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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요한일서1장1~4절
제목 : 충만한 기쁨을 맛보려면
[배경]
본 편지에는 집필자의 이름이 밝혀져 있지 않다.
그러나 초대교회 이래로 이 편지의 저자는 사도 요한으로 알려져왔다(이레니우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터툴리안 등).
현대 비평가들에 의하여 요한의 저작설이 도전받기도 하였으나 타당한 이유를 제시하는데 실패하였다.
따라서 전통적인 요한의 저작설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수신자]
수신자가 누구였으며 어디에 살았는지는
그들이 기독교인이라는 것 외에는 밝혀진 바가 없습니다(.2:12~14. 21. 5:13). 초대교회의 전통에 의하면 요한은 팔레스타인을 떠나 에배소에서 수년간 사역하였습니다.
요한계시록 2 장과 3장의 기록으로 미루어보면, 요한은 당시 로마의 식민지로 있던 아시아 지역 교회들의 상황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 편지의 수신자는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아시아지역 교회의 신자들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본 편지에서 언급된 거짓 교사들과 그들의 가르침은 당시 아시아에 유행하던
유대주의, 영지주의, 도케티즘. 세린투스의 가르침 등을 암시합니다.
이러한 사상들은 나중에 아시아를 넘어서서 로마 전역으로 확산되었으나,
요한의 생존 시에는 아시아 지역에만 국한되어 유행하고 있었습니다.
[기록 연대]
요한의 편지는 신약성경 전체를 통틀어 연대를 확정하기가 가장 힘든 책 중의 하나입니다. 연대를 추측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 중의 하나는 본문2장 19절의 내용입니다.
만일 거짓 교사들이 주후 60년대에 떠났다고 가정한다면 유대인의 로마 항쟁 기간인 주후 66년에서 70년 이전인 주후60년에서 65년 사이일 가능정이 높습니다. 그렇다면 요한은 이 편지를 예루살렘에서 썼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보수주의 학자들은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의 저작연대와 동시대인 주후 85년에서 97년 사이에 이 편지가 쓰여졌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요한의 저작들을 비교하여 저작 연대를 배열한다면,
복음서. 서신서. 계시록의 순서로 보는 것이 내용상 큰 무리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주후90년에서 95년 사이가 가장 타당한 저작 연대로 보입니다.
요한이 그의 인생의 후반부를 에배소에서 사역하며 보낸 것을 생각할 때 이 편지가 쓰여진 장소는 에배소일 가능성이 가장 높습니다.
1.들리고. 보이고, 만져진 하나나님(1절)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태초부터 있는. - 이것은 요1:1과 병행된 표현으로 생명의 말씀이 영원 전에 선재하였음을 암시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하나로 영원전부터 선재하셨으며(요10:30; 13:3) 복음이 하나님께 속하여 태초부터 존재하였음을 시사합니다.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 헬라어 본문상 본절은 주절이 문장의 맨 끝에 오는 일종의 도치문으로 네 개의 관계절,
즉 '태초부터 있던 것', '우리가 들었던 것','우리가 눈으로 보았던 것',
'우리가 주목하고 손으로 만진 것'이 '생명의 말씀'을 수식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이러한 매우 복잡한 표현을 통하여 자신의 격렬한 감정을 적절히 언어화시키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가장 핵심을 이루고 있는 '생명의 말씀'은 두 가지로 해석됩니다. 첫째로, 영원하시고 인격적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현현을 의미합니다. 즉 성육하신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요1:1).
둘째로, 복음을 의미합니다.
'생명의'에 해당하는 헬라어 '조에스'는
'말씀의 내용'(행5:20; 빌2:16)을 의미하기도 하고,
'생명을 얻게 하는 것'(요8:12; 6:35,48:4:10,11;계21:6; 22:1)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두 가지 의미는 서로 대립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 보완적입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이신 예수에 대한 본질적인 선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
'들은 바요'와 '본 바요'는 완료시제입니다.
이것은 생명의 말씀이 예수 안에서 마침내 실현되었으며,
그것을 사도들이 예수께서 설교하셨을 때 듣고,
예수께서 사역하셨을 때 눈으로 보고 확인하였음을 의미합니다(히1:1,2).
이 '듣고'와 '본'은 요한복음에서 '믿음'과 연결됩니다(요 10:27 ; 20:29).
한편 '만진 바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여살라페산'은 부정과거 시제로 과거 한때 직접 만져서 느낀 것을 가리킵니다.
