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데일리] 판소리, 서예, 민속춤. 젊은이들이라면 모두 시큰둥할 전통문화다. 이의 느낌은 마치 인문과학고전 책과 다르지 않다. 인문과학고전은 그나마 알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이라도 있다. 판소리나 서예에는 관심조차 갖지 않는 세상이다. 대부분 당연시 한다. 하지만 ‘그래서는 절대 안 된다’며 안간힘을 쓰는 이들이 있다. 김종헌도 그 중 하나다.
그는 서예에 미처 살았다. 평생 ‘서예의 아름다움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져왔다. 30년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서예의 끈을 놓지 않았다. 직장생활을 하며 아무리 취미를 오랫동안 가졌다 해도 프로페셔널은 쉽지 않다. 그러나 그는 프로다. 서예에 관해선 ‘도’를 터득했다. 서예를 ‘하는 일’이 아닌 서예를 ‘보는 눈’에서는 말이다. 그 눈을 발품을 팔아 얻은 결실이다.
< 추사를 넘어>(푸른역사. 2007)는 소문난 서예 애호가인 저자가 자신의 인생지도까지 바꾼 서예 사랑을 담아낸 서예 편력기다. 제목은 언뜻 추사 전기로 보이기도 하지만, 실은 서예 대가들의 치열한 삶과 예술 세계를 살펴본 책이다. 그러나 그를 뛰어넘는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먼저 책은 서예에 문외한인 독자들을 아름답고 고고한 ‘글씨 예술’의 세계로 안내한다. 서예가 추구하는 아름다움은 일단 ‘일필휘지’다. 먹물이 종이에 닿으면 번진다. 따라서 단 한 번에 써 내려가야 예술적 가치가 살아난다. 그 최고의 경지가 바로 일필휘지다. 이는 종종 비백(飛白)을 낳는다. 이에 날아갈 듯 일필휘지를 할 때 획의 일부분에 먹물이 묻지 않는 흰 부분을 뜻한다.
일필휘지는 각고의 노력으로 나온다. 추사는 칠십 평생에 벼루 열 개와 붓 1천 자루를 모두 닳아 없앴다. 책에 따르면 추사는 ‘서예가란 모름지기 팔뚝 아래에 삼백 아홉 개의 옛 비문 글씨를 완전히 익혀 간직하고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다시 말해 옛 사람이 남긴 훌륭한 글씨체 삼백 아홉 가지를 쓰고 익혀야 자신의 글씨를 쓸 수 있다는 말이다.
모든 분야가 그렇듯 서예의 대가가 되기 위해선 엄청난 양의 훈련이 필요하다. 이와 관련 비상한 관심을 모으는 사례가 있다. ‘검여’ 유희강 선생이 주인공이다. 그에 대한 대목을 보자. ‘그는 서예로 도를 깨우친 사람이다. 그에게는 추사를 뛰어넘으려는 예술적 목표가 있었으나, 글씨가 한창 무르익어 새로운 예술의 꽃을 피우려 할 때 그만 서예가에게는 치명적인 중풍에 걸려 절망의 순간을 맛본다.’ 왼손으로 글씨를 쓴다는 일이 어디 쉬운가. 그러나 그는 왼손으로 ‘좌수서’라는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 그러나 그도 얼마가지 못하고 ‘천명’의 벽을 만났다. 저자는 그가 “좌수서를 계속 발전시켰다면 추사를 뛰어넘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서예의 대가를 엿보는 재미가 있으나, 하이라이트는 역시 추사다. 그에 앞서 판교(板橋) 정섭(鄭燮)을 이해해야 한다.
저자가 이 책을 쓰게 된 동기에는 ‘추사’라는 거장의 모호함이 크게 한몫을 했다. 어려서부터 서예를 접한 저자도 우리나라 역사상 제일의 서예가인 추사 김정희의 글씨가 왜 좋은지, 왜 유명한지 쉽게 깨우치질 못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 1980년대 초 독일 뒤셀도르프의 한 화랑에서 정판교의 작품을 만나면서 다른 차원의 서예를 볼 수 있었다. 그때부터 저자는 판교와 추사에 관한 공부를 하며 추사 김정희와 그의 추사체를 이해할 수 있었다고 한다.
책에 등장하는 정판교의 글씨는 신묘하다. 그러나 김정희는 판교 정섭을 넘어 ‘추사체’라는 불멸의 서체를 남겼다.
‘그의 예술적 경지는 당대의 한중일 서예계를 압도하고도 남았다. 한마디로 추사는 근대 한국 서예의 르네상스를 인도하면서 근대를 뛰어넘어 현대로 이어지는 예술의 경지를 개척한 사람이다.’
이 책은 판교와 추사라는 두 서예 대가를 중심축으로 한다. 이어 ‘추사’라는 거봉을 넘으려 고군분투한 서예가 5인의 삶과 예술 세계를 조명한다.
저자는 사람들이 서예에 조금만이라도 관심을 가지라고 말한다. 한국인의 피에는 서예의 맥이 흐르기에, 작은 관심이 어렵게만 느껴졌던 서예 작품을 즐길 수 있는 기회가 된다는 것이다. 아마 이 책을 읽고 나면 서예가 보이고, 추사가 보일 것이다. 실제로 주위를 둘러보면 곳곳이 추사다. 한권의 책이 갖는 힘을 실감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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