입
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 말하는 그런 좋은 일, 착한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은 당신이 기쁘기 위해
서요, 거기에서 스스로 만족하기 위해서요, 세인들의 찬사 받는 일로(눅6:26) 자기를 행복하게 하
고자 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평안은 부정적인 요소나 어둠의 요소들이 전혀 없는 것이 특징입니다. 예수님의 생명과
평안으로 충만하면 그 속에 목사님 당신 안에서 은밀히 나타나고 있는 그런 어둠의 요소들은 있을
수 없습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하신 예수님의 말씀대로 진리를 알고 진리로 자유케
되었다면 절대로 그런 어둠의 요소가 그 안에 거할 수가 없습니다(고후3:17,18) 어떻게 있을 수가
있는 것입니까? 성경 로고스가 말씀하시는 믿음의 주요 온전(자유)케 하시는, 생명의 참법이 되시
는 우리 주 예수님을 레마로 만나 생명의 참법으로 온전케 되었으면, 거기에는 어떤 부정적인 요
소가 절대로 있을 수 없고, 평안의 기복이 절대로 있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평안의 능력은 무엇을 했기 때문에, 즉 남 돕는 일, 좋은 일, 착한 일을 했기 때
문에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무엇을 했기 때문에 기쁘고 행복한 것은 자기만족에서 오는 것임)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영님으로 오셔 계시니, 그 생명의 평안함이 내 안에 큰 무게로 자리하고 있는 것입
니다. 그 무게를 자기가 느끼고 압니다. 그것을 영의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또한, 만져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크기를 시시
때때로 경험합니다. 언제나 끓어오르는 기쁨이 있고, 행복감이 온 영혼을 감싸고 표현할 수 없는
사랑스러움이 온 영혼에 흐름으로써, 자유함의 찬양이 샘물처럼 영혼에서 올라오는 것입니다.
두 곳에 나누어진 물을 한곳으로 부어 섞으면, 그 물은 어떤 것으로도 다시 가려내어 구분할 수 없
듯이, 예수님으로 주어진 생명의 평안도 그와 같습니다. 성영님으로 주시는 생명의 평안함이 자기
영에 오시면, 그것은 무엇으로도 끊을 수도 없고 갈라놓을 수도 없고, 어느 누구도 빼앗을 수도 없
는 것으로서, 거기에는 평안함이 있다가도 공허함이 있다거나 불안감이나 두려움이 엄습한다거나,
하는 것이 절대로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이론이 아닙니다. 실제 실상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으로
주시는 천국의 능력은 여기서 끝이 아니라 끝이 없고 다함이 없습니다. 그러면 내가 이런 것을 모
를까 봐 나를 가르치려 하는 것이냐? 하시겠지요? 그런데 알면 뭐합니까? 목사님 당신 영혼에 그
능력이 없는데..... 목사님이 아신다면 그것은 이론적이요 지식적이요 추상적입니다. 그렇게 아는
것은 하늘에 닿을 만큼이라고 해도, 그것은 하나님과 관계없는 것이요, 하나님의 바라시는 바도
하나님의 뜻도 절대로 아닙니다.
복음이 이 땅에 들어온지 120년 이상이 되었다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성경을 처음 만날 때는 하
나님의 영적인 뜻은 모르는 것이니, 어두울 수밖에는 없어 하나님의 수준으로 열릴 때까지는 시간
이 필요했습니다. 말씀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볼 수 있고, 계시의 뜻을 깨달아 뜻대로 믿음이
되는, 예수님의 진정한 가지로서의 열매를 내는 성영님의 사람이 되기까지는, 성영님께서 가르치시
고 깨닫게 하시는 그 훈련의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니 복음을 받은 초창기 때는 하나님의 창조
와 구원하심의 뜻을 기록된 말씀대로 믿는 것은 되지만, 말씀을 문자적이요 인간 중심의 해석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 당연합니다. 그래서 예수님 믿지 않는 자는 지옥이요 믿는 자는 구원받아 천국
간다는 것을 전하면서 또한 예수님 잘 믿으면, 신앙생활 열심히 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하나
님이 복 주신다는 것으로, 생활의 문제를 해결 받으려면 열심히 하나님께 기도하라는 것으로 전하
는 것이 되어, 사람들에게 기도 열심을 내게 하였습니다.
또한, 사람들도 눈에 보이지 않는 천국과 지옥은 죽음 뒤에나 있을 먼일이고, 그것보다 우선 현실
적인 것, 지금 직면해있는 생활의 어려움에서 벗어나는 것, 세상에서 성공하여 잘 사는 것 등이
가장 우선되는 소원이요 욕구이기에, 그 복 주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서, 자기의 원하는 복을
받기 위해서 하나님을 믿는 것이 되고 교회 생활 하는 것이 되고 기도하는 것이 되었다는 것, 누
구나 부정할 수는 없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것은 지극히 신심적인 자기 믿음입니다. 그러나 하
나님께서도 성경의 뜻을 바로 알고 믿음으로 들어오기까지는 용납하셨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복 주시는 좋으신 하나님에 대해서 열심히 선포하고 또 열심히 예수님 이름으로 구
하고 기도한 대로, 하나님은 미쁘시니 환경이 잘 되게 하셨습니다. 또한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회
개시키시고 구원하시는 일을 도우시는 성영님께서, 귀신이 떠나고 병들이 치료되는 이적이 따라
나타나게 하여 사람들에게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하셨고, 성영님의 은사가 나타나 하나님
의 계심을 확실히 믿을 수 있게 하여, 하나님은 진짜 살아 계신 하나님이심과 우리 인생의 복 주
시는 좋으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스스로 고백하게 하셨습니다. 강제적 고백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험하게 하시고, 그 경험들로 인하여 살아 계신 하나님이시라는 인격적 고백이 되게 하셨다는 말
입니다. 복음이 처음 들어올 때는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구하고 찾는 것들을 주시고 응답하시는 것
으로, 하나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믿을 수 있도록 하셨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알고 뜻대로 살아야 하는 존재라는 것, 하나님은 인간의 요구를 맞
추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의 정해놓으신 길을 따라가야 한다는 것, 그 길만이 인간이 사
는 복된 길임을 알도록 이끄시기 위해 그같이 먼저 경험하는 하나님이 되게 하시고, 자기 입으로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시인하게 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는, 내게 역사하
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한다는 그 고백을 한 자는, 이제 고백에 대한 책임을 지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는 것과 함께, 도우시는 성영님으로 철저히 성경의 뜻을 배우고 깨달아, 영의 사람으로