요한은 이러한 관계절, 즉 '들은 바요','본 바요','만진 바라'는 표현을 통해서 생명의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셔서
역사 속에 현현하신 하나님을 드러내셨으며,
그의 사역과 설교를 통해 자신 안에 실현될 복음을 전파하셨음을 강조합니다.
2. 영성있는 신자(2절)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
본절은 일종의 삽입어구로 앞절의 내용을 확대시킨 것입니다.
이 생명이 나타내신바 된지라. - '생명'으로 번역되는 헬라어 '헤 조에'는 1절에서처럼 예수 자신의 존재와 그의 복음을 가리킵니다.
한편 '나타내신 바'는 예수의 지상 사역을 의미합니다.
즉 그의 성육신과 십자가상의 죽음과 부활을 가리킵니다.
이는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인 생명이 역사적으로 예수 안에서 계시되었음을 시사합니다.
또한 이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계시하시지 않는 한 인간이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
본문은 세동사, 즉 '보았고', '증거하고', '전하노니'를 통하여 경험의 세 측면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보았고'는 그 진의와 중요성 정도를 파악하기 위해 '살펴본다'는 의미로서 요한의 개인적 경험을 시사하며,
'증거하여'는 요한 자신이 경험한 내용을 개인적으로 전할 뿐만 아니라 사도로서 공적으로 선포하였음을 나타냅니다.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 내신 바 된 이신이라. -
본절 처음에 나타난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와 같은 의미의 반복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보다 발전된 표현으로 '생명'을 '영원한 생명'으로 부각시키고 동시에 생명의 결정적인 근원으로 '아버지와 함께'를 제시합니다.
이러한 사실로 보아 '영원한 생명'은 생명의 길이가 영원함을 뜻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그 생명이 갖고 있는 신적인 성격을 나타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 예수님을 믿으면 영생을 얻는가?
예수님 자신이 “영원한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예수님 자신이신 “영원한 생명”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따라서 누구든 예수님을 믿는자는 영생을 얻습니다.
흔 히 영생하면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이라고 이해합니다.
큰 오해 입니다. 만일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이 영생이라면 불신자도 영생합니다. 불신자도 죽지 않기 때문입니다.
불신자에겐 영생 대신 영벌이 있습니다.
영벌보다 무서운 심판은 없습니다.
고통이 너무 혹독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하여도 끊지 못하는 영원한 형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단지 삶의 길이를 말해서는 영생의 참 의미를 밝 힐 수 없습니다.
그렇다편 영생은 무엇입니가?
요한은 요한복음 17장 3절에서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생입니다.
요한은 영생을 정의하며 삶의 길에 대하여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삶의 질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질인가?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아는 삶의 질입니다.
흔히 가까운 사이에, “당신이 나를 안다 고 말하면서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어요.?” 라고 말하곤 하는데 이때 ‘안다’는 표현은 두 사람 사이에 아주 가까운 교제가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한이 사용한 “안다”(.ginwskwsin 으로 쓰임)라는 용어는 사람 사이의 아주 친밀한 관계를 표현하는 말로서 남녀 사이엔 육계적으로 관계를 맺는 정도의 친밀도를 표현하는 말로도 사용됩니다.
영생이란 무엇인가?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친밀하게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친밀하게 아는 삶의 질. 그것이 영생입니다.
신자라고 다 똑같은 삶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신자는 비천한 삶을 살고 어떤 신자는 질 높은 인생을 삽니다.
바울의 삶에는 질이 있었습니다. 그는 최상의 상태에 있는 그의 삶의 질을,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 예수께서 내 안에 사신 것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바울 안에 사신 것입니다. 영생의 삶이 극대화된 경우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성품을 알고 그분의 의도를 따라 살았습니다.
그의 삶을 보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그의 삶은 “그리스도의 편지” 였습니다.
영생이란 무엇인가?
내 속에 그리스도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영생을 경험하게 될 때 신자의 삶은 풍성해집니다.
그리스도의 향기가 그의 삶에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요한은 그리스도로 인하여 경험한 영생의 삶의 질을 녀희 공동체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 공동체에 있는 것이 너희 공동체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요한의 우리 공동체가 신자라면, 편지의 수신자 “너희”도 신자 공동체입니다.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신자에게 있는 것이, 너희신자에겐 없는 것입니다.
무엇이 있고 무엇 이 없단 말인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가 우리에rps 있는데 너희에겐 없단 말입니다.
요한은 어떻게 도왔는가? 그는 먼저 아들을 전하였습니다.
