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제저항기 小坡 吳孝媛의 한시에 나타난 민족계몽의식.
申斗煥 (安東大學校 漢文學科)
목차
1. 문제의 제기
2. 문자향서권기의 성장배경
3. 여류문사로서의 진출과 신여성 전환기
4. 민족에 대한 자아각성과 저항의식의 맹아
5. 결론
<국문초록>
이 논문은 일제강점기를 살았던 여류 시인 소파 오효원의 한시에 나타난 민족의 자아각성과 저항의식을 연구한 것이다. 그는 구한말에 여자로 태어나 기구한 운명으로 기이한 삶을 살다간 여류시인으로 474수의 시를 남기고 있다. 그의 시 대부분이 일제강점기의 여성적 일상을 정감으로 표출한 것이어서 그의 시를 따라 삶의 궤적을 살펴보면 일제강점기가 생생하게 묘사되어 드러난다.
그의 시는 얼핏 보면 친일적인 성향도 있어 보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남존여비의 유교적 봉건사회를 계몽하여 근대여성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여자학교를 설립하려는 계몽의식과 민족에 대한 자각과 국제정세에 대한 선진적 세계관이 드러나고 있다.
그는 또 독립운동이 전개되던 시기 중국으로 건너가 중국의 역사유적과 근대화 과정을 살펴보고 중국의 유명인사들과 교류를 통하여 전환기 동아시아 근대를 인식하고 돌아왔다. 이때 지은 그의 시에서는 민족에 대한 자아 각성과 일제강압에 대한 저항의식이 발견되고 있다. 이것은 일제 강점기 민족주의 문학적 성향과 애국적 투혼이 함의된 저항문학의 성격으로 볼 수 있다.
일제강점기 소파 오효원의 한시에 나타난 주제의식은 반봉건적이고 민족적이며 애국계몽적인 경향을 함의하고 있다. 이시기에 와서야 여류 한문 문사의 진정한 민족문학과 리얼리즘 문학의 맹아를 볼 수 있었다. 오효원의 한시는 조선여류시사의 이체였다.
<주제어> : 일제강점기, 여류시인, 소파 오효원, 민족, 저항, 계몽. 리얼리즘. 문학.
1. 문제의 제기
小東坡. 중국의 소동파를 사모하여 우리나라의 여자 동파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호를 小坡라고 하였던 일제강점기 천재시인 여류문사. 小坡 吳孝媛(1889~?)이 살았던 시대는 유교봉건사회에서 근대사회로 이행되는 전환기였으며, 서구열강들이 동아시의 약소국들을 침탈하던 약육강식의 시대였다.
서세동점으로 구한말 일제강점기 조선은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유교가 쇠퇴하기 시작하자 유교의 개혁론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소학교가 설립되고 신식학문의 각종학교들이 들어서면서 전통서당교육은 쇠퇴하게 되었다.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면서 전통사회는 빠른 속도로 해체되고 있었다. 소파 오효원은 일제강점이 시작되던 무렵 조선이 근대화의 물결로 몸살을 앓던 시기였다.
그는 경상북도 의성에 출생한 여류문사로서 이번 대동한문학회의 주제 <일제강점기 한문학의 재조명 –영남지역을 중심으로->에 매우 적합한 인물이다. 이 논문은 이번 학회의 성격에 맞추어 기조논문적인 성격으로 집필된 것이다.
우리 한문학사에서 일제의 압박에 대해 저항하는 저항문학과 이시기 폭넓게 구사되는 애국계몽문학은 매우 중요한 테마이다. 일본의 내정 간섭이 있던 19세기 후반 개화기부터 1945년까지를 아우르는 보다 넓은 시기를 포함할 수 있는 범주의 용어의 필요성 때문에 일제저항기란 용어를 권장한다.
일제강점기 한문학은 우리문학사에 비추어 보면 민족문학적 성격과 저항문학이 쏟아지던 중요한 시기로 많은 작가와 문학 작품을 새로 발굴하여 그 위상을 제고할 필요성이 제기되기 때문이다.
소파 오효원은 일제저항기의 치열한 삶을 형상화한 한시 474수의 시를 남기고 있다. 1929년에 그의 시문집이 수습되었다. 이 책 끝에 편집자는 “중간에 10년간의 시를 초해 둔 것과 南海 康有爲 任公 梁啓超, 南湖 廉泉의 序문과 說, 題字를 전란가운데 잃어버려 함께 간행하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라고 토로했다. 이것을 감안 하면 시가 훨씬 많았던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의 여류시인의 문집으로 이렇게 많은 시가 실려 있는 것은 드문 경우다. 지금까지 소개된 조선 여류시인들의 시들은 소규모의 시를 남긴 군소시인들이 대분분이다. 오효원은 여류시인으로서는 자질이 출중한 대형 시인이었다.
이 시집의 존재가 1970년에 밝혀진 이래. 그에 대한 연구는 다방면에서 많이 이루어지고 있다. 최근에 와서 석사학위 논문 2편과 박사학위 논문 두 편이 나오면서 오효원의 생애나 시세계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밝혀졌다.지금까지 진행된 연구들을 살펴보면 그의 시에 대한 소개가 대부분이며 그것도 5수, 7수를 소개하며 여성적 자아, 여성주체성, 여성의 정감표현, 허난 설헌과 비교연구 등 남성위주의 유교적 사회 속에서 여성의 성적차별을 극복하고 살아온 근대적 여성의 선구자로 파악했다. 그의 한시에 나타난 교육과 계몽을 중심으로 현실인식과 시세계 부분에 대한연구들이 대부분이다. 각 논문들이 비슷한 주제로 서로 중복되고 재인용되는 부분이 많아서 실재로 그 연구의 폭은 그리 넓어보이진 않는다. 한결같이 그를 칭송하고 여류한시 작가로서 떠올린 반면 그에 대한 일제강점기 민족문학적 성격이나 저항문학적 성격을 연구한 것은 소략해 보이는 만큼 소파 오효원에 대한 생애와 사상 학문적 경향 등에 있어서도 비판적 시각과 심화된 연구가 필요하다고 판단된다. 소파 오효원에 대한 연구는 이제 그 새로운 출발점에 와 있다.
그동안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일제강점기 소파 오효원의 삶의 궤적과 한시를 재조명하여 당대의 치열한 현실인식과 더 나아가 그의 반봉적인 근대계몽활동과 민족에 대한 자아각성 등을 중심으로 민족문학적 성격과 리얼리즘 문학의 맹아를 추적해 보고자 한다. 또 일제에 저항하는 저항문학적 성격을 분석하여 그의 삶과 문학적 위상을 충실히 제고해 보고자 한다.
2. 문자향서권기의 성장 배경
小坡 吳孝媛(1889~193?)의 초명은 德媛, 호는 小坡·隨鷗. 본관은 海州. 아버지는 일제강점기 의성군의 관리였던 首陽山人 夢今翁 吳時善이다. 호적에 기재된 이름은 吳道彦이다. 첫째부인에게 태어난 吳世英이 있었다. 소파 오효원은 오시선과 둘째부인 이춘파의 사이에서 경북 의성 도서리에서 태어났다. 둘째 부인에게서는 남동생 吳國泳과 여동생 吳義媛과 吳桂媛이 있었다. 그의 가계는 해주오씨 의성의 입향조 오국화의 후예들로서 그의 부친은 해주오씨 徵士公파의 후손으로 대대로 내려오는 영남의 유가사상을 신봉하며 살아 왔던 것 같다. 아버지 오시선은 의성군 관아에서 보건관련 부서에서 종사하는 의관의 신분이었던 것 같다.
오시선이 쓴 서문에 의하면 “1888년 무자년 맹하에 아내가 새벽에 일어나 꿈에 대해 말하기를 ‘이상해라 한 선녀가 바다 가에서 오더니 벽도화 한 가지를 주면서 ‘잘 지키고 잘 보호하라’ 하고는 홀연히 사라졌습니다. 라고 하였다. 그러더니 과연 그 다음해에 1889 기축년 3월에 여자아이 한명을 낳았다. 아이는 눈이 초롱초롱하고 눈썹이 예뻤으며 남아의 기상이 있었다. 자라나면서도 여자 아이들이 하는 소꿉놀이 등에는 관심이 없고 붓으로 담장에 칠하고 그리기를 좋아 하는데 기이한 글자모양을 그려댔다. 사람들은 놀라며 신기하게 여겼다. 나는 마음속으로 여자로 태어난 것을 한탄했다. 당시에는 나라에 여자교육기관이 없었기에 7,8세까지 헛되게 보내었다. 9살이 되던 1897년 정유년에 효원이가 큰소리로 울면서 ‘둘째를 따라가 사숙에서 공부를 배우고 싶다(願從二哥就學私塾)’고 간청하기에 나는 어쩔 수 없이 남자 옷을 입혀서 함께 배우도록 허락해주었다.
‘二哥’는 누구인가? 기존 연구에서는 두 오빠로 보고 있다. 두 오빠는 누구인가? 오효원의 큰아버지 吳道遠에게는 吳泰英(1878~1950)이 있었고 吳貴泳(1884~1947)이 있었다. 이 둘을 지칭하는 것으로 파악 했는데 오태영은 오효원과는 나이차이가 10살이고 오귀영은 4살 위다. 나이 차이로 볼 때 오태영 오빠와는 함께 공부할 수 있는 나이는 아니다. 둘째 오빠 오귀영일 수는 있다. 아니면 두 살 어린 동생 오국영이거나 이복오빠 오세영일 수 있다. 따라서 二哥는 둘째 오빠, 이거나 둘째를 지칭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보여 진다.
서당에 다닌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천자문을 바로도 외우고 거꾸로도 외우며 독음만 대하여도 그 뜻을 풀이하였고 하나를 들으면 열을 깨우쳤다. 마을선생이 더욱 감탄하여 말하기를 옛날 반고나 채옹에 대해 귀로만 듣고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그들도 이보다 더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이해 겨울에 시 짓는 법을 가르쳤는데 효원이는 그 자리에서 오언절구를 입으로 읊었다. 이로부터 선생이 더욱 열심히 가르쳐서 칠언절구와 율시까지 차례로 짓기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그가 아홉 살에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九歲入學後作 三首>
國俗自何時 나라의 풍속이 언제 부터인지
重男不重女 남자만 중하고 여자는 중하지 않다네
一篇千字文 드디어 한 편의 천자문을
九歲學於序 아홉 살에 처음 서당에서 배웠네
當年記姓名 당년에 이름자를 쓰고
旋占五言城 이내 오언시를 지을 수 있었네
一隊同窓伴 한 때의 동창생 무리들
謂吾慧竇明 나를 총명하다고 떠들어 대네
이 시는 1897년경에 쓰여 졌다. 그가 태어나 소녀기를 보냈던 경북 의성은 조선 성리학의 유풍이 강하게 남아 남존여비 사상이 엄격하던 곳이었다. 조선의 유교봉건사회는 일제 강점기를 맞아서 점차 해체되어 가고 있었다. 이 시를 분석해 보면 오효원은 어려서부터 남녀차별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었으며 반봉건적 사상이 자라나고 있었다.