사는 능력을 갖춰가야 했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것 하나님의 뜻으로 사는 능력이 되는 것은 절대적으로 성경의 모든 말씀을 레마로
깨닫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인간이 하나님의 요구에 맞게 사는 영의 사람, 하늘의 사람이
되어야 하기에,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하나님의 의도하신 바대로 속뜻을 깨달아서, 자기
의 말씀으로 받아들여 능력이 되었느냐에 있습니다. 그래서 더는 그 마음이 세상에 머물러있지 않
고, 세상 것을 붙잡지 않고 세상이 없어야, 그것이 세상 것 육의 것 때문에 하나님을 떠났던 인간
이 하나님에 대해 믿음을 가졌다는 뜻이요 예수님으로 사는 능력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고백한 교회의 책임은 바로 성경 전체 속에서 하나님
의 뜻은 땅의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시는 하늘의 것에 있다는 것을 반드시 깨
닫는 것이 돼야 했고, 말씀에 대하여 확연히 열려서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어야 했고, 의도
하신 바를 알아 사람들에게 그 영적인 뜻과 생명을 전해야 했습니다. 성경은 땅에서 성공하고 훌륭
하고 명예 얻고 잘 사는 것에 대해서 구하라고 말씀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더는 세상의 것을 집어
넣어 줌으로써, 마음이 세상에 고정되도록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세상의 것들을 채
워주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세상만 있는 인간에게 하나님의 믿음을 가지도록 할 때
예수님의 이름을 세상 것 받으라는 데 사용하는 것이면 그것이 하나님께 불법입니다. 세상의 옷을
깨끗이 벗어야 합니다. 자기라는 옷도 온전히 벗어야 합니다. 오직 예수님으로 옷 입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복음은 어떻게 해서든지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도록 세상 것의 복 주시는 좋으신 하나님이
라고, 그 하나님을 믿고 잘 섬기면 잘 되게 해주신다고 하는 막연한 말들로 비위를 맞춰주면서 주
라는 복음 아닙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면 살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죽는다는 것, 구
원과 심판의 뜻을 분명하고 정확하게 전해주어야 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책임지고 삶
을 이끌어 가실 것이지만,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것은 자기가 선택한 것이니, 하나님께서 그 선택을
존중하시는 것이지, 거기다 온갖 세상 비위 맞추는 말들로 하나님의 뜻을 흐리며 사정하라고 주신
복음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만일에 교회가 하나님의 뜻을 정확히 전하여 뜻대로 이끌어주지 못하
면 하나님께서는 그 책임을 반드시 물으실 것인데, 바로 목사님이 지금 여기에 확실하게 걸렸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세상도 좋고 예수도 좋다는 식으로 넣어주었음으로써, 영적 사람은 속 빈 강
정과 같고, 잎사귀만 무성한 나무와 같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오로지 육을 위한 세상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그 육이 원하는 세상이 대단히 강합니다. 그래서 하늘의 것을 넣어주려 할 때,
그같이 세상 것과 혼합하면 하늘의 것보다 땅의 것만 붙잡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예수 그리스도와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영생과 천국을 외친다 해도, 거기에 세상 것을 기대하
도록 세상 것으로 복 주시는 좋으신 하나님을 전하는 것이면, 영적인 것을 붙잡기보다는 본능에 가
까운 세상의 것을 붙잡고, 그것을 믿음으로 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에 대하여는 머리로 받고 이론
과 지식으로만 가진 관계, 추상적인 관계가 될 뿐이지, 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마음에 세
상이 가득하니 영에 받아야 할 말씀이 밀려나 버리게 되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죄인인 자기 정
체에 대해서 그 영혼에 깨닫는 경험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예수님과 인격적인 만남이
될 수가 있을 것이며, 영혼의 사귐이 될 수가 있겠습니까?
스스로가 예수님 믿고 구원받았다고, 하나님께서 모르시는 구원을 말하는 사람들에게, 성경의 인물
중에 누가 이렇게 해서 복 받았으니 너희도 이 복 받아라, 누가 이런 명예와 권세를 얻었다, 너희
도 이 사람 같이 행하여 명예 얻고, 권세 얻는 복 받아라....., 하는 것으로 연결하고 성경에 없는
현재 세상에서 물질의 부자로 성공한 사람들을 예로 들어 그가 십일조 잘하고 주일 성수 잘했더니,
봉사 열심히 했더니 하나님이 마침내 그에게 복 주셔서 거부가 되었다. 이러이러한 엄청난 복을 받
고 성공했다고 하는 이런 세상 성공담 등, 축복받았다는 이야기들을 열심히 전해주니 결국은 사람
들 마음이 부추김을 받아 '나도.....나도'하며, 마음에 그 세상 물질 복을 꿈꾸도록 한 것입니다.
그리고 열심히 그것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게 하고 행하는 일들의 목적이 거기에 모이게 함으로써
하나님을 귀신 대하듯 하게 하였고, 마음을 세상에다 두게 하는 역할 열심히 하는 것으로 영적인
것을 막고 오히려 마음이 세상에 묶여있도록 했습니다.
사람들의 축복받았다는 이야기들은 그들이 정말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냐? 세상 부귀영화와 영광을
가져다줄 수 있는, 세상 권세 잡은 사단으로부터냐? 하는 의문이 있음에도, 그것을 분별할 능력이
없으니 두려운 줄도 모르고, 그렇게 무조건 예로 들고 있습니다. 그같이 '신앙생활 열심히 했더니'
하며 들려주는 세상 축복 담이나 성공담들은 사단이 하와를 유혹한 것과 같은 것으로서, 사람들을
미혹하여 세상의 것을 쫓아가게 하는 타락의 연속입니다. 목사님 당신이 전하는 메시지가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것이냐를 보기보다는 사람의 마음을 다독거리고 비위 맞춰주는 데로 사용하여 이 땅에
서 잘 견디고 열심히 살면 잘살 수 있고 내일이 잘될 것이라는 그런 기대와 소망을 갖게 하는 것이
뜻인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종교의 말씀인 것처럼 하였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들
의 영혼을 살리고 그 영혼을 예수님으로 세우라는 데 있고, 삶의 능력이 거기에 있지, 그렇게 세상
복이나 가르치고 정신계몽이나 하는 말씀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살기 힘드니 열심히 힘내서 살아가
도록 힘과 소망을 주고, 삶의 힘이나 북돋아 주라는 것이 아니다 그 말입니다.
