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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로마서1장1~17절
제목 : 자랑스러운 하나님의 복음
번번이 로마 방문의 길이 막혔던 바울은 우선 편지로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바울은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과 복음을 위하여 택함을 받은 사도로 소개하며 로마 교회 성도들을 향한 관심과 사랑을 표현합니다.
1. 바울의 소개(1절)
“[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1) 예수 그리스도의 종.
헬라 원어에서 “종”이란 말은 둘로스입니다.
바울 당시, 로마 세계에 있어서 종이라고 하면 그 주인에게 일개의 가구와 같았던 것입니다. 예컨대 어떤 역사가의 증거 한 바와 같이,
가구 가운데 세 종류가 있습니다.
① 그 하나는 말할 줄 모르는 것(낫이나 호미 같은 것)이요,
② 또 하나는 반벙어리(개와 같은 것)이요,
③ 또 다른 하나는 말하는 노예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를 가리켜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이 책의 첫 머리에 있어서 자기는 오직 예수님을 절대 복종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 복종은 은혜로 되는 것입니다.
곧,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무서운 죽음의 세력에서 그의 피로 바울을 구원하셔서 그의 것으로 삼으신 은혜로 되어진 것입니다.
2) 사도 : 이것은 헬라 원어로 “ 클레로스”라고 합니다.
(1) 사도의 자격
① 예수님께서 친히 불러 선택한 자
② 예수님의 이적을 보며 생활을 같이한 자
③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본 자
④ 예수님의 증인이 될 수 있는 사람
(2) 사도로서의 삶
① 좁은 의미 - 12제자
② 넓은 의미 - 성도 모두가 부르심을 받음 사람이다.
(3) 사도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자
하나님의 모든 참된 종들이 이 클레로스의 경험을 가졌던 것입니다.
예컨데, 아브라함(창 12:1-3), 모세(출 3:10-12), 기타 모든 선지자들(사6:8-10;
행1:4-5). 바울은 특히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 이것을 받았습니다(행 9:3-5).
. (엡1:18-19)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 (엡4:1)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3)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는 자
(1) 복음 : 이 말의 헬라 원어 “앙겔리온”은 “좋은 소식”을 의미 합니다.
메시야를 보내셔서 그 백성을 구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 성취는 참으로 좋은 소식입니다.
이 약속 성취의 방식은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사람의 형상(다윗의 자손)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셔서 죽으셨다가 다시 사신 그것입니다.
(2) 택정함을 입었으니.
이 말의 헬라 원어는 “아포리메노스”니 “갈라 놓음이 되었다”는 뜻입니다(레 20:26).
이것은, 그의 나기 전에 사도로 거룩히 구별함이 된 것을 가리킵니다(갈 1:15).
이렇게 세움이 된 것은, 자기의 힘이나 혹은 자기의 뜻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세움이 되어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종은,
① 교만할 수 없고,
② 하나님의 대리자니 만큼 자행 자지(字行自止)할 수 없고,
③ 오직 보내신 자의 뜻을 성취하려고 노력할 뿐이며,
④ 두려워 할 것도 없고 염려할 것도 없이 보내신 자의 권능을 의뢰할 것이며, ⑤ 조심하여 그가 대리한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지 않도록 의롭게 살아야 합니다.
2. 바울의 인사(2~12절)
“[2]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3]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4]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5]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6] 너희도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니라[7] 로마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8] 먼저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에 관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9]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10] 어떻게 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11] 내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어떤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 주어 너희를 견고하게 하려 함이니[12]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1)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다(2절)
“[2]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성경에.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미리 약속하신 것. “약속”하셨다는 말은, 허락하였다는 말과 달라서 인간의 청구가 있기 전에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솔선하여 구원 주시기를 약속하심입니다.
이 “약속”은 구약 성도들에게도 하셨던 것인 만큼, 그들도 위한 것입니다. 그들은, 오실 메시야를 바라보는 믿음으로 구원함을 받았습니다.
이 약속이, 우리도 위한 것임은 물론입니다(15:4).
“미리 약속”하셨다는 말씀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생각게 합니다. 곧,
⑴ 하나님의 사랑이 그 택한 백성에게 대하여 어떻게 큼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은 현재에 복을 주심 보다,
미래에 더 많은 축복을 간직하여 주십니다(시 31:19).