거룩하신 아버지와 가까워지는 길은 아들을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l절의 `생명의 말씀', 2절의 `생명. 영원한 생명은 아버지 함깨 계시던 분이ㅣ며 3절에서 밝힌대로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알고 보면 요한은 처음부터 계속 아들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들을 통하여 아버지와의 친밀한 교제가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아들이 계셨기에 그분을 통하여 아버지를 볼 수 있었고, 만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한의 우리 공동체가 얻은 결론은 무엇인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는 하나님의 아들을 삶 가운데 생명으로 경험할 때 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가까워지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가까워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자는 먼저 그리스도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영성 있는 신자가 되는 지름길은 그리스도를 깊이 아는 일입니다.
3. 영성 있는 교제권(3절)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요한은 편지의 수신자인 너회 공동체가 다른 사람들이 아닌,
거룩한 사도적 교제권을 소유한 우리 공동체와 사귀는 것을 원합니다.
사귐이란 단어는 헬라어로 `코이노니아( koinwnia )' 인데,
공통된 것을 함께 소유한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무엇인가 공통된 것을 함께 소유할 때 서로에게 사귐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요한의 우리 공동체는 무엇을 공통으로 소유하였는가?
그들이 공통으로 소유한 것은 `아버지와 그아들 예수 그리스도 이다.
낚시 없는 낚시 동호회가 불가능하고.
바둑 없는 바둑 동호회가 불가능한 것처럼.
아버지와 아들 없는 신자 공동체는 불가능하다.
어떤 교제가 거룩한 교제인가?
아버지가 나타나고 아들이 나타나는 교제가 거룩한 교제입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가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 본절에서 요한은 생명의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전하는 궁극적인 목적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귐'입니다.
요한이 본절에서 '사귐'을 목적으로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 행위로써 표현되어야 한다는 자신의 사상과 연결됩니다(2:3).
'사귐'는 문자적으로 '공동 소유', '협동'을 뜻하나 본절에서는 마게도냐와 아가야의 그리스도인들이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해 공동자금을 모금한 '서로 나눔'의 의미(롬15:27; 고전9:23; 고후13:13) 둘 다를 함축합니다.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 본문은 1절 전반부부터 암시되어 온 예수의 이름을 명백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본문에서 그리스도인의 '사귐'의 본질이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것'임을 분명히 제시함으로 그 사귐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즉 완전한 인간으로 오셨고, 영원한 생명이시며 동시에 온전히 하나님과 하나이신 '그리스도'와 더불어 함께하는 것임을 시사합니다.
(2:1 ; 3:23 ; 4:2 ; 5:6, 20, Smalley, Wilder).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강조는 수신자들 사이에 퍼져 있었던 예수의 인성이나 신성을 경시하는 이단적인 가르침에 대한 경고를 내포합니다.(고전 1:9, Smalley, Stott).
4. 영성 있는 신자의 기쁨(4절)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요한은 본 구절에서 편지를 쓴 목적을 밝혔다.
기쁨이 넘치기 원해서 입니다.
그렇다면 본문에서 말하는 기쁨은 어떤 기쁨인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 때문에 갖는 내적인 만족감입니다.
그들이 소유한 영생의 삶 때문에 갖는 생의 만족감이다.
생명되신 그리스도를 나의 삶 안에 경험할 때 오는 즐거운 감정입니다.
신자 공동체 안에 생명으로 사시는 예수님을 기뻐하는 감정의 극치입니다.
요한의 교제권엔 이 기쁨이 있었습니다.
내 안에, 내 공동체 안에 사시는 하나님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환회와 감격의 감정을 기쁨이란 용어로 표현하였다.
요한은 기쁨이 있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기쁨이 충만해지기를 원하였습니다.
그 기쁨을 최대한 더 크게 맛보기 원하는 소원으로 편지를 썼습니다.
요한은 “우리 신자들” 과 “너희 신자들” 이 함께 교제함으로 너희 신자들도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계를 회복하고 “우리 신자들이 소유한 성서적 기쁨을”`너희 신자들도 똑 같이 소유하기를 원했습니다.
본문은 요 15:11을 반영합니다.
'기쁨'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사귐',
또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하는 사귐의 결과이며 동시에 성령의 열매입니이다.
(갈 5:22, Smalley, Stott).
이러한 기쁨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와의 사귐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현재에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와의 불완전하므로 기쁨 또한 불완전합니다.
그러나 불완전한 사귐 가운데 누리는 완전치 못한 기쁨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궁극적인 사귐과 기쁨의 표징이며 보증입니다.
그러기에 이 기쁨의 소망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헌신적인 사귐 가운데 기쁨을 누려야만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