오효원은 여자의 몸으로 9살에 벌써 천재적인 기질을 발휘하여 천자문을 배우고 시를 지을 수 있었다는 것이 발견된다.
10세 때인 이듬해 여름 의성군과 의흥현 두 고을이 동시에 주최하는 백일장에 나아가 장원을 차지하자 고을 수령이 성문에 방을 내걸고 10세 여자 아이가 참으로 기이하고 뛰어나니 여러 학생들에게 보여주고자 한다고 하면서 후한 상을 내렸다. 이때부터 소문을 타고 명성이 멀리까지 퍼졌다. 이때부터 한시를 비롯한 한문공부에 치중했던 시기였으며 종종 시를 짓고 시회에도 참여하며 학문에 힘썼던 것 같다.
소파 오효원은 이때부터 한문과 서예에 흥미를 느끼며 본격적으로 학문의 길로 접어들었던 것 같다. 그는 군청의 관리로 일하는 아버지의 월급으로 생활하는 집안에서 오직 공부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소녀의 공부는 남아들처럼 과거를 보는 것도 아니었으니 아마도 서예와 시 짓기 공부가 대부분이었을 것으로 추측해 본다.
오효원은 소녀문사로서 시사에도 참가하고 있다. 당시 의성의 용암시사에서 벌어지는 시연 雅集에 참가하여 그 정황에 대해 <龍巖社雅集 十二首>의 장편 시를 지었다. 그 중에 4수는 다음과 같다.
騷壇旗鼓動 시단에 깃발 펄럭이고 북소리 울리니
春色逐人來 봄의 정경이 사람을 쫓아오네
哄堂詩話席 마루에는 시 이야기로 떠들썩하고
亂酌無巡盃 어지러운 술판에는 잔 돌리는 순서도 잊었네
이 시는 1900년 전후에 지어진 것 같다. 깃발이 펄럭이고 북소리 울리며 시사가 열리는 모양이다. 봄날의 아름다운 경치 속에 시에 대한 담화와 어지러운 술판을 묘사하고 있다. 구한말 이시기에도 시사가 雅集의 형태로 벌어지고 있는 것이 흥미롭다.
오효원은 독서와 詩作을 바탕으로 서당 동기들과 함께 시를 짓거나 주변의 크고 작은 시회에 참여하는 생활을 즐겼던 것 같다.
오효원의 서예에 대한 솜씨는 그의 한시의 유명세 때문에 묻혀 가려진 부분이 많다. 그러나 그는 어릴 적부터 서법에 대한 공부를 열심히 하여 사람들로부터 신이내린 솜씨라는 평을 받았다. 오시선의 서문에 의하면 서숙에서는 붓글씨도 가르쳤는데 글자를 쓸 때는 반드시 똑바로 반듯하게 쓰고는 “글자의 뜻이 반듯하지 않으면 마음도 반듯하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또 글씨를 쓸 때에는 반드시 法帖을 달라고 했으며, “서법에 筆訣이 없다면 그림의 골자가 없는 것과 같습니다.” 라고 하였다. 이에 먼저 秋帖(왕희지 서첩)을 본받아 골격을 세우더니 또 董帖(동기창의 서첩)을 달라고 하여 서첩을 임모하여 華實을 겸비하였다. 편액이나 주련에 쓰는 글씨나 해서나 행서에 있어서까지 수십일 정도 익히면 노성하게 갖추어 졌기 때문에 마을의 이웃들이 모두 신이내린 솜씨라고 칭송하면서 본받아 쓴 것을 달라고 요구하는 것이 수백장이나 되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이로 보면 오효원은 시 뿐만이 아니라 서화에도 뛰어난 솜씨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 증명되고 있다. 소파는 소녀명필로서 서단에도 출입하고 있었다.
<到龍岩書社>
용암의 서사에 이르러
城北諸名伴 성 북쪽 용암에 여러 명필들 모이니
無期此日逢 기약도 없이 이날에 다 만나네
蒼郊歸禿釋 푸르른 들길에는 스님이 돌아오고
碧落叫酸鴻 허공에는 외로운 기러기 슬피 울며 날아가네
용암은 의성 북쪽에 있는 단촌 고운사 부근인 듯하다. 용암에는 시사에 이어 서사도 열렸던 모양이다. 당대 명필들이 모여 실력을 펼치는 이곳에 참여하고 있는 것을 보면 오효원의 서화에 솜씨는 일가견이 있었던 모양이다.
이렇게 시서에 몰두하고 있던 어린 소파에게 청천벽력같은 소식이 전해진다. 1902년 오효원이 14세 때에 부친 오시선이 공금횡령사건으로 한양의 감옥에 갇히게 된다. 오효원은 모든 것을 버려두고 무작정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상경했다. 이 당시에 지어진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赴京師> 壬寅 事註見上
<서울로 달려가다>. 임인년(1902)년 일은 앞의 주에 보인다.
單身顚倒入長安 혈혈단신으로 황급하게 한양으로 들어가니
四顧無親孰解顔 아는 사람 하나 없으니 누구에게 부탁하리오
事巨才踈全沒策 일은 큰데 재주는 적어 대책이 전혀 없으니
不禁涕淚日潺潺 눈물은 마를 날 없고 매일 흐느껴 울기만 한다오
마치 심청이가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인당수에 몸을 던졌듯 소파는 아는 사람 하나 없이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한양에 몸을 던졌다. 그는 무작정 상경하여 執政門 아래서 아버지의 죄를 대신하게 해 달라고 울면서 곳곳에 청원하고 다녔다. 어느 대인선생이 자리를 내어주자 머리를 조아리고는 찾아온 연유를 모두 말하였다. 그 말이 간절하고 정성이 가상하여 듣는 사람들이 눈물을 훔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어느 대인선생이 “너는 14살의 여자아이 인데 식견이 이와 같으니 글을 아는 것이냐? 마침 이 자리에 시 짓는 성대한 모임이 있는데 네가 한 번 참여해 보겠느냐?”라고 하니, “효원이 절을 올리며 사례하길 어찌 감히 싫다고 하겠습니까?”하며 잠깐 만에 율시 한 수를 지어 올렸다. 그 두 번째 연에 말하기를
國納關心思畵策 벌과금 납입할 계책을 생각하느라
家君滯病減形容 아버지 걱정에 모습이 여위어 가네
라고 하였다.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크게 놀라고 감탄하여 말하기를 “효는 제영(緹榮)이요, 시는 난설(蘭雪)”이라하며 모두들 감탄했다고 한다.
이때부터 오효원은 시서를 바탕으로 권력층을 찾아다니며 감옥에 있는 아버지를 구해내기 위해 애걸복걸하고 다녔다.
3. 여류문사로서의 진출과 신여성 전환기
소파 오효원이 서울에서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애걸하고 다니던 중에 그의 서예와 시에 대한 자질이 드러나게 되었다. 당시 궁내대신이었던 金宗漢(1844~1932)은 오효원 뛰어난 시재와 효성에 감동하여 부녀지간의 의를 맺었다.
<呈遊霞金判書> 宗漢 時宮內大臣
<유하 김판서에게 올리다>. 김종한 당시 궁내대신이다.
習烏纔飛却怕風 날기를 배우는 까마귀 도리어 바람이 두려워
嚶嚶啼向禁籠中 앵앵 울면서 새장 속으로 향하네
時來若得開籠手 때마침 새장을 열어준 손길을 얻었으니
因果應生四世公 인과는 응당 사대를 추존하는 덕을 이루리라
이 시의 말미에 “遂結父女之誼(마침내 부녀의 의를 맺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14세의 소녀가 혈혈단신으로 상경하여 시서를 매개로 거물들과 교유하며 정착하는 기적 같은 삶이 전개된다. 감옥에 갇힌 아버지를 구하려고 맨몸으로 상경하여 애걸하고 다니는 시골 소녀의 애틋한 사연, 낯선 한양에서의 두려움과 고독감, 도움이 절실하여 앵앵 울면서 낯선 어른을 따라 가야만 하는 남루한 소녀의 공포감과 기대감이 동시에 나타난다. 이후 소파 오효원은 김종한의 도움으로 살았던 것 같다. 김종한은 천재소녀 시인 오효원을 데리고 구로회 등 여러 시회를 두루 다녔다. 뜻밖의 일로 새로운 삶의 전환기를 맞은 오효원은 유명인사들의 도움으로 자기의 삶을 개척해 나간다. 그가 가진 것은 시 짓는 재주와 서화의 능력 뿐 이었다.
오효원의 명성은 순식간에 조선의 유명인사들에게 퍼져나가 국내의 고관대작들과 교류가 이루어지면서 졸지에 유명여류문사가 되었다.
<贈希齋李判書> 裕寅, 時務警使
희재 이판서께 올리다 이유인은 당시에 경무사였다.
人間始識貴黃金 인간 세상에 비로소 황금 귀한 줄 알았으니
只恨如今不孝忱 단지 지금의 불효가 너무나 한이 맺히네
稚娥計脫前生債 어린 계집이 전생의 빚을 갚고자하니
活佛應存普濟心 활불께서 보시하여 구제의 마음을 베푸시네
오효원은 공금횡령을 한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며 돈이 귀한 줄을 절실히 깨달았다. 여하튼 오효원은 근대판 심청이였다. 이때 그의 효성은 공양미 삼백석을 구하는 심청의 심정이었을 것이다. 이때 금전적으로 도와준 활불은 李裕寅인 것 같다. 희재 이유인은 당시에 경무관이었다. 14세의 어린 여류 문사는 이들과 시서로 어울리며 어려운 일제 식민지 시대의 고개를 힘들게 넘고 있었다. 어느덧 그는 이들로부터 개화기 근대의 정황을 얻어들을 수 있었고 신여성으로서 조금씩 성장하고 있었다.