*시31:19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 두신 은혜 곧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인생 앞에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
복음은, 아무런 예비나 계획한 바 없이 우연적으로 겨(糖)와 같이 날아 왔다가 사라져 버릴 것이 아니고,
오래 전부터 하나님께서 예정하시고 약속해 오신 영원한 진리입니다.
⑵ 하나님께서 미리 말씀하셨다가 그대로 이루어 주심은 그것이 성취될 때에 우리로 하여금 그 약속자이신 하나님을 더욱 믿게 하려 하심입니다.
*요 13:19 “지금부터 일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너희에게 일러 둠은 일이 일어날 때에 내가 그인 줄 너희가 믿게 하려 함이로라”
2) 예수님은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다(3절)
“[3]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육신. 이것은 헬라 원어로 “쌀크스”니 보통으로는 “몸”이란 말 “쏘마”와 달라서 인간의 부패성(腐敗性), 혹은 순전히 인성(몸과 영혼)을 가리키는데,
예수님께 대하여 이 말이 사용될 때에는 부패성을 의미하지 않을 뿐더러(고후 5:21), 도덕적 연약성도 가리지 않고, 오직 자연적 연약성을 띤 인성을 가리킬 뿐입니다.
히4:15,16에 “[15]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16]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성자(聖子)께서 육신이 되심은, 우리의 죄 짐을 지시기 위하여 대신 욕을 보심이요, 우리와 같이 되심입니다(히2:17).
복음은 그리스도에게 관한 좋은 소식으로 두 가지 요소를 가진 것이니,
곧, 인성(人性)과 신성(神性)입니다.
성경은 그의 중보자격(仲保者格)을 말함에 있어서, 그의 인성을 역설(力說)하였습니다(딤전 2:5).
그 이유는, 그의 신성이 그의 인성을 통하여 우리에게 계시(啓示)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인격의 주체(主體)는 신성(神性)입니다.
다윗의 혈통.---- 사도는 여기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에게 관한 구약의 예언을 생각한 것이 분명합니다.
구약에는,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후손으로 나시리라고 한 예언이 많습니다.
그 가운데 두 가지만 들며,
① 사 53:1-3에는,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라고 하였습니다.
이 예언과 같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는 다윗의 줄기(왕손)면서도 왕궁에서 나시지 않고 베들레헴의 외양간 한지(마른 땅과 같이 적막한 곳)에 나셧습니다.
② 사11:1에는,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그루터기에서 싹이 나서 열매를 맺으리라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에 포로 된 후, 다윗의 왕통이 오랫동안 끊어지고 그루터기로 있었습니다.
거기서 다시 왕손(王孫) 예수님이 나셨습니다.
위의 “가지”란 말은 히브리 원어로 “네체르”요,
“결실”이라는 말은 “이프레”입니다.
네체르는 마태 복음에 있는 나사렛을 생각게 하고(마 2:23),
이프레는 베들레헴 곧 에브라다를 생각게 합니다(마 2:5-6 ; 미 5:2).
이것은 왕손 예수님의 생장하신 곳이 나사렛(네체르)과 베들레헴(이프레)이 될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사 4:2 ; 32:2 ; 겔 34:1-24 ; 렘 33:14-26 ; 마 22:42 ; 용 7:42 ; 행 13:22-23 ; 딤후 2:8).
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4)
“[4]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1) 성결의 영.
“성령”이란 말 “프뉴마 하기온”과 구별됩니다.
“성결의 영”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학계(學界)의 견해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① 예수님의 영혼을 가리킨다는 학설, 이 학설은 합당치 않다.
그 이유는 이 의미를 취한다면, 이 구절에 말한 예수님의 부활이 예수님의 영혼으로 말미암아 되었다는 의미가 되는데, 이것은 롬 8:11과 맞지 않는가. ②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가리킨다는 학설, 이 학설도 합당치 않으니, 그 이유는, 다음에 말한 제 5 학설이 정당하기 때문입니다.
③ 그저 성령, 곧, “프뉴마 하기온”과 같은 뜻으로 사용되었다는 학설, 그러나 “프뉴마 하기오쉬네스”란 말은 여기에 한 번만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그 많은 다른 명칭과 같은 의미를 가졌다고 할 수 있을까?
④ 창조 또는 개조의 능력 있는 신성(神性)을 가진 성령에 대한 칭호라고 하는 학설(H. N . Ridderbos).