어느 날 성영님께서 목사님의 말씀 전함에 대하여 무엇을 보이시고 말씀하셨는가 하면 솔로몬 왕
의 삶, 즉 많은 이방 여인들과 결혼하여 그 여인들이 섬기던 신까지 들여와 섬기도록 함으로써, 자
신도 유혹을 당하여 신앙의 타락이 들어왔고, 하나님께는 악을 행하였으므로 그에게 돌이키라 경고
하셨으나 돌이키지 않음으로 인해, 이후 이스라엘이 분단되는 비극을 맞아 서로 물고 찢는 수난의
역사를 불러들였던 솔로몬을 비유하여 내게 보이셨습니다. 솔로몬이 하나님의 말씀과는 상관없이
자기의 좋은 대로 이방 여인들을 사랑하고 연애하여 자기의 사람으로 맞아들임으로, 자신과 함께
백성에게 타락이 들어오게 했던 것처럼 목사님 자신도 사람들을 위한답시고, 하나님의 의도하지
않으신 사람의 비위에 맞는 것들로 혼합하여 전하였으므로, 사람들의 영혼이 쭉정이가 되게 하였
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방 여인들을 맞아들인 것과 같은 말씀으로 바꾸어 전하였음으로, 세상의 것을 연
연하고 연애하게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이방 여인들과 혼인하는 것은, 그 혼인 자체가 유
혹을 받은 것임을 분명히 보았습니다. 사단의 속박과 세상에서 떠나온 하나님의 백성이, 이방인과
혼인하는 것은 곧 혼인하는 그 한 사람만 맞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를 지배하고 있는 그들의 섬기
던 세상 신까지 맞아들인 것이 되기에,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이방 혼을 절대로 금하
신 것 아닙니까(신명기7:1-5, 왕상11:1,2)? 하여 이 원리는 오늘날도 같은 것이기에 목사님의 말씀
을 받아들여 자기 삶의 소망으로 삼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유혹이 역사하여 마음을 세상에다 묶어두
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온 땅에 보급된 오늘날에 이단적인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인간은 자기
양심과 합리적인 이성에 비추어 그것이 옳은 말이기 때문에, 당연히 옳다고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오히려 듣기를 원하고, 사는 것에 지친 자기 마음의 위로와 힘을 얻는 말이 되니 마음에 듣기를 원
하는 중독성이 있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이왕이면 빈말이라도 '복 받을 것이다, 잘될 것이다'하면
듣는 사람도 기분 좋고 힘이 나잖아! 하듯이 믿는다는 사람들도 자기를 잘되라고 축복하는 좋은 말
을 듣기를 원하고, 그 말을 듣는 것으로 자기 위안으로 삼는 그것이 믿음인 줄로 착각하는 병패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성경이 온 땅에 보급된 오늘날은 사단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주임을 부인하게 하지는 않
습니다. 반면에 다른 것으로 믿음인 것처럼 속이는 일을 힘써 합니다. 바로 지금까지 목사님에게
말씀드린 것, 목사님과 같은 그런 경우입니다. 사단은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을 상대하지 않습니다.
그 단체의 지도자들만 사로잡으면 됩니다. 말씀을 가르치는 지도자가 말씀에 눈이 어두운 자신에
대해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일한다는 거짓 믿음과 탐욕에 끌려서 뛰어다니기 때문에 사단에게 자
신을 내주는 것이요 사단의 지배를 받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사단은 '죽도록 충성하라''열심을 내
라'고 하신 성경 말씀을 이용하여 하나님의 종은 하나님께 충성해야 한다는 것을 마음에 부추겨
인간 충성심이 발동하게 하고, 하나님의 일한다는 것으로 뛰어다니게 합니다. 열심을 내도록 끊임
없이 마음을 부추깁니다.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명목으로 자기 열심, 자기 열정에 빠져 자기가 주도하게 하고, 거기에 많은
사람을 붙여 따르게 함으로써, 그들로 속은 없고 겉만 번지르르한 열매 없는 나무의 무성한 잎과
같은 종교인이 되게 하고, 한편으로는 인간적인 명예욕이나 승부욕이나 경쟁의식 등을 부추기고 또
한 '너희들 나보라 하나님이 누구의 편인가 보라'라고 목회자로 성공했다는 승리감과 자만심에 취
하게 함으로써, 하나님께 반역의 태도가 되도록 조장하고 다 망하는 길로 끌어들였습니다.
지금까지 의도하지 않은 중복된 말들과 목사님이 모를까 봐 드린 말이 아닌 것도 있었습니다. 그러
나 구체적으로 말하라 하신 성영님께서 문제점에 대해 때때로 지적해주신 것들을 말씀드리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양해 바랍니다. 이제 목사님이 말씀에 얼마나 어두운지에 대하여 목사님이 보
는 성경이나 제가 보는 성경이나 같은 성경이니만큼 얼마든지 그러한가를 살펴보고 판단해볼 수 있
으니, 서너 가지만 예를 들겠습니다. 그중에 제가 내용을 글로 쓰기가 좀 복잡하고 힘든 생각이 들
어서 직접 들으시도록 '불법 행하는 성탄절'에 대한 내용과 '성영님을 불이라고 하는 자를 삼가라'
는 내용을 담은 DVD 2장을 함께 동봉합니다. 이 두 가지 것만으로도 목사님이 얼마나 영적인 어두
움에 붙잡혀서,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훼방하고 왜곡하였는지를 얼마든지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6) 예수님을 외아들로 설정하여 구원을 막는 사단의 종들
그리고 성서 그 어느 곳에서도 예수님을 외아들로 표현하고 있지 않을뿐더러, 또한 예수님이 외아
들이라는 것을 말하려는 계시나 말씀이나 그 의미가 부여된 것은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
서 목사님은 그렇게 예수님을 외아들이라고,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이라고 당당히 말씀하십니까? 어
떻게 거짓된 말을 그렇게 자연스럽게 할 수가 있는지, 성영님께서 물으시는 것이요, 저도 물론입니
다. 하나님께서 혹시 아들을 더 낳으려고 했는데, 예수님밖에 더 낳을 수가 없게 되어서 외아들입
니까? 아니면 아들 하나만 낳을 것으로 하고 낳았기에 외아들입니까? 만일에 성서가 예수님을 외아
들이라고,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라는 뜻으로 말하였다면 그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거짓이요, 세상
신들과 같은 모순이 있음을 말합니다.