<和呈遂堂李承旨> 二首 種元 結師弟之誼
수당 이승지에게 화답하여 올리다. 이름은 종원이며 사제의 의를 맺다.
桂山高處接芳隣 계산 높은 곳에 아름다운집들이 이어져 있고
無路從容奉晤頻 길이 없어 조용한데 자주 이야기를 나누네
旅館經春多草草 여관에서 봄을 보내고 나니 근심만 많아지고
不如今作早歸人 금방 일보고 일찍 돌아가는 사람들이 너무 부럽네
迢遞鄕山入夢驚 멀리 고향산천 번갈아 꿈에 드니 놀라고
望中星月意中橫 달과 별을 바라보니 마음은 어지럽네
蘭閨永夜眠難穩 규방의 긴긴 밤 평온한 잠 이루기 어렵고
臥聽溪鐘促漏聲 누워서 개울물 소리 들으며 시간을 제촉하네
이시의 제목에서 오효원은 이종원과 사제지간의 의를 맺었다는 것이 증명된다. 이종원은 파주목사 성균관장 등을 엮임 했던 관료로서 신체호의 스승이라고도 전한다. 오효원은 승지였던 이종원의 시에 화답하고 있다. 소파는 고관대작들과 어울리며 이렇게 여류문사로 성장해 가고 있었다. 소파는 이 당시 계동 근처 여관에서 지내고 있었다. 여관에서 오래 묶고 있자니 일을 금방처리하고 일찍 돌아가는 사람들이 부럽다. 소파는 일이 오래도록 해결되지 않고 아버지는 언제 풀려날지 여관방에서 근심 때문에 평온한 잠을 자지 못하는 현실을 시로서 형상화 하고 있다.
<殘春日赴三淸洞九老詩會敢以女士叅末焉>
쇠잔한 봄날 삼청동 구로시회에 달려가 감히 여사로써 말석에 참가하다.
時 海士金判書聲根 遊霞金判書宗漢 桂庭閔輔國泳煥 東農金判書嘉鎭 琴來閔輔國泳韶 石雲朴判書箕陽 李判書乾夏 詩南閔判書丙奭 荷亭呂承旨圭亨 是爲九老 效香山會 而敢以女士參末焉
당시에 판서 해사 김성근, 판서 유하 김종한, 보국계정 민영환, 판서 동농 김가진, 보국 금래 민영소, 판서 석운 박기양, 판서 이건하, 판서 시남 민병석, 승지 하정 여규형 이 바로 구로 이다. 백거이의 향산 구로회를 본받은 것이다. 나는 여류문사로서 이 말석에 끼게 되었다.
九老仙同一座開 구로회 신선들이 한 자리에 시회를 열고
三淸水釀紫霞盃 삼청동 물에 술을 띄우고 자하 잔으로 마시네
平生只有詩人態 평생 동안 오직 시인의 태만 있었기에
不畵蛾眉顚倒來 눈썹 화장도 못하고 엎어지면서 달려왔네
여기에 참가한 명단들을 분석해 보면 대다수가 판서였고 시서로 이름난 관료들이었다. 海士 金聲根(1835~1919)은 서예에 뛰어난 면모를 보였는데, 유작으로 사공도의 「시품」 이 성균관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필체는 미남궁체이고 『근역서화징』에 글씨가 전한다. 東農 金嘉鎭(1846~1922)은 한학과 서예로 유명하였다. 독립문 현판을 썼다. 琴來 閔泳韶(1852~1917)石雲 朴箕陽(1856~1932)은 거문고와 서화에 뛰어났다. 判書 李乾夏(1835~1913)詩南 閔丙奭(1858~1940)荷亭 呂圭亨(1848~1922)은 詩文에 매우 뛰어났으며 음률에도 통했고 幾何·算數·草木·蟲魚·星曆 등의 여러 분야의 학문에도 두루 밝았다. 그래서 詩·書·文을 비롯하여 射·琴·棋·酒를 잘한다고 하여 ‘七絶’이라 불리기도 했다. 뛰어난 문장과 해박한 지식, 그리고 숱한 奇行으로 李建昌·金允植·鄭萬朝 등과 한문학사의 대미를 장식한 한학자로 문학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인물 가운데 한 사람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黃玹은 『梅泉野錄』에서 “개화 이래 外人을 따라붙어 한 발짝이라도 뒤떨어질까 걱정했으므로, 사람들이 침 뱉고 욕했다.”라고 한 대목에서 알 수 있듯이 만년에 일제에 동조한 행위가 흠으로 지적된다. 이들이 구로회 회원들이다. 김가진과 민영환을 제외하면 하나같이 친일반민족행위자들로 의심되는 자들이다. 이들은 모두 과거를 거친 조선의 구한말 명유들로서 백거이의 향산 구로회를 본떠서 삼청동 계곡에서 자주 시사를 열었다.
이 모임에 오효원도 말석에 참가하였다. 그동안 연마했던 시와 글씨로 그녀의 존재감을 과시한다. 그러나 이들을 통해 시와 서예를 연마하며 배우는 것이 더욱 많았을 것이다. 오효원은 당대 최고의 문사들과 영광되게 교류하며 여류문사로서 자질이 급속도로 향상되고 있었다. 오효원은 구로회의 한송이 꽃이었다.
<端午日赴九老會> 단오일 구로회에 나가다
一年佳節又端陽 일년 가절 단오날
鬱鬱詩愁强擧觴 시 걱정 울울 억지로 술잔돌리니
芳草樓臺名勝地 방초가득 누대는 명승지
綠楊閭巷半仙鄕 푸른 버들 속 마을은 반이 선향이네
櫻桃薦進新嘗祭 앵도 따서 천신제에 올리고
艾葉編垂舊驗方 쑥을 엮어 법식대로 드리우니
此日思親尤倍切 이런 날은 부모님 생각 더욱 간절하여
望雲千里我懷長 천리구름 바라보니 내 가슴엔 그리움만 더하네
어느 단오날 구로회가 열렸다. 오효원이 구로회에 참석할 시기는 오효원의 이팔청준 전후시기로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기 전일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최고위 관료들로서 구성된 이들은 단오날 단군에게 천신제를 올리고 그 뒤를 이어 구로회 시사를 열었던 것 같다. 여기에 앵도를 올리고 쑥을 엮어 거는 등 단군을 제사하는 묘사가 드러나는 것이 흥미롭다. 여기에서 우리 민족에 대한 자각의 싹이 트는 기운이 감지되기도 한다.
오효원은 이런 위대한 모임 속에서도 시를 주고받으며 옥에 갇혀있는 아버지 생각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득차 있었다.
<和呈桂庭閔輔國 泳煥> 계정 보국 민영환의 시에 화답하여 올리다.
詩筵一別記華容 시회에서 한 번 이별 후 그 모습 떠올라
神思悠悠惱夢中 마음에 그리워 꿈에서도 번뇌 합니다
奉讀瓊章牙頰爽 옥 같은 문장 읽노라면 마음까지 상쾌해져
如今復見大唐風 당나라 시풍을 다시 보는 듯 하옵니다.
安得無風不雨時 어찌하면 바람 자고 비 내리지 않는 때를 만나
一年長對百花枝 일 년 내내 온갖 꽃가지를 대할 수 있나요
琴書朋酒雙兼地 거문고, 책, 벗과 술까지 모두 갖춘 곳에서
願上名樓共話遲 아름다운 누대에 올라 오래도록 말씀 듣고 싶습니다.
오효원과 민영환(1861~1905)의 교유는 그 자체로서 놀라운 사건이다. 오효원은 민영환과도 구로회를 통해 교류했다. 민영환도 오효원에게 도움을 주었던 모양이다. 오효원은 감사의 표시로 화답하여 올린 시가 있다. 소파 오효원의 한양 생활은 시회에 참석하느라 바쁘게 움직였다. 그는 고관대작들이 여는 시회에 참석하느라 분주히 움직였다. 그의 시에는 이들의 시회가 묘사되고 있다. 金嘉鎭 <東農金判書宅詩會>, 李完用, <一堂李判書宅詩會> 二首, 민영익 동생, 閔永璇, <和呈樊山閔判書>, 尹德榮, <和呈碧樹尹判書>, 閔丙奭 二首 <和呈詩南閔判書>. 朴箕陽, <和呈石雲朴判書> 結父女之誼, 李鐘元<和呈遂堂尹判書> 등에게 감사의 시를 지어 올렸다. 오효원은 이 모든 사람들과 교류하며 많은 도움을 받은 것 같다.
그는 한양에서 고관대작들과 시와 서예로 어울리는 생활에 젖어 살면서 아버지가 횡령한 돈을 모으느라 여념이 없었다. 오효원 드디어 아버지의 일을 해결하였다.
<事濟後感吟> 일이 해결된 후에 감회를 읊다.
吾家塵債政非輕 우리 집 쌓인 빚 그 정황이 가볍지 않으니
深入圓扉隱姓名 감옥 깊숙이 들어 앉아 이름도 감추었다오
賴有長安多活佛 한양의 많은 활불들의 도움을 받아
愁雲㤼雨一時晴 근심과 두려움의 먹구름 일시에 개였다오
오효원은 그동안 모은 돈으로 아버지를 감옥에서 석방시켰다. 아버지 때문에 쌓인 빚이 상당히 많았던 모양이다. 그의 아버지 본명은 오도언인데 오시선으로 바꾸었다. 그의 아버지 오시선은 서문에서 이 일을 상기하며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때부터 고관대작의 문하에 출입하였는데, 시와 서화가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고 각국 대사들에게 까지 알려져서 그 현명함을 칭송하고 부러워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불과 10개월 만에 도움을 주려는 의연금이 대략 수 만원이나 모여서 공금을 모두 납부하고 우리 집안이 온전할 수 있었다. 나는 이에 德媛이라는 이름을 孝媛으로 바꾸었다.”라고 하였다.
이 기록으로 미루어 보면 초명은 德媛이라는 이름을 뒤에 孝媛으로 바군 것이 발견된다. 또 아버지의 벌과금을 모두 납부한 것이 불과 10개월이라고 했다. 오효원의 나이 14세에 아버지를 구원하기 위해 한양에 올라온 것을 감안해 본다면 거의 15세 이전에 벌어진 일이다.
오효원은 <자서>에서 “나는 자라면서 집안의 재앙을 만나서 떠돌이 생활로 동분서주하며 생활하느라 시구를 찾고 글귀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거친 풍파를 겪고 비바람에 시달리면서 내 한 몸 추스릴 수도 없이 닥치는 대로 시와 서예로 요행히 생계를 해결하는 가운데 시인 문사들과 사귀면서 갈고 닦을 수 있어서 미미하게나 이름이 났다.” 라고 하였다.