⑤ “프뉴마 하기 오쉬네스”는, 예수님이 받으시고 그와 함께 계시는 성령을 가리킨다. 이 견해가 정당하다(Greijdanus).
그리스도의 부활은 예수님 밖에서 새로 들어오시는 성령의 역사로 된 것이 아니요 이미 그에게 내재(內在)하시는 성령님의 활동 결과였습니다.
죽은 가운데 부활하여. --- 이 말의 헬라 원어는 “죽은 자들의 부활로서”란 의미를 가집니다.
이 말씀에 “죽은 자들”이라고 복수(複數)를 사용한 이유에 대해여,
① 어떤 학자들은 말하기를 여기 이 말이 나사로의 부활과 같은 부활도 포함시킨 것이라고 하나, 이것은 자연스럽지 않다.
② 여기 복수가 쓰인 이유는 예수님의 부활이 모든 신자들의 부활을 성립시키신 부활의 새 시대를 가리키기 때문이다(Nygren, H.N. Ridderbos).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
“하나님의 아들”이란 성호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아들은 삼중 의미(三重意味)의 성호니,
⑴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
⑵ 메시야적 하나님의 아들.
⑶ 화육(化肉) 관계의 하나님의 아들이다.
이 세 가지는, 서로 나뉠 수 없는 관계를 가지는 것입니다.
영원하신 아들이 아니고는 아버지 하나님을 계시(啓示)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실 메시야가 되실 수 없으며(요 1:18),
아버지 하나님을 계시하시는 메시야는 화육을 필요로 합니다.
화육이 없이 어떻게 계시와 구속(救贖)의 메시야 사역을 행하실 수 있을까? “인정되셨”다는 말은 헬라 원어로 “호리스텐토스”인데, 그 의미에 대하여
⑴ 바르트(Barth)는 말하기를 “인정함”은, 역사적 행동이 이니고 원역사적(原歷史的)행동이라고 하였다.
이 견해는 계시(啓示)의 역사적 의미를 거의 무시한데 가까운 위기 신학(危機神學)의 사상입니다.
우리는 이와 반대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곧, 역사 그것은 계시를 유효하게 파악할 수 없으나,
하나님의 능력에게 복속된 그 역사는 그리할 수 있다고 합니다(행 16:14).
⑵ “인정되셨으니”란 뜻은, 예수님께서 부활 이전에도 하나님의 아들이셨으나 부활이 후에야 인간의 인식에 완전히 인정되셨다는 뜻이라고도 하고, ⑶ 이것은, 예수님께서 인간의 인식에서 인정된신 사실을 말함이 아니고, 부활하신 후 하나님 앞에서 영광(人性을 취하신 후 없었던 영광)을 얻으신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다는 뜻이라고 합니다(행 2:36).
4)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5절)
“[5]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
우리가 .--- 여기 사용된 인칭(人稱)이 복수(複數)로 된 이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학설들이 있습니다.
⑴ 리츠만(Lietzmann)과 바이스(B. Weiss)는, 이것이 저작 권위(著作權威)의 복수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하나 옳은 것 같지 않고,
⑵ 산데이(Sanday)는, 이것이 바울의 동역자들, 예컨대 바나바, 혹은 디모데와 같은 이들을 포함시켜 말한 복수라고 한다.
그러나 디모데나 바나바는 엄밀한 의미레서 사도가 아니었으니, 이 학설도 믿을 수 없다. 그러므로
⑶ 데오도레 즈안(Zajn)의 말한 것과 같이, 이 복수가 모든 다른 사도들까지 의미하였다는 의견이 정당해 보인다(Greijdanus).
은혜와 사도의 직분. ---
①“은혜”란 말은 헬라 원어로 “카리스”인데 받을 만한 공덕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도움을 받는데 쓰이는 말입니다.
멸망 받아 마땅한 죄인이 영생을 받은 것은 큰 은혜입니다.
은혜는 사도직(使徒職)의 기초입니다.
은혜 받은 일 없이 사도가 되지 못할 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하셨습니다(눅 10:20).
곧, 사도들이, 그 사도직 실행에 나타난 권능을 보고 기뻐함보다 차라리 그들의 구원 받은 일에 대하여 기뻐할 만하다는 뜻입니다.