성서가 말씀하는 예수님은 하나님의 외아들이 아닌 그냥 아들입니다. 예수님을 아들이라 하신 것은
육신으로 오신 그분은 곧 하나님에게서 나오셨다는 것, 하나님과 끊을 수도, 분리될 수도 없는 절대
적 관계라는 것을 말하고, 아들이면 또한 아들도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 수 있으니 그래서 아들이
라 하신 것이요, 아들이 있으면 아버지가 있다는 것이니, 그러므로 아들로 인해 아버지를 아는 것이
요, 아들을 보면 아버지를 보는 것이요, 아들의 행하시는 것을 봄으로써 아버지의 뜻을 보고 아는
것이기에, 아들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 아들의 생명을 얻은 자는 그 아들과 함께 형제라 하시고, 그렇기에 예수님은 사람 중에서 부활
의 첫 열매가 되셨고(고전15:20,23) 그분을 외아들이라고 한 것이 아니라 맏아들이라고 하신 것입
니다(눅2:7,롬8:29,히1:6). 목사님! 외아들이 아니라 맏아들이라 하셨다는 말입니다. 맏아들! 아십
니까? 도대체 성서 어디서 외아들이라 말했는지 그 출처를 밝혀주셨으면 합니다.
외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그에게 더는 형제는 없고 그 아들 하나로 끝났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외아들이라고 하셨다면, 인간은 그 아들의 생명을 얻을 수가 없을뿐더러, 그
아들과 함께 형제라 할 수 있는 여지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많은 형제를 얼마든지 두실
수 있는 여지로 아들이라 하신 것이요 하나님의 맏아들입니다.
그러면 목사님이, 성경이 예수님을 독생자라고 말하였으니 바로 그 '독생자'라는 것이 외아들이라
고 하는 말이 아니냐 하십니까? 물론 목사님의 성경 보는 눈이 다 그렇습니다만, 아니면, 이도 저
도 아닌, 남들이 그렇게 표현하니 당신도 그 말을 모방한 것입니까? 그러니 거짓 선지자라는 것이
분명하지 않습니까? 인간은 외아들을 독자라고 말하니 성경의 독생자 하는 것도 그렇게 인간 사고
방식으로 받아 외아들이라고, 대담하게 예수님을 한낱 외아들로 만들어놓았다는 것을 압니다만, 그
렇기에 성경의 말씀을 인간 머리가 주체가 되어 이런식으로 다 해석을 내려놓았기 때문에, 하나님
의 뜻이 사람들 속에 얼마나 왜곡되고 뒤틀리게 돌아가도록 해놓았는지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요1:14에 예수님을 아버지의 독생자라 했고, 요1:18에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아버지의 외아들"이거나 "아버지 품속에 있는 외아들이신 하나님"이라고 하는 말
이 절대로 아닙니다. 사도 요한이 예수님을 보고 '독생자'라고 한 것은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죄인
을 구원하여 생명을 주실 뜻을 정하시고, 처음 사람에게 그 뜻을 언약하셨는데, 그 생명의 구주가
곧 하나님 품속에 함께 계신 신성과 인성이신 하나님으로, 그 인성은 생명이요 그 생명으로 사람
(모든 피조물)을 창조하시고, 그 사람에게 영생하는 생명(조에), 부활의 생명을 얻게 하여 영생하
게 하시려고, 육신이 되어 오신 유일한 구주이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 한마디로 독생
자라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 인성으로 함께 계신 하나님으로 자기의 사람들에게 영생하는 생명을 주실 수 있는 유일
한 분이요, 유일하신 구주시요, 세상에 오실 때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오시되, 세상에 보내신 바 된
오직 한 분 생명이시며 구주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 한마디로 독생자라고 했습니
다. 사도 요한이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님에 대하여 그같이 긴 설명을 하지 않아도 '독생자'하면
성경의 뜻을 아는 성영님이 계신 영혼은 얼마든지 알아듣는 것이기에 긴 설명할 필요 없이 독생자
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사건 속에서도 그것은 증명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을 독자라
고 하셨습니다. 만일에 이삭을 외아들이라는 뜻에서 독자라고 하셨다고 하면, 아브라함은 이미 아
들 이스마엘이 있었고, 분명히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이 낳은 아들입니다. 그래서 이삭은 아브라함
에게 외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삭을 독자라고 하신 것은, 이스마엘의 존재를 몰라서
그런 것이 아니요 인간 머리가 생각하는 그런 외아들이라는 뜻에서 독자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오직 이삭만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시겠다는 언약으로 받은 아들,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 주신 유일
한 아들이라는 뜻에서 독자라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계신 하나님, 아버지 품속에 인성(생명)으로 계신 이 생명만이 사람을 죄에서 구원
하여 영생하게 하시는 유일한 생명으로서, 그 인성이 세상을 구원하시는 구주로 오시는 것에 대하
여 아브라함과 말씀하여 언약을 맺으시고, 그 언약을 반드신 이루신다는 증표로 아브라함 백 세에
아들을 주시고 그것을 씨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씨로 주신 독자의 언약은 이삭이 아니라
그리스도라고 갈3:16에서 분명히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목사님이 '독생자'를 '외아들'로 보았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생명 얻는 독생자의 엄청난
뜻을, 그저 인간 자기 눈으로만 보았고 자기 생각을 말한 것이고 복음을 거스른 자기 사상을 사람
들에게 심어준 것으로, 구원도 없고 생명도 없는 거짓말이요, 그러므로 거짓 서기관이요, 거짓 선
지자의 일을 잘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외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도 인간처럼 자식을 낳는 분
인데, 하나밖에 낳지 못해 외아들이라고 한 것이나 되는 것처럼, 사람들이 상상이나 하게 하고 하
나님을 하나님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같은 자리로 끌어내리는 것과 같은 거짓되고 망령된
것이요, 사람들을 생명 얻지 못하도록 훼방하는 속임의 명수인 사단의 일입니다. 도대체 목사님은
목회 생활이 50년이나 되었다는 것을 자랑삼아 말씀하시던데, 그러면 50년동안 성경을 대하신 분
이 어떻게 그렇게, 성경에 없는 거짓을 당당히 말할 수가 있으며, 예수님의 아들 되심이 인간 혈
통이나 되는 것처럼 끌어내릴 수가 있는 것입니까?