오효원은 시와 서예로 요행히 생계를 이었으며 고관대작들의 유명한 문사들과 교유하면서 시와 서예를 갈고 닦을 수 있어서 유명해 졌다고 실토하고 있다.
소파 오효원은 14세에 상경하여 고관대작들과 詩書로 어울린 것이 어느덧 세월이 흘러 20세가 되었다. 소파 오효원의 이 기구한 인생 7년은 어쩌면 그가 조선 최고의 환경에서 시서를 공부하고 근대식 교양교육을 이수한 최고의 수업을 들었던 시기였다.
오효원의 호 ‘小坡’는 동방의 작은 여자 소동파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또, ‘隋鷗’란 호에서는 풍류객들을 따라 노니는 갈매기란 뜻으로 어릴 적부터 유랑하는 객기가 있었던 것 같다. 소파는 고관대작들과 어울리며 여류문사로 성장하면서 문자향서권기로 살아온 여류문사의 이체였다. 소파 오효원은 어느덧 근대의 신여성으로 성장하여 유명한 여류문사가 되어 있었다.
4. 민족에 대한 자아각성과 저항의식의 맹아
1) 일본 유학과 근대여성의 계몽의식.
소파 오효원은 빚을 모두 청산하고 형편도 나아지자 자기에게 도움을 주었던 분들이 친일파도 있고, 항일한 사람도 있고, 민영환처럼 자결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기구한 운명에 처하여 삶을 연명하느라 그때그때 적소에 따라 그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 고관대작들이 학교를 설립하는 것을 보고 또, 암울한 조선을 보며 계몽을 자각하게 된다. 소파 오효원이 여학교의 설립에 뜻을 보이자 이들은 그의 뜻을 가상히 여겨 도움을 주선한다.
<爲明信女學校創立事入東京 三首> 戊申 1908
<명신학교 창립을 위한 일로 동경으로 들어가며, 3수>
其三 <그 셋째 수>
伊藤春畝公 춘무 이등박문 공이
勸我入東京 나에게 동경에 가길 권했다
聞有揮毫會 그곳에 휘호대회 있다고 하며
親書遠寄名 친히 써서 멀리 이름을 부쳐주시었네
春畝는 이등박문의 호이다. 동경에 서예 휘호대회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한 번 참가해 보라고 하며 직접 오효원의 이름을 써서 멀리 일본에다가 부쳤다. 이때가 戊申年(1908)이었다. 을미사변, 을사보호조약 등으로 조선의 국권침탈의 원흉이었던 이토오히로부미의 도움을 받았다. 14세에 상경하여 애국계몽기를 정신없이 살아온 그녀가 친일파를 의식할 겨를도 없이 20세가 되었다. 소파 오효원은 닥치는 대로 살면서 행인지 불행인지 국내의 거물들과 교류해 온지가 6년이 넘어가고 있었던 시점이다. 그는 이제 당시 일본의 최고 권위자 이등박문과도 교류가 이루어질 정도로 거물급 여류문사로 성장했다. 그는 이등박문의 추천으로 여학교 설립의 꿈을 안고 일본으로 가게 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는 갓 스물을 넘어가고 있었다.
그의 일본에서 모금활동은 적극적으로 전개 되었다. 그의 수양아버지 김종한은 1908년 2월 伊藤博文 후원으로 조직된 대동학회의 회원이기도 하였다. 오효원의 서권기는 어릴 적부터 서법에 뛰어나 사람들로부터 신이내린 솜씨라는 평을 받았다.
그의 아버지 오시선은 서문에서 “나는 무신년 봄 20살이 되자 혼처를 구하고 있었는데 효원이 말하기를 ‘의당 아버님 말씀을 받들어야 하지만 동경에 유학하여 그곳 풍토와 인물을 두루 둘러보고 또 북쪽의 중국으로 가서 천하의 기문과 장관을 전부 살핀다면 진량과 자장이 될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출가하여도 늦지 않을 것이니 이를 헤아려 주십시오’ 라고 하였다. 나는 그 뜻을 장하게 여기고 허락해 주었다.”라고 술회하고 있다.
동경에 도착한 오효원은 황족부인교육회를 찾아가 협조를 구하고 신문사에 글을 부치는 등 여학교 설립을 위해 고군분투하였다.
<抵東京呈皇族夫人敎育會>
동경황족부인교육회에 올리다.
先進東洋敎育開 선진국 동양에선 교육이 개방되어
夫人學院特崔嵬 부인들 학교가 특별하게 보이네
不吾遐棄同情否 우리도 머잖아 같은 정황 될 터이니
願借文明載筆來원컨대 문명을 빌려 붓으로 실어 오리라
이 시는 오효원이 여성들도 교육받을 권리가 있다고 외치며 우리나라 여성들의 학교를 세우려고 그 기금을 마련하러 간 일본이었다. 일본의 선진 교육제도를 관찰하며 특별하게 들어오는 여학교. 머지않아 우리 조선에도 오래관습 버리고 여자들도 신식교육을 받는 나라가 되리라고 판단하며 일본의 교육제도를 베껴서 오겠다는 포부이다. 이 시에서는 조선의 무지한 여성교육을 위하여 계몽하려는 의지가 돋보인다.
抵廣島縣贈藝備新聞社 광도(히로시마)에 도착해서 예비(게이비)신문사에게 주다.
吾邦昧敎育 우리나라는 교육에 어두워
女子未開明 여자는 아직 개명되지 못했다오
基金無豫算 기금도 예산도 없이
設校始經營 조선에 처음 학교를 세워 경영하려고
遠我今來渡 저는 지금 멀리 바다건너 왔으니
冀公好贊成 공들께서 쾌히 도와주시길 바랍니다
形勢依脣齒 지금 우리의 형세는 이와 입술 같고
湛和似弟兄 즐겨 어울림은 형제와 같으니
願蒙一助惠 한 번 도움과 은혜입길 바라니
敢露寸心誠 감히 작은 정성을 드러내 주세요
前頭發達效 앞에서 본받아 발달시킬 것을
擧筆指爲盟 손가락대신 붓을 들어 약속합니다
오효원은 우리나라가 교육에 어두워 여성들이 아직 개명되지 못했다고 인식했다. 이것은 여성계몽에 대한자각으로 보이며, 봉건왕조시대 조선에서 근대로 탈피하려는 선진적인 세계관으로도 볼 수 있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표현은 현실인식에 문제가 다분해 보인다. 조선과 일본을 ‘脣齒’와 ‘弟兄’로 표현하는 것에서는 반민족적 정서가 발견되기도 한다. 한 면으로 보면 소파 오효원의 여성교육의 계몽의식에 상당한 문제가 있음이 발견된다. 그러나 그의 여학교 설립의 꿈이 얼마나 절실하였던 가를 보여주기도 한다.
훗날 중국인 桐城 사람 吳芝瑛은 “일찍이 나라가 쇠약하고 민족의 힘이 없어 여자들이 배우지 못하여 사람 수만 채우고 마땅한 직분을 얻지 못하여 동포의 절반을 속절없이 잃는다고 하였다. 이에 미약한 힘으로 스스로 분발하여 20살에 바다를 건너 일본의 수도로 가서 학업을 익히면서 잠시 겨를이 생길 때마다 글씨를 써서 여학교 건설 모금을 위한 서예전을 열었다. 일 년 만에 몇 천원이나 되는 돈을 모으고는 귀국하여 여학교를 세우고 명신학교라고 이름 하였으니 이것이 한국여학교의 모태가 되었다, 마침내 이곳에서 교편을 잡고 영재들을 교육한 지 4년이나 되었다고 한다.” 라고 하였다.소파의 일본에서 모금 방법은 찬조와 서예작품을 팔아서 돈을 모으는 것이었다.
1909(융희 3)년 22세 때 東京에 있던 한국공사대리 申海永과 약혼했으나 혼인 직전 신해영이 죽자 고국으로 돌아와 여학교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다. 이시기에 연민의 정을 토로한 시들이 많았다. 그는 이때에 기독교에 감화된 것 같다.
<入耶蘇敎受洗禮> 二首
스스로 예수교에 들어가 세례를 받다. 두 수
自入耶蘇敎 스스로 예수교에 들어가
恭承洗禮行 공손히 받들고 세례를 행했네
粗知眞理在 진리가 있음을 거칠게나마 알았으니
從心信一生 일생동안 마음으로 믿고 따르리라
遏欲存天理 인욕을 막고 천리를 보존하는 것
曾知孔孟書 일찍이 공맹의 책에서 알았노라
細究新舊約 신구약성서를 세밀히 궁구하여 보니
不是別鋪舒 별다른 이치를 펴는 것이 아니로다
오효원은 기독교에 들어가 새로운 서구 문물에 접한다. 그러나 그는 공맹으로 다져진 몸으로 그 바탕위에서 서구를 의식하게 된다. 오효원의 문명의식은 점점더 성장되어 갔다. 오효원은 곳곳에 기독교 논리를 전파하며 교회를 세우는 일에도 많이 기여했던 것 같다.이능화가 지은 『조선해어화사』에 이시가 소개되고 있는데 그 제목이 <入敎受洗禮 從申公平生勸諭>로 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신해영의 권유로 기독교에 다니게 되었던 것이 맞을 것 같다.
<聞泰西戰報有感>
<서방의 전쟁소식을 듣고 느낌이 있어서>
西電蒼黃日夜斜 서방의 전쟁소식 번갈아 날아드니
全歐大勢可驚多 구라파 대세가 놀랄 만 하구나
自甘就死忘身命 죽음을 각오하고 목숨 잃는 것 달게 여기니
反愧求生沒國家 삶을 구하여 나라 잃은 것 도리어 부끄럽네
此戰未看前代鑑 이번 전쟁 전대에 볼 수 없었으니
何邦先唱後庭花 어느 나라가 먼저 후정화를 부를는지
孫吳古調今休說 손오시대 옛 병법을 지금 논하지 말라
雲水飛潛蔑以加 구름위로 날고 물속에 잠기니 이보다 더할 수 없다오.
이 시는 한일합방이후 일제강점기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소식이 서방에서 전파를 타고 밤낮없이 황급하게 날아든다. 제1차 세계 대전은 1914년 7월 28일부터 1918년 11월 11일까지 일어난 유럽을 중심으로 한 세계 대전이다. 1914년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하며 시작되었고, 1918년 독일의 항복으로 끝이 났다.