사도직도 귀하지만, 영원히 멸망 받을 죄인이 구원의 은혜에 참여한 것이 더욱 귀합니다.
혹설에, 여기 “은혜”는 멸망에서 영생으로 들어오게 하신 하나님의 기본 은총을 말함이 아니고, 사도의 직능적 은혜를 가리킨다고 합니다.
그 이름을 위하여.--“그 이름”(예수님의 이름)은, 예수님에게 대한 계시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사도의 일을 한다고 함은 그가 예수님의 이름을 전하는 자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믿어 순종케 하나니 ---“믿어 순종”이란 말은, 신앙과 순종을 별립시켜서 말함이 아니고, 믿음이 곧 순종이라는 의미입니다.
불신앙은 언제나 하나님에게 대한 반역입니다.
믿음 곧 인간에게 무거운 짐이요 수고가 되나, 신앙 순종은 모든 무거운 짐을 그리스도에게로 옮겨 놓는 행동이니, 이는 고역이 아니라 도리어 안식입니다.
5) 너희도 부르심을 받은 자니라(6절)
“[6] 너희도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니라”
여기 “그리스도의 것”이란 말은, 택하심을 받은 성도를 가리킵니다.
신자들이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 속하신 것과 마찬가지로 중요한 관계입니다(고전 3:23).
그리스도는 신자들을 자기의 보물, 곧 피 흘려 사신 보물로 사랑하십니다. 이것을 아는 신자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생각해야 됩니다.
⑴ 자기를 그리스도의 큰 사랑의 대상인 줄 알아 절망하지 말고 언제나 자기 존재의 가치를 그리스도의 은혜에서 느껴야 됨.
모든 절망자와 자살자들은, 자기들의 중요성을 자기 자신에게서 찾으려는 자들입니다.
⑵ 자기는 그리스도의 것인 만큼 겸손해야 됨.
고전 4:6-7에 말하기를, “교만한 마음을 먹지 말게 하려 함이라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라고 하였다.
⑶ 자기를,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하였습니다.
6)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7월)
“[7] 로마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 이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고로 우리를 불렀고 우리를 부르신고로 성도(聖徒)가 되었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부르심”은, 하나님께서 복음을 전하시어 그 백성을 세상에서 불러내심입니다. 우리가 성도된 원인은, 우리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다만 하나님의 사랑과 선택에만 있습니다.
인간은, 구원 소망을 자기 자신의 의(義)에 근거하여 생각할 수 없습니다.
인간에게는 의가 전연 없습니다(3:10).
만일 누가 자기의 의에 대한 보상으로 구원을 기대하며 지낸다면,
그것은 불붙는 집에 앉아서 잘 살기를 꿈꾸는 것과 같은 어리석음입니다.
인간의 구원은, 그 자신 밖에서 오는 것이니, 곧 하나님에게서 입니다.
우리 아버지, --- 구약에도 하나님의 부격(父格)에 대한 말이 없지 않으나 그것은 신약의 그것과 다릅니다.
구약의 것은 이스라엘의 국부(國父)라는 뜻으로 씌어 있습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공로를 보시고 우리를 양자(養子)로 받아들인 고로 하나님을 우리 신자들의 아버지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죄인에게 대하여 “아바 아버지”(8:15)가 되셨습니다.
은혜와 평강. --- 이것은, 사도가 교회를 축도하는 특별한 복이니,
헬라식 축도(행 23:26)와 히브리식 축도(삿 6:23 ; 삼상 25:6 ; 욱 10:5)를 겸한 것입니다.
사도의 축복은 옛날 이스라엘의 족장의 그것과 같이 권세 있는 것입니다(창 27:1-42) ; 마 10:12-13).
은혜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무조건적으로 호의(好意)를 가지시고 사랑을 베푸심입니다.
하나님의 호의를 얻음은, 온 인류에게 호의를 얻음보다 귀하고 요긴합니다. 온 인류가 다 반대해도 하나님만이 “나”를 지지하신다면,
그것이 오히려 기쁜 일입니다.
7)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8절)
“[8] 먼저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에 관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
첫째는. 감사요,
둘째는 다음절부터 나온 기도라고 하였습니다.