또한, 같이 동봉한 DVD의 내용에서도 말씀드렸듯이 목사님 자신이 가장 적극적으로 말씀하시는 것,
성영님을 불이라고(불과 같은 분이라고)가르치고, 하나님은 원하신 적도 없는 성탄절을 지키는 것
이 믿음인 것처럼 하지만, 그러나 믿음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인간 자기 열심과 양심에서 나는 무지
한 행위로서, 사단의 이용물이 된 것뿐입니다. 거부하지 않는 인간 양심을 교묘히 이용하여 믿음을
속이는 거짓이라고, 그것이 목사님을 말하는 것이라고, 제 목숨을 내놓고 목사님 당신에게 말씀을
드립니다. 성경에 기록된 문자의 예수님은 열심히 말하나 그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 속의 영이요 생
명은 보지 못하고, 거짓을 온 세상에 열심히 말하여 영혼을 쭉정이가 되게 하는 속이는 거짓
교사입니다.
아셔야겠습니다. 사단은 예수님을 얼마든지 말하게 합니다. 십자가의 예수님, 부활하신 예수님, 부
지런히 말하게는 합니다. 그러나 목사님이 예수님을 아무리 전해도, 병이 치료되고 귀신이 떠나도,
속을 보지 못한 생명 없는 겉껍데기의 말들, 하나님의 의도에서 빗나간 거짓된 속임의 것들을 전하
는 것이면, 사람들에게는 구원과는 상관없는 하나의 지식이고 추상적인 것이고 상투적인 것일 뿐입
니다. 그것이 사단이 목적하는 바요 작전입니다. 복음이 영혼으로 받아들여져 예수님의 부활 생명
을 얻은 영의 믿음으로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러야 하는데, 그것은 오직 성영님으로만 보고 들을
수 있는 영이요 생명이 되는 레마의 말씀으로 되는 것인데 그 눈이 없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창조에 대해 전하는 말씀도, 창조하신 하나님은 대단히 높여드리는 것 같지만, 지
금 당신 자신의 그 말속에는 '하나님은 실패했다, 하나님은 실패자다'라는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자신도 모르면서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전한다고 하는 그 말속에 하나님을 실패하신 분으
로 말하는 것인 줄, 자기의 하는 말이 뭔 말인지도 모르고 말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어서 나타나
는 부조리가 하나님이 주권이나 내세우고 휘두르는 분이나 되는 것처럼, 사람들로 하나님을 오해하
도록 유도한 것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당신 마음대로 풀어서 전하는 말이 돼 있어서 당신이
하나님이 돼 있는 것 같습니다. 이제 더 말씀드리지 않아도 당신에 대해 알기에 충분하리라 생각은
합니다. 제가 설명도 글쓰기도 복잡하여 여기서 줄이려고 했습니다만 아무래도 목사님뿐 아니라 목
사님과 관계된 모든 사람도 한 무리가 되어 있으니 어떤 여자가 목사님뿐만 아니라, 그 모든 무리
에게 더 억울한 수모를 당하지 않았으면 해서, 한 말씀만 드리고 맺으려 합니다.
(7) 사마리아 여자가 창녀라니요??
요한복음 4장에 기록된 수가 성 사마리아 여자의 대해서입니다. 목사님이 사마리아 여자에 대해서
설교할 때마다 천박한 창녀였다고 하는 것을 들었고, 또 이 여자가 이 남자와 살아봐도 만족이 없
고, 저 남자하고 살아봐도 만족이 없어, 다른 남자를 만나 살면 만족이 있을까 하여 계속 바꾸다
보니, 그렇게 남편을 다섯이나 바꾸었다고 들었습니다. 의사 남편을 만나 살면 행복할까? 만족이
있을까 하여 살아봤으나 거기에도 만족이 없고, 변호사 남편도 살아봤으나 거기에도 만족한 행복이
없고, 돈 많은 남자, 교육자, 농부 이런 식으로 여러 가지 직업의 남자들을 만나 살아봤지만, 그
어느 곳에도 만족을 얻지 못하고 남편을 다섯이나 바꾸게 되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자 비로소
마음에 참된 만족과 기쁨을 얻을 수 있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목사님은 그 사마리아 여자가 그렇게 천박한 창녀였다고 노골적으로 창녀라는
신분으로 깎아내려 모욕적인 말을 할 수가 있습니까? 창녀이기 때문에 남의 시선을 피해서 사람의
왕래가 없을 때 가장 더운 한낮에 물 길러 나왔다고요? 참으로 심히 주관적인 이런 유치한 해석에
소름이 다 끼칩니다. 또 만족이 없었다 해서 남편을 다섯 번이나 바꾼 여자라고 어떻게 그렇게 모
독적인 발언을 하실 수가 있으며 가지고 놀듯이 하십니까? 무슨 해석이 자기 맘대로 이랬다저랬다
합니까? 왜 목사님의 눈에는 그 여자가 창녀로 보이는 것입니까? 왜 그 여자가 창녀입니까? 그리고
창녀라면 무슨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다고 말하는 겁니까? 창녀라면 몸을 파는 직업적인 여자를 말
하는데 그러면 자기 몸을 파는 그 대상들을 남편이라고 말한 것입니까?