목숨을 초개같이 여기고 용감하게 싸우는 전쟁소식을 접하고 우리 조국을 돌아본다. 남들은 목숨을 버려가며 조국을 위해 전쟁하건만 우리나라는 왜 이렇게 한 번 싸워보지도 못하고 조국을 빼앗겼는가? 목숨을 구차하게 연명하려 나라 잃은 것을 도리어 부끄럽게 여긴다는 감회다. 오효원은 한일합방이후 유럽의 전선 소식에 조국을 잃은 슬픔과 민족에 대한 현실을 자각하고 있었다.
구름위로 나는 것은 전투기이고 물속에 잠기는 것은 잠수함이다. 오효원은 이런 신문물과 국제 정세를 이들의 시회를 통하여 알았을 것이다. 이 시는 1914년경에 지어진 것 같다. 이 시에서는 조국과 민족에 대한 자아의 각성과 강개함이 엿보인다.
<無題>
競爭榮辱各云奇 경쟁과 영욕이 각각 이상하다 말하면서
世事蒼黃莫說宜 창황한 세상일 당연하다고 말하지 말라
自恨此生難化蝶 이생에 나비 되지 못해 스스로 한스러워하며
只消長夏更看棋 다만 긴 여름 보내며 다시 또 바둑만 바라보네
安分知機眞吉卜 편안할 때 위기를 아는 것 진실로 길하리니
謹身修養是良醫 근신과 수양이 훌륭한 의사라네
顧逢治化文明國 잘 다스려진 문명의 나라를 돌아보면서
使我心神有一時 나의 심신으로 하여금 한 때가 있게 하리라
경쟁과 영욕에 목숨을 거는 창황한 세상사를 당연하게 말하지 말라며 한탄조로 조국의 현실에 대해 일침을 가하고 있다. 죽지 못해 사는 세상을 나비가 되지 못한 한으로 표현했다. 오효원의 시에는 나비라는 시어가 자주 등장하는데 이것은 삶과 죽음의 문제이다. 무엇인가를 위해 적극적으로 결단하지 못하고 긴긴 여름날 바둑 두며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는 것을 탄식하고 있다. 편안할 때 위기를 대비하는 것 진실로 훌륭한 계책인데 그러지 못했으니 근신하고 수양하는 것이 가장 좋은 의사와 같다는 것은 조국이 국권을 상실한 아픔을 뼈아프게 반성하고 후회하는 것이며 동시에 아마도 위정자들을 향해 비판을 가하고 있는 듯하다. 문명의 나라를 만나서 나의 심신으로 하여금 한 때가 있게 하겠다는 것은 애국계몽을 위해 희생하겠다는 강개함이 넘친다. 1910년 한일 합방이후 오효원은 민족에 대한 자각과 문명의 나라가 되기를 바라는 계몽의식을 자각하며 아프게 토로하고 있는 것이 발견된다.
2) 중국 외유에 드러난 민족에 대한 자아각성과 저항의식의 맹아
오효원은 28세에(1916) 중국으로 들어갔다. 1910년 한일합방 이전과 이후의 오효원의 삶은 판이하게 달라진다. 조선이 망국을 고하고 나라를 잃은 설움은 여류 지식인에게도 아프게 다가왔다. 오효원은 개성과 평양을 거쳐, 압록강을 건너, 여순 심양을 거쳐 중국 상해로 들어갔던 것 같다. 그는 이시기 개성의 선죽교와 평양의 기자묘, 연광정을 둘러보며 느낀 감회를 시로서 형상화 하고 있다. 이 시들 속에 민족에 대한 자아각성과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의 맹아가 드러난다.
過善竹橋有感
선죽교를 지나며 느낌
大節孤忠日月爭 큰 절개와 외로운 충심은 일월과 다투고
鷄林惟一鄭先生 고려 땅에는 오직 정몽주 선생뿐이었네
可憐善竹橋邊水 가련토다 선죽교 밑을 흐르는 강물이
洗盡千年血色明 천년동안 씻어낸 선명한 핏자국
소파는 개성에 도착하여 선죽교를 지나며 충신 정몽주의 절개와 지조를 상상한다. 그때 흘린 충신의 피를 생각한다. 소파가 표현한 피의 이미지가 의미 깊게 다가온다. 소파는 중국 상해로 향하면서 우리 민족에 대한 자아각성과 일제강점기의 점점 더 거세지는 일본의 압제 속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열망이 무겁게 일어나고 있었다. 개성에 도착하여 옛 유적들을 유람하면서 지은 시에서는 민족에 대한 자아각성이 물신 일어나고 있는 것이 발견된다.
松京懷古 三首
송경회고 삼수
滿月臺前荒草合 만월대 앞에는 잡초가 우거졌고
數聲哀笛咽斜陽 몇 가락 슬픈 피리소리 석양에 울부짖네
忠臣碧血腥秋雨 충신의 푸른 피비린 내 가을비에 일어나니
長使行人暗斷腸 길이 나그네로 하여금 몰래 애간장을 끊게하네
소파는 만월대를 둘러보며 민족에 대한 자아각성이 심각하게 일어나고 있는 정황이 포착된다. 소파는 개성을 회고하며 떠오르는 회고의 정을 시로 형상화 했다. 가을비에 여말 선초의 충신들을 생각하며 피비린내 속에 떠올려지는 충신들의 모습을 하나 둘 떠올리며 소파의 일제강점기에 대한 저항의식이 새롭게 싹터 오른다. 소파는 나그네로 하여금 애간장을 끊게 한다고 토로하고 있다. 소파는 왜 애간장을 끊는 듯한 아픔을 느꼈을까? 소파는 일제강점기 지식인으로 자처하며 비록 여성의 몸이지만 조국의 독립을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선비의 책무 같은 것을 느낀다. 소파는 왜 중국 상하이로 향하는 것일까. 중국 상하이에는 독립운동이 한창 전개되고 있는 시기이기도 한 점을 감안한다면 소파가 중국 상하이로 들어가면서 떠 울리는 시상들이 민족에 대한 자아각성과 충신들이 흘린 피의 이미지와 융합되면서 독립투사의 지사적 위상이 감지된다.
王氣迷茫野鳥啼 왕도의 기운은 아득하고 들판엔 새우는 소리
古都如夢草萋萋 옛 도읍지 꿈결인 듯 잡초만 무성하구나
興亡自是天人事 흥망성쇠는 본디 하늘에 달린 것
當日繁華逝水西 당시의 번화함이 강물따라 서쪽으로 흘러갔네
立馬秋風一放歌 말을 멈추고 가을바람에 목 놓아 노래 부르니
竹橋流水尙餘波 선죽교 흐르는 물엔 아직도 그때의 물결이 일어나네
五百年聞華麗地 오백년 고려의 화려했던 도읍에
至今惟有白雲過 지금은 부질없이 흰 구름만 떠도네
소파의 개성 회고의 시상에서 묘하게 떠오르는 망국의 한과 동일시되는 옛 고려에 대한 회고의 정이 새롭게 다가온다. 그 이전의 시와는 완전히 다르게 중국으로 가는 도중 우리 국토에 대한 역사 기행시는 온통 민족에 대한 자아각성으로 가득 차 있다.
謁平壤箕子陵
평양 기자묘를 배알하다
王業千年虛地歸 천년 왕업이 헛된 곳으로 돌아가고
牧丹浮碧掛殘暉 모란봉 부벽루만 석양에 걸렸구나
若無箕聖八條設 만약 기자가 팔조법금을 설치하지 않았다면
我們安逃左衽衣 우리들 어찌 옷고름을 좌로 매지 않았으랴
소파는 평양에 이르러 기자묘에 배알하였다. 유구한 우리 민족사의 정통성을 다시금 느끼며 기자 조선설을 찬양하고 있다. 지금은 그 유구한 역사를 가진 천년 왕업이 헛된 땅으로 돌아 갔다고 탄식하고 있다. 헛된 곳은 바로 일본을 지칭 한다. 지금은 일본 세상이 되어버린 평양에서 회고의 정을 토로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소파는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민족에 대한 자아의 각성과 일본에 대한 저항의식이 싹트고 있는 것이 발견된다.
渡鴨綠江憶壬辰古事
압록강을 건너며 임진왜란의 고사를 떠올리다
統亭駐驆泣呱呱 통군정에 어가 머물며 통곡하였고
行在君臣形影孤 행재소 군신들 몸은 지치고 외로운 신세
兵從天下揚威武 병사들 명나라 도움으로 용맹함을 떨치어
日月重懸解炭塗 드디어 해와 달이 다시 뜨고 도탄에서 풀렸네
소파 오효원은 중국 상해로 가기 위해 육로로 개성, 평양, 의주를 거쳐 압록강을 건너면서 그 옛날 임진왜란 시절 표류하던 선조의 어가를 떠올리고 있다. 통군정에 머물며 그 당시 신하들이 임금을 호종하며 통곡하던 일을 떠올린다. 그 암울하던 시절 명나라 구원병들이 이르자 용기를 얻어 위엄을 떨치며 일본의 침략에서 벗어난 일을 상기하고 있다. 소파는 왜 하필 임진왜란을 떠올렸을까? 일제강점기 지금 소파가 중국 상해로 가는 행차의 목적과 닮은 형국이다. 소파는 일제강점기에서 독립을 희망하며 민족에 대한 자아각성과 일본에 대한 저항의식이 싹터 오르는 것이 점점 거세지고 있다.
瀋陽大西關外吊三學士
심양 대서관 밖에서 삼학사를 조문하다
我來此地獨徘徊 내 이곳에 찾아와 홀로 배회하며
淚灑忠魂招不回 눈물을 뿌리며 충혼을 불러도 돌아오지 않네
國雖偏小人偏大 나라는 비록 작아도 인물들은 위대하니
酹酒爲公薦一盃 술을 부어 공을 위해 한잔 술 올린다오
소파는 압록강을 건너 심양의 대서관 밖에서 삼학사를 떠 올린다. 1636 병자호란 때 청나라와 화의를 반대하고 결사 항전을 주장하다가 인조가 항복한 뒤 중국 심양으로 끌려가 참형당한 홍익한·윤집·오달제 등 세 명의 학사를 가리킨다. 소파는 이 아픈 삼학사의 역사의 한 장면과 지금 자기가 중국으로 들어가는 심정과 동일시시킨다. 조국의 국권회복과 조국독립을 위하여 투신할 것을 맹서하려는 듯 삼학사에게 올리는 술잔 속에는 비분강개함이 일어나고 있다.