감사 제일주의가 있어야 범사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바울의 감사 제일주의는 그의 서신마다 나타났습니다(고전 1:4 ; 고후 1:3 ; 엡 1:3 ; 빌 1:3 ; 골 1:3 ; 살전 1:2 ; 살후 1:3 ; 딤후 1:3 ; 몬 4).
그리스도로 말미암아.....감사함. ---- 우리가 하나님과 교통하는 일은,
그 무슨 일이든지 그리스도의 중보역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감사하는 일도 그리스도를 힘입어서만 가능하거든, 하물며 다른 일들에 있어서야 더 말할 것이 무엇이랴. 그리스도를 힘입은 길은 그리스도 신앙입니다. 이것이 있는 때엔 죄인도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지만,
이것이 없는 때엔 소위 의인(義人)도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 ---- 바이스는, 이 문구가 다만 그들이 믿어 그리스도인 된 사실에만 국한된 것이고, 그들의 무슨특별한 선행을 가리킨 것은 아니라고 했다. 그와 반면에 고데(F. Godet)는, 이것이 그들의 모범적 덕행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 “너희 믿음”이란 말이 그들의 믿음 생활(믿음과 덕)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바울은, 감사 제목으로서 그들의 신앙생활 전체를 염두에 둔 것입니다.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 그 때 로마는 큰 도시였고 교통의 중심지였으니 만큼, 교회의 일이 각처에 퍼졌을 듯합니다.
일설에 의하면, 당시 세계의 모든 사람이 다 같이 로마에 있는 교회의 소문을 듣게 되었다는 말이 아니라고 합니다.
8)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심(9절)
“[9]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 --- 바울이 하나님을 섬기는 방식은, 복음을 전하는 그것이었습니다.
그가 복음 전파를 자기의 출세나 생계나 취미를 위한 것이 아니고 그 소명감(召命感)에 끌려 행하여지는 것이었습니다.
여기 “심령”이란 말은 렐라 원어로 “프뉴마”이니, 곧 영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내 영(靈)으로 하나님을 섬긴다고 함은 무슨 말인가?
이것은, 인격의 중심으로 하나님께 봉사함을 말함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정신력과 체력의 전부를 다하여 봉사함을 가리킵니다.
크레다너스(Greijdanus)는 말하기를, “이 봉사는, 마음을 드리지 않는 외형적인 것이 아니고 자기 존재의 가장 깊은 부분을 다하여 하는 것이다.
곧, 진실하게 온 인격을 기울여 하는 봉사이다”라고 하였습니다.
9)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10절)
“[10] 어떻게 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하나님의 뜻 안에서. --- 이 말에 대하여 어떤 학자는 말하기를,
여기 “하나님의 뜻”이란 말은 종교 윤리적인 하나님의 뜻이라고 합니다.
곧, 바울이 로마에 가고자 하되 남이 세운 교회에 간섭하는 잘못이 되지 않는 한, 거기 가기를 원한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 “하나님의 뜻”이란 것은 섭리적 의지(攝理的意志)를 말함입니다.
그가 로마에 가려고 해도 교통 사정으로 길이 막혀서 갈 수 없이 되어 있는데, 앞으로는 그 사정이 섭리적으로 해결되기를 바라는 의미로 이 말을 사용했습니다.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 여기 “좋은 길 얻기를 구”한다는 말은 보통으로 성황(盛況), 혹은 이득(利得)을 의미합니다(고전 2:16).
바울의 이 기도는 성취되어, 후에 그가 로마에 가게 되었습니다.(행 27:1-28:29).
그러나 그로 하여금 거기 가게 한 길은, 얼른 보면 좋은 길이 아니고 이상하게도 소송 건에 끌려가게 됨이었습니다.
그 길은 대단히 위태하여 그가 여러 번 파선 당해 죽을 뻔한 것입니다(행 26:32-27:44). 곧 그의 로마행은 육신적으로 괴로운 길이었습니다.
이것이, 이익을 얻는 길에 대한 바울의 기도 응답이었습니다.
경건한 신자에게 있어서 이익을 얻는 길은 반드시 평안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육신상으로 불행스러운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께 충성하다가 혹시 고생길에 설 때에도 낙심치 말고 도리어 그것이 유익 있는 오묘한 길인 줄 믿고 기뻐할 것입니다.