50년이나 목회하셨다는 것을 자랑하듯 말씀하시는 분이 어떻게 그렇게....., 이 사마리아 여자의 사
건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찾으시는 자가 누구인가? 하나님의 언약하신 구원과 생명이 누구에게로 흘
러가고 임하는 것인가를 보이신 복음입니다. 예수님과 관계되는 자, 예수님을 만나는 자가 누구인지
를 분명히 보이신,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루어진 멋지고 아름다운 영적인 뜻을 보게 하신 것입니
다. 그것을 볼 수 있는 눈이 돼야 함에도......, 어떻게 그렇게 자기 마음에서 나는 것으로 상식에
도 맞지 않는 그런 말들로 하나님의 엄청난 생명의 뜻을 흐려놓는 것인지 참 한탄스러울 뿐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의 의도, 하나님의 의지를 말씀하신 하나님의 책이기에 하나님의 처지
에서 보는 눈이 되어야 마땅합니다. 그것을 모를까 봐 내게 할 말이라고 하느냐 하시겠지만, 사마리
아 여자를 창녀로 보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삶의 만족이 없어서 남편을 다섯이나 바꾼 것처럼 보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시각으로 볼 눈이 되어야 하나님과 맞는 답이 나오는 것인데, 자기 눈
으로 보는 성경이 돼 있으니 자기 말을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사람들의 영혼에 해를 끼치는 거짓
된 가르침이 될 수밖에 없는 것 당연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수가 성 사마리아의 창녀를 찾아가신 것 아닙니다. 삶의 만족이 없어 남편을 다섯 번이
나 바꾼 여자에게 만족함을 주기 위해서 찾아가신 것도 아닙니다. 목사님이 생각하는 그런 류가 아
니라, 메시아가 오기를 고대하던 영혼을 찾아가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찾아가신 것은 메시아를 소
망하며 기다리던 영혼 이스라엘 집에 잃어버린 양을 찾아가신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자는 여자냐 남
자냐 하는 것을 보라는 데 있지 않습니다. 사마리아 여자는 분명히 여자이지만, 그러나 여자다, 남
자다, 하는 성을 말하라는 데 있는 것이 아니고, 여자만이 생명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여자만이
생명을 생산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영적인 것을 여자로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찾아가신 사마리아
여자는 생명의 목마름을 가지고 있는 여자(신앙)입니다. 예수님께서 찾아가셔야만 하는, 예수님이
오시도록 예수님을 부른 하나님의 메시아 언약을 영에 가진 여자입니다. 사마리아인들의 영의 목마
름을 대표로 보여준 여자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에 나갈 수 없게 된 죄인으로서, 그 성전을 향하여
마음과 소망을 두고 있는 사마리아인들에게 이제 성전은 폐하여 졌으니(필요 없게 되었으니) 예수
님 안에서 장소도 시간도 구애받지 않고, 하나님을 예배하게 되었다는 그 예수님의 때의 영혼들에
자유의 복음을 선포해주시려고 찾아가신 것입니다. 생명을 고대하며 생명 얻고자 하는 영의 목마름
을 가진 여자에게 그 목마름을 해갈하는 온전한 복음(생명)을 주시려고 찾아가신 여자입니다. 하나
님의 섭리 가운데 있는 여자요 구원의 뜻을 이루기 위한 준비된 여자입니다.
남자든 여자든 관계없이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알고 예수님의 생명 얻기를 소망하는 자는 영적으로
여자요 예수님의 생명을 얻은 자는 예수님의 신부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누구나 사마리아 여자와
같이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을 알아보고 만나지 못하면 예수님과 관계없습니다. 예수님이 자기 앞에
와있어도 예수님을 눈으로 보고 귀로 다 듣고 대화를 나눴어도, 그 영혼이 예수님을 맞아들일 수
있는 영혼으로 준비되지 않으면, 예수님을 영혼으로 알지 못하면 예수님은 그와 상관없습니다. 그
래서 여자는 이 같은 신앙을 의미하므로 사마리아 여자로 이것을 알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마리아 여자는 예수님이 마10:6에, 마15:24에 말씀하신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입니
다. 이스라엘 집에는 열두 형제(열두 지파)가 있었는데, 그 형제들 간에 뜻이 맞지 않아 나가서 살
겠다고(솔로몬 왕 임기 말년 르호보암 때), 열두 형제 중에 열 형제(북 왕국 이스라엘)가 예루살렘
(성전=아버지 집)을 떠나 나가(성전제사를 버리고), 자기들끼리 여호와 하나님께 제사하여 섬긴다
고 헀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방법도 하나님의 뜻도 아닌 성전을 벗어난 것이 되었으므로, 그같이 하
나님을 섬기는 례(禮)가 잘못되자, 그것은 우상을 섬기는 것과 같아서 곧 음란한 생활이 되었고,
주변국에 침략당하여 끌려다니며 신앙도 혈통도 다 더렵혀지게 되었습니다.
이후 이들이 예루살렘(성전)을 그리워하여 성전으로 나와 하나님께 제사 드리려 했지만, 그것은
유대인들에겐 용납되지 않는 일으므로 사마리아인들을 비난하고 정죄하며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북 왕국 사마리아 사람들'하면 '여호와 신앙과 율법을 버린 자'들, '성전 제사를 버리고
세상으로 나간 부정한 자'들, '이방인들과 혼혈을 이루어 유일신의 신앙을 더럽히고 이방인에게
빌붙어 사는 개와 같은 자'들이라는 뜻의 총칭되어 불리는 별명입니다. 성전으로 돌아올 수 없는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눅15장에 집 나간 탕자가 바로 이 사마리아인의 비유입니다. 이방인
들은 돌아온 탕자가 아닙니다. 가인의 길로 나가버린 죄악의 종자요, 죽은 자요, 사단에게 속하여
사단에게 종노릇하고 사단을 주인처럼 섬기며 살았던 이스라엘 밖의 이방인이었지, 하나님의 집을
나갔다 돌아온 둘째 아들로 비유된 탕자가 아닙니다. 그렇기에 사마리아 여자는 예루살렘 이스라엘
집 아버지의 집에 돌아가고 싶지만, 돌아올 힘을 잃어버린 영혼 곧 이스라엘 집의 잃은 양입니다.
예수님께서 야곱의 우물에 오셔서 우물곁에 앉으신 때가 제육시쯤 되었다 했습니다. 유대인들의 육
시는 정오를 가리키는 시간인 것을 목사님이 모르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정오라 하니까
자꾸 복음에서 빗나간 가장 더울 때라는 것으로 말하고 있는데, 가장 더운 때라는 것을 말하기 위
한 것이 아니고 '정오' 그 시간은 하루 중 가장 밝은 때입니다. 하루 중 해가 중천에 뜬 가장 밝을
때, 바로 생명의 빛이신 예수님이 인류 가운데 오신 때가 정오입니다. 어두운 세상에 광명한 빛으
로 오신 예수님의 때가 가장 밝을 때로 정오입니다.