<春日過天津韓國公使館舊墟>
봄날 천진 한국공사관 옛터를 지나며
利權幷峙憶當時 이권이 나란히 대치하던 그때를 기억하듯
惟有舊墟草木連 오직 옛터에는 초목만이 무성 하구나
未必悽然過恨事 지나간 한스런 일 슬퍼할 것만 아니니
天將風雨月將圓 하늘에 비바람 몰아쳐도 둥근 달은 반드시 떠오른다
천진을 지나면서 대한제국의 공사관 옛터를 방문하고 지은 시이다. 1905년 이토오히로부미와 을사오적만이 참석한 회의에서 강제로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한국정부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한국의 내정을 장악하려는 목적으로 무력에 의해 불법적으로 이루어졌다.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국내의 반일 열기는 고조되어 각종 반대운동에 일어났고, 국권을 회복하려는 항일의병항쟁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다. 그때 외교권을 박탈되었던 천진에 있었던 한국 공사관 터를 지나가며 그 당시 외교권 박탈에 항의하며 저항하던 사건들을 회상하고 있다. 슬프고 한스러웠던 지난 과거사가 반드시 슬픈 일만이 아니라는 부분 부정은 무엇인가 희망을 불어 넣는 것이다. 하늘에 아무리 먹구름이 끼고 비바람이 몰아쳐도 둥근 달은 떠오르게 되어 있다는 이치를 빌어 조국이 반드시 국권을 회복할 것이라는 예언을 하고 있다. 오효원은 천진의 옛 한국공관을 지나며 비로소 나라 없는 설움을 서럽게 깨닫는다.
<遊上海>
澤國山河到處佳 수국 산하 도처가 아름다우니
文明上海一層加 문명 세상 상해는 더욱 아름답네
歐美新規移此土 서구의 새로운 문물들 이곳으로 옮겨오니
畵圖世界屋叅差 즐비한 건물들 한편의 그림같구나
오효원은 28세에(1916) 중국 상해로 들어갔다. 오효원은 왜 중국 상하이로 갔을까? 상하이는 이미 국제항으로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구로회 회원 중에 소파와 사제의 결의를 맺었던 동농 김가진은 비밀결사인 大同團의 총재 및 고문으로 추대되어 상해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하고 있었다. 1920년 일본에 대한 포고문과 통고문을 배포하고 이후에 체포될 때까지 그는 상하이에 있었다. 이 기간은 오효원의 중국 여행과 기간이 겹친다. 아마도 이와 관련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의 시에 나타나는 지명을 따라가다가 보면 여순, 심양, 봉황성, 만리장성, 천진, 곡부, 등을 지나며 지은 시들이 나타난다. 이들 시에서는 옛 사신들이 갔던 길을 떠올리며 시상에 젖기도 한다. 오효원의 민족의식에 대한 각성은 중국으로 가면서부터 확연히 달라진다.
<白日靑天赤脚翩> 청천백일기 맨발로 휘날리니
聲光赫赫萬千年 그 명성과 영광 천년만년 빛나리라
指來直北張胡走 직례 북쪽으로 올라가니 장씨 오랑케 달아나고
摩向山東陣角圓 산동을 향하니 진각이 둥글어 지네
捲倒帝王龍鳳格 제왕을 타도하니 용과 봉황이 이르고
表旌民國血花蘚 중화민국 깃발을 올리니 핏자국이 선명하네
願言輸得長風力 바라건데 장풍의 힘을 실어 날라
打盡乾坤一色然 천지를 통일하여 한 빛으로 나아가리라
청천백일기는 청천백일만지홍기로 대만의 국기이다. 이것은 중국 국민당의 당기(黨旗)인 청천백일기(靑天白日旗)에서 비롯되었다. 손문이 이끄는 국민당이 국공합작으로 군벌을 소탕하기 위한 북벌이 1926년부터 1928년까지 이루어진다. 깃발에 묻은 선명한 핏자국 청천백일기 맨발로 휘날리는 중국의 혁명투쟁을 바라보며 오효원은 중국에서 일어나는 개화기의 새로운 변화의 바람을 감지한다. 이것을 목도하며 오효원은 일본의 강압에 허덕이는 조국과 민족에 대해 투혼을 불사르려는 각성을 하게 되는 것 같다.
중국을 두루 여행하며 지은 그의 기행시들이 비분강개한 어조로 지어지고 있는 것이 흥미롭게 발견된다. 오효원이 중국에서 역사적인 유적지를 유람하며 지은 <讀出師表>, <赤壁懷古>,<過泪羅弔屈大夫> 등 이들 시 속에서 전쟁과 애국의 주제의식이 새롭게 느껴진다. 오효원의 중국에서 지은 기행시들 따라가다가 보면 그가 중국에서 활동한 내력들이 고스란히 떠오른다. 중국 문인들과 교유한 시, 중국의 역사와 인물에 대해 평가한 시 등에서도 깊은 역사 인식과 현실 인식을 담고 있다. 이 시들 속에서 민족에 대한 자아각성과 자주독립에 대한 투사의 혼이 싹터 오르는 것이 느껴진다.
당시 상해는 중국과의 교역을 위해 각국의 공관들이 즐비하고 국제적인 교류의 중심지로 대도시의 분위기를 자아내던 곳이다. 오효원은 상해에서 특유의 친화력과 사교성으로 다양한 사람을 만나 교류를 나누었다. 서예에도 능하여 시서화 대회의 간사를 맡았고 신신보사라는 신문사에서 일을 하기도 하였다. 그가 중국에서 교유한 중요 인물들을 나열해 보면 당시 최고의 학자 였던 康有爲, 粱啓超, 唐紹儀, 袁世凱의 아들 袁克文 3형제 를 위시해서 廉泉, 吳芝英, 呂碧城(1883~1943) 등 중국의 유명인사들과 의를 맺었다고 한다. 여벽성은 중국여성교육에 앞장선 여권 운동가로 유명한 여성이었다.
오효원은 중국에서 양계초와 교유하였으며 자기 시집의 서문을 받기도 하였다. 그는 梁啓超(1873~1929)가 쓴 ‘중국시계혁명’에 대해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으로 판단된다.
“나는 비록 시를 잘 짓지는 못하지만 시를 논하기는 좋아하여 시의 경계는 천여 년 이래로 앵무새 같은 명사들에 의하여 모두 차지되어왔다고 여겼었다. 비록 아름다운 문장이나 아름다운 문구가 있다 하여도 한 번 그것을 읽어보면 마치 아무개의 시집 중에서 일찍이 보았던 같은 것이 가장 한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므로 오늘 시를 짓지 않는다면 그만이지만 만약 시를 짓는다면 반드시 詩界의 콜럼부스나 마젤란이 되어 유럽의 地力은 이미 다하였으니 새로운 땅을 아메리카와 태평양 연안에서 구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처럼 하여야만 한다. 시계의 콜롬부스나 마젤란이 되고자 한다면 다음 세가지 장점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첫째는 新意境이요 둘째는 새로운 어구이며 그리고 또 고인의 풍격에다가 그것을 담아야만 한다. 그런 뒤에야 그의 시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목성이나 금성의 동물을 美洲에 옮겨다가 놓는 것 같아서 아름답고 특이하기는 하더라도 그것들이 서로 어울리지 않음을 어찌하겠는가? 만약 이 세 가지를 구비하기만 한다면 곧 20세기 중국의 詩王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오효원은 양계초의 “시계의 콜롬부스나 마젤란이 되고자 한다면 다음 세 가지 장점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첫째는 新意境이요 둘째는 새로운 어구이며 그리고 또 고인의 풍격에다가 그것을 담아야만 한다.”라는 시론에 적극적으로 동의하며 그의 시에 적용시켰다.
그의 시집 <자서>에서 시에 대해 말하기란 그 얼마나 어려운가? 『시경』 이래로 본질보다 꾸밈을 중하게 여겨서 시법이 거의 사라졌는데, 晋나라 때는 우아함을 얻었고, 당나라 때는 부유함을 얻었으며 송나라 때는 기묘함을 얻었다. 시를 배우는 자들이 으레 三代를 추숭하면서 간혹 화려한 재주를 드러내 보이거나 자질구레한 시법을 잃기도 하였다. 라고 하였다. 또, “아! 시가 어찌 모방하여 지을 수 있는 것인가? 대개 인문이 같지 않고 풍속 또한 자주 바뀌어서 사람들의 감정도 아침저녁으로 달라지는 법이다. 하물며 사람은 감정에 민감한 것이어늘 지금 사람이 옛 사람의 감정을 훔치고 본떠서 구멍 속의 벌처럼 할 수 있는 것이겠는가?” 라고 하여 法古創新의 시학과 창의성과 상상력을 강조하였다. 오효원은 아! 시가 어찌 공교한 것이겠는가? 아마도 그 사람의 조화일 것인져!(嗚呼! 詩豈工之哉? 其人之造化也夫!)라고 하였다.
오효원은 중국을 다녀온 이후 시를 바라보는 시각에서 양계초의 중국시계혁명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것이 여기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양계초의 신사상이 구한말 일제강점기 우리 선비들에게 미친 영향은 매우 컸다. 이런 점을 감안해 본다면 오효원이 양계초를 비롯한 중국의 거물급 인사들과 교유한 것은 우리 역사에 남을 위대한 행력이었다.
일제의 강압이 거세지고 있던 시기 1918년 오효원은 중국의 외유를 끝내고 고국으로 돌아와 일제의 강압에 저항하는 시들을 짓는다. 그는 일본과 중국의 외유를 통해 저명한 인사들과 교류하며 자기의 학문과 지식을 확장하고 민족에 대한 자아각성과 일제의 강압에 대해 저항의식을 한껏 키웠다.
중국에서 외유하는 동안 지식인으로서의 의식이 확장된 오효원은 고국에 돌아와 조국 멸망의 안타까움과 비판을 담은 <漢城懷古> 3수를 지었다.