10) 신령한 은사를 주어 너희를 견고하게 하려 함(11절)
“[11] 내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어떤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 주어 너희를 견고하게 하려 함이니”
어뗜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주어. --- 여기 “어떤”이란 말은 헬라 원어로 “티”니, 그것은 아직 받지 않은(그러나 장차 받을) 어떤 신령한 은혜를 염두에 둔 말입니다.
바울은 로마에 가는 도상에 오를 때에 반드시 로마의 신자들에게 풍성한 영적 축복이 임할 것을 확신한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나갈 때에 그리스도의 충만한 축복을 가지고 갈 줄을 아노라”고, 그는 말하였습니다(15:29).
주의 종이 주님의 시키시는 일에만 순종하며, 언제나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영력(靈力)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신령한 은사”란 것은, 초자연적(超自然的)인 것인데 그것이 물질적 혹은 정신적인 것일 수도 있습니다.
“나눠주어”란 말은 은혜를 나눠 주는 자 자신도 남들과 함께 그 은혜에 참여함을 가리킵니다(Theodore Zahn).
만일 주님의 종을 통하여 교회 중에 하나님의 교훈이 임한다면,
주님의 종 자신도 그 교훈의 심판 아래 서야 됩니다.
너희를 견고하게 하려 함. --- 이 말의 헬라 원어를 직역하면 “너희로 견고케 되게 하려 함이니”입니다.
곧 바울이 자기 힘으로 그들의 신앙을 굳게 할 수 있다 함이 아니라,
그들의 신앙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굳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신앙을 장성케 하는 이는 오직 하나님 뿐 이시니(고전 3:5-7),
여기서도 바울은 자기의 할 수 있는 일과 하나님의 하실 일을 구분합니다.
11)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12절)
“[12]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 -- 이것은 신앙상 위안을 말함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세상에 부딧쳐 끊임 없이 피곤해집니다.
그러므로 이런 안위는, 우리에게 매일 음식과 같이 계속 공급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안위는, 염세주의(厭世主義)에서 찾아 만나지는 것이 아니고,
오직 주 안에서 성도들의 교통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내 신앙이 피곤해졌을 때에 남의 열심 있는 신앙을 보아서 용기를 얻게 되며, 또 본래 튼튼한 신앙도 다른 사람의 모본을 보고 더욱 힘을 얻습니다.
3. 바울의 계획(13~15절)
“[13]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14]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15]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1) 열매를 맺게 하려 함(13절)
“[13]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하나님께서 신자들을 세상에 두시는 목적은,
그들이 영적(靈的)으로 결실하게 되기 위함입니다.
그들의 처음이 좋지 못했어도 나중에는 좋을 수도 있습니다.
신약의 사울은, 처음에 비록 패역했으나 한 번 회개한 후에는 주님을 충성되이 섬겼습니다.
마가도 처음에는 바울과 바나바를 따라 가다가 낙심하고 돌아섰으므로 바울에게 불신임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도 후에 회개하고 귀한 종이 되었으므로, 바울이 그를 자기에게 유익한 종으로 여겨 모든 교회에 추천하였습니다(골 4:10).
이와 반대로, 어떤 신자들의 처음이 좋았다 할지라도 그 나중이 좋지 못한 것은, 그들의 실패를 의미합니다(겔 18:21-24).
구약의 사울은, 처음엔 하나님의 총애를 받았으나 후에 패역한 길로 갔으므로 그 말년에는 저주를 받았습니다.
“열매”는 주로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신자 자신의 성결의 열매요,
둘째는 다른 사람을 복음으로 인도하는 전도의 열매입니다.
요 15:1-6 ; 눅 13:6-9 ; 막 11:11-14, 20-21 참조.
길이 막혔도다. --- 하나님께서는, 그 사랑하시는 신자들의 길을 언제나 열어 주시지 않고 때로는 막으십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를 듣지 아니 하심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더 좋은 것을 주시려는 그의 오묘한 섭리입니다.
2)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14절)
“[14]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복음은 야만이에게도 가야 하며, 문명인에게도 전파되어야 합니다.
문명(文明)이란 무엇인가?
지혜와 지식은 무엇인가?
혹은 과학이란 것이,
만물의 성질은 알 수 있으나 그것의 근원을 알 수는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과학 연구로써 만물의 용법은 알 수 있으나,
그 만물이 어디서 왔으며 어떻게 존재하며 어디로 가는 바를 알 수는 없다(고전1:20). 이 세상의 지식층은 무식(어리석은 자들)과 마찬가지로 진리 앞에서는 소경이니, 진리 곧 복음이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두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전도자는, 지식 있는 사람들 앞에 역시 빚을 지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에 빚진 자의 명심할 것이 두 가지입니다.