물 길으러 나온 사마리아 여자가 창녀라서 창피해서 손가락질이 두려워서 사람들의 눈을 피하고자
가장 더울 때 아무도 나오지 않는 그 시간에 물 길으러 나왔다는 그런.... 복음을 끌어내리는 바리
새요 서기관의 유치하고 무지한 누룩과 같은 말이나 하라고, 여자가 정오에 나온 것이 아니고 바로
정오는 예수님의 때요, 그리고 생명의 기갈을 겪고 있는 사마리아 여자의 목마름이 극에 달한 때요
예수님을 만날 은혜의 때로 차올랐다는 의미입니다. 사마리아 여자, 생명을 목말라하는 구약의 모
든 여자(신앙)와 그 생명이신 예수님과 만나는 때입니다.
(참고- 때가 제 육시쯤 되었더라(요4:6)의 육시는 로마의 시간 계산법에서의 육시(저녁6시)를 말
하나 그 육시의 의미(속의 뜻)로는 히브리식의 정오쯤을 말하는 것임)
야곱의 깊은 우물은 긴 세월을 거쳐서 마침내 오실 생수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시입니
다. 물은 예수님으로부터 주어질 영생하게 하시는 생명수의 상징입니다. 그 실체이신 예수님께서
마침내 오셔서 목마르지 않는 생수, 자신을 주시기 위해 야곱의 물을 길러 나온 여자의 목마름을
예수님께서 친히 청하시고, 바로 자신이 주는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은,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생
명의 물임을 말씀하셨고(예수님은 예수님을 간절히 목말라 하는 자를 필요로 하심) 야곱의 깊은 물
로 목마른(생수를 얻고자 하나 얻지 못한) 사마리아 여자는 목마르지 않은 그 물을 청하여 목마름
에서 온전히 해갈을 얻게 되었음을 보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이 메시아이심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라 하셨고, 누구에게도 드러내지 않으셨는데
(마16:20) 사마리아 이 여자에게만 자신이 메시아임을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이 메시아임을 밝
힌 것은 오직 이 여자 한사람이었다는 것 보았지 않습니까? 사마리아 여자는 여자의 후손에 대한
그 생명을 갈망하며 그 생명의 후사가 끊이지 않도록 율법이 명한 뜻에 따라 생명을 얻고자 그 소망
으로 자기의 전 삶을 들어 생명을 기다리고 있었던 여자였습니다. 메시아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자기가 알고 있고, 그분이 오시면 모든 것을 다 일러주시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 여자,
오직 이 여자만이 메시아를 고대하며 기다리는 이스라엘의 여자요 예수님이 오시도록 부른 신앙이
요 예수님이 찾으시는 정죄 받은 죄인이었습니다.
남편이 다섯이 있었다는 것으로 그 여자의 속사정을 성경적으로 깨달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삶의
만족을 얻기 위해서, 만족이 있을까 하여 남편을 다섯이나 바꾼 여자를 소개한 것이 아니라, 창녀
가 자기 상대역 남자를 남편이라 부른 것이 아니라, 여기 사마리아 여자의 남편은 바로 율법으로
주어진 장자의 후사를 잇게 해야 하는, 계대 결혼에 의한 남편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장
자(첫 것)는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되었습니다. 그것은 장차 하나님의 맏아들로 오실 예수 그리스
도를 예표 하는 것으로서, 맏이가 자식이 없으면 그 동생이 형의 아내를 취하여 아들을 낳아 장자
의 후사를 잇게 하는 계대 결혼이 있었습니다(신25:5-6 마22:24-27 눅20:28-33). 사마리아 여자가
바로 그같이 계대 결혼에 의한 남편들인데, 그 남편들에게서 생명(후사)을 얻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둘째 남편도 셋째 남편도 넷째 남편에게서도 생명을 보기를 너무나 원했지만 다 얻지 못했
고, 그 생명에 대하여 목마름으로 다섯째의 아내가 되었는데,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지금 있는 자
는, 즉 "다섯의 남편이 있었으나 그 남편에게서도 생명 얻을 수 없다. 네게 생명을 줄 수가 없다.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다"라고 그 남편에게서도 생명 얻지 못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생명의 기쁨을 얻고자 하여 네게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남편(다섯)은 네게 그 생명
의 기쁨을 줄 수 없다" 그러니까 율법으로는 생명 얻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바로 네가 기다리는 생명의 실체요 "네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은 참 생명의 기쁨을 주는 생명
이요 영생하는 생명을 주시는, 네가 오실 줄 알고 있는 메시아"라고 예수님 자신을 드러내셨던 것
입니다. 예수님 자신을 그 여자에게 통째로 내주시려고 오셨음을 말씀하신 복음 중의 복음이요, 죄
인들에겐 이제 예루살렘 성전제사는 필요 없고, 예수님 안에서 어디서든지 예배할 수 있는 때가 되
었음을, 예수님 안에서 드려지는 영적인 예배에 대한 그 자유를 선포하신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 할 말은 많지만 여기서 생략합니다. 그러므로 목사님 당신이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얼
마나 자기의 생각을 따라 마음대로 요리하고 있는 것인지를 아셔야 합니다. 복음을 말하기는 하나
그 복음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식이고, 구원의 뜻을 가진 하나님의 영적인 섭리는 목사님이 절대
로 보지를 못했습니다.
뿌리 없는 나무는 없습니다. 뿌리가 있어야 줄기가 있고 줄기가 있어야 열매를 맺는데, 뿌리도 줄
기도 없는 그 열매만 말한다면 그것은 쉽고 얼마든지 말할 수 있지만, 실제로 뿌리 없는 나무는 살
수 없지 않습니까? 거기다 뿌리는 인간의 도덕률이 되고 줄기는 세상 중심의 것들이 되고, 열매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면 그것은 결합할 수도 없고 온전할 수 없는 것 당연합니다.
이 사마리아 여자는 목사님의 설교 레퍼토리(repertory)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어서 증거하여 말하
라 하신 성영님의 뜻에 따라 이것을 말씀드렸습니다만, 그러면 그동안 목사님 당신이 이 여자에
대해서 전한 말씀이 참말을 하였다고, 하나님께 당당히 말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사마리아 여자
에게도 장담하실 수 있겠습니까? 복음을 변개하고 왜곡한 것을 하나님께서 묵인하지 않으실 것이
라고 하셨습니다.
(8)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말은 성경 어디에??