西風回首漢陽天 서풍에 머리 돌려 한양을 바라보니
今古興亡五百年 고금 흥망이 오백년 역사로다
御苑鐘聲烟暮裡 창경원 저녁 종소리 안개 속에 퍼지고
洪陵草色水流邊 홍릉의 풀빛은 강가로 흐른다
宮梢落日山烏喚 궁궐 나무 끝에는 산 까마귀 울고
城郭無人野鹿眠 성곽엔 사람 없고 들 사슴만 잠자네
惟有終南楓葉好 오직 남산의 단풍만 곱게 물들어서
却敎歸客謾留連 문득 돌아가는 나그네를 부질없이 멈추게 하네
소파 오효원은 한양을 회고하며 일제에게 망한 국가라는 참담한 회고를 하고 있다. 그의 시에 나타나는 한양은 14세에 상경하여 20세까지 살아왔던 것과는 너무나 다른 한양이다. 고금흥망이 오백년이란 말에서 망국의 한이 드러난다. 그의 회고에는 조국의 참담하고 암울한 모습이 서려있다. 御苑이란 시어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제는 1909년에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바꾸고 동물원으로 만들어 조선 왕조의 자존심을 잔인하게 짓밟았던 것을 상기하고 있다. 고종과 명성황후 민씨의 능인 홍릉의 풀색이 강으로 흘러간다는 표현에서 소파의 일제의 만행을 고발하는 울분이 느껴진다. 궁궐나무 끝에 우는 까마귀 울음소리에 망국의 음산한 기운이 감지되고 궁궐엔 사람이 없고 들 사슴만 잠을 잔다는 표현에서 아픈 회고의 정이 느껴진다.
三千錦繡百王畿 삼천리 금수강산 역대 제왕들의 터전
搖落乾坤紫槿飛 하늘과 땅에 붉은 무궁화 떨어져 흩날리네
楚國氛妖南闕暗 초국의 요괴에 남쪽 대궐 어둡더니
秦天殺氣北辰微 진나라 하늘은 살기에 북극성이 희미하네
秋風灞上黃龍去 갈바람 부는 파수 가에 황룡은 떠나갔고
落日咸陽白馬歸 함양에 해가 지려하니 백마가 돌아오네
往事茫茫無問處 지난 일 아득하여 물을 곳 없는데
空留石獬守宮闈 부질없이 해태 석상만 남아 궁을 지키고 있네
이 시에는 민족문학의 성격과 저항문학의 속성이 함의되어 있다. 이 시를 일제의 감시를 피해서 쓰기 위해 위장한 흔적이 나타난다. 두련 제1구 에서는 우리나라 삼천리 금수강산 대대로 내려오던 온갖 왕들의 터전을 강조하며 유구한 우리민족의 터전을 강조하여 민족정신을 드러내려는 작가의 모습이 드러난다, 제 2구에서는 지금은 빼앗긴 조국을 상징하여 붉은 무궁화가 떨어져 건곤에 가득하게 날린다고 표현했다. 붉은 무궁화에서 여성의 항일 투사적인 이미지가 함의되어 있다. 함련의 제3구 초나라 요괴는 일본을 초나라 요괴에 은유하고 남쪽 대궐은 우리의 궁궐을 비유하는 것 같다. 일본의 만행에 우리 대궐에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는 뜻으로 파악된다. 제 4구에서는 대를 맞추기 위해 살기 가득한 진나라 하늘이라고 표현했지만 秦天은 악랄한 일본을 지칭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북극성은 우리 조국의 방향 우리의 임금 우리의 하늘을 지칭하여 일제하에 암울한 한양의 하늘을 표현하려고 애썼다. 이렇듯 두보가 마치 당시 당나라를 비판하기 위하여 다른 진나라 한나라라고 위장하여 표현했듯 오효원은 초나라와 진나라를 운운하며 일본을 비방하여 표현한 것으로 파악된다. 경련의 제 5구에서는 灞수는 한강을 비유하고 황룡은 우리의 임금을 상징하고 있다. 제6구의 함양은 우리의 서울인 한양을 상징하고 백마는 우리나라를 구원하려는 백마탄 왕자를 상징하는 것 같다. 지난 일 아득하여 물을 곳이 없다며 탄식하는 표현에서 암울한 조선의 독립을 그려보는 듯하다, 경북궁 앞의 해태 석상만이 부질없이 궁궐을 호위하며 지키고 있다는 표현에서 우리의 독립을 위해 나서야할 애국투사들이 우리의 궁궐을 지키지 못하는 실정을 쓰라리게 바라보고 있는 듯하다.
<漢城懷古>
萬里悲秋入帝畿 만리국토에 슬픈 가을이 황제의 터전에 드니
上林花落玉階飛 상림원엔 꽃이 떨어져 옥계단에 흩날리네
煙塵南北乾坤黑 안개 먼지 자욱한 남북의 하늘은 칠흙같이 어둡고
風雨東西日月微 비바람 부는 동서쪽엔 해와 달도 희미하네
山鳥夕陽三哭去 산새는 석양에 세 번씩 곡하고 날라 가고
布衣千載一吟歸 포의의 선비는 천년에 한 번 읊고 돌아가네
愁聽歌舞宮中女 수심겹게 들리던 궁녀들의 춤과 노래 소리는
散在人間設舊闈 뿔뿔이 흩어져 사람들의 옛 대궐이야기 속에 있네
이시는 일제의 강압을 피해 민족혼과 항일애국의 정신을 표현한 애국시이다. 제1구에서 오효원은 만리라는 표현을 자주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나라 옛 고구려를 만리지국이라고 표현했던 역사의식이 함의된 표현이며 우리의 국토라는 상징이 들어있는 시어이다. 상림원은 한양의 궁궐 비원을 비유한 것이다. 상림원의 고사를 인용하여 일제의 강압 속에 있는 조선의 궁궐을 비유하여 표현한 것이다. 함련에서는 먼지와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칠흑 같은 한양의 공간을 비유하여 일제의 강압 속에 들어 있는 조선의 궁궐을 상심에 찬 회고의 정으로 표현한 것이다. 대구에서는 비바람을 일제의 만행으로 표현하여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는 해와 달도 희미하다고 표현하여 동양과 서양을 가리키는 중의법으로 표현하고 있다.
‘三哭’사람이 죽었을 때 문상하는 예로 세 번씩 곡하는 예가 있다. 여기서는 석양에 날라 가는 세도 궁궐을 향하여 세 번씩 곡하고 지나간다는 표현으로 망한 나라 궁궐의 이미지를 흥미롭게 표현하고 있다. 포의는 선비를 지칭하고 천년에 한 번 읊조리는 지조와 절개로 죽는다는 것을 일컫는 것 같다. 궁궐에서 들리는 궁녀들의 춤과 노래 소리가 수심 겹게 들리더니 지금은 그 궁녀들 뿔뿔이 흩어지고 민간의 사람들의 입에서 옛날 궁궐 이야기 속에 들어있다는 표현이 처량하게 느껴진다. 이시는 일제의 치하에 들어간 한양을 회고하며 지은 시로서 우국의 한이 녹아 있는 절창이다.
이 시는 오효원 한시의 압권이다. 시인의 가슴 속엔 늘 조국의 독립과 국권의 회복을 이루지 못하는 원망과 한이 남아 있었다.
이수원은 서문에서 “소파의 시는 七情의 감정들이 시를 읊고 노래하는 가운데 마음과 뜻을 쓸어버리고 성정을 후련하게 터놓았으며 자구와 성운의 말단적인 것에 구애받지 않았으나 형상과 체제를 두루 갖추어 스스로 일견을 이루었다. 때문에 그 시를 읽으면 문자 밖의 고결한 품격을 알 수 있으니 시인으로 추중된 것은 진실로 당연하다.”라고 했고
중국의 동성 오지영은 소파시집 서문인 <題小破女士吾君詩集>에서 소파를 “타고난 자질이 활달하여 얽매임이 없었으며 나면서부터 총명함이 빼어나 일찍부터 책을 읽고 글을 지으매 奇警하고 飄逸하였다. 용모는 어여쁘고 아름다웠지만 자질구레한 일에는 얽매이지 않았고 자신에게는 박하지만 남에게는 널리 베풀었다. 또한 말솜씨에도 뛰어나 그 거침없는 논변이 주위 사람들을 모두 놀라게 하였다. 천성이 자유로운 것을 좋아하였지만 인륜을 지킴에 있어서는 조금도 벗어나지 않았다.” 라고 서술하고 있다.
오정애는 “얽매이지 않고 호방함은 쾌히 천고의 규문을 돌파하였고, 강개하고 절규함은 맹렬하게 백년의 나약한 사내를 발로 찬 것 같다.”고 하며 오효원의 호방한 성격에 대해 언급했는데 ‘飄逸’의 시상은 호방한 성격과 관련된다.
오효원은 가난과 집안에 닥친 화로 닥치는 대로 살아오느라 구로회 회원들의 친일 반민족적 행위에 대해 자각하지 못하고 어울리며 그들의 도움을 고맙게 받았다. 그가 독립적인 생활을 영위 할 때 쯤 그는 민족이 처한 현실을 깨닫고 애국계몽으로 전환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러한 오효원에게 우리는 반민족행위의 친일로만 덮으려 할 것이 아니라 민족에 대한 자아각성과 저항의식의 맹아를 찾아내어 위대한 여류문사의 위상을 제고해야 되지 않을까 한다.
표연한 신선으로 우리나라에 許蘭雪軒이 있다면, 쟁쟁한 열녀로 중국에 鑑湖 秋謹이 있도다. 표연한 신선이면서도 세속에 머무는 사람은 그 세속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굳센 기상을 가진 열사이면서도 屈從의 삶을 살아야 하는 사람은 그 屈從에 처했을 때는 울어서 그 불만을 토로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세속을 벗어나야 되는데도 부득이하여 못 벗어난다면 그 표현하는 시어가 청절할 수밖에 없고, 屈從함에 처해서 그 불만을 다 토로하지 못한 사람은 그 표현되는 시어가 憤鬱할 수밖에 없다. 대개 그 동경하고 탄식함이 가슴에 가득차서 터져나오는 것이 길게 읊으면 시가 되어서 저절로 절주에 맞게 된다. 꾸밈과 조탁을 가하지 않고 의도하지 않아도 자신도 모르게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이다. 어찌 재주를 희롱하며 기예를 파는 무리들이 미사여구만 일삼는 따위와 같겠는가?
나의 누이 소파는 표연하고 쟁쟁한 것이 허난설헌과 감호 추연의 그 선풍과 그 열사의 기질이 합쳐져서 그 한 몸이 이루어 졌다. 그 선과 열로 속과 굴에 처했으니 그 시어가 청절하고 분울하다는 것은 모름지기 물어보지 않고도 저절로 알 수 있는 것이다. 우리 누이는 아마도 시인이 아니라 지사일 것이로다!