⑴ 이 빚을 갚지 않으면 화를 당하는 것(고전 9:16),
⑵ 복음 전한다는 자세를 하지 말 것이다(고전 9:18-23).
3)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15절)
“[15]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이 구절은 헬라 원어로 “토 캇 에메 프로뒤몬”이니, 그것을 개역하면, “내게 달린 것은 뜨거운 소원이니”이다. 곧, 자기로서는 뜨겁게 원하나,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기다려 한 후에야 그 소원대로 행동하리라는 말씀이다. 사람이 어떤 선한 사업 계획을 세울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도를 기다려 행하지 않고 조급하게 행함은, 도리어 무익할 수 있다.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 이것은 이미 믿은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리라는 말씀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벌써 믿는 자들에게 복음의 지식을 가르쳐 줌도 일종의 전도이다.
4. 복음의 능력(16~17절)
“[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1)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16절)
“[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1)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 하노니.
“부끄러움”이란 것은 두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곧 사람이 자기의 소유가 무가치하여 부끄러워함과 자기의 성질이 겁약하여 부끄러워함입니다(딤후 1:8, 12-18 ; 히 2:11 ; 고후 10:8 ; 빌 1:20 ; 눅 16:3 ; 요일 2:28). 그러나 바울은
① 자기의 소유한 복음 전파의 사명을 무쌍한 영관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그런 귀중한 것에 대하여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② 그 뿐 아니라, 그는 복음 운동과 및 자기를 위하여 염려할(염려는 겁에 이르고 겁은 부끄러움에 이름) 처지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가 본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던 사울이었으나, 다메섹으로 가던 도상에서 그리스도에게 붙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그의 안에 사시는 이가 그리스도였습니다.
그에게는 죽는 것도 유익함이 되는 줄로 느껴졌습니다(빌 1:21).
*빌1: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2)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3)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이 순서는 민족 차별(民族差別)의 순서가 아니고,
하나님의 경륜의 순서를 가리킬 뿐입니다(3:1-2.9 ; 1-13, 11:1-6, 15:9 ; 마 15:24 ; 요 4:22 ; 행 1:8 , 13:46 참조).
구원의 복음이 왜 이스라엘 사람을 먼저 찾았는가?
그것은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습니다.
곧, 복음이 이스라엘을 먼저 찾은 것은, 이스라엘 자신을 위하는 동시에 꼭 같이 이방인들도 위한 것입니다.
곧, 그것이 이스라엘 자신에게 구원을 베푸는 행동인 동시에, 이방인들에게는 구원을 전하는 제사장(이스라엘은 이방인에게 제사장이 됨) 세누는 행사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의 사역을 통하여 많은 이방인들을 구원하시려 하셨습니다(창 12:3 ; 출 19:5-6).
그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시간의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나중 된 자로 먼저 되게 하시고 먼저 된 자로 나중 되게 할 수 있는 전능자시오 또 공의로우신 심판자이십니다(마 19:30).
*마19:30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2)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17절)
“[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1)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가. “하나님의 의”(義)가 무엇인가?
이 의는, 그리스도가 우리를 의로 제공되셨음을 말함입니다(고전 1:30).
사람이 하나님 하나님 앞에 의를 얻는 문제에 대하여 신학적 의견을 대표적으로 든다면, 세 가지로를 말할 수 있습니다.
① 펠라기안 학파의 의견.
이 학파에서는 말하기를, 사람은 유대인의 의식적 율법을 순종함으로 의를 얻는 것이 아니고, 다만
도덕적 율법을 행함으로 말미암아 의를 얻는다고 한다.
② 로마교의 의견.
여기서는 율법적 행위로 말미암아 의를 얻는다고 한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의견은 성경적이 아니라.
③ 푸로테스탄트 교회의 의견.
여기서는 성경이 말하는 데로 바로 주장하였다.
곧, 우리는 우리로 말미암아 행하여진 무엇으로 의를 얻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위하여 행하여진 다른 이(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 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을 말함입니다.