목사님이 자주 언급하는 말 중에 하나님께서 한 영혼을 천하보다 더 귀한 영혼이라고 하셨다며 사
람들을 향해 자신들이 천하보다 귀한 영혼인 것처럼, 기분을 맞추는 말을 열심히 하여 스스로 도
취하게 합니다. 그런데 언제 어디에 그렇게 하나님께서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말씀을 하셨
는지요? 목사님 성경, 제 성경 같은 성경이니 그 말씀이 성경 어디에 있는지 여쭙니다. 제가 판단
하기는 마16:25,26에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
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하신 말씀을 가지고 그렇게 말하는 것 아닌가 하
는 데요 그런데 예수님의 이 말씀은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 그대로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위해 살면 그 목숨은 잃는다. 영원하지 못할 목숨을 영원한 것
처럼 그 목숨을 위한 것이면 오히려 잃는다, 구원 얻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목숨이 끊어
지면 영벌에 들어간다는 말 아닙니까? 그런데 사람이 예수님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으면, 목숨을
잃는다 해도 찾는다는 겁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 때문에 목숨을 잃는다면, 그 목숨은 영원한 영
생에 들어간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려면 자기 목숨을 위해 살지 않고
잃을 것으로 하여,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다면 찾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
예수님을 믿는 것 그것은 자기를 부인하는 것인데, 자기 부인은 예수님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잃을
것으로 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목숨과 목숨의 일에 연연하지 않고 버려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만일에 사람이 목숨이 영원한 것처럼, 자기를 즐겁게 하려고 열심히 재물을 모으고, 세상 것을 다
갖추었다 해도 결국은 목숨이 끝나는 날이 있는데, 그렇게 자기 목숨을 위해 일생 다 바쳐 재물을
얻어 쌓아 놓고 세상 위에 가장 높은 지위 명예를 얻었어도, 천하를 다 얻었어도 목숨을 잃을 때
그것이 목숨을 구원해주지 못하는 것이니, 지옥 가는 것이니 무슨 유익이 있느냐는 말씀입니다. 천
하를 얻었어도 그것으로 목숨을 되돌려 받을 수도 없고 살 수도 없다. 목숨 한번 잃어버리면 다시
되돌릴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세상에 그 어떤 것 가지고도 목숨을 되돌려 살 수도 없고 목숨과 바
꿀 수 있는 것이 없다. 그러니 자기 목숨이 사는 일로 천하를 얻는다 한들 그것이 무슨 유익이겠느
냐 지옥 가는데, 목숨 끊어지면 그만이지 천하가 다 무슨 소용이냐는 말씀입니다. 자기 목숨을 부
인하고 자기 목숨이 죽는다 해도 예수님을 위해 내놓고 예수님을 위해 사는 자는 찾을 것이요, 그
러나 자기 목숨을 위해 사는 자는 천하를 얻었어도 잃을 것이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무슨 천하보다 귀한 영혼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입니까?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
다고 하셨다는 말이 어떻게 나올 수가 있는 것입니까? 왜 예수님의 말씀의 의도를 그렇게 목사님
마음대로 변질시켜 놓는 것입니까? 그러면서 '여러분은 하나님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하셨다, 여러
분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천하보다 귀한 존재다, 천하보다 귀한 영혼들이다, 그러
니 누가 여러분을 건드릴 수 있냐' 이런 거짓말로 바꾸어 사람들의 마음을 부추기고, 기분을 맞추
는 것으로 미혹하여 자기의 사람들로 만들고 있는 것이지 않습니까? 그러니 인간 자기가 뭐라도
되는 것처럼 착각하게 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시라 하니까 무조건 다 사랑한다는 것인 줄로
착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그냥 교회 나와 앉아 아멘 아멘 한다고 황송해서 어쩔 줄 몰라 하시
는 줄 아십니까?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셨다, 사랑하신다'하는 것은 예수님을 내주셨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인
데, 그러면 목사님의 교인들이 자기 목숨을 위해 살지 않고 예수님을 위해서 자기 목숨 내놓고 자
기 목숨의 일을 다 버렸다는 것일까요? 아마도 '예수 믿는 것은 이와 같다'한다면 사람들이 모여
들지 않으리라는 것 계산하는 것이니, 만일에 이 복음의 진리를 안다 해도 이 복음만 전하지는 않
을 거잖습니까? 그리고 기껏 성경에도 없는 말로 예수님의 말씀을 빙자하여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
할 걸 알기 때문에, 비스름하게 사람 비위 맞추는 듣기 좋은 말로 바꿔서, 그같이 하나님께서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다고 하셨다고,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천하보다 귀한 영혼이라고, 여러
분 한 사람 한 사람을 너무나 귀하게 여기신다고, 거짓 복음을 그렇게 자신 넘치게 외치고 있으니
그런데 어찌합니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눈에 보이는 자가 그리 없다고 찾아보기가 어렵다고
하셨으니 말입니다.
눅18:8에 예수님께서.......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셨습니다. 목사님은 이
말씀을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교회 건물 안에 사람이 없다는 말입니까? 사람은 넘쳐납니다. 그러나
믿음 있는 자를 볼 수 없다는 말입니다. 다시 강조하는 것은 당신에게 사람 많이 몰려들었다고 하
나님의 일인 줄로 착각하지 마십시오. 목사님과 사단이 합작하여 이루어진 일로, 목사님은 성공일
진 몰라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도 하나님의 방법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혹 기회 주시는 것이
면 이 회개의 기회를 잃어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이 글을 보낸 이후 성영님께서 제게 무엇
을 말씀하실지는 모르지만, 이것이 목사님에게 주시는 마지막 경고라고 하셨다는 것과 거짓된 말과
불법으로 하는 것들을 그만 그치라 명하셨다는 것을 분명히 전해드립니다. 무지한 말로 하나님을
말하는 것, 듣기 싫으니 그만 그치라 하셨습니다.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속에, 영의 생명을 얻지 못하여 생명의 목마름에 갈증으로
고통 하는 영혼이 더러는 있기에 그 영혼들에 생명의 충족을 주시고자 하나님께서 찾기 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목사님 당신이 하나님의 뜻대로 하셔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인정하는 마음
이 있다면, 하나님께 내드리라 하십니다.
영혼을 찾으시도록 성영님께서 말씀하시도록 하라 하셨습니다. 목사님의 자리를 성영님께 내드리
라 하셨다는 말입니다. 만일 합의 하시면 이후의 필요한 말씀은 목사님이 저를 만나시는 것이 돼야
하겠습니다. 두서없는 글에 양해 구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하며 이만 글을
맺습니다.
2010년 12월 8일 신성엽 올림
경고 1 조ㅇㅇ 목사에게 보내신 경고의 말씀.p52-p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