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한울림문학 시 원고
남진원
지나온 길, 아련한 그리움입니다
남진원
돌아보니 어느새 흘러온 70여 년의 세월
참 많이도 걸어온 걸 알았습니다
너그러움과 속 좁음, 번뇌와 평온, 기쁨과 슬픔의 행간에 스며있는
고마움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요, 감사함 뿐이었습니다
온통 따스한, 당신의 모습 뿐이었습니다
어느 하나 기적이 아닌 일상이 없었습니다
고요히
머리 숙일 뿐이었습니다.
어느새 이리 흘러온 70여 년의 세월
지나온 길,
모두가 아련한 그리움입니다
그리움으로 남아 있는 사랑이었습니다
허공처럼 지낸다오
남진원
지난 밤 창문을 여니
작은 아기 이처럼
빛나는 별들이 있어
세상은 구부러져도 아직 살만한 가 보다
바람 부는 들길에 나가니 코스모스가 예쁘다
길옆에 흐르는 물소리는 또 얼마나 맑은지 …,
이럴 때 누군가 묻는 말
요즘 어찌 지내오?
그러자,
가을날 오후가 내 대신 햇볕을 가르킨다
골짜기 물속 물방개와 가재를 비추던 햇볕
같은,
가을날 오후의 햇볕을 말이다
이날,
햇볕 옆에 둥둥 떠가는 구름 한 덩이를 보았다
흰색 허름한 바지 저고리를 입고
허공처럼 앉아있는
노인의 모습이었지
그 모습을 보니 나도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인생은 졸다가 깨다가 하는 한 채의 구름 같은 것이지요
그저 졸다가 깨다가 하는…
또, 덧붙여 말했다오
요즘 저렇게,
허공처럼 지낸다오
고요한 평화
남진원
가을이다
들끓던 여름이 떠난 자리에
반가운 손님처럼
가을이 들어섰다
잠자리 날아다니고
작고 아름다운 풀벌레
귀뚜라미 소리의 음률 …
방터골
아늑한 집 주위로
기쁨이 조금씩 삐어져 나온다
풀과 나무들
고요한 평화가 되어
작은 우주를 돌보고 있다
귀여운 그 내면이,
밀회하는 듯 하면서도 장엄한
모습이다
아름다운 것은 아름답게 남겨 두자
남진원
사람들아,
너로 인해 또, 나로 인해
살면서 서로의 가슴 속에 상처 낸 자국이
얼마이더냐
한순간의 분노도 참지 못하여 큰 후회가 된 일들을
보아 왔음이니,
오늘 가을 앞에
고개 숙임을,
머리 숙임을,
무겁게 휘어진 알찬 벼들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내 곳간에 들어있는 죄로써 얻은 부끄러움의 무게는 더 무거운데,
이런 가운데서도
진실함의 흔적은
숨겨진 보석 같이 존재하고 있었다니
놀라워라
사랑의 흔적이
숨겨진 은혜 같이 존재하고 있었다니
이 가을에
지나온 길은 더러 서러울지라도
아름다운 것은 아름답게 남겨 두자
지나온 길은 더러 아픔이 있을지라도
그리운 것들은 오롯이 그리워할 수 있게 남겨 두자
그래,
상처도 더러는 아름다운 것이지
아름다운 상처도
홀로 눈물처럼 빛나게 남겨 두자
사는 일, 아이 좋아라
남진원
부자가 아니어서 편안하고
귀하지 않아서 자유롭고
영화를 탐하지 않으니 담백한 즐거움이 있네
굳이 높은 깨달음이 무엇에 필요할까
사는 일,
그저 해 뜨면 일하고 해지면 잠 자리애 드는 일인데
이 평범한 생활에서 늘 안온한 기쁨을 만나니
무심하면서도
사는 일, 아이 좋아라
초가을
남진원
밤에 잠들기 전
한 쪽 문을 열어둔다
내 잠속에서도‘ 풀벌레들이
놀러 오게 말이다
요즘, 맛있는 꿈을 꾸는 것도
풀벌레들 덕분이다
어디 그 뿐이랴
열린 문밖에서
별들이 들여다보며
정겨운 눈짓을 한다
요즘은
정말, 별과 풀벌레로 행복한 날이다.
살맛 나는 일
남진원
버스 칸에서 사람들을 만나면
밭에 뭘 심었냐고 묻는다
“심지는 않고 키우기만 했어요”
“무엇을 요?”
“풀입니다.”
사람들은 웃지만 나는 진심으로 대답한 것이다.
초가을 풀밭에 나가면
기분이 좋다
메뚜기 여치 풀무치들이
마구 뛰어 다닌다
풀밭을 만들어줘서
반갑다는 인사를 그렇게 하는 모양이다
저들의 모습을 보니
살맛이 났다
코스모스
남진원
집 가에 몇 그루 과일나무 묘목 심듯
코스모스
모종을 하였다
그랬더니,
나도 몰래 가을 초입,
하양 꽃잎을 피웠다
내게 보내는
함빡,
웃음 웃음 …
저물녘
가벼운 바람 불어
이리저리 흔들리니
한결 싱그러워진 모습이다
한결 멋진 모습이다
문밖에 얼른 의자를 놓고
앉았다
오래도록
너희를 보고 지내는 게
요즘 내 삶이란다
2024, 여름
남진원
최악의 폭염에
초열대야까지…
힘들지만
새벽녘 뒷산 숲을 흔드는
매미소리
그 어느 때보다 힘차고 화려하다
유년의 고향 집 새벽
눈뜰 때 듣던
그 소리의 빛깔보다 더 빛나는
싱싱하고,
쟁쟁한
여름 아침을 물들이는
싱그러움싱그러움싱그러움싱그러움 …
폭염에 몸은
힘들고 어려워도
그 어느 여름을 보낸 해보다
기쁘게 맞이하는
행복한 여름이다
밤이면 쏟아부을 듯 빛나는
별들을 생각하면
벌써 가슴이 뛴다
우리네 삶, 늘
흔들리며 살아도
남진원
흔들리며 사는 일이
어제, 오늘의 일이었던가
내 인생은 늘 4.8의 지진이 일어났으니
삶의 곳곳이 허기진 채
수차례 여진도 다반사였지
선반의 그릇 흔들리듯 자네도
흔들리며 살아오지 않았는가
오늘 전북 부안 땅 엉덩이에 4.8의 지진이 났을 뿐인데도
전국 곳곳,
비틀
비틀
그래,
정치도 교육도 문화도 곳곳에서
이미 지진 수치 4,8도를 넘어
비틀거리고
우리네 삶, 늘
흔들리며 살지 않느냐.
세상살이가 무시로
억울함에 취해 울고
더러는 시름에 겨워
잠들다 깨다가 하거니
인생은 나무 옹이 같은 것
가슴에 박힌 옹이를 쓰다듬는 사람들아
슬퍼하지 마라
우리는 완행열차의 흔들림처럼
그렇게 흔들리며 가는 거지만
그렇게 흐르며 가는 거지만
우리네 삶,
흔들리며 살아간다는 게
아름답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