그러므로 이 의는 본래 우리의 것이 아니고,
다만 그리스도의 것을 우리의 것으로 인정하여 주는 것뿐입니다.
이 의는 복음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인데,
그 의로 말미암아 신자가 의롭다 함을 받습니다.
그 의는 완전한 것입니다.
나. “나타나서”란 뜻은 무엇인가?
이 말에 대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실을 생각하게 됩니다.
① 하나님의 정하신 구원의 때가 이르었다는 뜻(갈 4:4).
*갈4: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그러므로 그리스도로 나타난 하나님의 의(義)는 신자들에게는 바로 종말을 현재화(現在化)시켯다는 의미도 되어집니다.
이 의를 받는 자는, 세상 끝 날에 심판을 받지 않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벌써 심판을 받았습니다.
인자(人子)가 땅 위에서 사죄(赦罪)하는 권세가 있다고 한 대로(마 9:6),
신자들은 벌써 그리스도 안에서 사죄와 칭의(稱義)를 받습니다.
이 세상에서 사죄와 칭의를 못받은 자는
내세(세상 끝날 심판 때)에도 그것을 받지 못합니다(요 3:18).
*요3:18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② 하나님의 의(義)가 나타난다는 말은 그것이 영원 전 하나님의 작정에 감취엇던 것이라는 뜻을 내포함(엡 3:11).
이 감취었던 것이 나타난 것을 보는 신약 시대의 사람들은 감사히 그것을 받아야 됩니다. 엡 3:5 참조.
③ “나타나서”란 말이 현재사로 되었으니, 그것은, 사람이 복음을 믿는 그 현재에 하나님의 의와 접촉되고 또 받아지는 상칙(常則)을 말함니다.
이와 달리 3:21에는 “나타났으니”라는 현재 완료 동사가 사용되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사건의 역사적 실현(歷史的實現)의 완료를 보여 줍니다.
다. 믿음으로 믿음에.
칼빈은 말하기를 이것은 불완전한 믿음으로부터 완전한 믿음에 이르는 신앙적 장성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이 해석은 옳지 않습니다.
하찌(Hodge)는, 이것이 역설체(力說體)로서
오직 믿음으로만 의를 받는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1) 하나님은 복음의 기원이시며 주인이십니다(1~4절).
하나님은 그분의 아들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기로 계획하시고 선지자들을 통해 성경에 미리 약속하셨습니다.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약속하신 구원 계획을 성취하시고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믿고 영접하는 자들을 구원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받을 수 없는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구원의 기쁜 소식, 하나님의 복음입니다.
2) 하나님은 의로우시며 자비로우신 분입니다(16,17절).
의로우신 하나님은 불의한 인간에게 복음을 통해 ‘하나님의 의’를 주심으로 믿는 자를 의롭게 여기시며 구원하십니다.
이처럼 우리의 ‘의와 구원’은 하나님에게서 비롯되는 것이기에,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신실함과 은혜를 의지하고 받아들이는 ‘믿음’입니다.
노골적으로 복음에 대한 적개심을 드러내고 복음을 값싸게 취급하는 우리 시대에, 나는 복음이 모든 믿는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임을 어떻게 드러내고 있습니까?
내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 모든 직분은 은혜의 산물입니다(1,5,14절).
바울은 자신이 받은 사도의 직분을 은혜의 직분으로 여기며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우리를 불러주신 분도, 주님과 교회를 위해 섬길 수 있도록 직분을 주신 분도, 또 그 직분을 감당할 힘을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기에 결국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일하는 것입니다.
이미 은혜를 받은 우리는 하나님께 갚을 길이 없지만,
이 은혜가 필요한 사람에게는 빚진 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2) 성도의 교제는 서로를 든든히 세워갑니다(8~15절).
바울은 로마 교회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며 로마 방문을 통해 격려와 위로를 주고받음으로, 피차 유익을 누리길 희망했습니다.
우리 교회 공동체는 감사와 기도, 격려와 위로가 활발히 일어나고 있습니까?
기도
공동체-복음의 내용을 알고 받아들인 것으로 그치지 않고, 복음의 능력을 믿고 자랑하게 하소서.
열방-전 세계 복음주의 그리스도인의 비율은 2% 이하이고, 교회가 개척되지 않은 부족에 약 2억 명이 사람들이 살고 있다. 이들을 향한 선교사역이 더욱 활발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