오춘영이 발문에서 비유한 秋瑾(1875년 11월 8일 ~ 1907년 7월 15일)은 청나라 광서제 때의 혁명가이자, 여성운동가, 시인으로 본명은 규근이다. 별칭은 鑑湖女俠. 소흥사람으로 아명은 옥고, 자는 璿卿, 호는 旦吾이다. 31세의 나이로 처형되자 여성의 몸으로 혁명가로 활동했던 추근의 처형은 당시 청나라 당국이 상상도 하지 못할 만큼의 반향을 불러왔고, 그 후 추근은 중국 혁명운동의 정신적인 지주가 되었다. 오효원은 중국의 추근에 비교되고 있는 점은 조선의 혁명운동가 내지 독립운동의 뜻이 있었다는 전제에서 가능하다. 그의 남동생 오춘영은 그의 발문에서 “우리 누이는 아마도 시인이 아니라 지사일 것이로다!” 한 점에서 오효원의 조국과 민족에 대한 자아각성과 계몽의식은 열사적인 면으로 제고되어야 할 필요성이 있어 보인다. 일제 강점기 오효원의 행적은 조선의 쟌다르크 였다.
5. 결론
이상으로 일제강점기를 살았던 여류시인 오효원의 한시에 나타난 계몽의식과 민족의식의 각성을 살펴보았다. 소파 오효원의 시를 따라가다 보면 그의 인생의 행적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오효원은 경북 의성에서 태어나 14세까지 한문을 수학했으며 특히 한시와 서예에 뛰어난 자질을 보였다. 그의 소녀시절에 지은 시들은 봉건적 유교 윤리관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분방하며 순진무구한 정감이 넘친다. 그의 시에 대한 열정은 문자향 그 자체였다. 그의 서예는 신이 내린 솜씨라는 평을 받을 정도로 서권기가 넘친다.
그는 14세 때 아버지가 공금횡령사건으로 한양에 구금되자 감옥에 있는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무작정 상경했다. 그의 한양생활은 그를 새롭게 변화시켰다. 그 이후 벌어지는 기적 같은 고관대작들과의 교류는 행운이었다. 조선 최고의 문사들과 서예가들이 포진해 있는 구로회의 시사에 참석하게 되면서 그는 소녀문사로서 장안의 화제였다. 이들과의 교류 그들이 벌이는 각종시회에 참여하며 그는 시가 부쩍 늘었다. 구로회 회원들은 국제정세에 밝았으며 외국의 문물을 경험했고 근대문명의 첨단에서 활약했던 유명인사들이었다.
우선 구로들을 나열해 보면 判書 海士 金聲根, 判書 遊霞 金宗漢, 輔國 桂庭 閔泳煥, 判書, 東農 金嘉鎭, 輔國, 琴來 閔泳韶, 判書 石雲 朴箕陽, 判書, 李乾夏 判書 詩南 閔丙奭, 承旨 荷亭 呂圭亨 등이다. 여기에 判書 希齋 李裕寅, 承旨 遂堂 李種元, 判書 樊山 閔永璇, 判書 碧樹 尹德榮, 등 이외도 伊藤博文, 李完用 등과도 교류하였다.
이들은 오효원에게 근대지식 문명과 사상을 전파를 하였으며 오효원은 근대여성으로 성장하면서 신여성적 교양을 갖추며 유행의 첨단을 걷고 있었다. 구로회 시사에 모인 명사들은 한시의 고수들이었고 서예의 달인들이었다. 소파 오효원은 이들과 어울리면서 그의 실력은 다듬어지고 연마되는 것이 컸을 것 같다. 그의 시들은 시대를 풍부하게 반영하고 있어서 그의 시를 따라가다가 보면 일제강점기 조선의 모습들이 애처롭게 묘사되고 있다. 14때 상경해서 부터 20세에 까지 약7년 동안의 행적은 유명인사들과의 교류였다. 오효원의 신여성, 근대여성의 사상적 기초는 이들과의 교류에서 이루어졌으며 여성교육계몽의식도 여기에서 싹텄다.
오효원은 20세에 이등박문의 소개장을 들고 아버지와 함께 일본으로 들어갔다. 오효원은 여성교육에 관심을 가지고 여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그 기금을 모으기 위해서 갔다. 일본의 근대화된 여학교들을 관람하며 교육제도를 베껴오기도 하였다. 오효원은 명신여학교를 설립하였으며 여학교에서 교편을 잡기도 하였다. 이시기 일본을 유람하며 지은 시에는 근대 계몽의식은 나타나는데 민족에 대한 독립의식이나 자아각성은 발견되지 않는다. 일본이어서 그랬을까? 그가 일본을 다녀온 후 사상적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시를 통해 볼 수 있었다. 그는 1916년 중국에 들어간다. 중국의 인사들과 교류하며 지은 시들에서는 전환기 동아시아의 정황을 인식하고 근대계몽의식과 민족에 대한 자아각성이 드러나고 있다. 그가 중국에서 교유한 인물들은 康有爲, 粱啓超, 唐紹儀, 袁世凱의 아들 袁克文 3형제를 위시해서 廉泉, 吳芝英, 呂碧城(1883~1943) 등이며 이들은 중국의 유명한 개화의식을 지닌 사람들이다. 오효원을 중국의 여성혁명가 秋謹(1875~1907)에게 비유하기도 한다. 오효원은 중국을 다녀오면서 지사적 풍모를 지니고 돌아왔다.
그의 동생 오춘영의 발문에서 “그 얽매이지 않음과 호방함은 통쾌하게 천고의 규방 여자의 법식을 깨뜨렸고 그 강개함과 절규함은 맹렬히 백세의 나약한 자들을 발로 차 일으켰다. 우리 누이는 아마도 시인이 아니라 지사일 것이로다!” 라고 한 것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오효원의 한시 속에는 우리 민족에 대한 자아의 각성이 들어 있으며, 근대계몽을 위한 각종 시화운동을 위시하여, 여성 교육을 목표로 하는 계몽의식이 들어 있다. 그의 한시의 대부분 주제의식은 반봉건적이고 민족적이며 계몽적인 경향을 드러내고 있다. 오효원의 한시에서는 이시기에 와서야 민족문학과 리얼리즘 문학의 맹아를 볼 수 있다. 소파 오효원은 당대 최고의 여류한시 시인이자 여류명필이었으며, 여학교를 설립한 계몽운동과 조국과 민족을 걱정한 志士의 혈기가 넘치는 민족의 투사였다.
앞으로 오효원의 한시에 대한 연구의 지평이 더욱 넓어지기를 기대한다.
<참고문헌>
단행본
신익철, 『소파여사시집 역주』, 의성군. 2017.
논문
강혜종, 「20세기 여성 문사에 대한 사회적 시선과 여성의 사회 참여 방식」, 『열상고전연구』, 2010.
김선, 「韓國近代女性吳孝媛的中國體驗與詩作」, 『중국문화연구』제12집, 중국문화연구학회, 2008.
김승룡·이현정, 「小坡 吳孝媛 한시의 마음에 대하여 : 시학의 성격과 의경 '怨'을 중심으로」, 『漢文學論集.』 제49집, 槿域漢文學會. 2018. pp.179-211.
김인택, 「오효원의 한시 연구」, 중부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2017.
김지용, 「소파 오효원의 사회활동과 시작-개화기의 여류문예활동」, 『아시아 여성 연구』제17 집, 숙명여자대학교 아세아여성문제연구소, 1978.
김현주, 「소파 오효원 한시의 변모양상-의식의 변화를 중심으로」, 『여성문화의 새로운 시각』 4, 월인출판사, 2005.
이기현, 「근대 전환기 오효원의 현실인식」, 한국어문학회 국제학술포럼, 2008,
이성호, 「오효원 한시의 현실의식 및 여성정감의 특징」, 『한국한문학연구』 제27집, 한국한문 학회, 2001.
임보연, 「소파 오효원의 수학기 시에 나타난 주체적 여성의식」, 『어문논집』제45집, 중앙어문 학회, 2010.
정승호, 「허난설헌과 오효원의 한시 비교 연구」, 중부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7,
정의영, 「소파 오효원 연구」, 성신여대 석사학위 논문, 1993.
조순애, 「소파 오효원 여사의 한시 연구-소파 여사 시집 제 일 집 중심」, 고려대학교 석사학 위논문, 1981.
황수연, 「소파 오효원의 자기 탐색적 시세계」, 『열상고전연구』. 제60집, 열상고전연구회2017. pp.189-221
허미자, 「근대화 과정의 문학에 나타난 성의 갈등 구조 연구-특히 최송설당과 오효원의 한시 를 중심으로」, 『연구논문집』제34집, 성신여자대학교, 1996.
「Abstract」
A study on the Chinese poetry and national enlightenment consciousness of Sofa(小坡) Oh Hyo-won(吳孝媛)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Shin, Doo-hwan*
This thesis studies the modern enlightenment consciousness that appeared in the Chinese poem of Sofa Oh Hyo-won, a female poet who lived in Japanese colonial era. He is a female poet who was born as a woman at the end of the Joseon Dynasty and lived a strange life with a strange fate, leaving 474 poems. Most of his poems express Japanese colonial era's feminine daily life with affection, so if you look at the trajectory of life along his poems, Japanese colonial era is vividly depicted and revealed.
His poems reveal an enlightenment consciousness and advanced worldview to emphasize the need for modern women's education and establish a women's school by enlightening the Confucian feudal society of the Southern Journey to Korea. In particular, he looked back at Japanese colonial era Japan and was able to see the perception of women's education and modern civilization in poems. In addition, he moved to China, looked at the process of modernization of China, and returned after recognizing the East Asian modern era during the transition period through exchanges with Chinese celebrities. His poems written at this time have a small amount of poetry, but some poems reveal the characteristics of resistance literature, which implies nationalist literary tendencies and patriotic fighting spirit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The consciousness of modern enlightenment that appears in his poems contains the awakening of the ego toward our people. The theme consciousness of his poems reveals anti-feudal, ethnic, and popular movement tendencies, and contains a spirit of desperate patriotic enlightenment aimed at excitement and education. It was only at this time that I could see the buds of true national literature and realism literature. Oh Hyo-won's Chinese poem is the Unique style of Joseon Women's History.
<Key Word> : Japanese colonial era, Yeongnam, Poet Female, Sofa Oh Hyo-won, Nationality, Resistance, Enlightenment, Realism, Literatu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